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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무술 '태껸' 부흥의 중시조, 신승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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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dreamnet21.tistory.com/373 [김명곤의 세상이야기]

김명곤(1977) 팽개쳐진 민중의 무술 태껸(축소판).pdf

 

“하나 둘 이크, 하나 둘 이크.” 구령 소리가 매우 익살맞습니다.

구령에 맞추어 팔을 가슴 앞에서 휘휘 저어 대고, 한 발을 앞으로 쑥 내딛었다가 뒤로 살짝 거두면서 허리를 가볍게 돌리는 몸짓은 영락없는 춤입니다. 무서운 느낌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흥겹기까지 합니다.

두 사람이 마주 서서 한동안 그렇게 굼실대더니, 갑자기 한 사람이 발로 상대의 아랫배 근처를 내지릅니다. 공격을 받은 쪽은 휘휘 젓던 손으로 발을 탁 쳐내고, 자신의 발로 공격한 쪽의 얼굴을 원을 그리며 후려찹니다. 그러나 그 공격도 상대가 슬쩍 몸을 비키는 통에 헛발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역습을 당한 쪽은 틈새를 노려 왼발로 상대의 왼다리 안쪽을 차내어 낚시를 걸어 보지만, 상대는 발을 들어 오히려 상대에게 '딴죽'을 겁니다.

점점 거세어지고 날카로워지는 동작들을 보고 있으려니 흥겹던 기분이 싹 가시고 온몸에 긴장이 감돕니다. 춤사위 같던 손놀림-‘활개짓’- 이 먹이를 덮치는 맹수의 앞발처럼 매서웁고, 우스꽝스럽던 발의 움직임-‘품밟기’- 이 위험을 눈치 챈 학의 걸음처럼 신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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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복에 땀이 흥건히 배이도록 승부를 내지 못하고, 빈틈을 찾으려고 노려보며 빙빙 도는 두 선수는 충주에 있는 ‘한국정통 무술 태껸 도장’의 관원들이었습니다.

관장인 신승(본명 신한승) 명인은 가무잡잡한 살결에 부리부리한 눈과 네모진 얼굴이 생김새부터 영락없이 무술가로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연신 제자들을 불러내어 둘씩 짝지어 겨루게 해 놓고, 저것은 무슨 기술 저것은 무슨 차기 하며 태껸 동작을 설명하는데 어찌나 열심히 얘기를 하는지 정작 시합을 하는 제자들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듯 싶었습니다. 

지금은 태껸이 많이 알려졌지만 제가 신승 명인을 만났던 80년대만 해도 태껸은 낯선 이름이었습니다. 칠순, 팔순이 넘은 노인들도 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어렸을 때에 태껸을 보았다는 노인들은 여럿 있었지만 직접 배운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서울 서대문구 사직골에 사는 송덕기 명인과, 반포 아파트에 사는 김홍식 명인과 이들에게서 태껸을 전수받은 몇몇의 무술가와 함께 신승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송덕기 명인은 열너댓살 쯤에 스물아홉살 난 임호라는 사람에게 사직골 뒷산 잔디밭에서 태껸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가 태껸을 배울 때만 해도 서울의 사직골, 삼청동, 애오개와 같은 곳에 태껸꾼들이 많이 있어서 단오날이면 서로 이웃 마을 태껸꾼들과 솜씨를 겨루었다고 합니다.

고의 적삼에 솜버선을 신고 뒷산 잔디밭이나 개천 모래밭에서 연습도 하고 겨루기도 했으므로 특별한 도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일 합방이 되자 일본 순사들이 태껸꾼을 모조리 잡아가는 통에 태껸을 하다가도 순사가 오면 와르르 달아났다가 다시 모여서 배우곤 하느라고 스승한테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평생 남하고 싸움 한 번 못했지만 팔순 나이에도 젊은 사람 한둘쯤은 움쩍도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그는 돋보기를 끼지 않고 신문을 보며 오십 년을 계속해 오는 활쏘기를 하려고 아침마다 활터인 황학정에 오를만큼 정정하게 사시다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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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 명인은 세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도 스물 남짓한 젊은 시절에 태껸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때의 서울은 웃대와 아랫대가 엄격히 구별 되어 있었고, 문안과 문밖 끼리도 구별이 엄했다고 합니다. 웃대는 인왕산 아래 쪽 곧 대궐에 가까운 쪽을 일컫는 말이었고 아랫대는 청계천 건너 쪽이며, 문안은 서울을 둘러싼 성문의 안 쪽이고 문밖은 그 바깥 쪽을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웃대는 주로 벼슬아치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세도가 대단해서 이것이 늘 불만인 아랫대 젊은이들이 가끔 웃대의 젊은이들에게 시비를 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웃대에서 태껸꾼들을 모아 아랫대에 시합을 청하게 되어 서로 시합을 벌였다는 겁니다. 

평상적인 시합을 할 때에는 ‘서기 태껸’이라고 해서 먼저 넘어지는 사람이 지는 것으로 승부를 겨루지만, 동네 사이의 감정이 나쁠 때에는 ‘결연 태껸’을 했다고 합니다. 결연 태껸은 서로 겨루다가 사람이 죽게 되어도 살인죄로 치지 않는다는 서약 아래 행하여지는 무서운 싸움이라고 합니다.

결연 태껸을 할 때 쓰던 기술은 잘못 쓰면 위험하기 때문에 비법으로 전해져서 여간해서는 배울 수 없었다고 합니다. 동네끼리 실력을 겨루는 무술로는 태껸말고도 씨름이나 활쏘기나 편싸움이 있었는데, 김홍식 노인은 어려서부터 즐겨 그런 무술들을 배워 겨루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그때 이름 높은 태껸꾼으로 박무경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구리팔개’라는 별명으로 불리었고 힘이 천하장사여서 그가 나타나면 상대편 사람들이 모두 도망쳤다고 합니다. 또 어떤 때는 문밖의 사람들이 도전해 오기도 했는데, 그런 경우엔 웃대와 아랫대가 한편이 되어 그들과 겨루었다고 합니다.

 

김홍식 명인은 여러 태껸꾼에게서 배웠는데 그때의 가르침이란 것이 그저 남이 하는 기술을 보고 혼자 흉내를 내고 있으면 오다가다 귀띔으로 일러 주는 정도라 깊은 기술은 배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잘하는 사람들 하는 걸 보면 무서웠어. 담장이고 뭐고 휙휙 날랐지. 두발로 휙 떠서 가슴을 차고 땅에 떨어지지 않고서 그 다음 사람을 찼으니까. 하지만 난 조금 밖에 못 배웠어. 첫째로 부모님이 죽어라 말리시는 걸. 건달들이나 하는 짓이라서... 게다가 일본놈들이 태껸한다 하면 모두 잡아다 죽였거든. 그래서 헐 수 없이 유도를 했지.”

어린애같이 흥겨워하면서 얘기를 하는 김홍식 명인은 숨이 가빠지는 것도 무릅쓰고 몸을 놀려 본을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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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 명인은 위의 두 명인에게 태껸을 배워 끊어지려던 태껸의 대를 이은 사람입니다. 

그는 1928년에 태어나 서울 왕십리에서 자랐는데,  경기도 연천군에 살던 작은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면 으레 태껸꾼들이 몇 사람씩 묵고 있어서 그들이 연습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작은 할아버지 신재희씨는 오백석이 넘는 부자로 활쏘기나 씨름 같은 걸 좋아해서 이름난 씨름꾼이나 반건달 같은 패거리들이 늘 그의 집 사랑방에 묵고 있었답니다.

그들 가운데 태껸꾼들도 일고여덟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 이씨, 김씨라고 불리던 두 사람의 실력이 가장 나았다고 합니다. 신승은 어린 마음에 노인네들이 발길질이나 하고 건달처럼 노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태껸꾼을 좋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래도 그 집에 가게 되면 자연히 구경을 하게 되어 가끔 흉내를 내보기는 했는데, 별스런 정성으로 한 것이 아니니 그저 어린아이의 장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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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그가 중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에 전쟁이 한창 치열해져서 학생 지원병을 모집했습니다. 그는 소년 전차병으로 지원해서 특별 휴가를 얻어 연천에 있는 작은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여름을 보낼 때 강가 백사장에서 오십쯤 된 중년들이 젊은이들을 차 넘기며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을 보고 슬며시 흥미가 당겨 조금씩 배워 보았습니다. 동작을 흉내내어 혼자 연습하고 있으면 오다가다 보고서 몸을 더 가라앉히라느니 발은 그렇게 차는 게 아니라느니 하며 한마디씩 귀띔으로 일러 주는 식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배우다 보니 웬만큼 태껸의 동작이 몸에 익을 만하게 되었는데, 그 뒤에 해방이 되고 서울에 돌아오게 되면서부터 태껸보다 레슬링에 열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스물아홉살이 되던 해에는 멜보른 올림픽의 후보 선수까지 되었다가 최종 선발 시합에서 고배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 레슬링을 그만두고 유도를 시작했는데, 그의 나이 마흔살쯤이 되었을 때에 어린 시절에 봤던 태껸을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수소문하여 태껸을 했다는 사람들을 만나 보았으나 어렸을 때 본 동작이 아니라서 실망만 하고 있던 중, 신문에 실린 송덕기 명인의 기사를 읽고 서울로 찾아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970년 초봄 무렵이었습니다. 송명인은 그의 끈질긴 간청에 못 이겨 봄 가을에 두어달씩 아침마다 활터 뒷산에서 동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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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삼 년 쯤을 배운 뒤에 신승은 자신이 살고 있던 충주시에 도장을 내고 가르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어달 배운 뒤에는 관원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이 태껸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고심을 하고 있던 터에 김홍식 명인을 만났더니 시대가 달라져서 태껸을 옛날 식으로 가르치면 아무도 배우려 들지 않을 테니, 처음에는 기본기를 모아서 가르치고 어려운 기술은 기본기를 익힌 다음에 가르쳐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태껸의 동작 가운데 기본이 될 만한 동작 스물다섯 가지를 기본 기술로 삼아 아이들에게 쉬운 동작부터 순서대로 가르쳐 보았더니 훨씬 빨리 배워 나갔습니다.

 

우선 서는 자세를 원품, 좌품, 우품으로 나누고, 발을 이리저리 옮기며 몸을 굽실대고 허리를 능청거리는 '품밟기'를 익숙해질 때까지 익히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 손을 앞 가슴 근처에서 위-아래 또는 양 옆으로 원을 그리며 저어 대는 '활개짓'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발 기술을 익히도록 하였습니다. 발장심으로 상대의 무릎을 차는 '깍음다리', 발등으로 상대의 발뒤꿈치를 바깥 쪽으로 잡아채어 뒤로 넘어지게 하는 '낚시걸이', 발장심으로 옆구리를 차는 '곁치기', 명치를 차는 '명치기', 발바닥으로 따귀를 때리는 '발따귀', 차 들어오는 상대의 발등을 발바닥으로 막는 '발등걸이', 발오금으로 상대의 발오금을 걸어 뒤로 넘기는 '딴죽', 그 밖에도 '얼렁발질', '돌개치기', '두발낭상', '깨끔다리' 따위의 다리 기술, 그 다음에 태껸에서 쓰는 손 기술로 엄지와 검지를 벌려 상대의 목을 쳐내는 '칼재비' 등도 익히게 하였습니다.

 

그런 기술들을 익히게 한 다음, 약속된 동작으로 마주 서서 겨루는 '마주걸이'를 익히게 한 뒤, 익숙해지면 약속없이 겨루는 '맞서기'를 익히도록 했습니다.

 

그러자니 자연히 급수도 매겨 줘야 했는데, 급수의 이름도 고유한 말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다른 무술에서 '급'이라 부르는 것을 ‘째’라고 정하고 '단'이라고 부르는 것을 ‘동’이라고 했습니다.

째는 첫째, 둘째 할 때의 째에서 빌어 왔고 동은 윷놀이에서 말이 모두 빠져 나왔을 때에 '한 동 났다', '두 동 났다'고 하는 말에서 따왔습니다. 그 이름을 정하는 데에도 송 명인과 김 명인과 상의하고 한글학자와도 상의하느라고 여간 힘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큰 어려움은 '태껸'이라는 이름을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남아 있는 문헌에 그 이름이 저마다 다르게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한글 학회에서 펴낸 <우리말 큰 사전>에는 ‘태껸’ 또는 ‘택견’이라 적혀 있습니다. 그 풀이를 보면 ‘한 발로 서로 맞은 편 사람의 다리를 차서 넘어뜨리는 경기’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먼저 나온 조선 총독부에서 펴낸 <조선어 대사전>에는 ‘택견’이라 해 놓고 ‘한쪽 발로 서로 넘어뜨리는 유희’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그보다 좀더 오랜 문헌으로 구한말의 시인인 최영년이 쓴 <해독죽지>라는 시집 속에 ‘탁견희’라는 제목을 가진 한시가 있습니다.

다리를 놀려 백 가지 기예를 겨루고
가벼이 날아 올라 상투 끝도 스치며
꽃다움을 다투니 저게 바로 풍류일세
상투머리 차 내리면 의기가 볼 만하네.

 

그 시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이 딸려 있습니다.

 

“옛 적에 다리를 놀리는 기술이 세속에 전해져 왔는데, 서로 마주 보고 서서 한쪽을 차서 넘어뜨리는 기술이었다. 그 솜씨로 봐서 셋으로 나누었는데 솜씨가 좋지 못한 사람은 다리를 찼고, 솜씨가 좋은 사람은 손으로 어깨를 밀쳤다. 솜씨가 훌륭해서 다리의 놀림이 날랜 사람은 상투를 차서 떨어뜨렸다. 이런 기술을 서로 겨루어 원수를 갚기도 하고 좋아하는 여자를 빼앗는 내기를 하기도 하니 관에서 이름 금하게 되었다. 그 뒤로 지금은 그 기술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이름을 탁견이라 한다.”

 

‘탁견’, ‘태껸’, ‘택견’ 중 이글에서는 최근에 가장 널리 쓰이는 '태껸'을 선택습니다. 몇십년 전까지 전해 오던 기예가 이렇듯 이름조차 종잡을 수 없을 만큼 갑자기 그 자취를 감추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태껸이 건달이나 한량패들의 기예이고 관에서 금하니 드러내 놓고 남을 가르치거나 남에게 배울 수가 없었던 터에, 일본의 무술인 탄압 정책으로 그나마 간신히 이어 오던 맥이 끓길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니 백 가지가 넘는다는 표현이 좀 과장된 말이라고는 해도 옛날에는 좀 더 많은 기술이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남아 있는 기술로써는 태껸의 온전한 모습을 알아내기가 힘이 듭니다.

 

맨손 무술에 관한 오래된 기록으로 고구려 산상왕 때에 만들어진 환도성 각저 무덤의 벽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웃통을 벗은 채로 한 손을 앞으로 내밀고 발을 낮추고 서서 서로 겨루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은 보는 이에 따라 씨름이라고도 하고 태권도라고도 하고 태껸이라고도 하니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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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고려 충혜왕 때에 ‘수박희’ 또는 ‘권법’이라는 무술이 유행하여 왕이 상춘정에 늘 나와 그것을 구경하니 수박희를 전문으로 개설하였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조선 왕조 실록>과 정조 때에 집대성 된 무술책인 <무예 도보 통지>에도 권박, 상박, 권법 따위의 여러 이름으로 수박희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그 수박희가 태껸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수박희를 우리 말로 '수벽치기'라고 하는데 손을 주로 쓰는 기술인 듯 합니다.

 

<조선 무사 영웅전>을 쓴 안자산은 수박희를 설명하는 글 중에 “근래에도 청년들이 씨름과 다른 수박희를 행함이 있던 바, 소위 택견이라 하는 것이 그 종류다.” 라고 하여 수박희와 태껸을 같은 종류로 보고 있으나, 수박희의 그림과 설명이 들어 있는 <무예 도보 통지>를 보면 수박희는 그 모습이 태껸과 다른 점이 많고, 오히려 중국 권법에 가깝습니다.
역사가 신채호는 <조선 상고사>에 고구려 무사들이 연마하던 무예를 설명하면서, “혹 칼로 춤도 추며, 혹 활도 쏘며, 혹 깨끔질도 하며, 혹 태껸도 하며, 혹 강물을 깨고 물 속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며...” 라고 적어 고구려 때에 태껸을 했다고 설명했고 고려 때의 무예에 관한 글에서는, “공도의 수박희 곧 선비 경기의 일부분이니 수박이 중국에 들어가 권법이 되고 일본에 건너가 유도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기록을 찾아 보면 태껸보다 수박희가 더 자주 나오는데 정작 수박희는 그 기술이 끊겨서 전혀 모습을 알 수 없고, 태껸만이 희미하나마 전해져 온 점입니다.

또 이상한 일은 태껸을 보았다는 사람이나 했다는 사람이 모두 서울 사람인 점입니다. 시골에서는 태껸을 보았다는 사람도, 했다는 사람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욱더 이상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태껸'과 '태권도'를 혼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태껸과 태권도는 문외환이 보아도 다른 성질을 가진 무술임이 확실합니다. 잠깐 비교해 보면 태권도에는 공격과 방어의 일정한 모양세를 갖춘 '형'이라는 것이 있지만, 태껸에는 형이 없습니다. '형'과 비슷한 것으로 ‘본’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것은 틀에 박힌 공격과 방어의 형이 아니라 태껸꾼이 자기가 가진 기술 중에서 몇 가지 기술을 상대에게 보여 실력을 과시할 때 쓰는 것으로 그렇게 하는 것을 ‘본때를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더 다른 점은 태권도는 동작의 기본을 직선에 두고 맺고 끊는 것이 명확하지만, 태껸은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동작의 기본을 원에 둡니다. 또 태껸은 중국의 '쿵후'와도 달라 동작이 길게 흐르지 않고 순간의 탄력을 중요하게 여기며, 쿵후에서 자주 쓰이는 주먹쓰기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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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과 일본의 세 나라 무술이 서로 주위 무술의 영향을 받아 조금씩 변했으리라고는 짐작할 수 있지만 그래도 동작의 기본만은 쉽사리 변해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태껸이 우리의 고유한 몸짓을 지니고 있는 무술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신기한 기술, 오묘한 기술이란 것이 별 게 아니라 사실은 모두 기본 기술에서 나오는 것 아닙니까? 지금 태껸의 깊은 기술이 끊어졌다고 하지만 깊은 기술만 남고 기본 기술이 끊어진 것 보다는 차라리 잘 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현대의 무술은 옛날 무술과 달라서 경기가 되어야 합니다. 지붕을 날고 담을 뛰어넘는 오묘한 기술보다는 기본되는 기술을 널리 보급해서 청소년들의 몸과 마음을 건전하게 기르는 경기의 모양으로 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는 뒷날에 판단이 되겠지만 지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태극기 하나만 덩그렇게 걸려 있는 시멘트 건물에서 땀을 흘리며 수련하고 있는 스물 남짓한 제자들을 바라보며 그가 하는 말이었습니다. 한달에 오백원씩 건물 사용료도 되지 않는 회비를 받는다는 그는 그나마도 안 받으면 애들이 시시하게 알고 오지도 않는다고 하며 쓸쓸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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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뒤로도 열정을 다 바쳐 태껸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그 결과 1983년에 태껸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송덕기 명인과 함께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 뒤에도 그는 1987년에 이 세상을 뜰 때까지 태껸의 보급과 후진양성에 진력했습니다. 그 덕에 충주에 <태껸전수관>이 건립되고 1998년부터 해마다 10월에 <세계무술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태껸은 그가 아니었으면 사라지고 말았을 겁니다. 신승 명인은 근대 태껸의 마지막 전승자였으며, 태껸 정립의 외로운 길에 평생을 바친 현대 태껸의 중시조입니다.

 

 

 


 

 

이 기사는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에 실린 기사임. 김명곤 기자가 썼는데 2006년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했어. 전통을 사랑하던 젊은 기자가 택견에 대한 배경없이 신한승을 취재하며 작성한 기사로 염두하고 보면 되.

 

그리고 재밌는건  택견하는 사람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는 점. 가족들 계열으로 택견을 한 점을 알 수 있다. 그럼 송덕기 옹에 대해서도 알수있음.

 

 

1. 김홍식

 

여기서 재밌는 것은 김홍식 옹 이야기야. 김홍식 옹은 세검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어 세검정이 어디냐면 서촌(윗대에서 자하문터널 지나서 평창동 가기전임) 사실상 윗대 계열의 지역에 거주하는데... 

 

이 기사에서는 구리팔개가 있었다만 되어 있지만.... 문화재 조사서와 계보에는 구리팔개 박무경에게 택견을 배운 것처럼 묘사가 되어 있지.

 

여기서 염두할 수 있는 건... 김홍식 명인이 여러 태껸꾼에게 배웠는데 이름 조차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야. 
그리고 그걸 '그저 남이 하는 기술을 보고 혼자 흉내내고 있으면 귀띔으로 일러주는 정도'라고 되어 있는데 

너희도 서울대학교 청강가서 수업 좀 듣고 어디가서 서울대학교  OO교수님 아래서 배웠다 이렇게 배웠다고 해봐.
뭐라고 듣는지. 

 

나머지는 김홍식 옹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느낄 수 있는건 
이분은 택견을 배웠다기 보다 배우고 싶었지만 관심을 두고 있던 한 명의 당시 젊은이었던 분으로 할 수 있을꺼라 봐.

이야기하면서 즐거워 했다는건 영 택견에 대해 관심은 많으셨던 것 같아.
유도회 원로가 되셨다고는 하더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2. 신승의 수련기간

 

* 그 집에 가게 되면 자연히 구경을 하게 되어 가끔 흉내를 내보기는 했는데, 별스런 정성으로 한 것이 아니니 그저 어린아이의 장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 동작을 흉내내어 혼자 연습하고 있으면 오다가다 보고서 몸을 더 가라앉히라느니 발은 그렇게 차는 게 아니라느니 하며 한마디씩 귀띔으로 일러 주는 식이었습니다.

* 그렇게 몇 달을 배우다 보니 웬만큼 태껸의 동작이 몸에 익을 만하게 되었는데, 그 뒤에 해방이 되고 서울에 돌아오게 되면서부터 태껸보다 레슬링에 열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송덕기 옹을 만나 택견을 배운 것인데.... 동작이 어릴 때 했던 것으로 보기 힘들어.

이건 내 느낌이니 추후에 자료를 갖고 이야기 하자.

 

* 1970년 초봄 무렵 시작 → 봄 가을에 두어달씩 아침마다 활터 뒷산에서 동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건 두달에 한번 올라가서 배웠다는 것으로 봄. 그전에 보면 서울과 충주 거리가 있고 교통편 고려했을 때... 그리고 체육선생님이었던 점까지 고려한다면 죽치고 배우실 수가 없는 분이셨던 것으로 앎.

 

* 삼 년 쯤을 배운 뒤에 신승은 자신이 살고 있던 충주시에 도장을 내고 가르쳐 보았습니다.

 

공식적으로는 70~75년까지 하셨다고 하는데. 이후 이용복이 왜 3년밖에 안배운 것처럼 묘사한 이유를 알것 같음.
73년 또는 74년에 도장을 냈다고 하면... 솔직하게 서울 오가는 건 더 기간이 줄어들었을 꺼라 봄.

문화재 지정한 공로는 현 시대에서는 공이라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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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름과 기본을 정하는 일

 

맨 마지막 그렇게 삼 년 쯤을 배운 뒤에 신승은 자신이 살고 있던 충주시에 도장을 내고 가르쳐 보았습니다.
 / 그런데 큰 어려움은 '태껸'이라는 이름을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 

 

두개를 보면

기본과정을 정하는 일화에 대해서 나와 있어. 이 부분에서는 나름 고민과 고충이 느껴지면서도 당시 자료 조사의 부족함과 송 옹으로부터 택견을 사사받은 기간이 크지 않는데 

 

마치 일대종사 처럼 기술을 정하고 
분류하려 한 점은 참... 안타깝네.

이 부족한 자료와 당시 표준어가 택견이 되려는 바탕을 알 수 있다.

 

4. 태권도와 택견

 

태권도와 태껸을 구분 못하는 사람이 많다. 
아래 게이가 정리한 코리안 게임즈의 내용과 같다면. 

 

https://yugakkwon.com/free/17578

 

당연하다고 보지 않아?
그러면 이승만 대통령 역시 태권도를 보고 태껸이라 한 것이 설명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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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 없이 썼는데 추후에 이와 관련되서 한 번 더 쓰도록 할께.
 

김명곤(1977) 팽개쳐진 민중의 무술 태껸(축소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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