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자작소설] Chapter1 - 잿불(4)

익명_16190130
45 0 1

유진은 투기장 밖으로 나오는 노인의 모습을 보고 누구보다 먼저 움직였다.

 

수고하셨어요!”

 

노인에게 다가간 유진은 답지 않게 살가운 말을 건넸다. 그의 인생에서 전례없을 정도로 밝은 모습이었다.

 

갑자기 그런 식으로 나오니 내가 더 당황스럽구나

 

노인은 사람을 때릴 때보다 동요하는 모습으로 말했다.

 

그래 뭐 좋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방에서 이야기하자

 

그는 투기장의 관객들의 분위기를 읽었는지 자진해서 독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예상대로 권력자는 이후에도 노인을 계속 독방에 가두어두었다.

 

우습게도 그것은 유진에게는 기회였다.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노인에게 지속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 노인도 그러한 여건이 꽤나 유용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사실 나도 바라는게 있지

 

저한테서 바랄게 있나요

 

아무렴 애써 익힌 기술을 맨입으로 가르쳐줄까?

 

유진은 일부러 티가 날 정도로 모르는 척을 했다. 자신이 섣불리 굴거나 욕심을 부리는 것이 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얌전히 노인의 입에서 먼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여기까지 와놓고 내가 말하게 하는구나, 지난번에 보였던 눈치는 어디 갔지?”

 

노인이 못이기는 척 먼저 입을 뗐다. 

 

“그래, 내가 바라는 건 기술을 이어가 줄 사람이다

 

노인은 유진의 영악한 면을 간파했지만 그것이 고깝지만은 않았다.

 

기술을 이어가 줄 사람이요?”

 

제자 같이 거창한 건 아니야. 그냥 내가 가진 걸 다음으로 전달할 수 있는 머리, 다른 불필요 한 게 들어있지 않은 몸이 필요하지

 

그렇다면 제가 무얼해야 하나요?

 

"어허 끝까지..."

 

노인은 헛웃음을 치더니 다시 유진을 바라봤다.

 

“처음엔 이해하지 못해서 답답한 순간들의 연속일 거다. 의문이 들어도 나를 믿어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따라오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하는 말들을 알아듣게 될 거다. 할 수 있겠나?

 

유진은 기어코 확인하는 말을 듣고서야 아껴두었던 답변을 했다.

 

그럼요

 

유진은 사실 그가 말하는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노인의 우려가 담긴 질문은 그저 선문답 같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있게 대답했던 이유는 그것이 노인에게 기술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악한 청년은 그렇게 사소한 이유로 가혹한 운명에 빠져들었다.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흐름이 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은 노인과 그를 주시하는 몇 인물들 뿐이었다. 우습게도 5구역의 성주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항상 한 발 늦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작은 집무실에서 세상을 가진 양 떠들고 있었다.

 

"한반도는 전후 오랜 기간 주체적 수복기간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장기간 방치되었지."

 

성주가 모니터를 주시하며 말했다.

 

"그대로 시간은 흘러, 바야흐로 21XX,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다시금 일어나 살 방법을 찾았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흐름으로 말이지."

 

"너무 거창한 거 아닌가요?"

 

모니터 너머의 누군가가 말했다. 

 

"아니, 그럴만하지. 그 누가 강대국들의 약속과 대치 관계를 역이용하여 의도적으로 정부수립을 하지 않을 줄 알았겠는가. 누가 이 땅의 사람들이 지역별로 흩어져 아주 원시적인 형태로 집단을 구성하고, 그들의 동맹 하에 군사력을 키워나갈 줄 알았겠냐는 말이야."

 

"뭐 그건 그렇죠" 

 

"그렇게 총 9개의 구역이 한반도에 자리한 게 지금이야. 이미 폐허가 된 한반도 위에 자리한 9개의 구역들은 정부도 경찰도 없이 사회를 유지하고 있지." 

 

성주가 의기양양하게 말하고 뜸을 들였다.

 

"지방마다 독보적인 힘과 기술력을 가진 자가 득세하고, 생존에 불필요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멸시당하는 사회지만 말이죠." 

 

그러자 모니터 속의 남자가 뇌까렸다.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지. 다시 생각해봐. 우리는 그저 새로운 시대를 위한 혁명을 시도했을 뿐이다. 고도화된 문명의 잔재를 살려내 모두를 노동에서 벗어나게 했다. 식량과 생필품의 생산을 기계가 대신하니 굶어 죽을 걱정도 없지. 다만, 생산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에서 마땅한 기술이 없는 자들이 도태되어 갔을 뿐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노력했다면 대우가 달랐겠지."
 

"하... 그게 정말 옳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괜한 질문을 했네요 아버지는 항상 그런 식이었죠. 그래서 무얼 말씀하고 싶으신 건데요" 

 

"넌 우리 집안에서 태어나서 얼마나 덕을 보고 자랐는지 좀 깨달아야 해. 항상 자기 혼자 고상한 척만 하고 고마운 줄을 모르지."

 
"아무렴요 그걸 위해서 저를 집에서 내쫓아서 투기장으로 보내신 거잖아요"
 
성주는 기가 죽기는 커녕 자신의 말에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나 투기장의 군중을 다룰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그래 아무쪼록 네가 옹호하는 자들의 실체를 보고 깨닫는 바가 있기를 바란다"
 
"시궁창 경험 좀 해보고 아버지 바짓가랑이를 잡고 사죄하길 바라시겠죠"
 
성주는 이마를 짚고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바라보던 아들은 더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일방적으로 화면을 껐다. 어두워진 화면에 성주의 얼굴이 비춰졌다. 매서운 눈매가 무색하게 주름이 잡혀 초췌해진 얼굴이었다.
신고공유스크랩

한달이 지난 게시글은 로그인한 사용자만 토론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공유

퍼머링크

삭제

"[자작소설] Chapter1 - 잿불(4)"

이 게시물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