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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누가 일제 치하의 씨름 관련 글을 적어줘서 쓰는 글임.

 

일제 치하에서 택견이 탄압을 받았다! 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씨름과 국궁의 예시를 들면서 탄압은 거의 없었고 타국의 무술들이 들어오면서 자연소멸한 것일 뿐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희안한게 이 일제 택견 탄압 떡밥은 설왕설래가 많은 것치곤 결론이 나지 않은 주제임.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라 생각해서 연구가 부재한 건지, 아니면 택견계 특유의 적당히 덮고 넘어가는 식의 적당주의가 부른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참에 한 번 짚고 넘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적어 봄.

 

전반적인 기록들을 살펴보고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음.

 

분명 일제 치하에서 택견은 탄압을 받은 게 맞음 ㅇㅇ. 이는 송덕기 옹의 채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기에 택견이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음.

하지만 조금만 더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택견'이 탄압을 받은 게 아니라 '택견을 향유하였던 계층'이 탄압을 받았기에 택견 또한 덩달아 탄압된 거에 더 가깝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됨.

 

 당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구한말의 한양에서 택견을 향유한 계층은 크게 3개로 나뉠 수가 있음.

 

1) 저자거리의 왈짜

2) 무관 시험을 준비하는 한량들

3) 군영의 병졸들과 하급 군관들 <-이 택견을 향유하였던 메이저한 3개의 계층임.

 

그리고 일제의 입장에서 보면 저 위의 3가지 케이스 전부가 탄압해야 마땅한 인물들이라는 게 주목해야 할 부분임.

 

저자거리의 왈짜들은 자잘한 폭력사태와 협박, 심할 경우는 살인까지 가는 범죄의 온상이니 정상적으로 행정권을 휘두르고자 하는 주체라면(정통성이야 없지만서두) 당연하게  때려잡아야 하는 사회의 독버섯들이고,

무관 시험을 준비하는 한량들 또한 사실상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였기에 구제의 대상이었다고 봐야 함.

왜냐하면 당시 홍등가 역할을 겸하고 있던 기방을 관리하던 계층이 바로 한량들이었기 때문임. 그냥 나이트 관리하는 조직폭력배들 생각하면 편함.

당연히 행정부 입장에서는 조져 마땅한 범죄자 집단이겠지?

 

그리고 대망의 세번째, 하급 군관들이나 조선이란 국가의 녹을 먹던 병졸들은 대놓고 불령선인들이라 일제 입장에선 눈에 불을 켜고 때려잡아야 하는 인종들임.

자기들끼리 우르르 몰려다니는 걸 냅뒀다가 무슨 일을 낼 줄 알겠음? 당연히 뿔뿔히 흩어지게 만들거나 최소한 모이지도 못하게 만들어야 함.

 

여기까지 봤으면 대략 다들 감이 왔을 거라 생각함.

 

택견이 탄압을 받은 것은 분명 맞지만, 모 단체의 프로파간다 처럼 '민족 정기의 말살을 위해' 일제가 조직적으로 택견을 탄압한 게 아니라.

그저 조선이라는 새로운 식민지를 경영하기 위해 일제가 불안요소가 될 수 있는 부분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덤으로 된서리를 맞아야 했던 게 택견이었을 뿐이란 거임.

 

반대로 씨름같은 경우는 협회까지 세워서 해마다 크게 대회도 주최할 수 있던 것을 떠올려 보면,  당시 택견이 얼마나 음성적인 특징(혹은 사회악적인 특징)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결론이 아닌가 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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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_94008190Best 2020.12.30 00:05

    오 꽤나 그럴싸하네.

    왈짜들은 뭐 말할 것도 없고 한량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군영 병졸이랑 하급 군관들은 더더욱 눈엣가시의 대상이었겠지 ㅋㅋㅋ

    송덕기 할아버지 스승님이신 임호 선생님도 힘좀 꽤나 쓰셨던 장사셨던걸 보면 태껸은 확실히 일반 사람들이 했던 그런건 아니니깐,

    일제 입장에서는 태껸꾼들이 규제의 대상이었을테고 송덕기 할아버지도 군관이셨었고, 무인 양반 집안의 자제 분이셨으니 일제 입장에서 개인으로 순사가 따라붙는거 당연했던거 같음 ㅋㅋㅋㅋㅋ

    도기현 회장님 칼럼보면 송덕기 할아버지가 싸움꾼이나 하고 다니진 않을까 집안에서 태껸 계속 하는거 걱정하셨었다고 했는데, 확실히 태껸꾼들의 이미지를 보며는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던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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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_57103566Best 2020.12.30 00:13

    정확함.

    전직 군인 + 무관집안 출신 + 스승이 장안팔장 중 하나였다는 임호 선생임(나쁘게 말하면 조폭 두목급) + 주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택견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음

    이정도 조건이 죄다 갖추어 졌는데 감시 대상이 아니었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일 듯 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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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_94008190Best 2020.12.30 00:21

    아 근데 임호 선생님이 나쁘게 말하면 조폭 두목급이라고 하기엔 조금 틀린게 ㅋㅋ 장안 8장사라는 명칭은 힘이 쎄고 겨루는 것에 탁월하셔서 붙으신 명칭이지, 실제로는 그냥 집안에서 생활비 받으면서 딱히 직업은 없이 태껸 전수만 하다가 말년에 돌아가신거라서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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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_94008190 2020.12.30 00:05

    오 꽤나 그럴싸하네.

    왈짜들은 뭐 말할 것도 없고 한량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군영 병졸이랑 하급 군관들은 더더욱 눈엣가시의 대상이었겠지 ㅋㅋㅋ

    송덕기 할아버지 스승님이신 임호 선생님도 힘좀 꽤나 쓰셨던 장사셨던걸 보면 태껸은 확실히 일반 사람들이 했던 그런건 아니니깐,

    일제 입장에서는 태껸꾼들이 규제의 대상이었을테고 송덕기 할아버지도 군관이셨었고, 무인 양반 집안의 자제 분이셨으니 일제 입장에서 개인으로 순사가 따라붙는거 당연했던거 같음 ㅋㅋㅋㅋㅋ

    도기현 회장님 칼럼보면 송덕기 할아버지가 싸움꾼이나 하고 다니진 않을까 집안에서 태껸 계속 하는거 걱정하셨었다고 했는데, 확실히 태껸꾼들의 이미지를 보며는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던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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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_57103566 2020.12.30 00:13
    @익명_94008190 에게

    정확함.

    전직 군인 + 무관집안 출신 + 스승이 장안팔장 중 하나였다는 임호 선생임(나쁘게 말하면 조폭 두목급) + 주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택견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음

    이정도 조건이 죄다 갖추어 졌는데 감시 대상이 아니었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일 듯 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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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_94008190 2020.12.30 00:21
    @익명_57103566 에게

    아 근데 임호 선생님이 나쁘게 말하면 조폭 두목급이라고 하기엔 조금 틀린게 ㅋㅋ 장안 8장사라는 명칭은 힘이 쎄고 겨루는 것에 탁월하셔서 붙으신 명칭이지, 실제로는 그냥 집안에서 생활비 받으면서 딱히 직업은 없이 태껸 전수만 하다가 말년에 돌아가신거라서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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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_57103566 2020.12.30 00:43
    @익명_94008190 에게

    주변에서 비쳤을 이미지를 말한거였는데 이런 실수가.... ㅋㅋㅋㅋㅋ 아 쪽팔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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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_61814764 2020.12.30 02:54

    그리고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국궁이나 씨름은 일제시대 때부터 일찍 조직적 체계화를 이루었고, 근대식 협회가 창설되었다는 점. 여운형 선생같은 당시 정치적 거물들이 발 벗고 나서서 지키며 싸우기도 하고 ㅋㅋ 그에 반해 택견이나 석전은 전형적인 하류문화였기 때문에 그런 건지, 체계화를 이룬 조직도 없었고 당연히 근대식 협회도 없었지. 나도 본글에 나와있는 비슷한 이유로 택견이 탄압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긴 하는데, 그게 택견이 소멸될 뻔 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아닌 것 같아. 근대화라는 바람이 불던 격변 시기에 여전히 봉건시대 하류문화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슥슥 갈려 나간 게 아닐까..하고 추측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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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_57103566 2020.12.30 08:42
    @익명_61814764 에게

    ㅇㅇ. 약간의 시점 차이만 있지 나도 비슷하게 봄.

     

    택견의 기반이 될만한 향유층들 대다수가 반쯤 불법의 경계에 발을 거친 사람들이었기에 맘먹고 정부가 탄압하면 갈려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런 출신의 인물들이 씨름과 국궁처럼 협회를 만들려 했다 한들 당시 조선총독부가 허락을 해 줄리도 만무했을 거고,

    뭣보다 먹고 사는 문제에 민감한 우리 한국 사람들의 성향상 정부에서 탄압을 하는 분야를 굳이 고수하려 했을 리도 없었으리란 점 등.(전직 택견꾼들이 타 무술로 흩어졌다는 기록들이 실제로 있음)

     

    복합적인 이유들이 동시에 작용해서 일제 치하 36년이란 시간 동안 서서히 잊혀져 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나 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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