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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소설] Chapter3 - 검불과 깃털(2)

익명_6041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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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충일이 돌아오기 전 유진은 한 번 더 투기장에 오르게 되었다. 상대는 이전과 달리 격기를 배운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조지George라는 이름의 외국인이었다. 해외에서 복싱을 배운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황폐한 이 사회에서 투기장까지 도달하게 된 데는 지난한 사연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당신은 왜 여기에 온 거죠?"

 

유진은 투기장에 올라가기 전에 외국인에게 물었다. 

 

"스템퍼를 이긴 꼬맹이군, 그런건 왜 물어보지?"

 

돌아오는 건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냥 궁금해서요... 그럼 안되나요?"

 

"어. 싸우는 상대와 너무 가까워지려고 하지마."

 

"단호하시네요."

 

"누군가에게 손찌검을 하려면 그 순간만큼은 그를 누구보다 증오해야해. 그런데 이 세상엔 가까이 다가가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지. 우리는 3자일 때만 서로를 미워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이유를 불문하고 싸워야 하는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 필요가 없어. 아니, '알아서는 안된다'가 더 맞겠네."

 

외국인은 그곳에 있는 어느 부랑자 못지 않은 유창한 한국말로 유진을 다그쳤다. 유진은 더이상 묻지 못하고 그를 보내야 했다. 짧은 대화였지만, 유진은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유진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꽤나 멋있어 보였다. 그것은 충일에게서 느낀 것과는 다른 노련함이었다. 정연한 문장에 담아내는 외국인의 말은 어쩐지 고상한 상류층 지식인의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투기장 위에 올라서서 마주한 외국인이 주는 인상은 앞서 대화할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정갈하고 세련된 동작으로 싸웠다. 그의 기술은 누가봐도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자의 것이었다. 그의 주먹은 번번이 유진의 얼굴에 꽂혔다. 유진은 배운 기술을 써먹어 보려고 애썼지만, 도저히 복서의 주먹을 막을 수가 없었다.

  

가볍고 빠르다

 

유진은 그와 자신의 차이를 뼈져리게 느꼈다. 겪어 온 경험의 양과 질이 완전히 달랐다. 한 방, 한 방이 묵직하게 얼굴에 꽂힐 때마다 유진은 격차를 체감했다. 외국인 복서가 투자해 온 시간을 자신이 따라잡기를 바라는 것이 오만하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도 져 줄 생각은 없어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유진은 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직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좌절하기에는 너무도 이르다는 것이 오히려 그를 포기하지 않게 했다. 치기였고, 객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충일이 기대를 걸었던 유진의 자산이었다.

 

반보, 거리를 만들자

 

유진은 생각했다. 아쉽지만, 기술을 포기하더라도 맞지 않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유진은 발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허리까지 숙여댔다. 그제야 겨우 주먹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상태를 지속한들 좋을 게 없었다. 투기장은 중간에 싸움을 멈춰주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이대로 가면 유진 자신이 지칠 것이 명백했다.

 

뭐가 잘못됐지? 내가 잘못 이해한 걸까?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유진은 기민하게 공격을 피하면서도 생각에 생각을 이었다. 충일의 지도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가르쳐 준 기술은 투기장 위에 서 있는 두 사람의 현저한 격차를 메워주고 있었다. 억지로 신체를 개조하지 않고도, 주어진 신체를 최대한 활용하게 만드는  그 기술의 지향점이 빛을 발했다. 그러나 자연스러움을 표방하는 그 동작이 변화를 불러왔다는 사실은 외부에서는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다른 생각을 하며 경기에 임하는 유진의 모습은 타자의 시선에서 볼 때 한 수를 무르고 봐주며 싸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이러한 상태가 유지될 수록 복서는 초조해졌다. 자신이 미숙한 유진에게 저지당하고 있는 이 상황을 인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초조함은 그에게 그릇된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복서는 잠시 거리를 벌리더니 먼저 들어와 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유진의 태도에 항의하는 방법으로 도발을 택한 것이다.

 

"지난번 경기에서 보여준 호기로움은 어디로 갔지?"

 

못 들어가는 게 아니라 들어갈 만한 기술이 없다고..”

 

"이제보니 하는 짓이 영락없는 Secretary Bird(뱀잡이 수리)로군"

 

유진이 답답한 마음에 본심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러나 외국인은 유진이 자신을 기만하며 기회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동안 유진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연신 도발을 하는 외국인을 앞에 두고 머뭇거리는 묘한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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