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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소설] Chapter1 - 잿불(7)

익명_16229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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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우위를 보여줬던 노인과 달리 유진에게는 바로 다음 상대가 배정되었다. 오만한 감상에 빠져있던 유진은 괜찮다며 여유를 부렸지만, 노인은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좋지 않은데...”

 

노인이 혼잣말했다.

 

유진은 노인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운함도 잠시. 두번째 투기에 들어가기 전 날이 되었을 때 유진은 불안함에 휩싸였다.

 

한달이 지났는데 왜, 왜 다음 단계를 가르쳐주지 않는 거지?”

 

유진은 혼자 있는 곳에서 웅얼거렸다. 노인의 입에서 자신을 포기하는 말이 나올까봐 차마 직접 묻지 못한 말이었다.

 

말그대로 유진은 걷는 것 외에는 배운 게 없었다. 물론 그 속에 많은 세부적인 가르침이 있었지만, 공격적인 기술을 따로 가르친 적은 없었다.

 

유진이 고민으로 지새우던 그날 밤 노인은 독방의 초라한 벽을 바라보며 혼자 생각에 잠겨있었다.

 

잘 하고 있다, 지금 더 가르쳐봐야 나아질 게 없어..’

 

노인 또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가 이루고자 하는 일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버티는 마음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 투기장에는 다시 조명이 들어왔다.

 

나는 그래도 저것들보단 싸울 준비가 된 사람이야

 

객석을 메운 관중을 보며 유진이 마음을 추스렸다.

 

상대는 유진과 비슷한 체격의 부랑자였다. 핏기없는 하얀 피부에 열망이 없는 탁한 눈, 힘없이 늘어진 어깨.  2030년도에 대거 들어왔다는 이민자들의 후손인 듯 했다. 그는 인종적 차이 외에도 부랑자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신체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정렬된 척추라인과 긴 하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 긴 다리 때문에, 쉽게 다가가기 어려워 보였다.

 

멀리서 발로 싸우려나

 

유진은 짧은 시간 동안 단 하나의 단서라도 잡기 위해 노력했다. 투기장에 적막한 기운이 흐르고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눈치챘을 때, 나무같던 남자는 금새 유진의 눈 앞에 와 있었다.

 

보폭이... 길어..!’

 

예상치 못하게도 근거리로 들어온 남자는 빈약한 주먹을 뻗어왔다. 습관적으로 반 보 물러나려던 유진은 몸에 위화감을 느꼈다.

 

-‘

 

유진은 순간 자신이 왜 넘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상대방이 자신의 발을 밟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진은 일단 후속타를 막기 위해 얼굴을 감쌌다.

 

상대는 얼굴을 감싸는 유진을 보고 누워있는 유진의 몸을 차고 밟아대기 시작했다. 가녀린 나무처럼 보이던 그의 다리가 매섭게 몸에 꽂혔다.

 

빠져나가야 해..!’

 

유진은 고통을 실감하며, 살기 위해 옆으로 굴렀다. 본능적이고 우스운 동작이었지만 효과적인 대응이었다. 유진은 숨을 골랐다. 긴장감에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일분 일초가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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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시간 부랑자들에게 마련된 공동생활 공간에는 영사기를 통해 투기장의 전경이 중계되고 있었다. 관리자들은 삼엄한 경계 아래에서 부랑자들은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놓인 자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게 했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각인시키고 싸움을 부추기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때 만큼은 노인도 독방에서 풀려나와 같이 영상을 시청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스템퍼라고 부릅니다."

 

영상을 보던 대호가 노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 꺾다리 말인가? 별명같은 건가?"

 

노인은 대호를 살짝 흘겨보더니 여유있게 대답했다.

 

"네 여기선 종종 투기장에 오르는 부랑자들 중 눈에 띄는 인물들에겐 별칭이 붙곤 하죠"

 

"하기야... 그게 부르기 편하겠지. 누구도 본명따위 기억해주지도 않을 테고."

 

"얕은 수를 쓰는 자라고 해도 이곳에선 나름 승률이 높습니다."

 

대호가 노인쪽으로 향하고 있던 바라보던 고개를 돌려 투기장을 바라보자 유진을 몰아붙이고 있는 스템퍼의 모습이 보였다.

 

"오! 또 넘어뜨렸어. 이번에도 밟히면 오래 못버티겠는데?"

 

"그래도 저녀석도 잘 꽤 피해 다니잖아?"

 

같은 곳을 바라보던 부랑자들이 주변에서 웅성거렸다.

 

"상대를 넘어뜨리고 발로 밟는 싸움 방식 때문에 생긴 별명이지만, 이제와서는 별칭을 얻기 위해 꺾어야할 수문장이라는 의미도 갖게 되었죠."

 

"Stamper라. '도장을 찍어주는 사람'이라니 그럴싸 하군. 어디 우리 애송이는 도장을 받아 올 수 있으려나?"

 

노인은 기대와 우려가 섞인 혼잣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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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아이러니하게도 몸에 새겨진 고통을 느끼며 노인의 말을 떠올렸다.

 

밟는 게 중요해

 

유진은 참았던 호흡을 터트리며 웃었다.

 

"하... 참. 웃기지도 않네"

 

그리곤 스템퍼를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못하고 실성한 줄 알았는데 눈이 살아있군"

 

스템퍼가 말했다.

 

"어, 어떻게든 길을 찾은 거 같거든"

 

유진이 대답하고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그러자 스템퍼는 역으로 거리를 두기 위해 움직였다. 그는 자신의 공격이 상대방이 방심할 때 쓸 수 있는 기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은 그러한 저의를 놓치지 않았다.

 

‘잘 생각해보면 저 자식은 계속 비슷한 기술밖에 쓰지 않았어. 넘어뜨리고 밟고. 간을 보면서 타이밍에 변화를 주고 있을  뿐 단조로운 연계야. 쓸 수 있는 기술이 한정적인 거라면 아마 또 똑같은 방식으로 들어오겠지' 

 

그 후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대치 상태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진은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스템퍼는 그 여유에 불안해졌다.

 

"씨발..."

 

이윽고 그의 인내심이 더 버티지 못하는 순간이 왔다.

 

긴 보폭이 들어오는 타이밍에 맞춰 유진도 움직였다. 이전 상대를 무너트렸을 때처럼 반보 앞으로. 그 움직임에 장신의 남자가 아까처럼 유진의 발을 밟지 못한 채로 두 사람의 몸이 부딪혔다.

 

한 발을 미쳐 땅에 대지 못한 채 충격을 받은 나무가 뒤로 넘어졌다. 유진은 쓰러진 그의 곁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다음에 벌어질 일은 뻔했다.

 

"나도, 밟는 건, 배웠다고!"

 

유진은 발뒤꿈치로 스템퍼를 찍어대며 말했다.

 

그는 다음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항복을 받아낼 때까지 쉬지 않고 연신 밟아댔다. 쓰러져있는 남자는 당황해서 몸을 감싸거나 피하지 못했다.

 

싸움이 끝났다. 투기장은 환호성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노인은 기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는 모두가 유진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고 있었다. 낡은 타일의 갈라진 틈 사이로 벌레가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콰직-‘

 

노인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의 발밑에 기어 다니던 벌레를 밟아 죽였다. 마치 잿더미 속에 남은 불씨를 끄듯이 짓이겨서. 우환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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