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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택견 원형 논쟁을 통해 본 택견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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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세계택견본부 총사 이용복


Ⅰ. 서론

   택견에는 다른 무술 종목에서는 유례가 없는 원형(原形)에 대한 논쟁이 20여 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이것은 택견이 무술 부분에서 유일하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전통무예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문화재의 원형논쟁은 문화유산은 원래의 모습대로 보존되어야 한다1) 거나 문화재는 원형이 보존되어야만 문화재로서 가치를 지닌다2) 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실체가 존재하는 유형문화재와는 달리 무형문화재는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활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실체적 형태가 없는 것이므로 원형에 대한 논의는 원천적으로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무형문화재에 대한 원형 논쟁은 택견이외에도 탈춤, 농요, 무용, 민속놀이, 연희 등 여러 종목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택견의 경우 문화재 지정 직후부터 계속 되어 온 원형논쟁은 단순히 학문적 견해 차이에서 오는 논쟁을 넘어서 택견 전승 단체간의 사활을 건 분쟁 양상을 띠고 있다.

1) 1997. 12. 8 제정 공포한 문화유산헌장
2) 이승진(1990)전통문화의 보전 전승을 위한 문화재 행정의 개선 방안. 고려대 대학원


이것은 신한승 선생에 의해 정립되어 문화재까지 지정되어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면 이 문화재를 왜곡하거나 변질되지 않도록 우리 국민 모두는 관심과 책임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학들이 각자 단체를 만들어 나간다면 혼란만 야기 시킬 뿐 문화재의 가치는 퇴색되고 상실되어 조상들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택견의 모습은 사라지고 현대판 택견이 난무할 것이 자명하다3) 는 주장과 각 단체들이 택견을 해석하는 시각 차가 크다. 그리고 택견을 전수하는 방법과 체계가 차이가 있다. 물론 합리적, 효율적 면에서 우열이 분명히 있다. 또한 각 각 다른 제도가 굳어져 있다. 마치 다른 종목처럼 변한 각 각의 택견을 하나로 만느는데는 각 단체가 조금씩 양보할 수 있는 태도가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4) 라는 주장에서 논쟁의 이면을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면적 이유와는 상관없이 원형논의 자체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지금까지 택견에서 해온 원형 논쟁이 순수한 목적에서 빗나간 면이 있기는 하지만 논쟁을 통한 긍정적인 결과도 과소 평가 할 수 없다고 본다. 형식(形式)5) 은 내용의 판단기준이 된다. 특히 무형문화는 형식이 곧 그 문화 자체로 평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원형에 대한 연구는 택견의 본질에 접근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지난 20여 년 동안 택견 원형 논쟁의 실상을 파악하고 이 과정을 통하여 택견원형이 어떤 것이며 또한 택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3) 택견원론(2002). 보경문화사 오장환 추천사
4) 이용복(2003) 택견 대한체육회 준가맹. 계간택견 2003년 봄호
5) 이 경우 형식의 의미는 겉모양, 외형, 격식이나 절차, 고정된 관념이나 상태 따위의 사전적 해석을 포괄한다.

 



Ⅱ. 택견원형 논쟁의 시기별 양상



1. 원형에 대한 이견 노출시기

   1983년 택견이 문화재로 지정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부터 택견원형에 대한 문제가 나타났다.


서울의 송덕기(1893~1987)보유자로부터 택견을 배우고 있던 전수생들은 언론보도를 통해 소개되는 충주의 신한승(1928~1987)보유자가 하는 택견형태가 할아버지(송덕기)가 하는 것과 다르다."고 의문을 가졌다. 당시 문화재 당국의 담당자들도 동일한 종목의 두 보유자의 양식이 상당히 다른 것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송옹은 그 사람(신한승)이 제 멋대로 하는 것ꡑ이라고 일갈했다.


84년에 녹취한 송덕기의 증언은6) 원형논쟁 초기의 문제점이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송덕기 : … 내가 그랬어요, 저기 2과(문화재관리국 무형문화재 2과)에 가서도 뭐라고 했는고 하니, 운동이든지 뭐든지 하는 사람이면 거짓부렁이 하면 못쓰는 것 아닙니까? 죽을 때 죽더래도 … 이렇게 산 사람이 있는데 자기가 혼자 잘난 사람인 줄 알고 이렇게 떠들고 다니면 내가 여기 살고 있는 이상에는 저 사람(신한승)이 무어라고 할 수 없어. 내, 일부러 더 떠들어 보라고 그래, 그래요 난.
   이용복   : 그런데 선생님은 처음에 (송덕기)선생님을 만나 뵈었을 때 택견을 조금 할 줄 알았습니까?

6) 녹취록(1996) 미래합동속기사무소(1984. 8. 10 대화 녹음 테이프)
   
   송덕기   : 모르죠!
   이용복   : 전혀? 선생님
   송덕기 : 전혀 모르죠, 전혀 모르죠! 전혀 몰라요!
   이용복 :아 ─, 그러니까 옛날에 자신의 할아버지께 뭐 이렇게 했다(배웠다)고 하는 것은, 조금 구경은(하시지 않을까요?), 나이가(있으시니까)
   송덕기 : 그것도 없죠

   (중간 생략)

이용복 : 본때뵈기라고 태권도형처럼 만들어서 하는 것을 저희들도 연습을 해 보고 왔습니다만, 옛날에 선생님 처음 배우실 때 만 해도 본때라는 이런 게 요즈음처럼 있었습니까?
   송덕기 : 없어요, 본때라는 것은 없었어요.
   이용복 : 본때가 한 사람 한 사람 나와서 서로 견주기를 하게 되면 다음 사람이 나오기 전에 시위하듯이 했다고 하는데, 선생님이 옛날에 그걸 하셨다고 신선생님이 얘기를 하시던데,
   송덕기 : 없는 것을 했다고 해서, 안하고 안 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말은 확실하게 해야 되는 거예요. 왜 거짓부리를 해요, 거짓부리를요.

   송덕기 증언보다 5일 앞서 녹취한 신한승의 증언7) 역시 지금의 택견원형 논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내용이다.

   신한승   : … 이거 자꾸만 이런 식으로 하면 충주에서 잘못하는 거야. 그렇지만 (본때뵈기)12마당 형편 그겁니다. 그거 활개짓 하나에서 끝난다는 것은 똑 같아요. 원리는 다 맞아요, 기술에 그것만 다른 거지 ─ 그래 가지고 원리와 … 기술을 배합하고 요것은 내가 했다는 겁니다.
나는 명확하게 … 왜 그런고 하니 12마당은 옛날 사람들이 12마당을 했으니까. 그리고 일곱, 여덟 마당께 보통 끝납니다. 그러니까 우리 고전같은 것을 자꾸 연구해 가지고 우리 것을 조립해야죠. 막연하게 누구 이야기 듣고 하면 안됩니다 . ─ 그러니까 옛날의 것을 형태를 가져다가 그대로 익혀 가지고는 무언가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기술이 이렇게 된거예요.
   이용복   : 지난 번 중학생들이 시연 보일 때 첫 마당 …
   신한승   : 이것이 한마당인데 구태어 형(型)으로 따지면 두 개로 볼 수 있고 하나로도 볼 수 있거든. 사실은 하나인데 …
이걸 작업하기는 10년이지만 ─ 얘들 가르칠 때부터 만들어 낸게 10년입니다. ─ 아까 이야기했지만 뭐 이런 건 좀 달라 졌지만 핵은 안 달라 졌습니다. 나 이번에, 애들 가르치는 것하고 여기 가르치는 것하고는 또 달라요.
나 이번에 예절 학교에서 가르친 건 또 다르게 가르쳤습니다. 문예진흥원에서 하는 건 또 다르게 합니다. 그러면 그게 다르냐?


7) 녹취록(1996) 미래합동속기사무소(1984. 8. 5 대화 녹음 테이프)

그게 아니죠. 핵은 똑 같은, 원리는 같은데 남들 알아보게 표현해야 될 것 아니냐? ─ 활개짓도 그전엔 막 이렇게 했어. 지금 바꿔 가지고 이렇게 해 가지고 나가죠? 이것은 껍데기뿐이고 이건 변해도, 이건 뺏다, 넣었다 해도 관계가 없는 겁니다. 그렇다고 핵이 변하는 건 아닙니다. ─   또 문예진흥원에 서 ꡒ왜 기술을 다 바꿨느냐?" 고 그러네. ─ 그래가지고 모든게 그냥 핵이 무엇인지 그걸 알아야 됩니다. 모든 것이 어떻게 표현해야 할 것인가.
   이용복   : 문예진흥원에 그거(원형녹화)할 때 이게(재구성한 학습체계) 수록 돼 있죠?
   신한승   : 예, 이거
   이용복   : 그리고 저쪽에서는 어떻게 됐습니까? 문화재 관리국.
   신한승   : 문화재 관리국에도 이거대로입니다.
   이용복   : 아 ─ 그러면 이게 이제 그대로 남는 거죠.
   신한승   : 그대로 남는 거예요, 이제는, 그런데 별거리는 안 넣었어요, 그건 내양심상, 그거 앞으로 나 평(評)받으면, 에이 ─, 이거, 그래서 내가 거기 것은 될 수 있으면 평받아도 괜찮은 것만 이렇게 했습니다. 왜 다 도려냈느냐, 이것은 참 ─ 여기서 하는 것 다르고, 뭐 그기 다르고, 이사범(이용복)가르치는 것 다르고 다른 것 가르치는 것이냐, 가짜 가르치느냐, 아닙니다. 거기는 그대로 있고, 여기는 여기고,   애들은 애들이고 내가 예절학교 가르치는 것은 더 엉터리로 가르쳤어요.

(중간생략)
   이용복   : 그것은 우리가 태권도를 가르쳐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신한승   : 그래서 자꾸만 다르다고 해, 뭐가 달라?
   이용복   : 여기서 이렇게 가르치고, 저기서 저렇게 가르치고. (그런 것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신한승   : 핵이, 핵과 원리만 같으면 같은 거예요. 그거 빼고 가르치고 했다, 뭐 서서 이런 거 넣었다, 딴 걸 넣었다, 뭐 이렇게 하고 했다 (동작을 보여 주며), 저렇게도 했다, 아 ─ 그 자체에 핵이 들어가 있는데 뭐가 다른 겁니까?

   위 두 분의 증언을 들어보면 1984년 당시부터 송덕기의 택견과 신한승의 택견이 상이 한데 따른 불편한 심기를 두 분이 다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옹은 자신은 모르는 기술이나 동작을 신한승이 자의적으로 꾸몄다고 나무라고 있고 신한승은 교습의 효율성을 고려하여 대상자에 따라 다른 형태로 가르치는 것이며 핵이 동일하므로 형식에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대화중에 몇 차례나 반복해서 강조되는 핵과 원리는 같다는 말은 형태와 방법은 다르다는 강한 반증으로 받아들여 진다. 이와 같이 송덕기와 신한승의 택견형태가 다른데서 오해가 발생하여 택견을 우대(송덕기)와 아래대(신한승)의 유파로 구분하는 경향이 생기기도 하였다.


   1985. 6. 30 부산구덕체육관에서 개최된 제1회 택견 경기회에서는 서울(송덕기)과 부산(이용복), 충주(신한승)에서 출전한 선수들이 각 각 특징이 두드러진 형태의 택견 모습을 보이고 있다. VTR에 기록된 당시 동영상을 보면 문화재 지정 후 불과 2년이 지난 시점부터 나타난 상이점은 18년이 지난 오늘 날 세 단체에서 하는 택견이 마치 다른 무술 종목처럼 변화 하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



2. 본격적인 원형논쟁 시기

   1992. 6. 23자 일간스포츠 기사는 택견원형에 관한 논쟁에 불을 당겼다. 애써 되찾은 우리 전통무예 택견이 왜곡, 변질돼 가는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전통무예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전통택견의 보급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서슴치 않겠습니다."


당시 일간스포츠에 실린 기사 내용은 택견 기능 보유자 후보 정경화씨의 비장감 서린 인터뷰로 시작되어 있다. 이렇게 촉발된 택견 원형 논쟁은 91. 1. 14 사단법인인가를 받아 전국적인 활동을 시작한 대한택견협회의 활동에 대한 견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로부터 2주일 뒤 92. 7. 5자 같은 신문의 같은 난에 「대한택견협회․기능보유자 택견정통성 논쟁 치열」제하의 기사가 앞의 기사와 같은 크기로 실렸다. ꡒ택견은 본래 씨름과 같이 경기 차원에서 전래돼온 민속놀이였기에 경기화를 추진하는 것이 오히려 원형 복원에 더 가깝다"는 대한택견협회의 반론을 게재한 것이다.


   같은 해 7월 13일자로 택견협회 사무처장 손일환 명의로 정경화에게 신문기사의 내용을 조목조목 따지는 질의서가 보내졌다. 이에 대하여 8월 8일자로 전수생 천정엽 명의로 된 회신은 질문에 대한 논리적 답변 대신 감정적이고 격렬한 인신공격적인 내용이었다. 이것이 나중에 KAIST 폭행사건의 빌미가 되었다. 또 이보다 조금 앞선 7월 11일자로 이용복은 한국전통택견연구회장 명의로 문화재관리국에 질의서를 내었다. 그 내용은 택견원형이 잘못 지정되었음을 지적하고 공청회를 열어 재조사를 해 달라는 요지였다. 문화재 관리국에서는 8월 31일 문화재 원형 택견은 관계전문학자의 조사 연구와 문화재 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타당한 지정이라는 답변을 하였다.


   이듬해인 93년 5월에는 정경화가 스포츠서울에 게재된 협회 관련 택견 기사에 대하여 언론중재신청서를 제출했다. 언론중재신청서 내용 중에 문화재 관리국과 자신은 대한택견협회를 무형문화재 택견의 이름을 도용한 사이비 단체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 또 문제가 되었다. 택견협회에서는 문화재 관리국에 사실 확인 질의서를 내었다. 문화재 관리국에서는 회신에서 체육관계 비영리 법인인 택견협회의 활동은 무형문화재 기능 전승, 보존과는 무관 하다는 모호한 대답을 하였다. 택견협회에서는 문화재 관리국이 본연의 직무를 벗어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민간 활동을 위축시킬 수 있는 회신 내용이라고 크게 반발하였다. 여기서도 협회와 보유자 후보가 원형에 대하여 시각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95년 6월에는 택견협회에서 결련택견을 문화재로 추가 지정해 달라는 신청서를 문화재 관리국에 제출하였다. 신청사유의 요지는 송덕기 택견을 재구성한 현재의 문화재 택견은 원형이 아니므로 서울의 단오민속경기로 일제시대 초기까지 있었던 결련택견을 문화재로 지정해야 하며 이용복을 택견 기능보유자로 추가 지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해 10월 5일자로 문화재 관리국에서는 회신을 통해


   현재 지정된 택견은 정확한 조사가 된 것이며 이것이 현 정경화에게 전승되고 있는 것이 인정되고, 결련택견이란 마을끼리 편을 나누어 시합하는 택견경기를 의미하는 바, 택견 개념 속에 포함된 결련택견은 추가 지정함이 불필요하고,   이용복은 신한승이 체계화 한 택견을 토대로 시연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위의 내용 중에는 문화재위원회가 기존의 보고서에서 「결연택견」을 싸움수라고 한 것을 「결련택견」은 `경기택견' 이라고 번복한 매우 중요한 사실이 들어 있다.


   택견협회에서는 문화재 관리국의 결정에 불복하여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재심의를 요구하는 청원을 하였다. 결련택견의 문화재 지정신청에 의한 조사를 82년 택견을 조사한 장본인들이 주도한 것은 조사단 구성에서부터 공정하지 못하고, 또 조사 결과가 기존의 조사보고서 내용 중 매우 중대한 부분을 번복해 놓고도 이와 연계하여 배치되는 다른 내용을 수정을 하지 않아 논리적 모순이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재조사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96년 3월 택견협회는 문화체육부장관을 피고로 하는 행정소송을 제기 하였다. 청구 취지는 정경화에 대한 택견보유자 인정처분 무효 확인이었다. 청구원인의 요점은 정경화가 보유한 택견이 원형이 아니라는 것과 또 정경화가 택견은 전통무예이며 경기화 하면 원형이 훼손된다고 주장하여 원래 경기가 주류인 택견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소송은 때마침 보물로 지정된 거북선 총통이 가짜로 판명되어 일어났던 엄청난 사회적 파문과 맞물려 많은 관심을 끌었다. 재판에서는 송덕기 제자 김형국이 증인으로 나섰고 보유자인 정경화는 두 차례에 걸쳐 증인 심문에 응하였다. 세 번의 심리가 열린 이 재판 과정을 통하여 택견 원형과 관련하여 문화재 당국이나 기능 보유자의 주장만이 꼭 옳은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인식을 퍼뜨린 성과는 있었지만 원고인 택견협회는 소 각하 판결을 받아 패소했다. 소각하의 이유는 원고가 이 사건 소를 다툴 정당한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8)


   이 소송 사건 보다 조금 앞선 95년 12월에는 택견협회가 명예훼손죄로 정경화를 고소하였다. 92년 이래로 정경화는 각 종 언론매체와 자체 제작 유인물 또는 다중이 모인 공개석상에서 여러 차례 공연히 협회를 비방하여 명예를 훼손했다는 요지의 고소였다.

8) 행정소송법 제35조는 행정처분의 뮤효 등 확인 소송은 처분등의 효력유무 또는 존재 여부의 확인을 구할 법률상 이익이 있는 자가 제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근거하여 정경화에 대한 택견보유자 인정처분이 무효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바로 원고가 보유자로 인정되는 직접적, 구체적 이익과 연결되지 않으므로 원고의 자격에 하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경찰조사 단계에서는 피고인 정경화가 인간문화재로서 당연히 할 말을 했다고 진술하여 기소 의견이 검찰에 이송되었으나 검찰 조사에서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고검에서 일부 혐의가 인정되어 피고는 약식기소 되어 형사 처벌을 받았다. 그 후로 공개적인 협회에 대한 비방이 중단되었다. 이 고소의 빌미가 된 비방내용 역시 택견협회가 택견을 스포츠화 하여 원형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 골자였다. 법정으로까지 비화된 원형 시비는 두 사건을 계기로 일단 표면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잠복했다.
   90년대에는 문화재 택견의 보유자가 주도하는 한국전통택견회와 대한택견협회간의 분쟁과 갈등이 격화된 시기 였다. 표면상으로는 원형 논쟁이었지만 객관적 시각으로는 두 단체간의 택견 주도권 다툼으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두 단체는 감정적인 충돌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이른바 KAIST사건, 서울대 캠퍼스 사건, 지리산 삼성궁 사건, 택견협회 사무실 사건 등의 크고 작은 폭행사건이 꼬리를 물고 빚어졌다.


이 사건들은 협회측 사람들이 보유자, 또는 보유자 측근 사람들을 폭행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폭행 당사자들은 형사 처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정을 잘 모르는 문화재계 사람들로 하여금 택견협회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하였다. 일례로 문화재 관련 공청회에서는 이 폭행사건이 문화재 원형보존에 심각한 위해를 가하는 행위라고 성토되고 협회의 법인인가 취소를 당국에 건의하자는 안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격렬한 사생 결단식의 원형 논쟁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살펴 본대로 보유자측이나 문화재 당국에서는 논리적 반론이나 객관적 증거의 제시 없이 항상 기존의 문화재당국의 조사보고서의 절차적 정당성과 그에 의해 국가가 인정한 보유자의 권위로서 대응하였다. 이에 비해 택견협회에서는 설득력있는 논리 개발로 대응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결과적으로 택견협회에 의해 택견이론화가 상당히 진전을 보았다. 이렇게 원형 논쟁은 언제나 평행선상에서 서로 자기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3. 논쟁의 재발 시기

   1998년 10월 30일 국민생활체육 전국택견연합회가 창립되었다. 획기적인 것은 그 동안 반목하던 정경화 보유자측과 대한택견협회측에서 임원을 반 반 씩 나누어 집행부를 구성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단체의 결합은 1년이 채 못가 깨졌다. 보유자측에서 먼저 생활체육 택견연합회를 일방적으로 해산한다고 선언하고 탈퇴해 버리므로서 택견협회 출신 택견인들이 생활체육택견연합회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보유자 측의 단체인 한국전통택견회는 몇 개로 분열되어 심한 내부 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보유자측의 이러한 내부사정 때문에 한동안 원형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다. 이런 와중에 2001. 2. 2 대한택견협회가 대한체육회로부터 인정단체로 승인을 얻었다. 91년에 가맹신청서가 제출되었으니 꼭 10년 만이었다.


   대한체육회는 처음에는 택견의 보급이 미미하다는 어정쩡한 이유를 들며 택견협회의 가맹을 소극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택견 보급이 활발해 진 94년부터는 택견은 경기를 할 수 없는 전통무예임을 주장하며 반대하는 보유자측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가맹 불가를 표명하였다. 체육회는 이전까지 공식적인 회신 없이 구두 상으로 이런 저런 핑계를 대어 왔으나 94. 11. 23자로 첫 회신을 보냈다. 그 회신의 가맹 불가 이유 중 첫 머리에


   1983년 6월 1일 문화체육부가 지정한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 택견과 완전통합하여 전국 통할단체로 인정되어야 검토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체육회의 이러한 태도가 택견 원형 논쟁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택견협회로서는 체육회 가맹을 하기 위해 이제 택견 원형이 경기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원형논쟁이 대한체육회 가맹 문제와 결부되고 있을 때 마침 1999. 7. 28 한국전통택견회가 문화재청으로부터 사단법인인가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협회에서는 문화재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법인(한국전통택견회)과 체육법인(대한택견협회)은 목적이 상이하고 감독청과 관련 법규도 서로 다르므로 체육회가 두 법인의 통합을 요구하는 것은 체육회의 목적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체육측면에서 유일한 전국규모 법인인 택견협회가 체육회 가맹을 하는 것은 의당한 것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협회의 단독 체육회 가맹을 적극 시도하였다. 그 결과 택견이 전문체육으로 인정되는 획기적인 결과를 얻은 것이다. 이것은 원형이나 전통성과는 상관없이 현시점에서 택견이 결국 경기라는 점을 국가 체육을 통할하는 대한체육회가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후 택견 논쟁이 잠잠해 진 것으로 볼 때 그 동안의 원형 논쟁이 순수하게 택견의 정체성을 규명 하는 데만 목적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논리상으로 본다면 택견을 경기로 활성화하면 원형이 훼손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반하여 체육회가 택견을 전문 경기 종목으로 인정하였고 그동안 택견을 변형시켰다고 맹렬하게 비판받아 온 택견협회가 체육회의 인정을 받았다면 반대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보유자 측에서는 아무런 대응이 없었다. 그리고 2002. 2 .11 대한택견협회가 대한체육회 준가맹 단체로 승인되면서 잠복했던 원형 문제가 또 다시 발발하였다. 보유자 측에서는 택견협회가 대한체육회 준가맹이 된 시점을 전후하여 문화재청과 체육회, 문화관광부, 청와대, 각 언론사 등에 인터넷을 통한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러한 보유자 측 진정을 수렴하여 문화재청은 3월 8일과 3월 21일 두 차례에 걸쳐 대한체육회와 문화관광부에 협조요청 공문을 보내었다.


그 내용의 요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 택견 보유자, 이수자 등이 배제된 상태에서 택견협회가 단독으로 체육회에 가맹됨에 따라 택견인간의 갈등이 심해지고 있다. 국가의 심의를 거쳐 원형으로 지정한 전통무예로서의 택견이 아닌 민속경기로 변형된 택견이 공식 경기종목으로 채택 될 경우 택견의 원형이 왜곡 전승, 보급 될 우려가 있다.   택견이 원형을 잃고 변형된 형태로 국내외로 전승, 보급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특정단체만을 체육회에서 공인하는 것은 택견인간의 갈등을 심화시켜 택견 전승, 발전을 저해하고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택견협회의 체육회가입 등은 신중히 검토 처리해 줄 것을 요청한다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문화재청의 견해에는 앞으로 이 글에서 계속 논의해야 하는 택견이 민속경기로 변형되었다 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일단 제외하더라도 몇 가지 모순점이 발견된다.


첫째, 보유자, 이수자 등은 택견원형을 보존하고 이를 전수 보급하는 임무가 부여되어 있는데 경기단체인 체육회가맹단체의 일원이 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둘째, 택견이 꼭 원형대로 국내외에 보급되는 것이 바람직한가와 또 원형대로 해서 다양한 사회 욕구에 부응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셋째, 특정단체로 지칭되는 택견협회만이 체육관련법인이며 나머지 단체는 거의 문화재관련법인인데 문화재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법인이 체육회 산하 경기단체로서 이중의 목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인가는 의문의 대상이다.


이 문서에는 따로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 택견 전승현황을 붙였는데 전국 36개 전수관이 설치, 운영되고 있고 97년부터 매년 1회 씩 전국택견대회를 개최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도 경기가 원형을 훼손한다고 하면서 경기대회를 개최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또 설립과 활동이 문화재원형보존과 관련한 적법성, 적절성 따위는 논외로 하고 36개라는 적지 않은 전수관이 보유자의 지도아래 활동하고 있는데 굳이 체육단체의 활동에까지 원형 문제로 간여 할 만큼 원형의 보존이 심각한 위기에 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또한 문화재 전승단체 요구사항으로 ― 택견협회 이사로 단체별 1~2명 씩 임명, 기술규정 마련시 보유자 참여보장, 경기규칙에 100여 개 택견 동작중 품밟기 3동작, 활개짓 5동작 등 문화재로 전승되는 택견 동작 채택을 명기하고 있다. 이 요구사항을 순수하게 원형의 보존, 전승 문제로 접근한다면 그 방법상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다. 보유자가 경기규칙작성에 개입하여 몇 개의 동작을 추가시켜봐야 결국은 그들이 주장하는 원형과는 거리가 먼 트기가 될 뿐이다. 한 편 택견협회는 택견계의 화합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2월 8일 (사)한국전통택견회, (사)결련택견계승회 등과 대한체육회에 가맹된 택견협회에 다른 택견 단체가 함께 참여 할 수 있도록 합의하였다.


이 합의 내용은 체육회 준가맹의 조건으로 단서가 붙었다.


이에 따라 2월 15일 대한택견협회 총회는 타 단체가 참여하는 특별위원회를 설치 운영하는 규정을 삽입하는 정관개정을 하였다. 그리고 협회가 체육회와 특위 설치 운영 규정 작성을 협의하고 있는 도중에 문화재청의 공문이 접수 된 사실이 알려지자 협회 측 사람들은 즉각 반발하였다. 인터넷을 통하여 보유자 측과 문화재청을 성토하는 글이 쇄도하였다. 협회의 반박 논리의 요지는 택견을 문화재로 지정 할 당시에 원형이 잘못 조사되었으며 변형된 형태가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니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공청회를 통하여 재조사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번 사태를 요약하면 택견 보유자, 또는 문화재 당국은 92년의 원형 논쟁과 동일한 의미- 즉 택견인간의 화합, 또는 택견단체간의 주도권 경쟁등과 같은 원형문제 이외의 이유가 개입 된 원형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킨 셈이 되었고 이에 대한택견협회는 사안과는 별개로 이 기회에 진정한 원형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규명하자는 취지로 문화재청에 대하여 공청회 개최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외형상으로만 본다면 90년대 중반의 논쟁 상태로 되돌아 간 것이다.



Ⅲ. 원형 논쟁의 쟁점

   20여 년간 계속된 택견원형 논쟁은 시기적으로 볼 때 각 단체의 이해 관계의 변동과 맞물려 그 양상이 변화하여 왔다. 그러나 논쟁의 초점은 항상 동일하였고 평행선의 간극이 고정 된 채로 계속 연장되고 있는 현상도 동일하였다. 그러나 쟁점의 동일성 유지와는 달리 최근의 택견 형태는 의미 있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경기를 하면 원형이 훼손된다고 주장하던 보유자측에서 96년부터 택견 경기를 개최하고 있고 택견협회가 2000년부터 시행 하고있는 학습 과정에는 비경기적 기술, 즉 일반적으로 말하는 무술적 과정이 채택되어 있다. 이러한 변화는 원형 논쟁에서 파생된 영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기별로 원형 논쟁의 쟁점과 그 양상의 변화 추이를 알아본다.


1. 초기의 신한승의 원형 인식

   신한승의 증언은 1970년 봄에 송덕기를 찾아가 택견을 배웠다고 하였으나 송덕기 증언과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1971년 가을일 것으로 추측된다.


앞에 소개한 녹취록에서 신한승은 1960년대부터 택견을 연구했다고 하였고 송덕기는 자기를 처음 찾아 왔을 때 신한승은 택견을 전혀 몰랐다고 하였다.


   1973년부터 충주에서 택견을 가르치기 시작한 신한승은 과거에 택견을 얼마간 익혔던 김흥식, 이경천 등에게도 도움을 받았다. 신한승은 1977년 4월 YMCA체육관에서 처음으로 택견을 시범하였고 연이어 고려대, 충주 탄금대 등에서 택견을 선보였다. 이러한 활동을 계기로 73년부터 언론에서 관심을 가지고 신한승과 택견에 관한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신문기사에서 택견 원형에 대한 인식을 찾아 볼 수 있다.


「택견의 유일한 기능 보유자인 송덕기(81세)옹을 찾아 서울 인왕산에서 3년을 수련, 정수 29가지, 쌍수 16가지 등 모두 45가지의 기(技)를 완전히 익힌 유일한 전수자라는 것」 (1973. 11. 8 동아일보)
「우리 나라 농촌에서 부락대항으로 경기를 벌여온 고유 전통의 무예이며 오늘 날 태권도의 발상인 택견 보급에 나섰다.」(1973. 11. 9 조선일보)
「택견의 몸놀림은 고구려 고분 벽화와 신라 사천왕상 등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그 연원을 꼭 집어 말할 수은 없지만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스포츠 전통문화다」 (1977. 4. 9 조선일보)
「당초 놀이로 성장한 택견은 우리 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무술이라고 주장, 우리 전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택견원형은 보존되어야 한다」 (1977. 4. 13 충청일보)
「택견은 지난 날 수벽치기와 씨름과 더불이 장안에서 크게 유행했던 무희(武戱)였다. 서울 한복판을 흐르던 청계천가의 깨끗한 모래사장에서 서로가 기법을 겨루기도 하고 또 위대 아래대로 편을 갈라서 우열을 가르기도 했던 것인데 개화기 이후 어느 겨를엔가 흐지부지 자취를 감추었다」 (1977. 4. 12 한국일보)
「활개치기, 맞서받기, 마루치기, 마주걸이 등 25가지의 기본 동작으로 구성된 택견은 넘어지는 것을 승․패의 판단 기준으로 삼아 일격필살은 없지만 어느 무술과 맞서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 (1977. 7. 19 중앙일보)
「택견은 발로 品자를 밟으면서 유연하게 흔들다가 위로 솟으면서 발로 지르기도 하고 팔로 좌우 상하 활개짓을 하기도 해 다른 무술에서 보는 위력보다는 춤을 보는 듯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색이다.」 (1977. 11. 2 동아일보) (1978. 10. 19 조선일보)
「춤추듯 유연한 동작, 발은 品字 스텝, 손으로 활개짓, 넘어뜨리거나 얼굴 차면끝나. 수벽치기, 씨름과 함께 고유의 무술, 기본기 25가지   李朝땐 편싸움 戰法」 (1977. 5. 23 일간스포츠)


   이상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이전의 택견 형태를 표현한 관련 기사 내용이다. 비슷한 시기에 발행 된 각 신문의 기사 내용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신한승의 단독 인터뷰에 의해 작성된 기사로 볼 수 있으며 이에 따라 기사 내용은 곧 신한승의 택견에 대한 당시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뿌리 깊은 나무 1977년 9월호에는 후에 서편제에서 유봉역을 맡아 스타가 된 김명곤의 르뽀기사가 있는데 택견 원형 자료로서는 신빙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우대에서 태껸꾼을 모아 아랫대에 시합을 청하는데 보통으로 시합할 때는 "서기택견"이라 해서 먼저 넘어지는 사람이 지는 것으로 승부를 겨룬다」


「동네 사이에 감정이 나쁠 때에는 "결련태껸"을 하는데 그것은 겨루다가 사람이 죽게 되어도 살인죄로 치지 않는다는 서약아래 한다. 결연태껸 기술은 위험하기 때문에 비법으로 전해졌다」


「김홍식은 신한승에게 지금은 시대가 달라져서 옛날 식으로 가르치면 아무도 배우려 들지 않을 테니 처음에는 기본기를 모아서 가르치고 어려운 기술은 기본기를 익힌 다음에 가르쳐 보라고 권했다.


「현대무술은 옛날무술과 달라서 경기가 되어야 한다. 지붕을 날고 담을 뛰어넘는 오묘한 기술보다는 기본이 되는 기술을 널리 보급해서 청소년들의 심신을 건전하게 기르는 경기의 모양으로 되어져야 한다 (신한승)」


「기본기를 정해 놓은 것도 실상은 마음에 꺼림직 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현대는 경기의 시대이니 택견도 경기를 할 수 있게 가꾸어야 할 것이라고 여러번 주장했다」 이 기사에서 신한승의 지향 의지가 어떠한 것인지 확연히 나타나고 있다.


2. 문화재 지정 당시의 원형 인식

   80년대 들어 택견은 문화재 지정에 훨씬 가까이 다가섰다.


81년 신한승으로부터 자료와 함께 택견 무형문화재 지정 조사 의뢰서 제출을 부탁 받은 한국외국어대 오장환 교수가 작성한 택견 문화재 지정 조사의뢰서9)   에는 원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본인은 이 분야(전통투기)의 전통적 경기놀이도 타 분야 못지 않게 우리의 전통성이 요구되는 시기(86아시안게임․88올림픽을 앞 둔)임으로 조사를 의뢰함」
「이 밖에 김홍식, 이경천 등 택견을 하신 분이 있으며 김홍식의 활개짓, 품밟기 몇 몇 가지의 발질을 보았으나 전모가 확실하지 않고 이경천은 중풍으로 몸이 부자유하여 동작에 접할 기회가 없어 기술 못함」
「우리 나라 민간희(民間戱)대부분이 그러하듯 택견도 형식을 중요시하지 않아 상세하게 체계화되지 않았으나…」

 


9) 오장환(1991) 택견전수교본. 영언문화사

「 주로 발을 많이 씀으로 발로하는 놀이라 해서 우리말 사전에 각희(脚戱)라고 하지 않았나 생각 됨」
「택견은 우리 나라 고유의 기본(곡선의 몸짓)을 지닌 무희임에 틀림없다고 사료됨」
「결연택견의 쌈수가 있었으나 체육적 놀이로 가치가 없는 것 같아 생략 함」


   오장환의 조사의뢰에 의해 1982년 임동권 문화재 위원이 조사에 착수, 그해 7월 문화재 심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문화재 조사 보고서 제146호에 수록 된 내용은 오장환이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는 경기, 놀이, 무희라는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있는 무술의 하나이며, 무용적, 음악적 이어서 리듬을 지니고 있어 예술성을 지닌 유희(遊戱)일 수도 있고, 힘 안들이고 승부를 내는데 공격보다 수비를 위주로 한 호신술이다. 민족 전래의 무예로 육성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 됨」


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임동권의 무예에 대한 개념 인식은 이 보고서에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더구나 택견을 유희, 호신술 일 수 있다고 하면서 민족 전래의 무예로 육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방향을 설정한 것은 그 의도가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다. 다음과 같은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그가 왜 민속 경기 놀이로 육성 할 수 있는 택견의 여러 가지 요소와 정황들을 외면하였는지 궁금하다.


「호신술, 공격을 위해서 택견과 같은 무술이요, 무예요, 놀이가 발생하고 전승되었을 것」
「송덕기는 20세때 마을 택견꾼과 함께 경기에 참가한 바 있다」
「택견을 각희, 각술 이라 부르는 것은 택견이 다리를 위주로 하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그술(術)이 다양해서 무술의 일종 (一種)으로 여기기도 했고 명절에 택견을 하고 즐겨 놀았다고 하니 이렇게 되면 술(術)이 아니라 놀이가 되어 「각희(脚戱)」란 말도 쓰게 되었을 것이다」
「택견을 놀이로 경기해서 즐기면 유희가 되고, 호신하고 공격을 하게 되면 무술이 되었을 것이다」


   임동권이 권위 있는 민속학자이지만 무술에 대해서는 조예가 없는 분이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택견을 무술쪽으로 분류하면서 정작 다음의 싸움수는 보고서 맨 끄트머리에 아무설명 없이 단 두 줄로 기록해 놓은 것도 이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낙함, 턱빼기, 면치기(오광잽이), 멱치기, 항정치기, 손따귀, 주먹질, 휘뚜루치기(마구치기)등 결연택견의 쌈수가 있음」


   임동권의 조사 보고서에 의해 1983. 6. 1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된 택견은 우리 나라 무형문화재 분류 항목에 무예라는 분야를 추가하면서 국가 및 지방 무형문화재를 통털어 지금까지 유일한 무예종목 무형문화재로 남아 있다.10)


   오장환이 문화재 관리국에 제출한 조사의뢰서에는 단 한 곳도 택견을 무예로 지칭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태권도나 중국권법과는 달리 발로하는 놀이라 해서 오래된 우리말 사전에 각희 라고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하고 무희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하였다.


1973년 문화재 위원 예용해가 작성한 「택견 무형문화재 조사 보고서(제102호)」에는 송덕기 조사 자료가 있는데 여기서도 택견을 무술로 표현하지 않고 있다.   



10) 현대까지 국각가 지정한 중요무형문화재는 음악분야 22종목, 무용분야 7종목, 연극 14개 종목, 놀이와 의식 26개 종목. 공예기술 39개종목, 무예 1개종목, 음식 2개 종목 등 모두 111개 종목이 있다.


예용해는 택견이 「세시기」나 문집에도 없고 「무예총보」에도 찾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송덕기의 구술에 의한 단오 민속 경기의 모습을 세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임동권의 조사 보고서에는 '전래의 민족무예가 인멸 직전에 있다'고 하여 택견을 민속경기가 아닌 전통무예로 규정하고 있다. 택견 원형에 대한 개념적 해석이   다르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여기서부터이다. 그러나 조사보고서를 살펴보면 임동권의 택견은 무예라는 인식을 뒷받침 해주는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임동권의 조사 보고서에는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맹수와 싸워야 했고, 때로는 인간끼리 싸움도 있었으므로 몸을 단련해서 내 몸을 보존해야 했고, 더 적극적으로는 상대를 공격해야만 했으니 신체를 단련하고 힘으로 몸을 보호하는 무술(武術)이 필요했을 것이다. 일차적으로 호신술이지만 위급할 때에는 공격하는 방법을 알고 그러한 능력이 있어야 했다. 여기서 호신술, 공격을 위해서 택견과 같은 무술이요, 武藝요, 놀이가 발생하고 전승되었을 것으로 안다고 자기 생각을 밝히고 있지만 역시 택견을 무예라고 단정 할 수 있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서 혹시 임동권이 무예를 경기나 놀이 보다 상위개념, 또는 고급 문화로 인식하지 않았을까. 또는 택견이 일본, 중국의 전통무술이나 시중에 성행하는 수 많은 종류의 자칭 전통무술에 비하여 보다 고상한 가치를 지닌 전통문화재로 보존, 전승되기를 바라는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민속경기로 분류해도 될 것을 굳이 무술로 분류한 것이나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만약 이 추측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 오늘날 택견이 원형논란에 빠져있는 것은 임동권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권위 있는 민속학자로서의 양심으로 결자해지 차원에서 원형논의에 개입한다면 소모적 논쟁을 종결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해동죽지의 탁견희(托肩戱)의 주석을 인용하여 탁견은 무술로서 평가되었거니와 남에게 보복하거나 남의 애희(愛姬)를 빼앗는 수단으로 쓰는 일이 있어 법으로 관에서 금하였기 때문에 탁견이 부진하게 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무술은 선하게 활용하면 활인이 되지만 악하게 되면 폭력이 되기 때문에 그 폐도 있었던 것이다고 하였으나 이 역시 최근에 나온 해석과 차이가 있다.11) 또한 해동죽지의 기록만으로 고려사, 왕조실록의 수박(手搏)과는 택견이 다른 것이라고 평가 한 것도 마찬가지이다.12) 그러한 한편으로 유일한 기능 보유자인 송덕기에 대한 조사 자료에는 경기, 각희 등으로 표현한 오장환의 의뢰서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1925년에 출판된 해동죽지의 기록을 인용하여 택견을 무술이라고한 임동권의 해석은 1912년까지 택견경기에 선수로 활동하였던 생존 택견보유자가 경기를 하였다는 증언과 서로 엇갈리고 있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1) 남에게 보복하거나 애희를 빼앗는 수단이 곧 무술 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ꡐ탁견희ꡑ라는 명사로 보아 해동죽지 저자도 택견을 놀이로 인정하고 있다.해동죽지의 주석은 원래의   놀이기능을 간혹 보복을 할 때 사용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좀더 정확한 해석 일 것이다. 또한 애희를 빼앗는 풍속은 택견하는 한량들이 기생집에서 벌이는 기방 풍류의 하나이다. 이것은 남의 부인이나 딸을 빼앗는 부도덕한 악습이 아니며 기생을 사이에 두고 힘과 재주를 겨루어 기방의 좌장을 뽑는 활달한 남성들의 놀이요, 경기이다.

12) 수박(手搏)이 변(卞)이요, 각력(角力)은 무(武)이며 이를 탁견이라 한다는 정조시대에 간행된 재물보의 기록이 있다.




3. 문화재 지정 후의 원형인식

   택견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부터 70년대 후반 이후 잠잠했던 언론매체에서 또 다시 택견 기사가 실리기 시작하였다.


그중에서 이보형(李輔亨)문화재 전문위원의 「무형문화재 전수 실태 조사 4)」13) 기사는 택견원형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 조사기록에는 택견을 전통체기(傳統體技)라고 포괄적 분류를 하면서 송덕기, 신한승의 증언을 토대로 마을 대항 택견 경기를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택견은 씨름의 경우과 같이 경기 놀이로 생겨 발전한 것이지만 그 기예는 곧 무술로 응용할 수 있어서 한량, 별기검, 도순검과 같은 무변(武弁)들이 권법과 함께 익혀 호신술로 쓰기도 했다 한다. 택견 보유자들은 무술로 응용하는 택견은 결연택견이라 하여 일반 택견과 구별하고 있고 또 신한승씨는 결연택견과 구별하여 일반 택견을 <서기택견>이라 이르고 있다. 신한승씨는 마을끼리 솜씨를 겨루는 택견을 벌일 때 공격하는 편 택견꾼이 먼저 서거라하고 외면 방어하는 편 택견꾼이 섰다하고 외고 나서 겨루기 때문에 <서기택견>이라 이른다고 말한다. 국어사전에는 결연택견을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 승부를 결한 택견이라고 하여 약간 뜻이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일제때는 일인들이 택견하는 것을 금지하여 택견판도 몰래 벌이었고 또 마을 어린이들이 택견을 익히다가 일본 순사가 나타나면 우루루 피했다가 다시 모여 하는 통에 전승이 제대로 되지 못하였고 지금은 서울에서 마을끼리 택견을 겨루는 놀이도 끊어진지 오래여서 택견이 무엇인지 아는 이조차 드물게 되었다」

13) 문예진흥 제11권 1호. 1984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이보형의 이 기록은 임동권의 조사 기록에 비해 보다 정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통체기라는 용어는 택견이 경기이지만 무술로 응용할 수 있어 호신술로 쓰기 때문에 이 세가지 개념을 포괄하기 위해 선택 된 표현으로 보인다. 임동권이 택견을 무술이라고 하면서도 소홀하게 취급했던 결연택견(쌈수)을 무술로 응용하는 기술이라고 정리하였다. 그런데 국어사전의 결련택견과 조사보고서와 보유자의 증언인 결연택견의 의미가 상반되는 것을 발견하였으면서도 임동권의 보고서와 신한승의 구술대로 결연택견을 글자만 結連으로 바꾼채 수정없이 수용하고 있는 것은 이보형 역시 무예를 모르는 민속학자로서 이에 대한 큰 문제의식이 없었던 탓으로 보인다.


「경기로 벌이는 서기택견 즉 일반택견과 투기나 무술로 벌이는 結連택견은 엄격한 구분은 없으나 저편의 급소를 치는 기예, 상해를 주는 기예, 택견의 일반적인 기예에서 동떨어진 특징을 갖는 기예는 서기택견에서 제외하고 있다」
「오늘 날에는 택견이 경기 민속놀이로 벌이기 때문에 結連택견은 삼가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 기록은 현재 보유자가 하고 있는 택견형식이 <서기택견>, 즉 <경기로 벌이는 택견>이라는 것을 증언한다. 택견은 무술이므로 택견경기화가 원형을 훼손한다는 주장의 전도된 논리를 간단히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다음 내용은 앞서 소개한 신한승의 육성증언과 일치하고 있다.


「그(신한승)는 레슬링, 유도 등 현대체기를 익혔기 때문에 그 안목으로 택견 수련과정을 체계화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1983년에 문예진흥원에서 실시한 택견 VTR화면에서도 주로 그의 학습체계를 응용하였다」


   이보형은 이 조사보고서의 결론에서 임동권이 무술로 육성해야 한다는 입장과는 다르게 택견을 씨름과 같이 민속놀이로 되살리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택견이 투기로 기울면 태권도나 가라데와 같이 될 것이지만 경기 쪽으로 기울면 씨름과 같이 민속놀이 쪽으로 기울 것이다. 씨름과 같이 민속놀이로 되살리려면 국민들의 택견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야 할 것이다」


   이보형의 조사보고서는 택견을 민속 경기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한승이 정리한 문화재 택견이 경기택견, 즉 「서기택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기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보유자가 무술택견이라고 한 결연택견을 국어사전에서는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 승부를 결하는 택견이라고 다르게 해석한다고 지적한 점이다.


   이보형의 이 조사기록을 읽기 전에 필자는 국어사전에서는 결련(結連-결연이 아님)의 의미가 신한승선생이결연(決然)택견은 싸움할 때 응용하는 택견이라고 한 것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신한승선생께 직접 말씀 드렸다. 당시 신한승은 매우 난감해 하면서도 오류를 인정하고 차후 기회를 봐서 수정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14)


이 시기에는 택견이 민속경기라는 점에 대하여 택견 관련자들 간에는 이견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그러나 외부에서는 택견을 신비한 기술을 가진 우리 고유 무술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특히 유도에 이어 태권도가 경기화 되면서 무도(武道)적 특징을 상실해 가는데 대한 반작용 의식이 택견이 고색창연한 신비 무술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경향을 조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택견에 대한 이러한 기대는 택견이 심오하고, 기이하며, 탁절(卓絶)한 기예(技藝)라는 개념을 형성하였고 택견을 무술로 육성하자는 견해가 힘을 얻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은 당시 이런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신문, 잡지의 기사이다.


「택견이 맨손무술의 한 종목이었다가 경기 위주의 스포츠로 바뀌면서 술기도 살수(공격수)위주에서 활수(방어수)위주로 크게 변화했다」
「그렇다면 전통무술의 한 종목인 택견의 보존과 육성을 통해 굽힘 없었던 옛 정신을 되살려야 할 것이고 실전 된 것처럼 보이는 과거의 옛 무예를 다시 복원하여 우리의 상무 정신과 대륙을 호령하던 옛 고구려인의 호연지기도 되살려야 할 것이다」15)
「송옹은 3년 전부터 같은 동네의 이준서씨를 전수제자로 지목 비술(秘術)을 가르쳐 오고 있다」
「60대가 넘어서도 깡패 10여명 정도 가볍게 해치웠다는 송옹…」
「택견은 무려 1천 여 가지의 수로 구성되어 있다. 그 하나 하나의 수가 스포츠화 된 태권도와는 달리 섬뜩할 정도로 치명적인 타법(打法)이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죽느냐 사느냐는 생존의 기로에서 일결필살 (一擊必殺)의 자세에서 연구해 온 것이기에 매서울 수밖에 없다」16)
「치명적인 살상의 무예가 외형상 그 모습을 감춘 대신 놀이화 된 부분, 즉 씨름의 형태로 순화된 무예의 형식만이 민속놀이로 일반에 폭넓게 보편화되어 ―」
「그러나 무예의 비술이 그 모습을 감추었을망정 그 맥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14) 신한승이 소장하고 있던 국어사전은 수록 단어가 많지 않은 초등학생용이었는데 이 사전에는 결련, 또는 결련택견 이라는 낱말이 수록되어 있지 않았고 다만 결연(決然)만 있었다. 전적으로 이 사전을 이용한 신한승은 결연은 태도가 굳세고 결정적이다(결연한 태도로 벌떡 일어섰다)라는 의미이므로 구전되던 결련택견을 발음이 비슷한 결연으로 이해하고 싸움택견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주류인 경기택견에 「서기택견」이라는 이름을 지어 붙여 구분한 것이다.
15) 마당 84년 7월호 1984
16) 조선일보 1985. 8. 6 「千의 秘術 택견 "마지막 脈 잇기"」


「오늘날 태권은 현대사회에 알맞게 변모되어 왔으며 수련과정 역시 점차 과학적으로 세련되고 정리되어 세계적 스포츠로서의 자리를 굳혀가고 있는게 사실이며 고대 택견과의 의미 관련도 상당부분이 변모되어 있는게 또한 사실이다. 다행히 아직 비전의 정통 택견 기능 보유자가 살아있고- 앞으로도 태권은 그 원형엑기스와 같은 우리 무예의 원류에서 계속 자양분을 섭취해서 ― 」17)


   택견에 대한 기대 가치는 무협 소설이나 홍콩의 무술 영화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런데 이러한 황당한 무술인식은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고 특히 지적수준이 높은 사람, 무술에 조예가 있거나 관심이 많은 계층에서 오히려 더 그쪽으로 기대치가 높아 보인다. 94년에는 송덕기-신한승으로 이어지는 택견이 아닌 산속에서 비전된, 또 다른 택견계보라고 주장하며   초인간적, 초자연적 신비 기예를 내세우는 택견도 나타났다. 바위를 발로 밟아 움푹하게 발자국을 찍는가 하면 대나무를 발로 차서 싹뚝 잘라 버리는 초능력적인 전통무예라고 한다. 이 사이비 택견은 기득권을 가진 송덕기 계보 택견인들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가치 있는 우리 고유의 전통무예 택견의 한 계보를 말살시키려 한다고 호소하고, 이런 허튼 소리를 믿고 이 택견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일류대학 택견동아리의 비장한 목소리도 있다. 최근에는 고수를 찾아서라는 SBS TV 프로그램에서 택견을 마치 무협지 속의 무술처럼 소개하여 시청률을 높이는 재미를 본 사례도 있었다. 이런 현상들은 택견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여 일시적으로 전수회원 확장에는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택견의 가치를 왜곡하거나 사장시킬 수 있는 폐단이 있는 것이다.

17) 전통문화 1985. 9월호 「종합무예에서 파생된 씨름․택견」








지금까지 살펴 본 대로 택견 원형 논쟁의 쟁점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택견은 경기(무희, 놀이)이며 맨몸 무술도 경기개념에 포함된다.
― 대한택견협회
○택견은 무술이며 경기화는 원형을 훼손하는 것이다.
― 보유자

   그리고 결련택견에 대하여 택견협회에서는 우대, 아래대가 편을 갈라 하는 민속 경기 놀이로 하는 택견으로 인식하고 있고 문화재위원회에서도 뒤늦게 이를 인정하였으나 보유자는 결련(혹은 결연)택견을 쌈수, 싸움택견 이라는 당초의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 논쟁의 가운데서 문화재당국은 82년 보고서에 결연택견을 쌈수라고 인정하였던 것을 95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에서는 견련택견은 마을끼리 시합하는 경기택견이라고 번복하였다. 그렇지만 보유자가 여전히 결련택견을 싸움 택견이라고 하고 있는데18) 대해서는 방관하고 있다. 심지어 문화재청은 2003. 3. 8자 공문서에서 ꡐ민속경기로 변행된 택견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잠시동안 잠복해 있던 원형논쟁을 재연시키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원형논쟁의 쟁점인 무술이냐, 경기냐의 여러 기록과 증언은 초기에는 경기라는 점에 일치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문화재 지정이후부터 무술이기도 하고 경기이기도 하다고 하였고, 90년대에 들어서부터 문화재청과 보유자측에서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택견을 무술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시기별로 원형에 대한 개념이 변해 왔고 그것이 보유자가 하고 있는 택견형태와도 괴리가 있다는 점이다.



18)정경화 2002. 택견원론. 보경문화사




Ⅳ. 무술과 경기의 개념

1. 용어사용의 전제

   택견원형논쟁이 무술과 경기라는 관점의 대립이라고 정리되었으므로 무술과 경기의 개념을 자세하게 검토하고 두 개념의 차이를 살펴봐야 한다. 먼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무예, 무도의 용어사용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무술(武術)이라는 용어는 5~6세기 남북조시대에 간행된 문선(文選)에서 처음 발견되고 무예(武藝)는 호한대(漢代,BC202~AD220)의 「삼국지」에 나오는 말이다. 무도(武道)는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   초기부터 사용되던 용어로 보인다. 무술과 무예는 한문의 의미가 동일하고 현재에도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무도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보다 강조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무술, 무예와 동일한 개념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인용하는 글에서 세 가지 용어가 경우에 따라 특히 의미를 달리 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느 것이나 모두 동일한 개념으로 본다.


   한편 무술의 본래 의미이던 병장기를 사용하여 싸우는 기술이 가장 발달한 형태가 현대 군사과학기술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이를 일반적으로 무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또한 상고 인류의 주류 무술이었던 사냥 기술 역시 총포를 사용하는 레저스포츠로 분류되고 있어서 근대에 와서부터 무술과 별개로 취급되는 것도 의미 심장한 점이 있는 것이다.






2. 무술의 개념

   무술은 대개 무기를 가지고 사람끼리 싸우는 기술, 먹이로서 동물을 사냥하는 기술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무기가 사람의 근력에 의거하는 비중이 높았던 과거에는 맨손으로 싸우는 기술도 무술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은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임진왜란 직후인 1598년 간행된 무예제보(武藝諸譜)에는 맨손무술은 제외된 무예 6기가 실려 있다. 그러나 200여 년이 지난 영조 때 사도세자가 만든 무예신보의 18반 무예와 1790년에 간행된 무예도보통지의 24반 무예 중에는 권법이 하나 끼여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전투는 단병접전(短兵接戰)형태보다는 활과 총포를 이용한 진법(陳法)의존 형태였다. 왜군이 개인 무술 능력 면에서 조선군이나 명군보다 월등한 점이 있었지만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그런데 무기와 전투술이 임진왜란때보다 훨씬 발전한 시대에 단병무술, 그것도 맨손무술이 군사교재 과목에 포함된 것은 그 무술이 직접적으로 전력증강에 목적을 두었다고 보기 어렵다. 과학병기가 고도로 발달된 현대 군대에서도 도수무술이 군대훈련 과목이 된 것처럼 개인체력과 정신력 강화 등의 훈련 효과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맨손으로 싸우는 기술을 자연스레 무술(武藝)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무예도보통지의 스물 네 가지 무술 종목 중에 권법이 포함되어 있는 이유와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무예 24반의 일기(一技)로 맨몸 무예(武藝)가 포함된   점이 맨몸 기예를 무예로 취급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중국무술에서도 개별적으로 맨손 무술 종목을 지칭 할 때는 태극권, 소림권, 당랑권… 따위로 부르고 병기술 역시 삼재검, 풍파곤 육합창, 태사수마편… 따위로 부르지만 이들을 모두 무술이라고 통칭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도 맨손무술이나 무기술 모두 무도(武道)로 부르고 있다. 근대에는 태권도, 유도 같은 맨손무술 종목의 관점에서 보면 무술이라고 하면 으례 맨손으로 하는 것으로 이해 해버리는 경향도 있다.


   필자 역시 맨손무술의 시각으로 무술을 이해하고 있던 터여서 무의식중에 수박(手搏)을 무술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책에 기록했다. 제대로 말한다면 수박은 맨손무술을 일컫는 일반 명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택견의 원형이 경기라고 강변하는 협회에서도 처음부터 택견에 민족무예라는 수식어를 사용해 왔던 것도 그렇고 문화재지정 이전에 택견에 대한   신문보도 기사의 대부분이 택견을 무술로 표기하는 제목을 달았던 것도 용어 사용의 특정한 습관 때문이다. 김용옥은 이러한 현상을 격의(格義)라고 하였다. 그런데 말이란 사회의 언어 관습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맨손무술은 그것을 하는 사람의 인식으로 그냥 무술이라고 부르고 그 의미의 통용이 이미 보편화되어 있다면 무술의 용어 개념도 그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현대적 무술의 개념

   「우리 나라 전래 무예를 병장무술(兵仗武術)과 도가무술(道家武術)로 나눌 수가 있다 한다. 병장무술이 실제 전쟁에 활용된 것이라면 도가무술은 심법(心法)에 의한 권장술(拳掌術)을 위주로 하며 심신의 수련에 그 주안점을 두었다」 (김광석 1987. 한국무예 바탕골 소극장 팜플렛)


「전통무예는 지역적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삼아 공방의 의미를 포함한 기격 동작을 주요 단련 내용으로 공법(功法), 투로(套路), 격투의 수련 형식을 갖추어 내외를 함께 단련하는 것」 (최복규 1995. 석사학위논문 서울대) 무술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대체로 무기술과 도수무술이 혼재되어 있는 중국 무술류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 공법, 투로 등의 용어 역시 중국무술에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견해는 다분히 일본 무술의 시각이다.
「사람들이 무예 수련을 하는 목적은 건강, 호신술, 수양, 전통계승의 네 가지로 요약 할 수 있을 것이다」 (위 최복규 석사 논문)


   김용옥은 태권도의 구성원리에서 ꡐ무술은 개인과 개인의 몸을 전제로 한 것이다. 무술은 인격의 원리(Principle of personality)에 의하여 지배된다ꡑ고 말하고 술(術)에서 도(道)로의 전환은 곧 무술이 근대성을 획득하는 과정과 일치하는 것인데, 그 근대성의 원리는 평화의 원리와 건강의 원리이다」라고 하였다. 대단히 수사적이고 철학적 문장이지만 사고의 근저에는 일본무도의 인식이 짙게 깔려 있다.


평화의 원리는 무술의 폭력성을 역용(逆用)하여 폭력을 부정하는 순수한 방어의 논리와 자신이 가진 힘(폭력)의 행사를 절제하는 논리인 수신(修身)의 유형이라고 해석하였다. 또 건강의 원리는 무술이 개개인의 몸과 몸의 집합인 인간 사회의 건강을 실현해야 하고 무술 학습이 몸의 불 건강을 초래한다면 무술의 가치가 상실된다고 하였다. 또 이 건강원리는 심미적 원리와 직결된다고도 하였다. 이것은 아이키도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무술사상을 연상케 한다.


오랫동안 검도를 찬하여 왔으므로 일본 무도에 정통한   김재일은 일본인들에 의한 무도, 무술이 오늘날 한국의 무계(武界)를 형성 해왔다고 하고 신체 단련과 정신수양을 다루는 무계에 있어서 더욱 일본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단언하였다. 아마 실제 무술을 많은 시간에 걸쳐 체득한 사람이라면 이 주장을 수긍하는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실제 하는 우리 나라 무술의 현상을 사실대로 직시하여 고대와 현대의 무(武)의 의미를 비교하여 원래 무기술이 원조였던 무가 현대에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개념이 변화하였고 전쟁과 투쟁의 방법이던 것이 건강과 스포츠로 변하여 생사를 초월하던 절대적 의식이 스포츠 형식의 승패 의식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하였다.19)

19) 김재일(2002) ꡐ무에 대한 담론ꡑ국무논총 배달국무연구원


허건식은 일본의 경우는 선(禪)의 영향을 통해 예도(藝道)형태의 무도로 발전하였으며, 권투, 펜싱과 같은 서양 무술과 근본적으로 다른 매우 정제된 교육전통과 철학을 가지고 있는 점이다. 중국무술의 경우 오랜 실천생활을 통해 발전해 온 중국의 문화유산으로 중국철학, 미학, 예술학, 문화의 정신이 응집되어 있다. 무술은 보건성, 격투성, 예술성을 핵심으로 하는 종합적 문화실체로써 스포츠로 변화하고 있다. 현대 무도는 동양사상에 있어서 신체 수련의 의미로 도(道)의 개념에 철학을 둔 문화로 본다. 이것은 무술이 깊은 내층의식에 대한 규범의 현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무술의 개념을 정리하였다. 20)


   양진방은 사람들이 무술에 접근하는 동기와 추구하는 가치를 유형별로 구분하였다.
   ① 호신술 수련 (실용적)         ② 스포츠의 일종 (기호적)
   ③ 정신적 가치 (철학적)         ④ 고수준의 기술추구


이에 대하여 나영일은 이론적 필요성에 의한 구분일 뿐 오히려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하였다. 21)


   김대식과 Allan Back은 그들의 공저인 무도론에서 무도의 다양한 활동목적을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요약하면 기술의 전문성, 격투능력, 스포츠의 숙련도, 형의 숙련도 등을 거론하고 특히 정신적 혹은 종교적 예의, 의식이행을 중심과제라고 하였다. 그들은 무도는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에 스포츠의 숙련을 제외하고 무도는 형, 대련, 정신수련의 세 가지를 목적으로 해야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현대무술의 개념이 스포츠와 접근하거나 혼합적 개념으로 변모하고 있는데 대한 강한 저항감이 느껴진다.



20) 허건식(2002) ꡐ현대 동양무술의 문화적 이해ꡑ.국무논총 배달국무연구원
21) 나영일(1982) ꡐ조선조의 무사체육에 관한 연구ꡑ서울대 발사논문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현대 무술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대체로 개인의 심신 수행과 이를 통한 사회적 덕성 함양으로 집약할 수 있다. 유도, 태권도, 우슈, 가라데 등이 경쟁적으로 국제스포츠로 변모함에 따라 최근에 새로이무도스포츠 무술 경기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이에 대해서는 인간의 생명을 직접적 대상(對象)으로 하는 무술의 엄격함을 내세워 개념을 분리해야 한다는 견해와 스포츠화를 발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이유로 무술과 동일한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회자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무술의 스포츠화가 해당종목의 발생지인 동양에서, 그리고 대중적 지지를 많이 얻고 있는 주류종목에 의해 선도되고 있고 반면에 무술에 대한 과거의 개념을 고수하려는 쪽은 소수파 종목이거나 서구 사람들이라는 특징이다.





4. 맨몸 무술의 개념

1) 용어의 정의


   용어 사용을 보다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으므로 도수(徒手)무술, 맨손무예 등의 용어를 택견에서는 맨몸무술(또는 무예, 무도)로 부르기로 한다.


   맨손과 맨몸은 무기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보호구를 착용하는 경우에는 맨 손 일수는 있어도 맨 몸이라 할 수는 없다. 보호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장비와 상대방을 보호하기 위한 장비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태권도의 호구(護具)와 가라데의 방구(防具)따위이고 후자는 권투 글러브 따위이다. 물론 손에 장갑을 낀 것을 맨손이라고 하는 점은 언어상의 모순이 있지만 공격의 효용성을 저하시킨다는 의미에서 맨손의 범주에 넣어도 무방하다는 판단이다. 이런 보호장비가 없는 그야 말로 맨몸의 무예는 유도, 레슬링, 씨름, 등과 같은 유술(柔術)종목이다.


   택견은 태권도, 가라데와 외형상으로 유사하여 격술(擊術)로 분류할 수 있으나 맨몸으로 하고 승부방법이 타격을 엄격하게 금하는 상태에서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유술로 분류되는 것이 타당성이 더 있다.

2) 맨몸무술의 의의


   인류가 두 발로 곧추서서 걷게 된 주원인은 장기간에 걸쳐 앞다리로 도구를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 가설을 토대로 인류의 무술 기원을 생각해 본다면 최초의 무술 형태는 돌맹이나 나뭇가지 같은 구하기 쉬운 자연상태의 물건을 사용하여 싸우거나 동물 먹이를 잡는 형태였을 것이다.


   인류의 진화 과정을 차례로 나열한 가상 그림에는 최초의 사람   과(科)로 분류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손에 뾰족한 자연석이 단단히 들려 있다. 사람은 다른 맹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인 신체적 조건을 보강하기 위해 다른 물체를 이용하였고 매우 오랫동안 이런 활동에 적응하면서 두 발로 걷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류로 분류되는 시기에는 꽤 발달한 무기사용방법을 터득하고 숙달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냥이나 맹수와의 경합, 다른 종족과의 서식역을 두고 싸울 때는 맨몸으로 싸우는 것은 애써 피하고 사용하기 좋은 도구를 고르고 또 이를 더 잘 사용하는 신체기능을 발달시켜 나갔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은 무술의 향상에 따라 더욱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류는 차츰 집단을 이루며 살게 되었고 이때 사냥이나 전투에서 효과적인 협동 작업을 하기 위해서 지휘계통이 필요해졌다. 또 협동으로 한 사냥과 전투에서의 수확물에 대한 분배의 질서를 위해서 반드시 서열을 정해야할 필요도 있었다. 초기 인류 사회에서 공동체의 구성원끼리 하는 경쟁방식으로 직접적인 대결이 선호되었을 것이고 이때 도구를 사용한 싸움에서 죽거나 심한 부상으로 잡단의 전투력과 노동력의 손실 등과 같은 시행 착오를 겪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상호간의 안전을 고려하여 무기 사용을 제한하고 맨몸으로 싸우는 방법을 개발하였을 것이다. 한자(漢子)로 맨몸 격투를 각력(角力)이라 하는데 이것은 숫컷 초식동물끼리 뿔로 들이받는 싸움을 의미하는 말이다. 경쟁에서 승리한 숫컷은 암컷과 교미 할 수 있는 특권과 가장 좋은 서식지를 차지한다. 그렇게 해야 강한 숫컷의 유전인자를 이어받은 튼튼한 새끼가 태어   날 것이고 또 암컷들과 새끼들이 보다 나은 환경과 조건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은 교미기에 맞춰 정기적으로 이행되므로 기회는 항상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주어진다. 따라서 승자나 패자 모두 다음 대결에 대비하여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 열심히 하게 된다. 이런 동류간의 경쟁에서는 상대방을 죽이거나 큰 상해를 주지 않는 룰이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 동물들의 이런 모든 행동은 종을 번성시키고자 하는 본능에서 나온다.


무기의 효용성을 터득하고 있는 초기 인류들이 맨몸으로 싸우는 격투를 개발한 것도 집단을 이루고 사는 동물들의 생태와 동일한 유형으로 이해 될 수 있다. 인류가 맨몸으로 싸우는 행위는 무기를 버린다는 행위 자체가 제한성과 규칙성을 뜻하며 하나의 격식(格式)이 되는 것이다. 이런 논점에서 본다면 맨몸 무술은 원초적으로 규칙을 지키며 싸우는 경쟁 기술, 즉 경기(競技)가 본질인 것이다. 이런 논리를 이해한다면 동양의 무술이 현대스포츠로 변모하면서 생긴 이데올로기의 공백 상태를 메우는 모티브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3)현대 맨몸 무술의 허구성


   앞에서 지적한 바 있듯이 택견에서 신비한 무술의 가치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동양의 무술이 고도의 훈련을 통하여 인체의 기능을 얼마든지 확대, 확장, 보강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중국무협지에서 보이는 축지법, 경신술, 장풍, 격파력, 발경, 천리안, 염력, 공간이동, 유체이탈… 등의 이른바 초능력을 훈련만 하면 누구나 소유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사람으로 하여금 무한한 잠재능력을 인식시켜 자신감과 용기를 주고 개체 생명의 위대함을 깨닫게 하는 긍정적 기능도 있다. 그러나 동양에서 이런 자기 내부지향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지구의 반대편 사람들은 도구를 활용하는 방법을 더욱 발전시켜 인간의 능력을 확대, 보강하는 과학무기 개발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는 동양의 문명이 과학병기를 앞세운 서양 세력에 굴복한 근대 세계사가 말해준다. 동양문명은 신체의 열세를 도구 사용으로 보강 하므로서 생존경쟁에서 승리하여 진화 해 온 조상들의 행적을 잠시 일탈 한데 대한 혹독한 댓가를 치룬 것인지도 모른다.


세계 문명의 중심지라고 자부하던 중국의 청대말에 일어났던 의화단(義和團)사건은 동양 무술의 허구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에 걸쳐 청에 대한 반란을 주도했던 비밀결사 대도회(大刀會)를 계승한 의화단은 백련교 계통의 의화권(義和拳)을 수련하는 무술 단체였다. 그들은 의화권이 총알을 피할 수 있고 총알이 뚫을 수 없는 몸을 가질 수 있는 비법이라고 선전하였다. 당시 청의 지배자였던 서태후와 조정 고관들도 이런 황당한 주장에 기대를 걸고 정치적으로 이들을 이용하려 했다. 의화단은 구경화기를 앞세운 일본,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4개국의 연합군대에 의해 1900년에 패망하고 마는데 중국의 전통무술로 무장한 의화단 수십만 명이 신식무기를 가진 불과 2100명의 외국군대에게 궤멸 당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은 의화단이 과학병기로 무장한 서구열강의 군대에 맞서 전통 무술로 장열하게 저항했다는 사실에만 촛점을 맞추고 신비한 동양무술의 처절한 패배는 애써 외면해 버린다.


   1930년대에 일본에 보급되기 시작한 가라데는 맨손으로 일본 본토 군대의 철갑무장병에 대항한 오끼나와 데가 원류라고 밝혔다. 당시 전쟁 분위기였던 일본에서 맨손으로 총칼을 이길 수 있다는 가라데의 선전이 효과가 컷음은 물론이다.


우리 나라 역시 구전 민담이나 이야기책에는 사명대사, 홍길동, 전우치 같은 신출귀몰하는 무술 고수들의 이야기가 많고 의병과 독립군이 맨손으로 일본군과 싸운 설화도 더러 있다. 특히 해방이후, 일본 무술을 한국화 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객관적 증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 모순투성이인 ꡐ산속으로 피신한 전통무술 고수들이 항일수단으로 사용했던 무술ꡑ이라는 과장 선전이 여과 없이 전통무술 개념으로 정착되어 갔다. 일본 가라데의 경우를 그대로 답습했다고 보여지는 맨손무술의 허구적인 개념이 오늘날 택견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현실로 되어 있다.


오카나와에는 실제로 오끼나와데가 존재하였다. 하지만 오끼나와가 1609년 사쯔마 한에 의해 정복되어 금무정책(禁武政策)이 실시되었을 때 무기를 빼앗긴 오끼나와 인들이 국권회복을 위한 지하운동을 할 때는 맨손무술이 아니라 농기구와 생활용구를 무기화 하여 사용하는 형태의 무술을 개발하였다. 맨손보다는 간단한 도구를 이용하는 것이 전투력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을 오끼나와 사람들이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필자가 2002년 가을에 오끼나와데를 조사하기 위해 현지를 방문하였을 때 오끼나와 사나이의 조국에 대한 열정으로 총칼에 적수공권으로 맞섰다는 그 자랑스러운 무술은 그 형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다만 생활용구를 이용한 무기술만 남아 있었다. 애초에 오끼나와데 나 가라데의 연원이 조작되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의 의병이나 독립군도 맨손 무술로 일본군대를 쳐서 일본군을 수 없이 살상하고 산속에 숨어서 신비한 무술을 연마하였으며 이런 고수들에게 비밀 전수 받아 하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전통무술이 더러 있다. 그러나 우리의 독립군이나 의병들이 총을 든 일본군에게 그렇게 무지스럽게 맨몸으로 대항하지는 않았던 것이 자명하다. 간혹 김구의 치하포 사건이나 신돌석의 의병 활동 기록에서 보이는 맨손으로 적과 싸웠던 사례가 없지 않았으나 그것은 상황적으로 부득이하게 그렇게 하게 된 것이지 맨손이 도구 사용보다 효과적이어서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런데 우리사회 현상은 이런 터무니없는 무술들의 주장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거나 혹세무민의 책임을 묻기는커녕 그것을 욕구정화 차원에서 너그러이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사이비 무술의 끊질긴 생명력은 미숙한 인간심리의 틈새에서 종양처럼 유지   되고 있는 것이다.


5. 경기의 개념

1) 무술과 경기의 목적


   여기서 경기란 곧 운동 경기(athletic sports)를 말하며 운동경기는 스포츠와 동일한 의미로 이해된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마추어 스포츠를 관장하는 기구를 대한체육회라 하고sport for all을 생활체육이라 하고 있다. 이렇게 sports를 체육(體育)으로 번역하여 사용되기도 하므로 일단 운동경기와 스포츠, 체육은 동일한 의미를 가진 용어로 본다. 경기는 스포츠의 어원인 기분전환, 장난, 위로, 유희의 의미로 해석 될 수 있으며 Gillet는 스포츠의 구성요소를 유희, 투쟁, 신체 활동의 격렬성으로 보고 특정한 형태의 게임으로 파악하였다. 무술과 경기를 별개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포츠의 유희성이 무술의 엄격함과 진지성에 배치된다고 보고 있다. 그들은 무술에 스포츠의 요소인 유희성이 존재하고 또 무술 스포츠(운동경기)로 행해지기도 하지만 무술은 스포츠의 한 종류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무도의 근원은 격투기 형태였으며, 자기 방어와 군사적 목적으로 수행되었고 발전 과정에서 종교적 가치와 정신적 개발의 의미가 부여되었다는 견해이다. 22)

22) 김대식. Allan Back (2002) 무도론 PP58~P60 교학연구사



무도라는 용어에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에는 경기 개념이 개입된 무술 종류와 용어 사용상 구분하려는 엄격한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일본 가라데의 창시자 후나코시는 시합이 무도를 삶의 한 과정으로 승화시키는데 방해가 된다고 하였다. 또 가라데는 삶을 살아가는 한 방법이며 스포츠를 통한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인성을 도야한다, 행동하는 사람이 노력의 실용적인 측면을 떠나 변화 무쌍한 현상으로부터 영원한 세계로 마음을 돌리면 그때 비로소 참되고 영원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견해들은 무술을 종교적 수행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견해는 권위있는 무술가들의 훌륭한 태도라고 보지만 삶의 형태와 방법이 특정한 가치관으로 단정 될 수 없는 것처럼 무술의 수행목적과 방법, 그리고 그 효과는 시대와 공간, 그리고 개개인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그리고 스포츠, 체육분야에서도   신체적(physical)교육 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인간의 몸이 마음과 분리되지 않고 조화적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이를 구체화하려는 실용주의적 체육 학자들도 많이 있다. Zeigler는 넓은 의미로 체육은 경험에 의한 인간의 변화이며 체육 활동이 단지 근력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인성 교육이 주라고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무술과 경기는 방법상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에 대한 교화(敎化)라는 동일한 목적 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격투경기
   격투(格鬪)의 사전적 해석은 서로 맞붙어 치고 받고 싸움(fisticuffs)이다. 의미상으로 볼 때 무기를 갖지 않고 맨몸으로 싸우는 것이다. 격(格)은 격식(格式:격에 어울리는 법식, 규칙, 법칙)이다. 환경이나 사정에 맞는 체제나 품위, 또는 자격, 지위, 등을 의미한다.


투(鬪)는 싸우다. 다투다(경쟁), 만나다 라는 것이 사전의 해석이다. 갑골문의 투는ꡐ鬥ꡑ이며 글자꼴은 두 사나이가 손과 팔을 서로 붙들고 힘을 겨루는 것을 표현 한 것이다.


따라서 격투는 사회적, 문화적 틀에 의해 정해진 격식을 갖추어 맨몸으로 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격투에는 경기라는 개념이 함의되어 있어서 격투 경기라는 용어는 동일한 의미가 일부 중복되는 명칭이다. 그러나 축구경기, 권투경기의 용례처럼 축구, 권투라는 용어에는 이미 공차기 경기, 주먹으로 싸우는 경기의 의미가 있지만 중복 된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택견의 사전 풀이도 ‘발로 차서 쓰러뜨리는 경기’ 이지만 택견경기로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다.


맨몸무술, 즉 격투의 발원(發源)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초기 인류가 소집단을 구성하며 사회를 형성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격투는 인류의 시원 문화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초의 격투는 단순히 집단 생활의 필요적 행위였다. 즉, 종을 보존하고 개체의 생존을 위한 동물의 본능 활동이었다. 이것이 문화적인 형태로 변모하는 과정은 문화는 놀이의 형식 속에서 성립되었고 문화는 처음부터 놀이되어 진 것이다라는 호이징하의 이론으로 설명 될 수 있다.


호이징하는 원시인의 공동체 생활에서 가치가 높은, 단순한 생물적인 것을 넘어선 특성을 지닌 바의 것. 그것이 여러 가지 형태의 놀이라고 정의하였다. 원시 격투는 분명히 유희적 성격이 가미되었다고 볼 수 있다.23)
초식동물의 각투(角鬪)가 단순한 생물적 행위에 그치고 있으므로 그것은 문화의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의 격투는 유희성 또는 제의성과 결합하여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문화로서 훌륭하게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23) 이용복(1990) 한국무예 택견 PP24~32 학민사






3) 격투의 진지성
여러 논의 속에서 맨몸무술과 격투스포츠는 모두 원시 격투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일부에서는 무술은 진지함과 엄격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놀이성이 가미된 격투경기와 차별을 시도하고 있지만 호이징하의 주장은 다르다.


「흔히 진지함과 놀이는 대립적 의미로 쓰이지만 진지함의 언어적 분석은 급함, 열중하는, 노력하는, 애쓰는 등이고 이런 의미는 놀이와도 잘 연결된다. 그러나 진지함의 의미 내용은 놀이의 부정이다. 진지함이란 곧 놀지 않는 것으로 통한다. 이에 비해 놀이의 의미 내용은 결코 진지함이 아닌 진지하지 않는 것이라고 규정되어질 수는 없다. 놀이는 무언가 각자 고유의 것이다. 놀이에는 개념 그 자체가 진지함보다는 높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진지함이 놀이를 배척하는 것임에 비해 놀이는 진지함을 내포할 수 가 있다」


   로제 카이와는 그의 저서 「놀이와 인간」에서 놀이의 진지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확실히 놀이는 금지 행위를 준수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재원(능력)을 최대한 발휘함으로서 이기려고 하는 의지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요구되는 것은, 예의를 지키면서 상대방을 능가하며, 원칙에 따라서 상대방을 신뢰하고, 중오심을 품지 않고 상대방과 싸우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있을 수 있는 실패, 불운이나 불행을 처음부터 각오해야 하며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며 패배를 감수해야 한다.   놀이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자기 억제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게 하며 또 그러한 습관이 붙게 할뿐만 아니라 인관 관계와 인생의 부침(浮沈)전체에 까지 그 교훈을 확대하게 된다」24)


24) 로제 카이와(1994) 놀이와 인간 P19 이상률 역 문예출판사


이쯤이면 우리는 무술과 놀이, 또는 경기의 본질이 매우 유사한 개념으로 접근되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렇게 진지함 뿐 아니라 무도의 엄격(嚴格)함도 격투경기 또는 놀이의 개념에서 쉽게 발견된다. 호이징하는 일본 무사가 위험과 죽음 앞에서 필요하지 않는 고상한 자제(自制)를 보여주는 행동도 일종의 충성심과 의무, 인내와 용기, 절제의 시합형식을 띠고 있어서 제 일인자가 되려는 놀이 정신과 동일하다고 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시합이란 직접적인 경쟁은 아니다. 그러나 무사도(武士道)규범 수행에 대한 역사상, 또는 세간의 평가라는 점에서 경쟁적이 될 수 있으며 특히 일본 무사도의 기본 자세인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의미에서 호이징하의 견해에 수긍할 수 있다.   제 일인자가 되려는 것은 제 일인자로서 존경을 받으려는 바램 때문이다. 그래서 경쟁 본능은 먼저 힘에 대한 갈망이라든가 지배하려는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남보다 빼어나 보려는 욕망인 것이다. 이러한 경쟁 본능의 특성은 이기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기느냐가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된다. 따라서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로제 카이와가 말한 여러 가지 태도가 요구된다. 경기의 핵심은 규칙을 잘 지킨다는데 있고 이것은 절제를 기르는 훈련에 의해 수행된다. 이것을 반대로 보면 경기를 통하여 규칙을 잘 지키고 절제를 기르는 것이 된다. 경기를 통해 절제된 경쟁 원리를 익히는 것은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자연이 평화롭게 공생할 수 있는 지혜를 기르는 일이다.


이러한 원리는 격투경기에서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진지성이라 할 수 있는 상대에 대한 배려에서도 나타난다. 경기의 과제는 이기는 것이지만 이것은 지는상대방을 전제로 한다. 격투- 즉 맨몸으로 싸우는 상대방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타도해야 할 적(敵)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일원(一員)이며 경쟁의 파트너이다. 자신과 상대방은 대립에 따른 긴장을 유지하면서 각자가 자기 향상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촉발시켜주는 동기 부여를 해주는 호혜적 관계이다. 격투 당사자는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살상의 위험이 있는 무기를 버리고 오로지 몸만으로 싸우자는 합의가 성립되어 있는 공생의 사이인 것이다.


그리고 격투에서는 비록 생명을 걸고 싸우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 긴장감을 사생결단의 대결 못지 않는 수준으로 경기자를 지배 할 수가 있다. 명예, 지위, 돈, 여자 같은 대상이 어느 때는 목숨보다 우선 되는 가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싸움의 긴장감이란 이겨야 한다는 이유와 함께 상대방에게 상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이 원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Ⅴ. 택견원형의 재인식


1. 택견원형의 문제점
   
   1992. 7. 11자로 이용복은 문화재관리국에 질의서를 제출하였다. 이 질의서는 문화재는 고유한 전통의 원형이 온존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1.택견조사보고서 제102호 (1973년 예용해)와 제146호 (1982. 임동권)에 수록된 기술 내용이 다르다. 1971년 제작된 VTR의 송덕기 동작과 1983년 문예진흥원 제작 VTR의 신한승 동작 간에 큰 상이점이 있다. 신한승은 송덕기의 택견을 계승한 것인데 이 차이점은 변형에 따른 것이다.


   2. 현재 문화재 당국이 관리하고 있는 택견 전수자들은 신한승의 택견만 전수하였으므로 송덕기 기법이 인멸 될 소지가 있다.


   3. 택견은 19세기초까지 서울 일원에서 경기를 해 온 것이 유일한 택견 전승의 맥이다. 그러나 현재 문화재 택견 발표회에서는 경기가 아닌 현대적으로 재구성 된 연습 체계만 보여 주고 있다. 택견경기를 발굴, 재현하는 것이 택견원형을 되살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4. 민속은 지역성을 가진다. 택견은 유독 서울 일원에서만 행하였던 민속이다. 그러나 현재 택견 보유자가 거주하는 지역(충주)이 택견 전승지로 잘못 알려지고 있다.


   5. 결련(結連)택견과 결연택견의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한다.


   6. 택견원형 정립을 위해 공청회, 토론회를 열고 당국이 재조사해야한다.

 


이상과 같은 질문에 대하여 1992. 7. 25 문화재관리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회신을 하였다.

 


   1. 무형문화재는 관계 전문학자의 조사․연구 및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한다.


   2. 1982년 관계전문가(임동권)의 조사 당시 송덕기옹은 자신의 모든 것을 신한승에게 가르쳐 안심한다고 말하였고 이를 재차 송옹에게 확인하였으므로 보고서 내용은 타당하며, 현재 신한승의 기예를 전수한 보유자 후보(정경화)가 전수교육을 실시하고 있고 그 전수실태를 관계 전문가에 의해 수시 점검하고 있다.


   이용복의 문제 제기가 고식적 답변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택견협회 명의로 택견기능 보유자 추가 인정 신청서를 문화재관리국에 제출하였다. 민원에 대해서는 당국이 어떠한 형태로든 조처를 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택견을 다시 조사하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신청서의 요지는 「현재 택견원형은 재구성 과정에서 변형되었다, 따라서 송덕기 택견 형태인 민속경기 놀이인 결련택견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 기능을 가진 이용복 등을 보유자로 추가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미 앞에서 살펴 본대로 당국의 답변은 「1982년 조사 보고서는 정확한 것이고 송덕기의 기능은 신한승에게 계승되어 정경화에게 전승됨이 인정되고, 결련택견은 택견경기를 의미하지만 택견의 개념에 포함되어 있어 추가 지정은 불필요하고, 이용복은 신한승 택견을 하는 것으로 판단되고, 송덕기는 83년 당시 고령으로 지도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확인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택견협회에서는 국민고충처리위원회와 관련 기관등에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하여 진정을 하였으나 대답은 문화재 전문가로 구성된 집단인 문화재 위원회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것 뿐 이었다. 그 뒤 행정소송까지 있었지만 여전히 처음 제기한 원형에 대한 문제점은 어느 것 하나 검토되지 않고 고스란히 숙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20여 년의 논쟁 속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발견 할 수 있는 것은 첫째로 당국이 「결연택견=쌈수」가 아니라 「결련택견=경기」 라는 점을 인정하였고 둘째, 경기를 하면 원형이 훼손된다고 주장하던 보유자측이 경기를 하게 된 것. 셋째, 택견이 경기라는 것을 대한체육회가 공인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문화재청에서는 최근「전통무예로서의 택견」을 원형이라 하고 「민속경기로 하는 택견」을 변형이라는 견해를 2003. 3. 8   문화관광부와 체육회에 낸 공문으로 공식화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문화재원형문제는 과거의 것이냐, 아니냐를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재당국의 원형에 대한 판단은 전통무예이냐, 민속경기냐 하는 개념인식의 문제로 원형논의가 다소 궤도를 이탈한 방향으로 전환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2. 비속무술로 보는 인식
   
   택견이 전통무예라는 인식은 택견인들간에는 이론이 없다. 이것은 모든 택견인들이 택견앞에 민족무예, 전통무예라는 꾸밈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렇다. 다만 문제가 돠는 것을 무예에 대한 해석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최복규는 택견을 무예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고 하였다.25)

 

무예는 본질적으로 생사의 문제가 걸리는 전투기술, 싸움기술과 관련 된 것이다. 택견에서 그런 심각성을 발견할 수 있는지, 검토의 여지가 있다.

 

택견의 성격은 첫째, 기능면에서 투기나 대인격투술이라는 무술의 본래 기능이 거의 퇴화해 버리고 놀이나 경기에 초점이 있으며

둘째, 발기술에 집중되어 있고,

셋째, 기술이 어떤 형(型)이나 체계 속에 구조화 되어있지 않고 개별기술로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택견에 대한 외부의 이러한 시각에 대하여 택견을 무술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정경화나 문화재청이 명쾌한 답을 내려야 할 입장일 것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런 문제 제기에 대응하는 논리를 정경화나 문화재청으로부터 듣지 못하였다. 다만 택견이 현재 하는 기술이나 행위로써 무술임을 설명하는 구체적인 언급은 정경화가 결련수(쌈수)를 (신한승이)복원하여 무예의 면모를 보였다26)고 한 한 구절이 있다. 그런데 쌈수란 것이 낱개로 8개 뿐 이고 기술의 구조측면에서 살펴보면 위력면에서 다른 맨손무예에 비해 많이 부족하며 형이나 체계 속에 구조화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내용은 오히려 택견을 무술로 보지 않을 수 있는 근거만 될 뿐이다.


박종관은 택견은 옛부터 체계적인 구성이 없었으며 일반적인 권법의 형태와 판이하게 다르다. 기법에 강(剛)은 거의 없고 유(柔)로 구성되어 있고, 낱기법으로 구성되어 있어 어린이나 어른을 막론하고 쉽게 배울 수 있다. 이것은 씨름에도 여러 가지 기법이 있지만, 이것들을 연결한 일정한 형식이 없다. 택견도 이와 비슷한 조건이다.27) 라고 하였다. 그러나 박종관도 “택견은 우리 선조들이 하던 무술임에 틀림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실제로 송덕기의 택견을 습득한 사람이나 이에 대한 연구를 한 사람들은 모두 택견이 다른 무술들과 달리 놀이, 유희, 경기적 요소가 강하다고 하면서도 무술이라고 하거나 그렇게 알아듣는데 아무 저항감이 없다. 이것은 이미 스포츠로 변모한 유도, 태권도, 우슈, 가라데가 무술이라고 하는 것과 동일한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앞에서 무술과 경기의 개념을 검토하였으므로 외부사람이 택견의 무술성을 시비하는데 대한 대답은 충분히 검토 된 것으로 본다. 앞에서 맨몸의 무술이 생사와 관련된 진지성이 퇴화된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보호와 집단의 생존을 위한 본능의 진화된 형식이며 이것이 사회 구조의 영향으로 유희성, 제의성이 가미되어 문화적으로 더욱 발전된 형태로 검토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사를 건 전투, 싸움 기술만을 무술이라고 규정하는 것부터 논리가 비약되어 있다. 근거가 될만한 어느 문헌에도 무술의 개념을 딱부러지게 규정한 것은 보지 못했다. 현대에 와서 무술에 대한 여러 개념이 생겼지만 어느 것도 전적으로 수긍하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형이나 체계적   구조가 생사를 건 전투기술, 싸움기술과의 연관성이 어떤 것인지도 사실상 모호한 것이다. 이소룡은 형과 체계를 벗어나야 비로소 강한 싸움기술이 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그는 자신의 주장을 실천해 보였다. “거리에서의 격투를 무술 전문가의 처지에서 관찰하더라도 그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다. 전문가이기 때문에 오히려 고정된 인식의 함정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격투의 실제는 일정한 형식이나 제한된 문파의 기술에 치우치지 않는 시각이 있어야 승리 할 수 있다” 요컨데 그는 모든 생활을 생명을 건 전투(戰鬪)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형식과 체계를 탈피한 자유스러운 무술로서 절권도(截拳道)를 창안해 내고 “절권도의 묘는 단순화”라고 자부하였다. 이렇게 무술에 대한 개념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실제로 송덕기가 전수해 준 택견기법은 품밟는 것부터 응용수까지 합쳐도 30여 종 밖에 되지 않는다. 흔히 택견을 백기신통 비각술이라고 자랑하지만 송덕기의 발기술 중 날아 치는 비각술은 고작 두발낭상 뿐이었다. 너무 나이가 많아 실연을 할 수 없었을 것이지만 말로써는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는 문제이다. 이외 얼굴이나 몸통을 차는 기술도 발따귀, 복장지르기, 곁치기, 등 대 여섯 개를 넘지 않는다. 그렇다고 택견이 퇴화되었다고 하기보다는 형식이나 체계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해서 꼭 필요한 기술만 발전되었다고 시각을 바꾸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태권도의 경우 꽤 오래전부터 옆차기가 사라지고 있다. 물론 경기에서 이런 현상이 있는데 이것은 옆차기가 경기에서 불리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술 구조가 매우 단조로워지고 있다. 이런 변화는 경기가 활성화된 무술종목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택견을 무술로 보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무기술과 격투를 구분하여 생각하지 않은데서 온 것으로 보이며 또한 무술과 경기에 대한 기존의 인식체계로 택견을 평가하려한 잘못이 있다. 김용옥이 “택견은 무술이 아니다”라고 단언한 것도 자신만의 격의(格義)로 택견을 평가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수긍하면서도 그 말의 의미 모두를 납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술은 realism이 먼저이고 ldealism은 후위개념이다. 무술 정신은 기술의 연마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3. 무술로 보는 인식

   다른 사람들이 택견은 무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정반대로 택견은 분명 무술이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보유자 정화씨다. 정경화의 무술에 대한 가장 최근의 인식은 그가 최근에 지은 「택견원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무술은 한 마디로 삶의 근본이요, 원천이다. (무武)를 하나의 기능으로만 생각하고 인간을 만드는 산교육의 요소로 생각하지 않은 탓으로 천대받는 경우가 있었다. 무는 활기에 넘치는 기(氣)의 뭉치로 볼 수 있다. 우주속에 살아 움직이는 존재의 삶 자체가 무이다. 모든 생명의 탄생, 모든 물질의 이합집산하는 것은 자체가 힘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무는 자연의 근본이요 원천이다. 모든 생물의 움직임 속에는 반드시 길이 있다. 이 길(도리)이 있기에 우주는 영원히 존재한다. 무란 도로서 생성된다」


이상이 정경화의 무술 개념을   정리 해 본 것이다. 다음은 정경화가 스스로 무술 개념을 요약한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무도(武道)란 삼라 만상의 생명력인 것이며, 항상 살아 숨쉬는 활력소라 하였다. 기(氣)의 움직임을 따라 막힘 없이 돌아갈 때 몸의 건강을 찾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적의 위험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무술인 것이다」


그는 이 말 끝에 이제 무술의 참 뜻을 알았을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 자신이 파악하는  무술은 그런 것일 수 있는지 모르지만 택견은 무술이다 라는 주장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좀 현학(衒學)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의 앞쪽에 자신이 원형이라고 소개한 택견의 실제 기술, 학습체계, 경기구조 등과 연계되는 설명으로서 구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 의문스러운 것은 그의 경기에 대한 견해이다.


「경기란 재주를 겨루어 보는 것이다, 무술이란 경기를 하기 위한 대상물이며, 경기란 무술의 우열을 가리는 행위자이다. 무술은 순수한 기운의 발동체이며 경기는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 나가는 행위 일 뿐이다」「이와 같이 순수한 수련을 해 간다면 심신을 단련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으나 경기를 하게 되면 반드시 rule(경기규칙)이 적용되어야 하고, 그로 인해 무술의 기법 자체가 시합술로 변해 가는 것이다」


무술과 경기에 대한 일반론이라면 이와 유사한 견해들도 있을 수 있으므로 큰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현재 문화재 택견의 원형이<서기택견=경기택견>이라는 점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면 자기부정, 혹은 자기비하적 논리가 되므로 대단히 혼란스러운 것이다.


정경화는 자신이 보유자라란 신분적 입장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정부로부터 전통무술로서 문화재로까지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면 보급하기 쉽다하여 굳이 쉽게 변질 될 수 있는 스포츠(놀이)로 전락하려고 하는 저의는 무엇일까? 참으로 통탄 할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부가 전통무술로 분류하여 문화재로 지정, 보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는 전통무술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규정하지는 않았다.

 

현재 원형이라고 지정한 택견형태가 무술의 기준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경기라고도 말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스포츠로 전락이라는 주장은 개념이 전도된 논리이다. 택견을 현대 스포츠로 활성화하는 것은 전통문화 계승의 발전적 양상이며 그 저의는 우리 민족의 문화자산을 확대 재생산하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 택견이 무술로 발전되느냐 아니면 문헌의 일부분이 유희나 놀이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하여 무술임을 망각하고 우선 보급 발전의 일환으로 놀이형태로 발전시킨다면 무술의 본체를 잃어버리고 개체를 살리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현존하는 무술의 원형을 지켜 나가기는 쉬워도 이미 왜곡되어 변질 된 형태를 다시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무술을 줄기라 할 수 있으며 경기란 그 가지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고 하였다. 무술과 경기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보편성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논리가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설득력이란 사실에 근거해야 하며 이를 논증할 수 있는 자료가 제시되어야 제 기능을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 본 것과 같이 택견이 놀이, 유희, 경기라는 점은 초기의 택견 기술과 경기구조, 학습체계와 여러 자료가 일치되고 있고 그 양도 풍부하다. 그리고 택견을 접하였거나 연구를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에 동의하고 있다. 반면에 무술이라는 주장은 유독 문화재 택견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만의 논리이며 대부분 객관적 입증 자료가 없는 자의적 해석이거나 지향성향의 수준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현행 택견의 실제 기술과 학습형태와 무술이라는 논리가 부합되지 않는 점이다. 또한 무술경기, 무도스포츠라는 개념처럼 두 개념이 복합되어 확대되는 현상이 생겨나고 있고, 우리 나라는 물론 중국, 일본 등 동양무술의 대표적 무술 종목들이 앞 다투어 국제경기로 변모하고 있어서 경기를 무술의 부수적 가치로 치부하는 것은 택견 발전의 전략적 측면에서도 불리하다. 택견에 대한 객관적 시각이 모두 경기, 놀이 따위로 보고 있는 터에 경기, 놀이의 개념을 무술의 하위 개념으로 취급하기보다는 호이징하의 이론을 빌려서라도 무술을 놀이 개념에 포함시키는 것이 현실적이다. 현대의 추세는 가장 큰 세력을 가진 동양의 전통무술이 스포츠로 탈바꿈하면서 이미 무술이라는 용어의 개념이 확실히 변질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일부러 역류해서 택견과 별 관계가 없는 일본, 중국의 무술, 또는 이들 무술이 한국화 하여 정체성이 모호한 무술들이 광고 선전 차원에서 내놓은 무술개념을 택견에 적용시키는 것은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하는 겪이 될 것이다. 다른 무술들이 18~20세기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본래의 형태나 가치를 잃어버리거나 왜곡되고 변질되는 과정을 겪을 때 택견은 타율에 의해 휴지기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불우했던 과거가 현재에 와서는 다른 무술들에서 찾기 힘든 맨몸무술의 본질적 가치를 제대로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술에 대한 기존의 막연한 인식에서 탈피하여 택견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재조명을   통하여 무술에 대한 개념을 새롭고 분명하게 정립하는 것이다.



Ⅵ. 결론


1. 요약
   
   이 글은 최근 문화재청이 대한체육회와 문화관광부에 보낸 공문내용에 대한 반론 적인 것이다. 이 공문에서는 대한체육회에 가맹된 대한택견협회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택견이 아닌 민속경기로 변형된 택견을 하고 있으므로 체육회 가맹으로 인하여 택견 고유의 원형을 훼손하고 맥을 끊을 수도 있으니 체육회 가맹을 신중히 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연히 택견협회내에서는 반발이 일어 날만한 일이기는 하지만 체육회 준가맹은 이미 결정되었고 문화재청의 이런 견해는 묵살하고 넘어 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택견 단체간의 주도권 다툼 차원의 원형 논쟁이 아닌 순수한 원형논의는 택견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며, 그리고 원형논쟁에 있어서 당사자의 한 축인 문화재청에서 문제를 제기한 만큼 새로운 논의의 기회로 삼고 싶었다. 이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 해보려고 20여 년의 긴 시간동안 평행선을 그려온 논쟁의 실상을 대체적인 시기별로 정리하고 그 과정에 따라 원형에 대한 인식의 변화추이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다음 항에서 다룬 원형논쟁의 쟁점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택견원형 논쟁의 쟁점은 택견을 무술이라는 주장과 경기라는 주장의 대립이었다. 논쟁의 시발은 문화재지정에서부터였다. 문화재만 아니라면 아무도 관심을 가질 필요조차 없는 원형 문제는 그래서 수많은 무술 중에서 택견만이 안고 있는 고민거리였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택견이 다른 무술과 경쟁하는데 유리 할 수 있는 특수한 소재가 되므로 회피해서는 안되는 것이기도 하다.


문화재지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문화재 지정 조사보고서에는 그 이전까지의 택견에 대한 몇 가지 자료나 기록과 달리 택견을 무술로 육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현 택견보유자가 ꡐ정부로부터 전통무술로서 문화재로 지정 되어 보호를 받고 있는ꡑ것을 전가보도(傳家寶刀)로 이용하게 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질의서 제출, 명예훼손 고소사건, 행정소송 따위 격렬하고 다양한 방법과 형태로 논쟁이 벌어졌지만 아직까지 해결 된 것은 없었다.


이것은 문화재 당국이나 보유자측이 논리적 대응을 하기보다는 기득권과 국가 권력의 권위로 대응하여 항상 논점을 비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택견협회는 논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료의 정리와 논리개발을 진전 시겼고 그 결과 공청회, 또는 공개토론을 요구 하는 입장이 되어있다. 최근에는 택견협회가 대한체육회 준가맹이 결정 되므로서 위상에 상당한 변화가 생겼다. 국가 체육을 총괄하는 대한체육회의 공인은 문화재의 권위를 어느 정도 상쇄시키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이 보유자측을 자극하게 되고 이들의 요청으로 문화재청이 대한체육회 가맹문제에 개입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원형논쟁 재발의 동기가 되었다. 재발발 한 논쟁에서도 쟁점은 처음이나 현재나 여전했다.


협회는 택견은 경기가 원형이고 경기가 맨몸무술의 본질이라는 주장이고 문화재 당국과 보유자는 택견은 무술이 원형이고 경기는 원형을 훼손한다는 종전의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에 따라 먼저 무술과 경기에 대하여 각각의 개념을 파악, 비교, 검토하는 용어 개념의 정리 작업이 필요하였다.


무도, 무예, 무술을 동일한 개념의 선택적 명칭으로 전제하고 일본무도의 개념에서 보이는 생사를 건 엄격함, 수양의 진지함, 기술의 오묘함 따위를 주로 무술의 특징이나 가치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맨손 무술과 맨몸 무술을 엄밀한 의미로 구분하고 택견을 맨몸 무술로 분류했다. 격투, 각력 등이 맨몸 무예이며 그 출발은 종의 보존과 번식을 위한 동물의 본능 활동과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맨몸의 무술은 곧 경기와 동의어라는 논리가 가능하였으며 언어의 개념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보편성의 획득으로 변화 한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또 동양의 무술들이 국제 스포츠로 변모하면서 이미 무술의 개념이 경기, 스포츠와 혼합 또는 통합 확대되었음을 검토하였다. 이를 근거로 택견의 개념은 무술, 또는 경기 어느 것이나 동일한 의미로 사용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와 같은 결론은 사실상 1970년대부터 이미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것이었으나 그동안 논쟁을 위해 무리하게 개념 구분을 해온 측면을 새삼스레 발견 할 수 있었다.


또한 이상주의적 동양무술의 허구성과 과대 포장된 맨손 무술의 실체을 밝혀 택견이 가지고 있는 경기, 놀이의 성격이 폄하 될 대상이 아님을 역설하였다.


마지막 장에서 택견원형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하기위해 현재 문화재청이나 보유자가 가지고 있는 원형인식의 문제점을   다소 조심스럽게 제기 하였다. 이 글에서는 되도록 택견의 본질과 그에 대한 가치개념에 초점을 맞추기 위하여 직접적으로 원형과 관련된 실기 부분에 대한 논리 전개는 유보하였다.사실 문화재 원형논의에서 규명되어야 하는 것은 누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인식의 구별이 아니라 현재 문화재 당국이 원형으로 인정한 택견이 과거의 형태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볼 때 택견원형 논쟁이란 사실상 택견이 무엇인가라는 본질에 대한 논쟁이다. 따라서 원형논쟁 과정의 실상과 쟁점을 되짚어 보면서 택견의 본질에 접근해 간 것이다.


그 결과 일본, 중국의 무술개념을 답습하고 있는 기존의 무술인식체계를 택견적인 무술인식론으로 대체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전개된 논리는 결국 택견 속에 내재한 택견의 본질이 다른 유사 체기 보다 변질이 덜 되어 맨몸무예의 정체를 찾을 수 있는 유용한 통로라는 것을 확인해 본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관점에서 무술개념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2. 향후의 과제
   
   택견은 현재 중요무형문화재의 범주를 훨씬 벗어나 있다. 이미 1999년에 국민생활체육 종목이 되었고 2003년에는 대한체육회 준가맹 경기종목이 되었다.


매년 전국규모 경기대회가 10개 이상 개최되고 있고 시, 도, 단위, 시, 군, 구 단위 이상의 지역 공식경기 대회만 50여회 이상 개최되고 있다. 금년에는 국무총리기와 대통령기가 신설된다. 2004년에는 우리 나라를 위시하여 미국, 캐나다, 호주, 프랑스, 독일, 스페인, 불가리아, 일본, 중국, 카자흐스탄, 인도 등 12개국이 참가하는 국제경기대회를 서울에서 개최 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렇게 택견이 생활체육, 전문체육, 나아가 국제스포츠로 급속히 발전해 가는 마당에 ʻ무술이다ʼ, ʻ경기다ʼ라는 원형논쟁은 진부하고 무의미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원형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확립해 두는 것은 앞으로 택견의 진로에 중요한 일이다. 택견협회가 문화재청의 원형인식에 문제를 삼고 이를 전향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태도는 택견에 대한 인식론적 기반을 단단히 해야 할 필요가 현실적으로 상존 하기 때문이다.


나영일은 「전통무예의 현황과 과제에 관한 연구」에서 전통무예의 현대적 과제로서 철학화, 조직화, 체계화, 대중화하는 네가지를 제시하였다. 대한택견협회가 창설된 것은 조직화, 체계화, 대중화의 기반 조성을 위한 첫 단계였다. 그리고 택견협회는 그 기능과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국민생활체육 전국택견연합회 역시 택견협회가 본연의 노력을 해오는 과정에서 얻어진 결실이었다. 2002년 12월에 창설된 재단법인 세계택견본부는 국제택견조직의 구심체로 택견전수의 총지휘부이다. 재단 설립은 택견 메카 건설에 주춧돌 하나를 놓은 셈이다.


2000년부터 전면 시행되고 있는 새 학습체계를 만든 것도 96년 이 후 해외 보급 활동을 통해 얻은 경험을 토대로 국제무술시장에서 경쟁력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다. 이로써 남은 하나의 과제는 택견의 철학화이다. 철학화란 무엇인가? 바로 택견을 규명 하는 것이다. 택견의 본질을 캐내야 하는 지난한 작업인 것이다. 본질은 형식속에 내재되어 있으므로, 그리고 원형의 규명은 택견의 미래에 motive를 제공해 주는 것이므로 중요한 것이다. 유사이래 철학에 정답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택견원형을 통한 본질의 규명 역시 하나로 귀착되는 해답을 얻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같은 귤나무 모종이라도 그 토양과 기후 등 생장 여건에 따라 모양과 크기와 맛이 달라진다. 또한 동일한 기후와 토양에서 같은 시기에 피는 꽃도 씨앗에 따라 개나리가 되고 진달래가 된다. 무술이든 경기이든 우리가 추구하는 택견에도 원래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 어려운 문제를 또한 간단하게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이란 실제로 택견을 해보는 것이다.택견을 오래 오래 해나가는 도중에 문득 자신이 체득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이 곧 정답일 것이다.


인간의 행위가 실체인 것이면 아무리 정교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론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있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체험도 없고 자료도 불충분한 상황에서 기존의 무술 논리에 의존하여 접근한 문화재 조사 방법에서부터 오류의 소지를 안고 있었던게 아닌가. 그리고 순수한 택견의 정체성을 위한 논쟁이 아니라 주도권을 의식한 원형논쟁이 끝없는 갈등의 평행선 궤적만 남겨 놓았던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원형에 대한 논의가 중요한 것이고 그것이 미래에 필요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논쟁 당사자들은 보다 진지하게 생산적 논의를 재개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앞서서 택견의 길을 가는 사람이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해야하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 글이 건강한 원형논의의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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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견 코리아라는 사이트에 연재된 칼럼 가운데 하나임.

 

사이트가 갱신 안된지 엄청 오래 되기도 했고, 언제 날아갈지 모를 거 같아서 함 들고 와봄.

 

원본 글 주소는 여기 : http://www.taekkyonkorea.com/bbs/opboard/dirr.php?wh=column&sno=19&st=0

 

읽고 나서 드는 감상은 개인적인 호오를 떠나서 대택이 택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같은 부분이 굉장히 잘 드러난 칼럼이라고 생각함.

 

거기다 충주와 있었던 분쟁에 대한 내용이 생각 이상으로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다는 것도 살짝 놀라웠음.

 

내용이 워낙 길어서 읽다가 정신이 혼미해진 거 빼면 상당히 양질의 글이었음.

 

앞으로도 종종 칼럼들 들고 와 봐야 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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