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무관 양성을 위한 별도의 학교가 설립되기 힘들었던 이유.
무학과 무학별설
무학(武學)은 조선시대에 병법과 무예를 진작시키고자 하는 학문이었다. 조선 태종이 관리를 등용하기 위해 10가지 시험과목을 두었다. 이 과목에 무학이 포함돼 있었으며, 병조(兵曹)에서 시험을 주관하게 되면서 시작됐다. 그 후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왜란이후 새로운 병제(兵制)를 만들게 되는데, 여기에 '무학(武學)'이 포함돼 있었고, 선조29년(1596)에 교육기관으로서 무학을 설립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이에 따라 지방에 훈련원(訓鍊院)과 같은 무학이 설립돼 무학생(武學生)이라는 역명(役名)으로 사용되다가 무학이라는 하나의 직역 개념으로 사용됐다.
조선에서는 문·무과에서 문과 위주의 풍조를 띠게 됐고, 문반에 비해 무반의 입지는 보다 낮아졌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는 무학은 직역의 개념으로 통용됐고, 직역자로서 무학의 법제적·사회적 지위는 양반 사족에서 점차 하향하는 추세였다. 무학의 신분에 대해서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학계에서는 가난한 양반이나 서얼, 중서층, 양인들중에 무예에 뛰어난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근거는 당시 무학의 신분을 가진 이들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무관 양성을 위한 무학(武學)을 별도의 학교로 설립해야 하느냐? 하는 무학별설 문제의 논란도 조선전기와 후기에 있었다. 조선 전기의 경우에는 훈련관(訓練觀)에 병가(兵家)의 공자(孔子)라 일컬어지는 강태공(姜太公)의 사당인 무성왕묘(武成王廟)를 설립하자는 것이었다. 문무병중(文武幷重)의 원칙에 따라, 묘학(廟學)의 구조를 갖춘 성균관과 향교의 제도를 준용하여 훈련관에 무묘를 설립해 훈련관을 명실상부한 무학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별설론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무묘를 별도로 건립하면 공자는 문(文)을 전업으로 하고, 태공은 무(武)를 전업으로 한 것이 돼 문무일체(文武一體)의 도에 맞지 않는다는 반대론에 부딪혀 현실화 되지는 못했다.
무학이 창설되는 선조대이후에도 무학 설치령 직후의 성여신과 18세기 중반의 이익 등에 의해 무학별설론이 다시 제기됐다. 이것은 선조대에 창설된 무학이 애초 별설론자들이 구상하던 무학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별설론자들이 무학교육의 근본으로 강조하였던 무성왕묘가 설립되지 않은 것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유형원은 '문무의 도는 본래 둘이 아니고, 학교도 두 종류가 있을 수 없다'는 무학별설 반대론이 여전히 우세했기 때문이다.
전국의 무학당 33곳
무관(武官) 양성을 목적으로 무예와 병서를 강습하는 무학은 유학과 잡학 교육기관과 함께 조선시대 교육체제의 축을 이루었다. 선조와 인조 연간의 무학 설치령 이후 전국 각지에 설립된 33곳으로 충청도 14곳, 강원도 2곳, 평안도 1곳, 경상도 13곳, 전라도 3곳에 무학당(武學堂)이 있었다. 또한 평안도 성천의 무학장(武學長)과 경상도 안동의 무학제독(武學提督), 대구와 경주의 무학교수(武學敎授), 상주의 무제독(武提督)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무학교수가 배치됐다. 이외에도 평안도의 이산, 삭주, 의주와 제주와 정의의 '무학청(武學廳)'과 양덕의 '무청(武廳)' 등의 유사한 이름으로 무학당이 존재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무학별설론자들이 추구하던 '무학당(武學堂)' 이라기보다는 별설반대론자들이 주장하는 연병(鍊兵)의 장소로서의 '연무청(鍊武廳)'에 가까운 성격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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