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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술] 어째서 18세기의 조선군은 무예시험에서 창이 아닌 칼(월도)과 주먹(권법)을 선택했을까?

익명_985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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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저번에 내가 올린 바 있는 오군영과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의 관련성 탐구( https://yugakkwon.com/taekkyeon/271863 )의 보충 겸 후속격인 글임.

 

이전 글에선 장용영을 포함한 오군영의 중순 결과와 합격자들이 선택한 시험 종목의 비교, 각 군영들의 역사와 특징. 그리고 훈련도감과 서촌의 지리적 연관성 등, 각 군영들의 공통점이 아닌 차이점과, 훈련도감의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권법 합격자 비율(47.8%)과 같은 군영별 특수성에 대해 탐구해 봤다면,

 

이번엔 군영 간의 차이점 보다는 군영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하나의 경향과, 그 경향이 어째서 생겨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내용을 다루어보고자 함.

 

스크린샷 2024-12-30 160353.png

리스펙을 위한 링크(논문) : https://www.riss.kr/link?id=A106904415


위의 표는 장용영 1975명과 오군영 5065명. 총합 7070명의 표본으로 이루어진 18세기 조선군의 중순(무예 시험) 합격자를 정리한 것으로, 이전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미 본 내용이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차이점이 아니라 공통점을 찾고자 하는 관점으로 이 표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경향 한 가지를 찾을 수 있음.

 

그건 바로 18세기 조선군의 놀라울 정도의 검술 애호와, 그와 대비되는 창술 천시 기조임.

 

1795년 치루어진 각 군영별 중순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검술(조선세법/예도/제독검 등)은 군영을 막론하고 합격자의 30~4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 종목이었으며, 월도는 훈련도감을 제외하면 평균적으로 약 30%의 합격자를 배출할 정도로 18세기의 조선군 사이에서 대접이 꽤 좋은 무기였던 걸로 보이지만,

 

반대로 창술 같은 경우 기창, 죽장창, 이화창으로도 부족해 창이기보다는 폴암에 가까운 낭선이나 당파, 거기에 창술하곤 거의 관련이 없다시피 한 편곤까지 전부 합쳐도 합격자가 200명을 넘지 못하는 걸 확인할 수 있음.

 

이게 얼마나 적은 숫자인가 하면, 표본이 되는 7070명의 합격자들 가운데 200명. 다시 말해 3퍼센트도 안 되는 숫자의 인원만이 창술로 무예 시험을 통과했다는 말인데,

 

심지어 정조가 편찬한 무예도보통지를 가장 잘 따르는 부대였다는 평가를 받은 장용영에서조차 창술과 관련된 중순 합격자가 아예 없을 정도였던 걸 보면 당시 조선군에서 창술이 교범 자체로는 존재했으되,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인원은 거의 없는 사실상 사장된 기예였다는 추측마저 가능할 정도임.

 

스크린샷 2024-12-30 160230.png
그리고 이러한 기조는 이 표로 더욱 명확해지는데, 위의 표는 어영청에서 년도별로 치루어진 중순의 결과를 나타낸 것으로 표를 보면 알겠지만 1755년 이전까지 겨우 10프로 언저리를 유지하던 창술(단창/장창) 합격자들이 1756년 이후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며,

 

반면 검술 같은 경우 해에 따른 종목과 합격자의 편차는 조금씩 있을지언정 검술이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선 대략적으로 40% ~ 50%를 유지하고, 많을 땐 70% 이상의 높은 합격자 수를 기록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음.

 

다시 말해 세간에 정설처럼 퍼져 있는 "도검은 부무장 내지는 호신용 무기로 쓰였을 뿐이며 전쟁에서 주로 쓰이는 무기는 창이었다." 라는 일반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게 18세기의 조선군이었다는 이야기임 ㅇㅇ.

 

그렇다면 그 이유는 대체 어째서일까?

 

사실 사료를 살펴 보면 조선군의 창술 천시 기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음.

 

대표적으로 임란 가운데 명나라의 장창을 접한 선조가


"장창 이거 참 좋은데, 우리도 쓰는 게 어떻냐?" 라고 말하자, 신하들이 "폐하, 장창을 만들 목재 조달이 어렵습니다." 라고 답변했고,

 

"씁, 그래? 그럼 아쉬운 대로 대나무 대를 이용해서라도 만들어라." 라고 교지를 내린 일화가 있으며,


 

뿐만 아니라 후금과의 전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인조 또한

 


"조선에서는 (기병을 상대해야 하므로) 창이 요긴한데 우리나라에서는 대나무로 (창을) 만들기 때문에 일이 매우 형편없다. 각별히 정밀하게 만들어 정벌하는데 쓰는 것으로 삼으라"

 

라는 말을 하였으나, 1625년 경기도 속오군에 화포수(火砲手) 3000명, 장창수(長槍手) 1000명, 대검수(大劍手) 1000명씩을 조직하기 위해 무기를 조달하려는 과정에서 10년 뒤인 1635년까지도 장창수 1000명은 편재가 되지 못하였는데(병자호란이 1637년임),

 

그 사유가 어처구니없게도 장창의 창대로 쓰일 재료(목재)가 수급이 어렵다는 것 때문이었음. 

 

저 재료 수급 문제가 오죽했으면 완성된 조총의 가격이 쌀 3.5석이면 창대의 가격만 2석이라 창을 만들어 병사들에게 쥐어줄 바에야 차라리 총을 지급하는 게 더 돈이 싸게 먹힌다는 기적의 계산법이 현실이 된 곳이 당시의 조선이었으니 말은 다 한 셈임.


(출처 : https://blog.naver.com/ss920527/222896529655)

 

거기다 창술이 조선군의 메이저가 되지 못한 건 위에 언급된 단가 문제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조선군이 채택한 군사 교리와 궁합이 맞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음.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삼수병(포수/사수/살수)으로 이루어진 후기 조선군의 보병전술은 아군의 기병 전력이 적보다 심각하게 열세일 경우엔 병거(전투마차)로 기병 돌격을 막는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다량의 화포와 총화기를 이용한 화력투사로 니가와를 시전하지만,

 

스크린샷 2024-12-30 163740.png

(위에 언급된 예산 문제 때문인지 1808년 작성된 만기요람에 따르면 조선군이 사용하는 병장기 중 장창이 목록에서 사라짐. 다시 말해 대기병전에서조차 장창방진을 활용하지 않았단 소리임)

 

반대로 기병의 지원이 충분하거나 적극적으로 적과 교전이 가능하다 판단될 경우

 

층진_총수의_후퇴와_후층_파궁수의_사격.png

(출처 : https://m.blog.naver.com/laguel/222326433954)


이와 같이 병사들이 듬성듬성하게 늘어선 여러 겹의 열들로 구성된 소위 층진(層陣)의 형태로 적과 교전하는 것을 기본적인 방침으로 삼았기 때문임.

 

조선군이 이런 형태의 보병 전술을 선택한 이유는 조선군이 따르거나 영향을 받은 두 진법서(조선 전기의 오위진법 - 여진족/조선 후기의 기효신서- 왜구)가 전부 소규모 부대들의 산발적 조우와 전투 상황을 상정하여

 

내구도가 높지만 유연성이 떨어지는 방진 보다는 분대 단위로 움직여 전술적 유연도가 높고 병사들 사이의 공간 덕분에 투사무기에 대한 저항도가 높으며, 상황에 따라 전열과 후열이 자유롭게 합류하거나 후퇴하여 서로를 지원할 수 있는 기정(奇正)의 법을 전투에 있어 주요 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으로.

 

예를 들어 적들과 교전 중인 1열의 비어있는 사이로 2열, 3열이 합세하여 전열이 무너지는 것을 막거나, 혹은 1, 2열의 병사들이 3열로 후퇴하여 순간적으로 적과의 공간을 만든 다음 대기하고 있던 3열의 병사들이 일제히 화력투사를 하는 등. 

 

https://youtu.be/G_v0Jaxq37Y

(영상 중반부터 나오는 포수의 순차 사격과, 적군이 충분히 근접하자 포수들 사이의 간격을 이용해 달려나가는 살수들. 병사 사이의 간격을 벌려 진퇴를 용이하게 한다는 후기 조선군의 전술을 고증한 장면.)

 

방진 특유의 내구성과 버티는 힘 보다는 여러개의 열들이 진퇴를 반복하며 만들어 내는 다양한 효과(넓은 공간 활용, 지속적 화력 투사, 상대의 전술적 오판 유도)를 노리는 방식으로 발전한 것이 조선군의 전술적 독트린이었음.

 

그리고 이러한 조선군 특유의 보병전술이야말로 정조가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고, 재정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으로 중순을 열어 합격자들에게 포상을 주면서까지 병사들의 무예 수련을 독려했는가에 대한 이유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사실 저 층진이야말로 병사들 개개인의 백병전 능력이 떨어지면 애초에 시도조차 하면 안 되는 전술이었기 때문임.

 

반례로서 창병 방진으로 유명한 테르시오를 살펴보면 보다 쉽게 이해가 가능한데,


https://youtu.be/CTYuYxmICGo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처럼 수백. 수천명이 밀집해서 방진을 이룬 상황에서 승패를 가르는 건 바로 옆 병사가 총이나 포에 맞아 쓰러져도 덤덤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규율(제식)과 사기이지 (물론 수준이 떨어지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병사들 개인의 무술 실력이 아니라는 것으로, 위의 영상과 같이 방진에 소속되어 창 하나만 겨우 찌를 수 있을 만큼 수백명이 밀착해 있는 상황에서 일개 병사 1인이 뭘 얼마나 활약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는 일이며.

 

반대로 병사가 개인의 무술 실력을 뽐내며 활약을 할 수 있는 상황이란 곧 그들이 구성하던 방진이 어떤 이유에서건 깨졌다는 말이기에(...) 이런 상황을 대비해 병사 개인의 무술 훈련을 독려할 바에야 처음부터 방진이 깨지지 않도록 가혹한 체벌과 폭력을 가미한 제식훈련을 빡세게 돌리는 게 100배는 더 가성비가 높다는 건 이미 수많은 전근대의 군사이론가들과 군 지휘관들이 몸소 증명을 해 낸 하나의 공식에 가까움.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조선군의 보병전술은 통상의 방진 형태가 아닌, 병사들 사이의 거리가 넓찍한 층진을 기본으로 삼았기에 옆이나 뒤의 아군에게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방진과는 달리 적군과 근접전을 벌이는 살수들 개개인이 후속 제대의 지원이 있기까지 일정 시간 이상을 홀로 적군과 교전을 벌일 수 있을 만큼의 무술 능력을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https://youtu.be/EdASLNskD88

(이쯤 되면 짐작하겠지만 1795년의 각 군영별 중순 합격자 순위에서 탑 3에 드는 검술/월도/권법 모두가 적과 아군이 어지럽게 뒤섞이는 난전에서 힘을 발휘하는 무기와 기예들이다)

 

한편으론 대형이 헐거워 상대적으로 전열을 돌파당하기 쉽다는 층진의 특성에 더해, 18세기에 다다라 살수의 비율이 포수의 1/3으로 줄어든 훈련도감과 아예 인원 전부가 포수(조총수)였다는 어영청 등. 종래와는 달리 근접전을 전담할 살수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게 된 환경에서, 살수 뿐만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후열에서 화력지원을 하던 사수, 포수까지 휴대하던 검을 빼들고 달려나가 진 내에 돌입한 적군을 돈좌시켜야 했던 것이 당시 조선군의 현실(뚫리면 다 죽으니까)이었으니 본문 초반의 중순 합격자 표에서 검술과 월도, 그리고 권법이 합격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반면 창술이 3퍼센트도 안 되는 숫자의 합격자만 나온 것은 어찌 보면 필연에 가까운 결과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음.

 

요컨대 넓찍한 공간을 커버해야 하는 특성상 방진에서만 활약이 가능한 그리고 비싼 창술 대신 리치와 특유의 위압감으로 혼자서 다수의 적을 상대 가능한 월도나, 단병접전에서 우위를 가져갈 수 있는 도검과 전투 레슬링(권법,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을 병과에 상관 없이 연마하던 게 후기 조선군이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아무래도 상관 없을 여담이지만 구한말 편쌈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성내 매질꾼들의 특기로 꼽힌 것 중 하나가 육모랑 발차기를 잘 쓴다는 것 외에도 횡렬 산개로 쳐들어 가는 것이었다 하는데, 어쩌면 후기 조선 중앙군의 기초 전술이었던 층진을 군영 출신들이 많았을 성내 매질꾼들이 편쌈에서 그대로 사용했었던 게 아니었을까?

 

(다양한 상상의 여지가 있을 듯 하다.)

 

어쨌든 워낙 글이 길어졌으니 세줄요약(?)으로 마무리 하자면

 


1. 창대의 재료 수급 문제와, 병사 사이의 간격이 넓어 병사 혼자서 커버해야 하는 범위가 크다는 층진의 특성상 후기 조선군은 창을 거의 쓰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


2. 원거리 화력투사를 1번으로 친 것은 맞지만, 통설과는 다르게 조선군은 백병전을 생각 이상으로 의식한 군대였다.

 

애초에 무예도보통지의 작성과 보급 그 자체가 층진의 강점이자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느슨한 전투대형이 주는 문제를 병사 개개인의 무예실력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커버하고자 한 국가적 노력의 결정체였다고도 볼 수 있을 정도다.


3. 층진의 특성상 전열이 두텁지 못해, 필요에 따라선 후열에 위치한 사수와 포수마저 적극적으로 백병전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구조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군영을 막론하고 검술 합격자가 최소 30%~40%를 차지하며, 특히 훈련도감의 경우엔 합격자의 수가 기병을 제외한 보병의 총원과 거의 일치하는데, 이들이 검술(50%)과 권법(47.8%)으로 반반씩 나뉜 건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과 연관되어 권법을 익숙히 여기는 지역적 특색(서촌/하도감) 뿐만이 아니라 1인분을 하기 위해선 포수나 사수 또한 백병전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 있던 결과일 수 있다.


 

정도가 될 것 같음.

 

물론 이게 윗대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의 공식 입장이라던가 연구,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이렇게 해석도 가능하다 정도로 받아들여 주면 좋겠음.

 

잘 읽었다면 추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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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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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익명_985222 작성자

개인적인 관점이지만 후기 조선군의 삼수병 체제와 층진이 전기 조선군의 오위진법을 충실하게 계승하기는 커녕 개악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사수/포수들까지 백병전을 대비한 검술 훈련을 빡세게 시켜야 하는 환경이 되었다는 점이라 생각되는 게,

 

조선 전기의 오위진법을 기준으로 하면 아래와 같이

 

image.png

(출처:https://blog.naver.com/laguel/222306355808)

 

근접병종과 원거리 병종의 조합이 3:2로 생각보다 조화로운 편이지만(단창병도 있음) 조선 후기의 삼수병 체제에서 살수와 사수/포수의 병력 조합은 1:3으로 압도적으로 원거리 병종의 숫자가 늘어나게 되는 반면 정작 그 원거리 병종이 활약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줄 살수의 숫자가 줄어들게 됨.

 

비슷한 경향이 서양에서도 일어났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그 동네는 장창방진이 현역이어서 총병들이 화력을 투사할 수 있는 시간과 기병에 대한 저지력을 제공해 줄 수 있었는데 조선군은 그조차도 안 되서 근접전 실력이 이래저래 떨어질 수밖에 없는 사수나 포수가 칼을 들고 우랴돌격을 하게 만들었으니...

22:17
24.12.30.
임진왜란 때 백병전으로 처발렸던 트라우마가 강하게 반영되어서 선조부터 정조 때까지 백병전 역량 향상에 심혈을 기울이는 게 일관되게 나타나긴 함. 무예도보통지도 그 결과물이고...
19:43
24.12.30.

임란때 백병전으로 쳐발린 것도 결국 층진의 바탕이 되는 오위진법이 가진 근본적 한계 때문이었음.

 

오위진법은 최전선의 팽배수가 전열의 주축이 되고 그 뒤를 장검병과 총통수, 궁수가 받쳐주는 일종의 분대전술 체제로 각 분대간 일정한 거리를 둬서 전술간 유연성을 추구한 진법이었고, 이 말인즉 분대 뿐만이 아니라 소대, 중대, 대대 차원에서 손발을 오랫동안 맞춰야 1인분을 하는 구조였단 얘긴데 임란 초 조선군은 다들 알다시피 그런 거 없다(...) 상태였으니 병사 개개인이 백병전에 잔뼈가 굵은 일본군을 상대로 박살이 날 수밖에...

 

뭐, 임란을 거치면서 절강병법을 받아들이는 등 분대전술을 재조직 하려는 노력이 있긴 했던 듯하지만 본문에 나온 것처럼 장창이 가성비 문제로 나가리 되고, 어영청의 중순표를 보면 알 수 있듯 분대전술(원앙진)의 핵심인 등패도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걸 보면 정조의 무예도보통지 편찬도 사실상 조선 초의 오위진법과 절강병법의 개악(...)에 가깝던 조선의 삼수병 체제를 병사들의 백병전 기량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최대한 쓸모 있게 만들어 보려던 고민의 결과물이 아니었나 싶음.

20:10
24.12.30.
익명_940810
백병전 뿐만 아니라 대규모 집단전술에서도 잔뼈가 굵은데다 부사관, 장교급 인재풀에서도 차이가 많이 났지.
15:04
24.12.31.
2등 익명_321660
정조의 무예도보통지 편찬 이유가 이렇게도 해석이 될 수 있겠네. 확실히 병사들이 백병전 능력이 떨어지면 큰일 나는 시스템이긴 했구만...
20:56
24.12.30.
본문에 딱히 적지는 않았지만 사실 저 층진이란 게 이상은 좋아도 현실적으론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닌 진법이라...

ㄹㅇ 병사라도 정예하지 못하면 답이 안 나오는 구조인데 그렇다고 군제 시스템 자체를 갈아엎지는 못하는 상황이니 궁여지책으로 한 정책이라는 느낌적 느낌쓰...
21:54
24.12.30.
익명_321660

하긴. 일반적으로 군대를 개혁한다고 하면 제식이나 전술을 손보기 마련인데 그런 거시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의 개혁이 불가능하니까 어쩔 수 없이 무예교본을 보급하는 걸로 퉁쳤다고 볼 수도 있겠구나. 뭔가 납득되면서도 좀 웃프네..

22:32
24.12.30.

전통적으로 원거리 병종이 많은 만큼 반대로 근접 병종은 적었을테니까 백병전 대비로 사수들에게도 검술을 배우게하긴 해야 했을 것 같음. 전투 환경 자체도 산지가 많았을 테니 진형 갖추기 어려운 상황도 고려해야 하고

그래서 그런지 창도 장창보다는 단창을 선호한 듯. 세종 시기에 사용되던 창의 길이가 1m 후반에서 2m 중후반이었다고 함.

21:51
24.12.30.

개인적인 관점이지만 후기 조선군의 삼수병 체제와 층진이 전기 조선군의 오위진법을 충실하게 계승하기는 커녕 개악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사수/포수들까지 백병전을 대비한 검술 훈련을 빡세게 시켜야 하는 환경이 되었다는 점이라 생각되는 게,

 

조선 전기의 오위진법을 기준으로 하면 아래와 같이

 

image.png

(출처:https://blog.naver.com/laguel/222306355808)

 

근접병종과 원거리 병종의 조합이 3:2로 생각보다 조화로운 편이지만(단창병도 있음) 조선 후기의 삼수병 체제에서 살수와 사수/포수의 병력 조합은 1:3으로 압도적으로 원거리 병종의 숫자가 늘어나게 되는 반면 정작 그 원거리 병종이 활약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줄 살수의 숫자가 줄어들게 됨.

 

비슷한 경향이 서양에서도 일어났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그 동네는 장창방진이 현역이어서 총병들이 화력을 투사할 수 있는 시간과 기병에 대한 저지력을 제공해 줄 수 있었는데 조선군은 그조차도 안 되서 근접전 실력이 이래저래 떨어질 수밖에 없는 사수나 포수가 칼을 들고 우랴돌격을 하게 만들었으니...

22:17
24.12.30.
https://cafe.naver.com/gsmann/505
https://cafe.naver.com/gsmann/518

이 내용이 단서가 될 수도 있으려나? 간단히 요약하자면 조선 창은 보병용으로는 써먹기가 곤란한 형태인데(기병용으론 가능) 조선군은 500년 내내 그 형태를 고집스레 유지해왔다는 거. 근데 단순히 창술을 도외시했다기엔 무예도보통지에 죽장창-기창-장창으로 창술 커리큘럼은 꽤 충실하게 실려 있단 말이지.
11:00
24.12.31.

글고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에도 창이 아예 없지는 않은 거 같은 게 고검연에서 2주 전쯤에 창술판이 벌어진 적 있었는데 창대 잡는 요령만 배우고 품밟기&활갯짓했더니 팔극권 육합대창 상대로도 어느 정도 공방이 가능했고 창술 30년 하신 분께도 호평받음(ㅄ같이 하면 가차없이 까는 분인디)

물론 기술이 있는 거랑 그 기술이 주력 전술로 선호받았냐는 별개이긴 하지만.

11:08
24.12.31.

커리큘럼 자체는 있었어도 현장에서 창술이 딱히 선호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싶은 게,

어영청중순표를 보면 의외로 당파 같은 경우엔 시대를 불문하고 고정 사용층이 유지되는 반면 창술은 1755년 이전엔 어찌저찌 10퍼센트 정도의 사용률을 보이다가 1755년를 기점으로 사실상 맥이 끊기는 모습이 나타남.

장창은 본문에 언급한 것처럼 가격과 재료 수급 문제가 워낙 커서 자연스럽게 도태된 걸로 보이고.

무엇보다 1795년 정조 시대에 실시된 중순에서도 총원 7070명 가운데 3프로도 안 되는 인원만이 창술로 중순을 통과한 걸 보면, 무예도보통지의 충실한 커리큘럼은 점점 창술이 도태되어가는 현장의 상황을 어떻게든 바꾸기 위해


"제발 이거라도 보면서 창술 좀 익혀라."에 더 가까웠던 게 아니었을까 싶음.

14:51
24.12.31.
이 글 펨코에서 퍼갔네요.
https://www.fmkorea.com/best/8006301354
16:21
2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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