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태껸의 뿌리는

익명_52638603
242 0 7

내가 그냥 추측해보는거긴 하지만 태껸이란 무술은 수박과 각저(각력의 또 다른 말) 두 가지가 합쳐져서 생긴 무술이 아닐까 싶다.

 

미리 수박(手搏)을 잘하는 자 50여 명을 뽑았다가, 누하(樓下)에서 승부를 겨루는 것을 관람하게 하니, 갑사(甲士) 최중기(崔仲奇)가 6사람을 이겼으므로, 정포(正布) 3필을 하사하고, 한유(韓宥)는 4사람을 이기매, 정포 2필을 하사하였다.(預選善手搏者五十餘人, 角勝于樓下而觀之。 甲士崔奇勝六人, 賜正布三匹; 韓宥勝四人, 賜正布二匹。 旣罷乃獻壽, 宗親及兵曹堂上、代言等侍宴, 各以次進爵。)​​​​​​  -세종 1년(1419) 7월 1일

 

요 문헌에서 알 수 있듯이 수박은 조선 시대에 있었던걸로 볼 수 있음.

그리고 각저라는 것에 관한 기록이 하나 존재하는데,

 

내가 잘못 헤아린 일이 있는 것은, 군관(軍官)으로 봉급을 주는 자는 매우 수효가 적은데, 무사(武士)는 반드시 여력(膂力)이 있는 자를 뽑아야 하기 때문에, 모래 20말[斗]을 공석(空石)에 넣어서 들어올리게 하였는데, 능히 드는 자는 전연 없고 혹시 반(半)쯤 드는 자가 있으면 문득 부료 군관(付料軍官)에 뽑아 넣었으며, 혹은 각저(角觝)를 잘하고 혹은 초거(超距)가 조금 나으면 또한 뽑혔으니(후략)( 積有錯料事, 軍官給料者, 甚爲數少, 而武士必取膂力者, 故盛沙卄斗於空石, 使之擡擧, 則能擧者絶無。 或有半擧之人, 則輒爲抄入付料, 或善角觝, 或超距稍勝, 則亦爲見抄, 此不過或有出戰之事, 則欲以此爲身邊親近之兵, 皆出於爲國選士之意, 而聞有謗言, 旋爲停抄。) - 숙종 6년(1680) 4월 10일

​​​​​​​​​​​​​​​​

이와 같이 조선 초중기에는 수박이랑 각저라는 것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문헌에는 수박과 각저라는 말이 안나오고 탁견(태껸의 이두식 표현)으로 대체되게 되는데, 조선 정조 2년(1798)에 이만영이란 사람이 집필한 재물보라는 문헌에 따르면

 

수박(手搏)은 변(卞)이라고 하고 각력(角力 [각저를 일컫는 또 다른 말] 힘겨루기, 씨름)은 무(武)라고 하는데 지금에는 이것을 탁견이라 한다."(卞 手搏爲卞 角力爲武 苦今之탁견)

 

이걸 보면 태껸은 최소 조선 중후기부터 기록이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송덕기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태껸을 지칭하는 또 다른 말인 "박양박수 박양서각"  이라는 명칭으로 보아서 (위대 수련자 분이 박양은 사람 이름이라 하더라.) 박수와 서각은 수박과 각저(각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음.

박양이라는 사람은 박수와 서각이 합쳐진 태껸이란 무술을 정립한 사람일테고, 태껸은 서울 사대문 안에서 성행했으니 박양이란 사람이 정립한 태껸이 퍼져나갔다고 볼 수 있다.

 

자연스럽게 태껸이란 무술이 뿅하고 체계적으로 등장했다기엔 태껸춤이라는 자료 같은게 있고, 위대에서 하는 겨누기 자세나 그런게 있기 때문에 박양이란 사람이 태껸을 정립하고 그게 이어져내려왔다고 본다. 다만 개인이 이렇게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아마 박양이란 사람과 뜻이 맞는 자들이 태껸 전수에 힘쓰지 않았을까 싶다.

 

자유롭게 의견 댓글로 나누는거 백 번 환영이다.

 

 

 

 

신고공유스크랩

한달이 지난 게시글은 로그인한 사용자만 토론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공유

퍼머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