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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냥 추측해보는거긴 하지만 태껸이란 무술은 수박과 각저(각력의 또 다른 말) 두 가지가 합쳐져서 생긴 무술이 아닐까 싶다.

 

미리 수박(手搏)을 잘하는 자 50여 명을 뽑았다가, 누하(樓下)에서 승부를 겨루는 것을 관람하게 하니, 갑사(甲士) 최중기(崔仲奇)가 6사람을 이겼으므로, 정포(正布) 3필을 하사하고, 한유(韓宥)는 4사람을 이기매, 정포 2필을 하사하였다.(預選善手搏者五十餘人, 角勝于樓下而觀之。 甲士崔奇勝六人, 賜正布三匹; 韓宥勝四人, 賜正布二匹。 旣罷乃獻壽, 宗親及兵曹堂上、代言等侍宴, 各以次進爵。)​​​​​​  -세종 1년(1419) 7월 1일

 

요 문헌에서 알 수 있듯이 수박은 조선 시대에 있었던걸로 볼 수 있음.

그리고 각저라는 것에 관한 기록이 하나 존재하는데,

 

내가 잘못 헤아린 일이 있는 것은, 군관(軍官)으로 봉급을 주는 자는 매우 수효가 적은데, 무사(武士)는 반드시 여력(膂力)이 있는 자를 뽑아야 하기 때문에, 모래 20말[斗]을 공석(空石)에 넣어서 들어올리게 하였는데, 능히 드는 자는 전연 없고 혹시 반(半)쯤 드는 자가 있으면 문득 부료 군관(付料軍官)에 뽑아 넣었으며, 혹은 각저(角觝)를 잘하고 혹은 초거(超距)가 조금 나으면 또한 뽑혔으니(후략)( 積有錯料事, 軍官給料者, 甚爲數少, 而武士必取膂力者, 故盛沙卄斗於空石, 使之擡擧, 則能擧者絶無。 或有半擧之人, 則輒爲抄入付料, 或善角觝, 或超距稍勝, 則亦爲見抄, 此不過或有出戰之事, 則欲以此爲身邊親近之兵, 皆出於爲國選士之意, 而聞有謗言, 旋爲停抄。) - 숙종 6년(1680) 4월 10일

​​​​​​​​​​​​​​​​

이와 같이 조선 초중기에는 수박이랑 각저라는 것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문헌에는 수박과 각저라는 말이 안나오고 탁견(태껸의 이두식 표현)으로 대체되게 되는데, 조선 정조 2년(1798)에 이만영이란 사람이 집필한 재물보라는 문헌에 따르면

 

수박(手搏)은 변(卞)이라고 하고 각력(角力 [각저를 일컫는 또 다른 말] 힘겨루기, 씨름)은 무(武)라고 하는데 지금에는 이것을 탁견이라 한다."(卞 手搏爲卞 角力爲武 苦今之탁견)

 

이걸 보면 태껸은 최소 조선 중후기부터 기록이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송덕기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태껸을 지칭하는 또 다른 말인 "박양박수 박양서각"  이라는 명칭으로 보아서 (위대 수련자 분이 박양은 사람 이름이라 하더라.) 박수와 서각은 수박과 각저(각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음.

박양이라는 사람은 박수와 서각이 합쳐진 태껸이란 무술을 정립한 사람일테고, 태껸은 서울 사대문 안에서 성행했으니 박양이란 사람이 정립한 태껸이 퍼져나갔다고 볼 수 있다.

 

자연스럽게 태껸이란 무술이 뿅하고 체계적으로 등장했다기엔 태껸춤이라는 자료 같은게 있고, 위대에서 하는 겨누기 자세나 그런게 있기 때문에 박양이란 사람이 태껸을 정립하고 그게 이어져내려왔다고 본다. 다만 개인이 이렇게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아마 박양이란 사람과 뜻이 맞는 자들이 태껸 전수에 힘쓰지 않았을까 싶다.

 

자유롭게 의견 댓글로 나누는거 백 번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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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_84595780 2020.11.30 23:23

    이후 태껸으로 기록되다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권법, 유술 등으로 지칭됐다는 의견을 갖은 학자들이 많다. 민간 음지에선 태껸으로 불리고 행정적인 국가 기록은 일관이 있지도 없지도 않을 정도로 권법일때도 유술일때도 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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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_52638603 2020.11.30 23:44
    @익명_84595780 에게

    그 글은 어디서 본거야? 그런 글은 못봤었는데 링크 좀 달아줘. 내용이 보고 싶네. 근데 조선에선 권법, 유술 이런 말은 쓰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 해동죽지나 백긴통비각술이란 말만 봐도 주로 발로 하거나 잡아서 넘어뜨리는 식으로 묘사가 되있어서. 권법이란 표현은 안썼던걸로 아는데 처음 들어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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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_84595780 2020.11.30 23:47
    @익명_52638603 에게

    실록 찾아보고 뒤져보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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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_52638603 2020.11.30 23:57
    @익명_84595780 에게

    찾아보니 실록엔 그런게 없고 무예도보통지에 있긴 한데 여기 나오는 권법은 택견이랑은 관련이 없는 장권인데? 애초에 수박과 각력이라는 이름이 실록에 실려있는데 그걸 수박이라고 했으면 했지,

    갑자기 권법이라 하는 것도 이상하고 무엇보다 조선 말 해동죽지나 백기신통비각술이라는 명칭을 봤을 때 발로 하는 무술로 시선이 보인거 같은데?

     

    실록엔 안나와있는데 그 공식적인 문서는 무슨 문서야? 그리고 그렇다고 확신한 학자들은 누구야? 학자들 의견이면 분명 논문 자료로 정리가 되있거나 구술자료나 인터뷰 같은게 남아있을텐데?

    링크 좀 띄워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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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_13011162 2023.01.31 11:43
    @익명_52638603 에게

    무예도보통지의 권법이 택껸의 유래라는 말은 당연히 아니지만,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하긴 좀 애매한게, 택껸을 수련한 계층 중에 한량이나 군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을텐데, 이 사람들 중에 무예도보통지의 권법을 안 배운 사람이 없을리가. 게다가 중국에 청나라가 들어서고 명나라 유민 중 상당수가 조선으로 망명했는데, 그 중에는 군인 출신들도 상당수였고, 서울에 정착한 사람들도 많았다함. 당시에도 택껸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영향은 받았을거라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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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_67174236 2020.11.30 23:53

    누군가 손을 안 댔을리가 없지. 당장 품밟기만 해도 처음에 잡고 가더라도 나중에 다시 깨닫고, 잡아야 하는 개념들이 몇갠데. 일개 민속놀이로는 도저히 나올수 없는 디테일들 투성이고, 이것 때문에 난 택견의 본질이 무술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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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_20329107 2020.12.01 00:00
    @익명_67174236 에게

    김영만 선생님 택견 근현대사 내용을 누가 여기 저장소에 정리해두었는데, 암만 봐도 놀이로는 볼 수 없더라 ㅋㅋㅋ 일단 송덕기 할아버님의 스승이신 임호 선생님도 장안 8장사로 불리셨다 하니깐.

     

    위대태껸회를 보면 위대태껸은 되게 디테일적인게 많은거 같은데 당장 결련택견협회에서 배우는 옛법, 그냥 기술만 하더라도 배울게 많은데 ㅋㅋㅋㅋ

     

    나도 태껸은 무술이라고 봐. 다만 무술 안에 유희적 성격을 띄고 있는 놀이가 어느 정도 포함되있었다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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