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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은 평민(상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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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중인이란 양반도 아니고, 상민도 아니고 그 중간에 있어 가장 교화되기 어려운 존재이다.  권일신, 최필공 등에게 의리를 일러 스스로 새롭게 되게 하라(≪정조실록≫권 33, 정조 15년 11월 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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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中人)은 조선의 특수 신분으로, 양천제 분류로는 양인이지만 대과 응시가 불허된, 지배층도 아니고 피지배층도 아닌 중간의 특수계층을 말한다.

 

전반적으로는 고려 기득권층 중 사대부가 아닌 이들의 후손으로, 일반 상민과 달리 양반처럼 한문으로 이름을 짓고 성씨와 관향이 있으며 족보도 가지고 있지만 대과 응시를 할 수 없었다. 이는 정도전이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면서 고려 말의 폐단을 야기했던 부원세력, 향리세력, 상인세력을 한꺼번에 박살내기 위해 취한 극단적인 조치의 영향이다. 명분을 살펴보자면 부원세력은 몽골어 통역으로 원나라 황실에 아부하며 매국을 했고 향리세력은 중앙정부의 지방행정에 반항했으며 상인세력은 사병보유와 재정교란으로 고려의 내정을 파탄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이 중인은 좁게는 역관(譯官), 의관(醫官), 율관(律官), 산관(算官), 화원(畵員) 등 잡과 출신 기술 관리를 가리켰다. 지금으로 치자면 외무공무원이나 지적직 공무원, 의무직 공무원 등 기술직 공무원, 법원공무원, 연구직공무원에 해당되는 집단이 여기에 속했던 것. 넓게 보자면 여기에 관청에 소속된 녹사 아전과 이들의 자손들, 상단 행수급 이상 상인들과 지방 의원 및 양반의 서얼들이 포함된다.

잡과에 급제해도 벼슬을 받기는 하지만, 문,무과에 비해 낮은 접을 받았으며(다만, 중인은 무과응시가 가능했다), 승진 품계에 한계가 명확했기에(한품서용) 문과 급제 가문에서는 잡과를 천시했고, 사대부로 대접 받지 못하는 이들을 가리켜 중인이라 하게 된 것이다.

 

중인들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체제적 노선 때문에 불이익을 받던 자들이었으므로 양천제가 사실상 반상제로 바뀌면서 양반과 상민의 구분이 짙어지던 때에도 양반들은 법적으로는 대과 응시가 가능한 상민보다 그나마 족보도 있고 돈도 많은 중인들을 더 경계하고 멸시하였다. 심지어 양반이 가세가 기울어 잡직으로 진출하면 양반자격이 박탈될 정도. 단적인 예로, 의주 만상 도방 임상옥이 지방 사또에 제수되어 근무 하던 중에 사저를 좀 크게 지었는데, 암행어사가 이걸 보고 감히 양반도 아니면서 집을 크게 지어 양반을 우롱한 죄로 봉고파직을 해버릴 정도였다. 심지어 국왕에게 직접 벼슬을 받았는데도 양반 대접을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중인이 멸시받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왕실 직속 경호원인 별감이 되는 것이었다. 별감은 국왕과 왕비와 왕세자의 수족이었으므로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별감은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된 대신 막후에서 막대한 금전적 이권과 사치를 누렸고 화류계의 큰 손으로써 유행을 주도했다. 물론 의관으로서 왕의 주치의가 되는 사례도 있었으나 하고싶다고 할 수 있는게 아니었고...

 

중인들은 대개 한양 중심에 살았는데, 가운데 신분이라서가 아니라 가운데 살기 때문에 중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양천제였으므로 중인은 공식적인 신분은 아니었고, 실제 사회적 대우로 구별된 계층이었던 것이다. 양반에 비해 여러 차별 대우를 받았지만 전문기술자로서 실무를 담당했고, 그 중 잡과 합격자들은 일단 관료로 대접은 받았기에 일정의 권리를 누렸고 수완을 발휘하는 자들은 양반 이상의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특히 역관들은 사신단에 참여하여 무역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중인들의 직역은 대체로 세습되어 의관 가문, 역관 가문 등이 나타났고 전통의 과학 기술들도 중인 가문들을 통해 후대에 전해졌다. 따라서 조선 후기 해외와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양반 문화와는 별개의 중인 문화를 만들었으며, 이들은 경제력이 강하면서도 중간에 끼어있다는 처지 때문에 특유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다. 조선 후기 서민 문화의 상당 부분은 이들이 만들어나간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치부가 쉬워졌던 것은 조선 후기의 생산력이 조선 전기보다 급속히 확대되었기 때문이었다. 양란 후에 경제규모가 회복기에 접어들고 대동법과 균역법의 실시로 인한 상공업의 발달이 곧 생산력의 증대로 이어지면서, 경아전들은 여기서 발생한 잉여생산을 통치구조가 이완된 틈을 타서 중간에서 흡수하고 부를 증식하였다. 중개무역을 통했던 역관은 부는 무역활동에 재투자되는 자본의 속성은 갖고 있었으나, 경아전의 부는 생산활동과는 유리된 것이었고, 재생산을 위해서 재투자자본으로 축적해야 하는 요건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여기에서 그들의 부는 소비적이고 유흥적으로 흐를 소지가 농후하였다. 이것은 조선 후기에 경아전들이 문학과 음악 및 그림 등 예술활동에 기울어지는 기반이 되었다.

 

서유럽에서 최초의  공중(대중)형태는 17∼18세기에 문학적 공중형태였다고 한다. 그들의 토론주제는 처음에는 예술적 문제에만 국한되었으나, 점차 정치적인 문제로 바뀌어가면서 공중의 성격 또한 정치적으로 변모하여 갔다. 이러한 변화형태에서 보면, 18세기 조선사회에서 나타난 양반사대부의 독점물이었던 지식의 대중적 확산과 서울주민들이 소설·판소리 등 예술활동을 즐기는 경향은 이른바 문화적 공중의 형성 및 확산단계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별감의 경우 중인 중에서도 격이 낮은 하급 관료 집단이었지만 임금의 곁을 보좌했기 때문에 왕들이 봐주는 경우가 많았으며, 조선 후기로 가면 별감 출신들이 궁녀가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측근 집단이었다. 또 기방의 주인이며 유행을 선도한 오렌지족이기도 했다.

 

중인들의 해외무역을 통한 富의 축적과 의식의 향상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현저해졌다. 특히 그들의 활동은 사회경제면에서 두드러졌는데 효종 6년(1655)까지 상평통보를 발행한 수십만 관이 중인 10개 집안의 재산에 해당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중인들이 활약하던 왜관을 통한 사무역은 대륙의 정세가 안정되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까지 번영하여 많을 때는 1년간에 은 6,000관에 달할 정도였다. 중인들의 신분의식은 17세기 이후 詩社運動으로 나타났다. 역관시인 洪世泰가≪海東遺珠≫를 펴낸 이래 중인의 처지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흙 속에 묻힌 진주격으로 표현되었다. 중인은 외국문물의 도입이나 정보에 밝았고, 사고방식이나 행동이 현실적이며 변화에 민첩하고 계산적이어서 유교문화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 결과 중인들은 개화운동의 선구자나 고위직관료로 진출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되었다. 개화당의 형성과 지도에 이바지하였던 역관 吳慶錫과 劉鴻基나, 또는 갑신정변에 깊이 관여했던 승려 李東仁이 그 실례가 될 것이다. 조선 말기 정치지배층 가운데 잡과출신이 1.5% 이상 되었고, 개화관료 중에는 11.6%가 잡과출신이었다. ≪大韓帝國官員履歷書≫에 기록된 3,150명 중에는 적어도 67명 이상이 잡과의 합격자였다.

 

중인이 담당하던 전문업무는 과거 양반사회에서는 2차적이었으나 근대사회에서는 1차적으로 중요한 지식이었다. 근래 사회학방면에서는 조선시대에 양반체제가 500년 이상 지속된 원인의 하나로서 중인 중에 하급 행정실무자들이 현실적으로는 지배엘리트의 일부가 되어 하층의 불만, 분노와 공격으로부터 지배자인 양반계급을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조선왕조는 그만큼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러한 견해는 조선시대의 중인계급을 이해하는 데 한 가지 시사가 되고 있다.

 

갑오개혁 때 내각의 대신 가운데는 과반수가 서자나 중인의 출신배경을 갖고 있었고, 광복 이후 제헌 국회의원 중 60%이상의 출신 가계가 중인 계급이었다. 천민, 양인들은 여전히 까막눈이었고 양반들은 일제의 탄압을 많이 받았거나 변절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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