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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박치기와 날파람 2편~ 짤린 부분 이어서 3편

익명_465205
2592 4 10

안녕하세요.
저는 '프로젝트 우리몸짓이야기'에 참여 중인 사람입니다.
참고로 '우몸이'는 단체가 아니라 프로젝트 명이랍니다.
저는 무술 외에 것으로 참여중인데 여기 커뮤니티에 보고서가 올라왔다고 해서 방문했습니다.
평소에 택견에도 관심이 많구요.
작년 글을보니 '평안도 박치기와 날파람2편'의 글이 중간에 짤려 있더라구요.

뒤가 더 꿀잼인데~~~
원래는 저희만 보던 글인데 여기저기 오픈이 되어서 이제는 신경을 안쓰는 것 같습니다. ㅎ
재밌고 신기하니까 막 퍼나르는듯 ^__^
짤린 페이지부터 다시 연결해봅니다.


~2편에 이어~~ ^__^

◇선생4: 당시에 일본이 근대화를 빨리 시작하면서 유도나 레슬링, 권투 이런 걸 좀 빨리했거든요. 그런데 이 유도 같은 경우에는 너무 강한거야. 
나도 아버지한테 자주 들었는데, 당시에 지금 서울, 말하자면, 거기 일본 순사들 있는 경무국, 뭐 경찰서 같은 곳이겠지. 거기 유도를 하는 무도 경관들이 서울에서 주먹 좀 쓴다는 깡패들, 당시 주먹패들, 도전을 얼마든지 받아줬다더라고, 
또 YMCA같은 데서도 권투나 레슬링 하는 사람들도 언제든지 도전을 받아주고, 
그런데 안된다고, 전통 무술이고 뭐고 갔다 하면 다 깨지는데, 그 옛날에 김두한씨가 일본 유도 경관 있잖아. 야인시대 보면 나오는, 
 
◇기자: 마루오까 경부요. 
 
◇선생4: 그래, 그 사람을 이기려고 부하들 보내서 기술 훔쳐보고, 연구하고 했다잖아. 
그리고 결투를 도장에서 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종로 한복판에서 한 거지. 
그만큼 이를 간 거라고, 이긴 사람이 없으니까. 그때 전통 무술이 뭐가 있는데? 
다 작살이 났지. 
 
◇선생5: 저희 할아버님도 일본 무술이나 당시 권투, 레슬링 이런 게 너무 강하다 보니까, 우리 무술이라는 게 빨리 사라졌을 거다. 하셨거든요. 
진짜 강하면 어찌 되었든 유지가 되죠. 그런데 뭐가 무서워서 일본이 전통 무술을 못 하게 막겠어요? 또 당시 날파람 같은 경우도 패싸움을 너무 심하게 하니까, 같은 조선 사람들이 민원을 제일 많이 넣었다고 했거든, 
 
◇기자: 같은 조선사람이요.  
 
◇선생5: 당시에 패싸움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해야 돈도 던져주고 하니까, 그럼 시내 같은 곳에서 많이 했겠죠. 장사하는 사람들이 가만있겠어요? 
 
◇선생4: 가게들이 피해를 보니까, 
 
◇기자: 그런데, 한국 전쟁 때부터 난다리는 조금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일본에서 배우러 오기도 했다고 들었거든요. 
 
◇선생5: 난다리라고 불리던 그 때 기술은 날파람과 많이 다르다고 봐야죠. 
권투 처럼 원투 같은 거도 있고,  
 
◇선생4: 뭐 예전 어른들은 다들 뭐라고 했냐면, 권투에다 박치기, 팔꿈치, 무릎 쏘기 이런 걸 섞어둔 거다 했지. 
 
◇선생5: 이 부분은 과거 어른들이 의견이 다양한데, 먼저 훈련법을 생각해보면, 
 
◇기자: 그 6가지 훈련법 말씀하시는거죠? 
 
◇선생5: 네, 그렇죠. 그 훈련법을 보면 뭔가 체계적이에요. 머리를 천천히 단련시키고, 박치기를 할 때, 목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는 단련이라던지, 뭔가 과학적이라고, 
근데 이런 훈련법을 그냥 날파람꾼이 만들었다? 난 이게 조금 이상해요. 
어른들이 하는 얘기는 훈련법은 그냥 주먹쟁이들이 만들었을리가 없다. 분명 옛날 군이나 그런, 어떤 기관 같은 곳에서 정리를 하지 않았겠느냐, 하셨거든, 
 
◇선생4: 옛날에 X관장하고 X장로님하고 날파람이나 평안도 박치기 찾아 다닐 때, 어떻게 조금 아는 양반들은 봤는데, 훈련법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거든. 
 
◇기자: 그럼 지금 이 훈련법은 누가 전수를 하신거죠?  
 
◇선생4: 처음에는 X장로님 부친이 알고 계셨고, 그분이 여기 목사님 조부께 확인을 해보니, 서로 아는 게 같더란 말이야.  
 
◇선생5: 원래 훈련법이 10가지 정도 되었다는데, 전해지는 게 6가지에요. 아마 날파람때  모습도 있을거고, 그 후에 조금 변하기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훈련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드물었어요. 이 분들이 한국 전쟁 당시에 육박전을 하면서, 노하우가 쌓인거지. 
 
◇기자: 날파람을 하셨던 분들이요? 아니면 훈련법을 알고 계시는 분들? 
 
◇선생5: 날파람 훈련법을 알 고 있는 사람들이 실전을 겪으면서 그 경험을 토대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 난다리라고 보는 거지. 
좌익들과 싸우고, 전쟁터에서도 싸우고 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해야 되나, 
신식 스포츠를 경험하면서 거기다 박치기도 넣고 했겠죠. 
나중에 통일이 되어서 보면 알겠죠. 북한에 날파람이 남아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모습은 여기 남쪽에서 새롭게 정리된 것이랑 많이 다를 것 같해요. 
 
◇기자: 참, 역사라는 게, 연결 고리를 찾기가 쉽지 않네요. 
 
◇선생5: 뭐 계속 반복하는 이야기지만, 정리하면, 현대식 격투기 기법이 섞인 평안도 박치기 또는 난다리 속에 오래전 날파람의 흔적이 남아있는 거죠. 
일본 무술인들도 궁금했겠죠. 일제 강점기 때 조선인들 박치기는 유명했으니까, 그런 게 현대적으로 변화되었으니 궁금할 테고, 또 평안도 출신들 중에 배 타는 일 하면서 일본을 많이 갔잖아요. 
거기서도 야쿠자들이랑 마찰이 있었고, 그때마다 박치기가 또 알려졌고, 그런 거죠. 
또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번 하면 잘하잖아요. 
그 옛날에 권투, 레슬링, 유도가 신기했겠지만, 반대로 배워서 얼마나 유명한 선수들이 많이 나왔어요. 대단한 집념이죠. 


● 박치기의 비밀, 훈련법 ● 
 
여기서 부터 위 인터뷰에 도움 주신 (선생4 / 현 74세), (선생5 / 현 75세) 두 분과 새롭게 (선생6 / 현 81세)께서 함께 해주셨다. 
박 장로님이라고 부르는 선생6은 평양이 고향이시다. 어릴 적 부친에게 날파람을 배웠는데, 기술 보다 훈련법을 가장 많이 연습하셨다고 한다. 재밌는 이야기들을 많이 가지고 계셨다. 
 
◇선생4: 내가 봤을 때, 우리 목사님하고 장로님이 아마 날파람에 관련된 이야기는 제일 많이 알고 계실거라. 
 
◇선생6: 무슨, 내보다 저 목사님 조부가 많이 알고 계셨지. 나도 그만큼은 아니고, 
 
◇기자: X장로님하고 또 그 두 분은, 
 
◇선생4: 그 두 분은 연세가 90이 넘어서 오래 기억을 하시는 거지. 속속들이 아는 걸로는 여기 X장로님이 더 많이 아신다고, 
 
◇선생5: 창로님 참 오랜만에 뵙는데,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제가 부산으로 자주 찾아봬야 하는데, 이 먼 데까지 와주시고, 
 
◇선생6: 아이고, 울산이 뭐 멀다고, 뭐 어찌 도움을 드려야 되노. 
나도 한참만에 꺼내는 이야기들이라, 이제 가물가물하거든. 
 
◇선생4: 여기 X대표님한테 뭐 이런저런 얘기 들려주시면 됩니다. 아까 얘기한 거, 저 훈련법 같은 거, 그거 물어봤죠? 
 
◇기자: 네, 그 훈련법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거든요. 처음에 박치기에 대한 이야기들 정리하면서 사실, 날파람도 신기하고, 난다리도 신기하고, 박치기에 대해 듣는 이야기들 전체가 다 신기하고 재밌더라구요. 
그런데 훈련법은 좀 더 뭐라고 할까요, 너무 비밀스럽다고 해야 하나, 
 
◇선생6: 보자. 그게, 지금 훈련법이 6가지라고 하는데, 내용이 아마, 점찍기, 턱걸이, 모서리 다지기, 따닥, 주먹 단련하는 거, 그 담에 저거, 노리개 잡는 거(주머니 치기) 이렇게 있는데, 
옛날에는 몇 가지가 달랐어요. 여기 목사님 조부도 비슷하게 기억하셨거든, 
여기서 옛날부터 내려왔다고 하는 거는 점찍기 하고 모서리 다지기, 따딱 걸이, 그다음에 지금은 안 하는데, 저기 월담, 담 뛰어넘는 거, 4가지 정도였다고, 
 
◇기자: 네, 나머지는 대부분 70년대 이 후에 모아서 정리했다고 들었습니다. 
 
◇선생6: 그래, 뒤에 젊은 사람 몇이 그거(날파람) 다시 한다고, 찾아가지고 지금 6개라고 하는거지. 
 
◇선생5: 그러니까, 60년도에 X장로님 부친께서 우리 할아버님을 만나서 확인한 몇 가지에다가, 나중에 80년도 후반에 돌아가신 X관장님하고 여기 이 선생님하고, 또 X장로님하고 날파람 자료 찾으면서 나머지를 포함시킨 거에요. 
그 뒤에 따닥 걸이, 주먹 단련, 주머니 치기, 턱걸이 이런 게 포함된 거지. 
(따닥 걸이: 명칭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한국 전쟁 이후로 기법 형태가 달라진다.) 
 
◇기자: 그럼 따닥 걸이하고 주머니 치기, 턱걸이는 언제 만들어진 겁니까? 
 
◇선생6: 턱걸이는 여기 X목사님 조부가 기억하시던 거고, 따닥 걸이하고 주머니 치기는 그 때 죽은 X관장 부친인가 조부인가 한테 들었다고 했었거든, 
 
◇선생4: 조부가 알려줬죠. 
 
◇선생6: 조부라? 
 
◇선생4: 네, 조부가 기억하고 계셨다 카데요. 
 
◇선생6: 그런데 이 따닥 걸이라는게 재밌어요. 이게 평안도 기술이라고 하는데 말이야. 함경도 사람들도 비슷한데, 자세가 달라. 이름도 다르고, 
 
◇기자: 이름이 다릅니까? 
 
◇선생6: 다르지, 빠닥걸이, 빠다고리 뭐 이런 이름이라. 옛날 남해 출신들이 배를 많이 타는데, 피난 온 이북 사람들이 남해 사람들이 주인으로 있는 배를 많이 탔다고, 그럼 뱃 일이 험하잖아. 싸움이 자주 나지. 
근데 이 함경도 사람들이 박치기를 하면 신기해. 상대가 드러누웠는데, 그 누운 상대를 무릎이나 박치기로 또 찍어 누른다 말이야. 
그거 보고 남해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함경도 사람들은 싸울 때 뭉개더라, 몽글 트리삐더라, 뭉그리더라. 이랬다고, 
 
◇기자: 저희 조부나 부친도 고향이 남해라서 많이 들었습니다. 뭉갠다. 뭉개뿐다. 
 
◇선생6: 그래, 잘 알겠네. 그 따닥 걸이 훈련할 때 보면 두 가지가 있잖아. 서서 들어가는 게 있고, 허리를 숙여서 들어가는 게 있고, 그 허리를 숙여서 들어가는 게 함경도 식이라. 
나는 그리 알거든. 그런데 평안도 싸움 기술에 함경도 싸움 기술이 섞인다고? 
그거는 옛날에는 불가능하고, 아마 해방 지나고, 여기 경남에 피난 와서 섞인 게 아닌가 한다고, 나는, 
  
◇선생5: 그러니까 장로님 말씀은, 지금 훈련법이 한국 전쟁 이후에, 평안도식과 함경도식이 섞인 것 같다 그 말씀이에요. 
이 훈련법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죠. 
하나는 박치기를 할 때 머리나 목을 다치지 않기 위한 것이고, 두 번째는 더 강한 파워를 만들려고 하는 거고, 그런데 뭔가 신비하게 포장이 된 거죠. 
사람들에게 오픈하면 안 된다고 하고, 또 오래전에 선도 같은 수련을 한 사람이 만들었다고 하고, 또 저 점찍기는 축지법 하던 사람이 만들었다고 하고, 또 뭐야, 저 주머니 치기는 옛날에 유명한 소매치기가 연습하던 거라고 했거든요. 
이제는 시작 점을 찾는 거는 힘들고, 그런데, 참 신기하죠. 
훈련법은 어릴 때 하든지, 나이 들어 하든지 상관없이 그거만 해도 정말 건강에 큰 도움이 되거든요. 
요즘으로 말하면 다 있잖아요. 하체 운동, 유산소, 뭐 근력, 
 
◇기자: 아, 저도 인정합니다. 장수 운동이나 다이어트 같은 걸로 좋은 것 같습니다. 
뭐 지금 와서 사람 얼굴을 받는 박치기보다, 어쩌면 훈련법들이 공개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근데, 점찍기는 언제 부터 시작된 걸까요? 
 
◇선생6: 그게 참 말이 많았다. 옛날에 축지법을 하던 보부상이 아침마다 하는 걸 따라 했다.부터, 신식 체육을 배워온 외국인 선교사가 가르쳐 준거라는 것부터, 이야기가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외국인 선교사가 가르쳐 준 것은 아니고, 뭐 이제 와 확인할 길이 없지만, 내 생각에는 더 오랜전에 있었지 싶어. 
그 양반, 참 장수하다 가셨는데, 그 영감 있잖아. 
 
◇선생4: 정 영감님, 
 
◇선생6: 그래, 정 영감 
 
◇기자: 네, 그 분 이야기 들었습니다. 
 
◇선생6: 그래, 그 양반이 젊었을 때 이 점찍기를 지게를 지고 했다 했거든, 그 지게 위에 모래주머니를 채워서 했다고, 그래서 죽기 전까지 그 나이에도 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다리심이 좋았다고, 또 X장로 아버지, XXX장로님도 군용 포대에 모래를 채워서 점찍기를 했던 양반이라.  
그래가지고, 내가 한번 물어봤다고, 정 영감한테, 이 점찍기가 어디서 시작된 겁니까? 옛날에도 이 모양이었어요? 하고 물었다고, 
그때 그 양반이 하시는 말씀이, 조선 시 대때 평양에 있는 군에서 했다는 거야. 당시에는 이름이 달랐다고, 튀어 오르기, 솟구쳐 돌기, 뭐 이리 불렀다하데, 
그러면 훨씬 오래된 거지. 
여기 대표님은 점찍기 해봤어요? 
 
◇기자: 네, 지금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선생6: 어디서? 저기 체육관 같은데? 바닥이 평평한 데서 하겠네. 사면을 딱 찍어야지. 
 
◇기자: 네, 맞습니다. 뭐 건물 바닥이 일단 평평하니까요. 
 
◇선생6: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봐요. 여기 X목사님이나 이 집사는 어디서 했는지, 
 
◇선생4: 우리는 어릴 때 사면을 오르막에서 했거든, 계단에서도 하고, 조금 더 힘들었죠. 
 
◇기자: 아, 오르막에서 점찍기요? 생각만해도 힘든데요. 
 
◇선생5: 나는 잠깐 했어요. 근데 그 점찍기 덕은 많이 봤지. 사람들하고 축구를 하면 속도가 잘 나왔으니까, 
 
◇선생6: 사람들이 뭐 축지법이니 뭐니 별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서도, 확실 한 건, 옛날에 군에서 하던 훈련법이 맞는것 같해. 
보부상이 연습했다고? 무슨, 그런 걸 할 시간이 어딨어? 하루라도 빨리 돌아다녀야지. 장돌뱅이가 많이 돌아다니면 자연스럽게 다리심이 생기는 거지. 걸음도 빨라지고, 
그리고 날파람 좋아하는 주먹패들도 훈련법은 잘 모른다고, 노름 좋아하는 것들이 뭘 연습을 해, 반짝 놀고, 빨리 가는 거지.  
저기 점찍기는 생활체조로 아주 좋아. 많이 해. 
 
◇기자: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주머니 치기도 혹시 아시는 거 있으면, 말씀해 주십쇼. 
 
◇선생6: 주머니 치기, 노리개 치기, 주머니 뺏기, 이것도 이름이 여러 가지라. 
해봐서 알겠지만, 손이 빨라지는 연습이거든, 옛날에 권투 하는 사람들도 이걸 배워 가고 했다고, 뭐 아까 목사님도 말씀하셨지만, 옛날에 쓰리꾼(소매치기)들이 주머니를 훔치려고 연습하다가 생겼다는 말도 있고 한데, 내 생각에는 그건 아니고, 쓰리꾼이 몰래 훔치지, 뭐 하러 얼굴 빤히 보고 이런 연습을 하겠냐 말이야. 
이건 그냥 내 의견이니까, 대표님이 잘 헤아려서 판단하세요. 
나도 옛날에 이 주머니 치기가 궁금해서, 여기 목사님 조부 살아 계실 때, 몇 번 물어봤다고, 목사님은 기억을 하실 지 모르겠지만, 당시에 X장로님이 뭐라고 하셨냐면, 주머니 치기는 날파람에 있던 훈련법이 아니다.라고 하셨거든. 
 
◇선생5: 그렇게 말씀하셨죠. 
 
◇선생6: 그렇죠? 그래서 내가 그럼 어디서 왔을까요? 물으니까, 장로님이 뭐라고 하셨냐면, 모양새를 보면 꼭 샅바를 잡는 것 같으다. 이러셨다고, 
 
◇기자: 씨름 샅바요? 
 
◇선생6: 그래요. 그거,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옛날에 씨름이나 택견하는 사람들이 상대의 샅바나 다리 부위를 잡으려고 시작했을 거라는거야.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게 맞는 것 같단 말이야. 우리가 상대의 손을 열고 들어가서 씌우자마자 바로 박치기가 들어가는 그런 기술을 보면, 그 손을 여는 동작이 날파람에는 없었어요. 
그건 나중에 난다리라는 걸 하는 사람들이 새롭게 시작한 거라. 그니까 신식 기술이지. 
그래서 옛날에는 그 기술이  YMCA같은데서 권투를 배운 사람들이 섞은 거라 생각했거든. 
그게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이 주머니 치기에서 나온 것 같다는 말을 그 장로님이 하셨다고,  
 
◇기자: 그러고 보면 주머니 치기를 아래로 해서 그렇지, 손을 위로 하면 따닥 걸이가 되네요. 저희 연구팀에 주짓수를 오래 한 팀장이 그랬거든요. 100년전에 이런 스피드의 훈련이 있었다는 게 놀랍니다고, 
 
◇선생6: 계속해봐라. 손도 빨라지고, 눈도 빨라진다. 
 
◇선생4: 지금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이 오래 전에 X관장 이야기하고 겹치는 게, X관장 기억하십니까? 장로님, 
 
◇선생6: 아이고, 나지, 그 사람 때문에 그 때 우리가 연구를 다시 한거 아이가, 너무 일찍 갔어. 
 
◇선생4: 그 X관장하고 옛날에 같이 운동했던 분이 XXX씨라고 있는데, 그 양반이 미국 가기 전에 여기 대표님한테 X장로 연락처를 줘서 지금 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된겁니다. 
 
◇선생6: 아, 그랬나. 참, 그 양반 죽어서도 이렇게 하고 싶었나 보다.  
 
◇선생4: 아무튼, 그때 그 X관장 증조부였나, 오래돼서 기억이 희미한데, 이 주머니 치기를 X관장 조부였나 부친이었나 기억을 하고 계신 거지, 내 기억으로는 증조부가 알려줬나 그래. 
X관장도 같은 내용으로 기억을 하고 있었는데, 주머니 치기는 씨름이나 수박, 택견 하던 사람들이 하던 연습 법이었다고, 그랬거든, 
 
◇기자: 그런데, 씨름에서 못본 것 같은데요. 수박, 택견은 잘 모르겠고, 
 
◇선생4: 그런거는 이제 X대표께서 찾아서 확인해봐야지. 
 
◇기자: 숙제가 또 생기네요. 그런데 지금까지 전혀 생각을 못했거든요. 샅바를 잡는다고 생각을 하면서 주머니 치기를 다시 하면, 그 모양이 딱 맞는 것 같은데요. 
 
◇선생6: 그래, 맞다니까, 이름도 아마 '샅바 잡기' 뭐 이런 거였을 거라고, 
 
◇기자: 턱걸이도 재밌습니다. 얼핏보면 레슬링 기법 같기도 하고, 
 
◇선생6: 턱걸이는 여기 목사님 조부가 기억하고 계셨는데, 다른 사람들은 한두 가지 기억하거나, 또 뭔가 정확하지가 않았거든, 그런데 그 장로님은 정확하게 딱 기억하고 계셨지. 
 
◇선생5: 원래 턱걸이가 날파람을 좀 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나 두 가지 정도 알고만 있었고, 대부분 그걸 훈련법이라기 보다 기술로 알고 있었어요. 
대표님도 해보셔서 아시겠지만, 상대에게 목이나 어깨를 잡혔을 때 쓰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사실 그게 아닌데, 
뭐 호신술로 형태로, 그 모양대로 쓸 수도 있겠지만, 턱걸이라는 훈련법의 원래 의도는 아니니까, 
턱걸이를 해보면, 박치기 위치, 간격, 손의 도움 같은 것들을 이해하기가 빨라요. 그걸 해야 모서리 다지기로 가는 거죠. 
어떤 부위를 어떤 타이밍에 받는지, 또 어떤 동작을 연결해서 받는지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습관을 기르는 단계거든요. 
5가지 받는 법과 5가지 뿌리치고 받는 법이 가장 기본인 거에요. 그래서 더 중요하다고 하는 거고, 
 
◇기자: 정말 계속 놀라운 게, 너무 과학적이거든요. 이런 훈련법을 만들었다는 것도 대단합니다. 하면서 많이 느낍니다. 얼마나 실전을 많이 겪어야 이런 데이터를 만들까 싶습니다. 
그럼, 제가 이해하기 쉽게 순서를 보면, 점찍기로 하체를 단련하고, 주머니 치기로 손의 감각과 스피드를 키우고, 같이 주먹 단련도 해주고, 그다음에 턱걸이, 모서리 다지기를 순서대로 하면서 박치기의 감각과 기능을 만들어주고, 이 모든 걸 다 섞어서 따닥 걸이로 가는 거네요. 그렇죠? 
 
◇선생6: 거기다 이제 더 강한 신체를 가지고 싶으면, 접장 칼춤하고, 그 뒤에 만들어진 거 까치발로 하는 거, 그거까지 훈련법으로 봐야 옳지. 
 
◇기자: 아, 검무요. 제가 그게 이름이 너무 다양해서 일단 하나로 부르자 해가지고, '개성 접장 검무'라고 붙였습니다. 그다음에 그 까치발로 돌면서, 이름이 없더라구요. 무슨 날파람춤? 난다리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요.  
 
◇선생5: 그게 이름이 따로 없어요. 그냥 옛날에는 멕사리 까지만 있었는데, 뒤에 한 바퀴 돌면서 하는 거는 한참 뒤에 만들어진 거예요.  
대표님이 이름 하나 붙여보세요. 뭐 약간 혼자 하는 품새 같은 거니까,  
 
◇선생4: 참, X장로님도 대단해. 우리 중에 그거 기억하는 양반은 그 양반뿐일 거라, 


● 개성 접장 검무 ● 
 
◇기자: 검무는 좀 고민입니다. 평안도 박치기와 함께 둬야 할 자료인지, 따로 분류를 해야 하는지, 그런데 따로 분류하기에는 내용이 그렇게 많지가 않아서, 
 
◇선생4: 이게 다, X관장이 불을 질러서 시작된 거지. 저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선생6: 이름이 몇 가지가 있었다. 칠성 검무라고 하고, 접장 칼춤이라고 하고, 그게 뿌리가 어찌 되는지 몰라. 
 
◇선생4: 당시에 X관장이 자료를 찾아다니다가 검술이 하나 있다고 했는데, 그때는 검술이라고 했거든, 그런데 찾아보니까 검술이 아니라, 검무지, 칼춤이었던 거지. 
 
◇기자: 그러니까 이게, 모르시는 분이 더 많더라구요. 
 
◇선생4: 이 검무는 처음에 X관장 조부한테 얘기가 나왔고, 그 내용을 부산에 내려와서 다른 어른들한테 물어보다가, X장로님한테 확인을 했더니, 비슷한 걸 기억하고 있었던 거라. 
X장로님은 또 이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냐면, 피난 와서 알게 된 고향 사람 중에 무당이 있었는데, 그 무당이랑 이야기를 해보니, 이 무당이 조금 상세히 알더라는 거지. 
 
◇기자: 그러니까 이건 당시에 다 하던 게 아니었잖아요. 
 
◇선생4: 그렇죠. 
 
◇선생5: 나도 기억나는 게, 당시에 날파람 하던 사람들이 다 알던 그런 검무가 아니고, 이게 몇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이제 날파람 하던 보부상들이 처음 시작했다.라는 거고, 또 하나는 날파람 훈련 중에 무속적인 부분들이 있는데, 그런 행위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싸우기 전에 하던 상징적인 행위? 뭐 그렇게, 
또, 그런 이야기도 있는데, 싸움판이 아니라 관에서 날파람을 배운 사람들이 하던 검술이다.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참 많죠.  
 
◇기자: 이 검무 이야기가 X관장님 조부, 그리고 X장로님, 또 장로님이 아시는 그 무당, 이렇게 세 분에게서 나온 이야기가 다인 거죠? 
 
◇선생4: 그렇지. 그때 무당 아들이 지금 박수무당이거든, 거기는 대물림이 되었다고, 신기하지. 그런데 이걸 어떻게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옛날에는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는데, 장로님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선생6: 나는 그 검무라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내가 모르니 뭐라 말을 할 수가 있나? 지금부터 여기 대표님이 이제 정리를 하셔야지. 
 
◇기자: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일단 두 가지입니다. 짧은 스토리는 검무를 추던 무당이 보부상 하는 남편을 도우려고 기도하다가 하늘이 알려줬다는 거, 그리고 하나가 조금 긴 스토리로 들은 게 임오군란 때 평안도 출신 칼잡이 이야기거든요. 
 
◇선생4: 그 임오군란 뭐 하는 이야기는 소설이지. 누가 만든 이야기 같해. 
 
◇기자: 재미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검무 훈련이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까? 
 
◇선생4: 나도 X관장 때문에 뒤늦게 배웠지. 당시에 X장로님은 그런 검무가 있었다 정도만 알고 있었고, 하는 법은 몰랐거든. 
 
◇기자: 아, 그럼 그 무당이 알려주신겁니까?  
 
◇선생4: X관장이 검무의 존재를 알려준거고, 그 존재를 알고있던 X장로님이 무당을 소개 시켜준거지.  
 
◇선생5: 당시에 장로님은 그런 거가 있었다 정도만 알고 계셨고, 무당한테 우리들 보고 배우라고 말씀을 못하시는 거죠.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런 걸 배우러 무당한테 갈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 X관장이 자료를 찾아다니면서 부탁을 하니, 그때 알게 된 거죠. 
또 X장로님하고 여기 이 선생님하고 같이 자주 만나면서 검무를 배우게 된 거고, 
 
◇선생4: 그게 일종의 차력 훈련에 한 종류라고 하더라고, 이 검술을 하면서 팔에 힘이 좋아지는데, 치고, 잡고, 꺾고 하는 그런 기능들, 그런 게 아주 좋아졌어요. 
실전에 쓰는 검술은 아닌 것 같고,  
 
◇기자: 팔에 힘이 실제로 많이 좋아지셨어요? 
 
◇선생4: 아, 많이 좋아졌죠. 효과가 금방 나오더라고, 
 
◇선생5: 대표님이 하신 게, 그 칠성검?  
 
◇기자: 네, 저는 몰랐는데, 그게 그거더라구요. 제가 아는 분이 한 다리 건너서 같은 분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부분이 이 접장 검무의 앞부분이었죠. 
 
◇선생5: 저도 가만 보면, 그 무당 이야기, 전설이라고 봐야죠. 
보부상 접장이 검을 휘두르기만 하는데 조화를 부려서 산적을 이겼다. 이건 신빙성이 떨어지고, 또 몰라. 주문을 몰라서 안되는 건지,  
내 생각에는 오래전에 관군들이 하던 검술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편싸움할 때 서로 기선 제압하는 거지. 그렇게 전해진 거 아닐까요? 
날파람꾼중에 포졸 출신이 있었을 수도 있고, 검을 쓰는 선비 일 수도 있고, 
 
◇선생4: 제일 그럴 싸 하네. 
 
◇기자: 네, 그냥 검무가 아니고, 검술로 쓰였으니까, 임오군란 이야기도 있는 거겠죠? 
 그 칼잡이 이야기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선생4: 재밌지. 그 이야기, 
 
◇선생5: 실전에 쓰지 않더라도 무거운 목검을 휘두르면 팔 힘이 당연히 좋아지겠죠. 
 무게가 정해져 있고, 또 조금씩 무게를 올리는 것만 봐도, 주술적인 색보다 훈련의 목적이 크지 않았나, 그리 생각합니다. 
 
◇기자: 전에 XXX장로님께서 하신 말씀이 평양 출신 날파람꾼들중에 칼을 잘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셨거든요. 연관이 있을까요? 
 
◇선생5: 평양 하면, 현재 이북 5도 문화재로 되어있는 검무가 있죠. 검무는 유명한데, 검술, 칼 쓰는 건 글쎄요. 함경도는 있는 것 같고, 저 육모 부리기가 나중에 짧은 칼로 바꿔서 썼다고 들었거든요. 
또 날파람꾼이니까, 꾼들은 대부분 당시에 주먹패고, 그런 사람들이야 어디서든 길거리 싸움을 배웠을거고, 
 
◇기자: 네, 일단 공방에 대해서 전해진 게 없으니까, 검무로 기록하겠습니다. 
 
 
● 꺾기, 손목잡기, 재끼기 ● 
 
◇기자: 이것도 고민입니다. 따로 분류하기도 그렇고, 내용이 적어서 날파람 또는 난다리 관련 기법? 정도로만 소개를 해야겠습니다. 너무 궁금하기는 한데, 
 
◇선생6: 참 오묘하지. 사람 관절을 그렇게 하면 제압이 된다는 걸 우찌 알았을고, 
 
◇선생4: 싸움판에서 터득한거지. 뭐, 
 
◇기자: 제가 들은 이야기는 X장로님 부친이 전해 주신 거 하고, 또 K선생님 조부가 전해 주셨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선생6: K선생? 
 
◇선생4: 저 XXX씨, 옛날에 XXX회 회장 지내셨던 양반 있다 아입니까, 그 양반 조카, 
 
◇선생6: 아, XXX, 그 양반은 옛날에 건달이었다. 
 
◇선생4: 네, 그 양반입니다. 
 
◇기자: 그분 숙부가 전해주신 게, 이 씨, 이서방이라는 인물인데, 보부상인 아버지에게 배웠고, 아버지는 접장에게 배웠고, 뭐 그런 내용이었거든요. 그러면서 옛날에 이 씨 또는 임 씨로 불렸다. 고 하셨는데, 목사님 조부께서는 다르게 기억하신다고 했잖아요. 
목사님 뵙기 전에 앞 전 보고서에는 제가 그렇게 써서, 미리 뵐 걸 그랬네요. 
 
◇선생5: 저희 할아버님께서 임 씨를 직접 만나셨으니까, 그때가 1910년에서 1912, 13 그쯤이라고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이서방이라는 사람도 있던 사람이고, 임 씨라는 사람도 있던 사람인 거죠. 
이게 내용이 뭐냐면, 이서방이라는 사람이 이런 꺾기 기술을 잘했는데, 그걸 임 씨라는 사람이 배운 거에요. 
할아버님이 부산, 지금 동래, 거기에서 한 열흘간 머무르셨는데, 그때 이서방이라는 사람에게 그런 게(꺾기, 재끼기) 배우고 싶으셨던 거지. 그런데 가보니 자리를 비우고 없더라는 거야.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어디 갔는데 조금 있다가 올 거다. 그런데 할아버님은 본인에게 허락된 시간이 열흘밖에 없고, 그래서 임 씨라는 사람한테 한 4, 5일 정도 배운 거에요.  
 
◇기자: 꺾기하고 재끼기죠? 
 
◇선생5: 그렇죠. 그거 하고 또 저기 육모 부리기, 그 임 씨라는 양반이 뭔가 조심스러웠나 봐. 이름은 안 가르쳐 주고, 그냥 임가다. 그리고 고향은 함경도인데, 당시 경성, 지금 서울에서 지내다가 잠깐 왔다. 그러는데, 이제 할아버님 생각에는 그 임 씨가 싸움도 잘하고 힘도 좋았다고 하시더라고, 맨손 싸움도 잘하고, 칼도 잘 쓰고, 
육모 방망이를 쓰는 법이라고 할아버님께 가르쳐 줬는데, 방망이가 아니라 칼을 쓰면 되겠더라고 하셨거든요. 
 
◇기자: 육모 방망이 쓰는 법인데, 방망이 대신 칼로 해도 된다는 거죠? 
 
◇선생5: 그렇죠. 
 
◇기자: 저도 이게 재밌는 게, 4가지 훈련을 순서대로 해주면 누구나 칼싸움을 할 수 있으니까, 큰 칼은 모르겠지만, 작은 칼은 바로 실전 투입이 가능하겠구나, 생각했거든요. 
 
◇선생4: 잘 만들긴 했어. 
 
◇선생5: 그래서 할아버님 생각에는 그 임 씨가 아마도 군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부산에는 잠깐 도망 와 있던 것 같고, 또 흥미로운 게, 할아버님 형님, 그니까 큰 할아버님이 어렸을 때, 석전판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함경도 쪽 애들하고 싸웠나 봐요. 
그때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유명했나 봐요.  
그런데, 그 사람인 것 같다고 하셨어요. 아마 그 함경도 석전판에서 유명했던 임가 같다고, 
 
◇기자: 그럼 목사님 조부께서는 꺾기라는 기술들은 전부 그 임가 라는 분에게 배우신 거에요? 
 
◇선생5: 2, 3가지.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으니, 뭘 많이 배우겠어요. 
나중에 고향 돌아오셔서 다른 분에게 배우신 거죠. 
 
◇기자: 세 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꺾기라는 기술이 우리 것일까요? 아니면, 섞였을까요? 
 
◇선생4: 그 이서방이라는 사람의 자손이 없다고 들었어요. 뭐 그 기술이 그 사람 자식들한테 전해진 게 아니라, 옛날에 이서방에게 배운 사람들이 전한 거거든, 
뭐, XXX씨 삼촌께서 그렇게 알고 계셨다고 하니 믿는 거지. 상세히 아시니까, 이서방이 보부상 하는 아버지한테 배우고, 그 아버지는 접장에게 배우고, 접장은 저기 절에서 배우고, 그 계보를 기억한다고 하니까, 맞는갑다 하는 거지. 
 
◇선생6: 나는 저 기술을 잘 몰라. 본적만 있지. 배운 적이 없어서, 그런데 어렸을 때 듣기로는 저런 어려운 기술이 있었나 싶어, 치고 받거나 갈기는 게 대부분이지, 뭘 잡고 꺾고 재끼고 하냐고,  
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옛날에 날파람이나 이런 거 하는 사람들 허풍이 심하거든, 잘 걸러 들어야 된다고, 
 
◇선생5: 무조건 못 봤으니까 없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또 우리가 안 했으니 일본 무술이나 서양 기술이 섞였을 것이다.라고 단정 짓기도 그렇고, 내 생각에는 꺾고 제압하는 기술도 분명 우리 무예 같은 거에 있었을 거예요. 
관아에서 범인을 제압할 때 뭐를 하지 않았겠어요? 꺾거나 자빠트려서 체포를 해야 하니까, 
 
◇선생4: 그러기에 기법이 너무 세련되다고, 그 옛날에 쓰던거라고 볼 수 있나, 
 
◇기자: 저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요즘 유튜브 같은 데서 유명하다는 해외 호신술이랑 비교해 봐도 전혀 밀리지 않을 겁니다. 
저는 손목을 꺾어 돌리는 게, 그 일본 무술 중에 아이키도라는 게 있는데, 그거랑 비슷한 것 같았거든요. 
 
◇선생6: 이게 옛날에 XXX장로님이 부산에서 피난 시절에 미 군정에서 통역하던 양반을 하나 알았는데, 이 양반이 전에 일본 순사라, 뭐 그래가지고 잠깐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유도를 오래 했단 말이야. 그래서 물어보니 왜정 때 서울에 있는 도장에서 일본 무술을 배웠는데, 그때 선생이 강낙원이란 사람이다. 
그래서 이 꺾기 몇 가지를 비교해 보니 비슷하니까, X장로님은 거기서 시작된 것 같다. 했지. 
 
◇선생5: 역사라는 게, 뭐 천년 전 이야기도 아니고, 100여 년 전 이야기도 그 진실을 알기가 힘드니, 
 
◇선생6: 아이고, 100년은 무슨, 군사 정권 때 봐라, 40년 전도 다 속이고 감추는데, 알 턱이 있나, 
 
◇기자: 지금 어른들이 알고 계시는 꺾기 기술도 6, 7가지 정도라서 이건 그냥 박치기 이야기에 한 부분으로 붙여 놔야 겠습니다. 
뭐, 나중에 누가 또 찾아보더라도, 
 
◇선생5: 손목을 꺾는 거나 팔을 꺾는 움직임을 보면, 아주 과학적으로 연구해서 나온 기술이 맞는 것 같해요. 
예전에 합기도 관장이 이걸 보고 놀랬거든, 이렇게 손을 낚아채서 꺾는다는 생각을 못 했다는 거지. 그때가 오래전 이야기니, 지금은 뭐 또 연구를 해서 비슷하게 하고 있을지는 모르죠. 
기술의 형태나 수준을 보면, 그냥 싸움꾼이나 아니면 저기 편싸움판에서 놀던 사람이 만든 건 아니라고 봐요. 나는, 
정 영감님이 옛날에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박치기가 무인들이 하던 거고, 그걸 따라 하던 민가에서 편싸움(날파람)속에 섞어서 한 것 같다. 
그러니까 날파람이 먼저가 아니라, 박치기가 먼저 였을 것이다.  
날파람이라는 편싸움은 석전에서 나왔을 거고, 왜냐면 이게 고작 날파람 터에서 패싸움이나 하는 종자들이 무슨 박치기 훈련법이나 기술을 연구해서 만드냐. 말이 안 된다 이거지. 
그 말씀이 맞는 것 같해요. 
그러니까 그 꺾기나 재끼기도 이 서방이라는 사람을 거슬러 올라가면, 양산에 내원사까지 나온다는데, 그 뿌리가 절에서 생긴 거라기보다, 옛날에 무관들이 하던 거지 않았을까, 그리고 어쩌다 그게 절로 들어갔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선생6: 이건 확인이 불가하다.그자? 
 
◇기자: 네, 그냥 이런 것도 있었다더라, 정도로 남겨 놔야겠습니다. 
 
◇선생4: 그래도 그 KXX씨 숙부가 잠깐 건달을 하긴 했어도, 옛날에 군사 정권에서 공무원 하던 사람이었다고, 군인이었나 그랬거든, 
경호실에 있었다는 말도 있고, 거기 중정(중앙정보부)에 있었다는 말도 있고 그랬지. 
 
◇선생6: 그 건달 말을 믿을 수 있나? 
 
◇선생4: 아이고, 실력을 보면 감이 온다 아입니까. 그 양반한테 잡혔다 하면 손목이고 팔이고 작살이 나는데, 
 
◇선생6: 그래도 저기 X장로나 자네 부친한테는 안된다고,  
 
◇선생4: 에헤이, 참, 그거야 붙어봐야 알지. 
 
◇선생5: 박치기 같은 싸움 기술이라기보다 상대를 제압하는 간단한 호신술의 성격이 있다 보니까, 아무래도 다를 겁니다.  
또 간단 하도 해도 웬만한 연습으로 쓸 수 있는 건 또 아니거든, 아까 이야기 나온 그 합기도 하던 양반도 일본에서 오래 배우고 왔는데, 이걸 보고 그랬잖아요. 
이건 고수나 배울 수 있다고, 그런 양반이 봐도 예사롭지 않은 거지. 
X대표님이 더 연구해서 찾아보세요. 
 
◇기자: 하, 쉽지 않겠는데요. 


● 육모 부리기 ● 
 
◇기자: 이 이야기를 하면 그 임씨가 다시 나오거든요. 이 내용은 목사님께서 아마 제일 잘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그죠? 
 
◇선생5: 뭐 잘 안다기보다 나도 들은 거니까, 할아버님이 기억하셔서 전해주신 것 정도예요. 
할아버님이 기억하시는 해가 1910년에서 1912, 13인데, 이 부분은 꺾기 이야기할 때 했죠. 
당시에 부산에 내려오신 이유가 증조부 심부름을 하러 오신 건데, 그때 할아버님의 큰 형님하고 같이 내려오셨어요. 
열흘 정도의 일정으로 내려오셨는데, 그때 동래에 간 거죠. 
요즘으로 말하면 접대를 받으러 가신 거죠. 그때 거기, 지금 온천장 그 일대에 기생집이 많았다고 해요. 동래 기생조합이 만들어지면서 기생집이 거기 다 모였나 보더라고, 
이 당시에 할아버님의 형님, 그니까 큰 할아버님은 기독교인이니까 술은 안 드시고, 할아버님은 나이롱이였지, 한마디로, 교회도 나가고 술도 마시고, 
그 술자리에서 이 서방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할아버님이 너무 만나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자리를 비워서 한 달이나 지나야 온다니까, 일정은 안 맞고, 그러다가 거기 일하는 기생이 알려줘서 임씨를 만난거죠.  
 
◇선생6: 어르신이 막낸가? 
 
◇선생5: 네, 막내셨습니다. 
 
◇선생4: 지금 이야기하신 목사님 조부님의 큰 형님이 어렸을 때, 석전판에서 이름 좀 날리셨다 그래요. 
 
◇선생6: 아 그래? 큰 조부님은 연배가 어찌되는고, 
 
◇선생5: 이건 저도 기억이 흐릿한데, 1873년생으로 기억하거든요. 할아버님하고 차이가 좀 나셨어요. 
 
◇기자: 열흘이라는 일정동안 그 임 씨를 만난 건 5일 정도라고 하셨죠? 
 
◇선생5: 그렇죠. 그렇게 기억을 해요.  
처음에 큰 할아버님과 같이 봤는데, 인사도 하고 술도 같이 드셨나 보더라고, 서로 대화를 해보니, 그때 큰 할아버님이 낯이 익다. 석전판에서 본 것 같다. 이러신 거죠. 
고향도 함경도고, 몽둥이고 잘 쓰고 했다고 하니, 당시에 유명한 꾼이 있었나 봐요. 
성도 같은 임 씨고, 그래서 그냥 추측을 한 거죠. 
이 사람이 너무 자신에 대해서 조심하는 부분이 있어서, 할아버님 생각에는 도망 다니는 것 같다. 하신 거예요. 
당시에 의병들이 몰래몰래 활동할 때니까, 
그래가지고, 이서방은 없고 하니 그 임 씨한테 꺾기를 조금 배웠는데, 그 임 씨 말이 자신이 잘하는 게 육모 방망이를 쓰는 건데, 이것도 인연이니까, 가르쳐 주겠다. 한 거예요. 
그런데 할아버님 생각에 며칠 안에 뭘 얼마나 많이 배울까 해서 물어보니까, 
이 양반이 하는 말이 4일이면 된다. 하더라는 거야. 
하루는 꺾기 배운다고 지났고, 남은 4일만 배우면 된다는 거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첫째 날은 찌르는 방향을 배우고, 둘째 날은 막는 방향을 배우고, 셋째 날은 막고 다시 찌르는 방향을 배우고, 넷째 날에는 진짜처럼 해보면 된다라고 한 거예요. 
어렵지 않으니까, 4일간 자기한테 배워서 고향 가서 동무랑 연습을 해라. 그랬다는 거죠. 
또 그러면서 한 말이 방망이로 연습을 하는데, 진짜 실전에서는 저기 비수 같은거, 짧은 단검을 써야 한다. 칼을 써라라고 하더라는 거지. 이때 할아버님은 이 임가 한테서 군인 느낌이 났다고 해요. 
그렇게 배우기 시작했는데, 형태만 배우는 건 이틀 안에 끝났어요. 
X대표님도 해보셔서 알겠지만, 어려운 게 없어요. 그다음에는 감각을 키우기만 하면 되는 거라서, 
 
◇기자: 네, 맞습니다. 네 가지 단계만 따라 하면 누구든 짧은 칼을 쓸 수 있죠. 저도 그게 신기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도 신기하고, 
지금 보면 칼 대신에 그, 삼단봉으로 써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거든요. 
 
◇선생6: 옛날에 신기했지. 잠깐만 배우고 연습만 꾸준히 해주면 되니까, 이렇게 전해주기도 너무 쉬우니까, 군인들이 했을 법 하네, 
실험 해봤다 안했나? 
 
◇선생4: 여기 대표님이 군에다가, 특수부대죠? 
 
◇기자: 네, 네 가지 단계로 부대원들에게 테스트해봤습니다. 육모 방망이나 뭐 그런 표현은 안 쓰고 대검으로 쓰면 된다고 해서 테스트를 했죠. 
결과도 너무 좋았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 육모 부리기는 원래 육모 방망이로 하던 거였는데, 실전에서는 방망이 보다 단검 같은 걸 쓰면 된다. 이런 거죠? 
 
◇선생5: 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육모 방망이로 해도 되고, 칼로 써도 되고, 이것도 할아버님 추측이지만, 그 임 씨가 군인이었거나 의병 같은 거였으니 몽둥이보다 칼을 쓰라고 강조한 게 아닐까, 하셨고, 또 그 양반이 칼을 가지고 다녔다고 해요. 
길이가 성인 남자 손끝에서 팔꿈치까지 오는 정도 길이라고 하셨거든, 
 
◇선생6: 여기 대표님은 이걸 누구한테 배웠어요? 
 
◇기자: 아, 여기 이선생님한테 배웠습니다. 
 
◇선생4: 제가 알려줬는데, 이 배경은 설명을 잘 못해서, 그래서 여기 목사님 만나는거 아입니까, 
 
◇기자: 이 기술은 현재 몇 분이나 알고 계세요? 박 장로님도 아시죠? 
 
◇선생6: 알지. 이게 보자, 60년도 초에 X장로님하고, 여기 이 선생 부친하고, 또 X장로님하고 몇 분이 모인 게 시작인데, 그 전쟁 끝나고 고향도 못 가니까 여기 남은 평안도 사람들이 먹고 살아야 하잖아. 
그래서 장사를 하고 뭘 하고 해야 하는데, 부산에 깡패들이 텃세가 심한 거라. 우짜노. 
당하고 살 수만 없으니까, 우리도 서로 지켜주자 했지. 
그때 싸움 좀 하던 사람들이 모여서 기술도 주고받고 했는데, 위 어른들이 이야기를 하는데, 두 양반을 이야기해. 
그중에 한 명이 정 영감이고, 또 한 사람이 여기 목사님 조부라, 
정 영감은 여러 가지 훈련법을 알려주고, 여기 목사님 조부는 처음에는 같이 모여 기도를 해야지 무슨 싸움이냐 하시다가, 그때 사고가 있었거든, 
왜놈 야쿠자가 장사를 한다고 부산 항에 들어와서 싸움이 났는데, 그때 고향 어른이 칼에 맞아가지고 돌아가셨단 말이야. 
그래서 여기 조부께서 마음이 안 좋으셔 가지고, 4, 5명만 불러라 그래. 뭐 고향 사람이라고 다 부르지 말고, 책임감 강한 사람으로 조용히 4, 5명만 불러봐라. 
그래서 그 사람들한테 육모 부리기를 가르쳤지. 조용하게 했다. 
 
◇기자: 조용히 하셨다는 게, 
 
◇선생5: 당시에 부산에 자리 잡은 평안도 출신들이 다 협력하고 살았던 건 아니에요. 여기저기 모임들이 여러 가지 있었는데, 이때 할아버님이 예전 서북청년단 같은 그런 모임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거나, 좀 과격한 고향 사람들? 뭐 모임, 이런 사람들은 피하셨어요. 
그래서 소개 소개로 알게 된 몇 분만 불러다가 가르치고 했어요. 
 
◇선생6: 죽창으로 사람을 찔러 죽이던 사람들이 천진데, 그런 사람들한테 가르치면 되겠냐 말이다. 
 
◇선생4: 뭐 그랬다가 살기 좋아지면서 다 잊고 살았는데, 80년도에 X관장이 이것저것 찾아다니면서 다시 나온 거지. 
 
◇기자: 네, 그럼 다시 아까 이야기를 하면, 조부께서는 그 임 씨한테 배우고 계속 교류는 없었습니까? 
 
◇선생5: 또 만나고 싶었는데, 거처를 확실하게 알려주지를 않았나 봐요. 
나중에 다시 만나보려고 한 두해 지나서 동래를 찾았는데, 거기 사람들이 이 서방이랑 만주로갔다고, 그렇게 얘기하고, 또 몇 가지 이야기를 들은 게, 이제 그 임 가는 서울에서 살다 왔다더라, 하고 기독교인이다. 이런 이야기만 들으셨다고, 거기까지에요. 
 
◇선생6: 독립운동하는 사람이 맞아. 들어보면 뻔하지. 
 
◇선생5: 뭐 할아버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싸움으로 유명한 사람은 맞는 것 같해요. 석전이든 뭐든 간에, 저기 큰 할아버님도 석전판에서 임 씨 성을 들어봤다 하시고, 뭐 그 양반이 그 양반인지는 모르겠으나, 또 할아버님이 며칠간 배우면서 몸이 부딪쳐보니까, 그 느낌이 있잖아요. 실제 싸우는 걸 본 적은 없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바로 알지.  
팔 힘이 하도 좋아서 물어보니까, 육모를 많이 휘둘러서 좋아졌다. 
 
◇기자: 정리하면, 육모 부리기는 함경도에서 전해지던 것이고, 그걸 처음으로 전해준 사람은 임씨 성을 쓰는 사람이다. 또 육모 부리기는 꼭 육모 방망이만 쓰는 것이 아니라, 칼로 대체해도 무방하다. 이정도네요. 
이건 평안도하고 어떤 연관이 없으니까, 따로 분류를 하겠습니다. 
 
◇선생5: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면, 그 임 씨도 육모를 정확하게 언제, 어디서 배웠다는 구체적인 이야기는 없었어요.  
어릴 때 배웠고, 함경도 사람이라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는 거지. 
 


● 그 외, Q&A ● 
 
평양이 고양이신 박 장로님(선생6 / 현 81세)과 따로 만남을 가졌다. 
재밌는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계셔서 개인적인 호기심과 욕심으로 인터뷰 요청을 드렸고, 선생께서는 흔쾌히 응해주셨다. 
 
◇기자: 건강하셨습니까? 병원에 잠깐 계셨다고 들어서 걱정했습니다. 
 
◇선생6: 이제 여기저기 고장이 나니.. 갈때가 된거아이겠나. 지금 한 달만에 다시 보는건가? 
 
◇기자: 네, 맞습니다. 한달만이에네요. 그냥 쭉 건강하시면 좋겠습니다. 
 
선생6: 더 살아 머할라고, 뭐가 더 궁금한게 남았소? 
 
◇기자: 네, 많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다 뭔가? 했는데, 지금은 하나하나 알아 갈수록 재밌네요. 날파람 이야기도 더 궁금하구요. 
 
◇선생6: 뭐,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나도 어릴적에 진짜 제대로 하는 날파람을 못봤다고, 장정이 50명, 100명 모여서 편싸움을 하고 이런 진짜 날파람판을 본적이 없어. 
그냥 동네 형들이나 어른들이 몇명 모여서 작게작게 했지. 
진짜 제대로 노는 판은 훨씬 전에 사라졌다고 보거든. 내 생각은 그래. 
 
◇기자: 박치기 기술만 살아 남았네요. 호신술처럼 쓰이면서, 
 
◇선생6: 그렇지. 그리고 박치기를 날파람꾼들이 많이 쓰기도 했고, 해방 이후에 싸움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배워가지고 모양이 많이 바뀐거지. 
사람들 만나고 다니면서 느꼈겠지만, 평안도 출신들이라고 다 박치기를 알고, 싸움을 잘하는 건 아니잖아. 그자? 
지금 딱 몇명들이 그걸 연구하고 써묵고 한거지. 
묵고는 살아야 되고, 주먹으로 해결할 일이 많고, 이러니까 연구를 안하겠냐 말이야. 
거기다 무술같은거 좋아하고, 누가 뭐 잘한다하면 가서 배우고, 이러니 계속 모양이 바뀐거지. 
 
◇기자: 최근에 일본 무술인과 교류가 있었는데, 그쪽에서도 박치기에 관심이 많더라구요. 
일단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가 있었다. 라는 말이 더 믿음이 간다고 했거든요. 
그 만큼 실전에 잘 쓰이니까 지속적으로 연구를 하고 변화를 준 것 아니냐. 발전을 했다는 뜻이죠. 
 
◇선생6: 전통 무술이니 그런 말은 안어울리고, 그냥 길바닥에서 하는 싸움이지. 무슨 깊은 철학이 있고 그런 건 아니니까. 
 
◇기자: 전통 무술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지금 나와있는 무술이나 호신술과 비교해도 저는 큰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선생6: 시대적인 배경이 그랬던 것 같거든. 뭐 왜놈들이랑 싸우고, 해방 후에는 좌익들하고 싸우고, 전쟁나서 여기 밑으로 피난왔더니 여기 사람들하고 싸우고, 돈이 된다고 해서 배타고 일본 다니면서 거기 야쿠자들 하고 싸우고, 뭐 계속 안싸웠냐 말이야. 
그러니 내를 스스로 지킬라면 묘책이 있나? 이거라도 잘해야지. 
 
◇기자: 네, 최근 선생님들하고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게, 여기 부산이나 경상도 쪽으로 전통 무술 같은 것들이 많이 모여 있었던 것 같거든요. 
피난을 왔으니 뭐 당연하겠지만, 날파람도 그렇고, 혹시 다른 무술이나 뭐 그런거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선생6: 여러 있었지. 뭐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게, 뭐 다 이북에서 내려온건데, 아까도 내가 말했지만, 이북에서 내려온 이런 박치기 같은 기술들이 사람들한테 들어 낼 수 없는게, 여러 사정이 있지만, 전쟁이 끝나고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반공반공 했다고, 간첩 같은거 신고하고 그랬단말이야.  
그때도 평안도 출신들은 조심했지. 그러다 보니까, 더 숨기고 말못하고 하다가 사라진 것도 많을 거라고, 
옛날 이북, 저기 황해도 그런 지역에 보부상들이 싸움을 잘했다 했거든, 손을 잘 쓴다고, 
 
◇기자: 전에 X목사님께 수박이라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뭐 그런거요? 
 
◇선생6: 나도 옛날에, 그러니까 우리 위세대지? 수박이라는게 있다. 뭐 이런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그게 몇 가지 있어. 
하나는 지금 뭐 날파람이나 저기 택견, 씨름 이런 것들을 다 묶어서 수박이라 칸다. 
다 손으로 치고 받는 동작이 있으니, 우리가 그냥 묶어서 무술이라고 부르듯이 말이야. 
또 하나는 수박이라고 따로 있다. 손을 잘 쓴다고, 
내 생각에는 수박이라는 무술이 따로 있었다고 봐. 왜냐면 X장로님 있잖아. 
 
◇기자: 아, 네. 사람들이 시라소니라고 착각하셨다고, 
 
◇선생6: 그래, 그 양반 살아 계실 때, 내가 듣기로는 황해도, 평안도 쪽에 수박이라는 걸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그래. 스스로도 보셨고, 그래서 내가 우찌 하는건데요? 물어보니, 
손바닥도 쓰고, 주먹도 쓰고, 씨름처럼 잡고 넘기고 그런다 카데. 
그런데 이 양반들이 가만보면 전신에 보부상들이라, 장돌뱅이라 이거지. 전국을 다니니까 도둑도 만나고 할거아이가, 그러니까 온종일 걷다가 잠깐 쉴 때 모여서 그걸 연습하고 그랬다는거야.  
전에 내가 왜 주머니 치기 얘기 안했나? 
 
◇기자: 네, 말씀하셨습니다. 씨름의 훈련법일 것 같다.라고 하신거요. 
 
◇선생6: 그래, 그런데 X장로님은 지금 생각해보니, 왔다 갔다 하신 것 같해. 본인이 그걸 보시고 수박하는 사람들도 하고, 씨름 하는 사람들도 하는 걸 보신건데, 세월이 흘러서 보니 씨름하는 사람들은 그걸 모른단 말이야. 
그러니 나는 그게 아마 수박하는 사람들이 하는 게 맞겠다. 싶은거지. 
 
◇기자: 아, 혼돈이 되신거다. 뭐 오랜 전 일이나 충분히 그러실 수 있죠. 
전에 재가 '대쾌도'라는 그림 보여드렸죠? 지금 제가 폰으로 보여드리면, 여기 댕기 묶은 남자 둘이 자세를 잡고 있잖아요. 
이걸 보고 보통 사람들은 지금 택견하고 모습이 비슷하니까 택견일 것이다. 라고 말하거든요. 
제가 봐도 그렇고. 
 
◇선생6: 아, 내도 알지. 이 딱 그 자세 아이가. 장단 치기, 
 
◇기자: 그러니까요. 저도 자세를 보고 이 그림이 생각났거든요. 장단 치기, 주머니 치기 
그림이랑 자세가 너무 똑같아서, 그런데 지금 박치기의 훈련법으로 보통 이야기 하시던데, 이 기술은 날파람하고 아무 상관이 없을거라고 하셨거든요. 대부분 그렇게 이야기 하시고, 
 
◇선생6: 지금와서 맞다 아니다 라고 할 수 없지만, 나도 오래 전에 듣기로 박치기나 날파람하고는 거리가 멀고, 보부상들이 모여서 땅에다 줄 끄어놓고 하는거라고 들었거든. 
 
◇기자: 네, 그래서 그냥 제 생각에 보부상들이 즐겨 하던 무술이 수박이니까, 혹시 장단 치기도 주머니 치기처럼 수박하는 사람들이 하던 것이 아닐까, 손을 쓰는 흐름도 비슷하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6: 그건 알 수 없지. 그래도 한 가지 내가 말할 수 있는거는, 이제 와서 저 자세는 어떤 거고, 저 자세는 어떤 거고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말이야. 
자 봐라. X목사 조부가 1800년도 후반 사람이다. 그 양반이 싸움 좋아해서 당시에 외국 사람 따라다니고, 일본인 무술 시범하는 거 몰래 훔쳐보고 해서 배운 것이 얼마나 많겠노? 
그래서 배운걸로 X목사 부친한테 가르킨게 먼줄 아나? 
얼굴에 원투 딱 치고, 정신 못차릴 때 다리 잡아서 넘기가 자빠진 놈 얼굴 들이 받는 거였다. 
남들은 그 당시 사람들 싸움 하면, 상투 잡고 대가리 흔드는 것 밖에 기억 못한다. 
그런 시절에 그렇게 기술적으로 싸움을 했다고. 그러면 그건 전통 무술이라고 부르면 안되나?  
이제 와서 뭐면 어떻노? 
 
◇기자: 네, 맞습니다. 
참, 그분은 당시에 서양문물을 잘 흡수하신 신지식인이셨네요. 혹시 지금 수박하시는 분이나 비슷한 수련을 하시는 분 알고 계십니까? 
 
◇선생6: 개인적으로 아는 양반은 없고, 예전에, 가물가물하는데, 자갈치 시장인가, 장사하는 사람이라 했는가, 아무튼 우리 처럼 이북에서 온 양반인데, 맨손 무술을 하는 사람이 있었어. 
나는 모르고, X장로님이 살아 계실 때 들은거라. 
그 양반이 X장로님을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못봤던 것 같해. 
 
◇기자: 아, 그렇게 곳곳에 숨은 보물들이 많은데, 너무 우리 것에 신경을 안쓰고 살았다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듭니다. 
저는 그 육모 부리기도 신기했거든요. 
 
◇선생6: 당시 여기 부산에 피난민들이 모여살 때, 깡패들이 얼마나 바글거렸는지 아나? 
말도 못했다. 그 시절 깡패들은 칼, 도끼부터 저기 권총도 들고 다녔다고. 
육모 방망이면 순한거지. 저기 일본놈 야쿠자도 칼들고 다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어찌 이어져왔는지, 들었나? 
 
◇기자: 네, 임가라는 분이 전해줬다고, 
 
◇선생6: 진짜 그런 양반이 있었는지 내는 모르지만, 기술은 신기해. 
그 옛날에 말이야. 이 연습이 가만보면, 뭐꼬, 그 감각을 훈련하는 거란 말이야. 
 
◇기자: 네, 맞습니다. 
 
◇선생6: 또, 참 간단해. 그리고 자세를 보면 상대가 칼을 들었을 때 쓰는 것 처럼 만들었다 이말이야. 지금 생각해도 참 지혜롭지. 
뭐든 오래하면 좋겠지만, 그런데 이거는 오래 배울 필요도 없어. 기술이 여러가지 있기는 하지만, 당장 싸움을 해야 된다면 일주일만하고 나가면 되는기라. 
어른들 말로는 함경도 사람이었다 하는데, 뭐 그것도 독립운동가면 위장일 수도 있고,  
아무튼 간에 옛날에 깡패들이 보고 기겁했지. 저 멀리서 씩씩거리면서 육모방망이들고 뛰어오는걸 상상해보라고. 도깨비 같을 거 아이가. 

◇기자: 이런 이야기들 다 모아서 영화 한편 만들어도 될 것 같습니다. 
 
◇선생6: 아이고, 속시끄럽다. 혼자해. X사장 혼자하라고, 우리는 일절 관심 없으니까. 요런 걸 잘 배워가서 다르게 또 발전을 시켜보란 말이야. 


■ 꾼? 고수? 열전 
지금부터 소개되는 내용은 몇몇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중에는 알려진 사람도 있고, 이 글을 통해 처음 소개되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싸움 실력으로 거리를 청소하고, 악당을 물리치며, 나라에 도움이 되고자 했던 꾼들, 또는 고수들, 그들의 이야기.. 아니 열전이라 부르고 싶다. 
 
참고로 본 이야기 속 사건들은 구술에 의존하였으며, 고증과 확인이 불가능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자손들이나 관련 인물들이 드러남으로 불편해짐을 방지하고자 모두 가명으로 처리하였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라 생각하고, 약간의 상상력을 더했으니 재미로만 감상하면 좋겠다.   
또 곳곳에 숨어 있는 선조들의 한과 지혜, 용기들을 통해 힘든 삶에 아주 조금이라도 활력이 되었으면 하는 바이다. 


● 황해도 점찍기, 안상길 ● 
 
안상길은 1872년(추정)에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상길이 12세가 되던 해에 부친의 장사가 크게 되어서 온 가족이 평양으로 이주하게 된다. 
큰 시내에 점포를 차린 상길의 부친은 사람이 좋아서 금세 단골손님들을 만들 수 있었고, 짧은 시간에 평양 시내에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상길은 서당을 다녀와서 남는 시간에는 부친의 장사를 도왔고, 또 상길의 여동생은 집에 있는 모친을 도왔다. 
가족 모두가 화목했고, 큰 탈 없이 평양에서 잘 적응하고 있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났을 무렵, 서당을 다녀와서 부친의 점포를 돕고 있던 상길은 거리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듣게 된다. 
어디서 소란이 일어났는지, 사거리 언저리에서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상길의 생각에는 싸움이 났거나, 아니면 신식 물건을 구경하거나, 것도 아니면 서양 코쟁이를 구경하나, 싶었다. 
그런데 소란이 점점 가까이서 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눈으로 확인이 가능할 만큼 가까이서 그 난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이 모여 싸움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무섭게 싸우는지, 여기저기 곡 소리가 나고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더 놀라운 건, 그 참담한 모습을 보고도 말리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상길의 부친이 길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아이를 보고 점포에서 뛰쳐나왔다. 그 쓰러진 아이의 얼굴과 체구를 보아하니, 상길과 비슷한 또래였다. 
상길의 부친이 아이를 부축해서 일으키는 찰나, 몇몇 청년들이 상길의 부친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상길이 뛰어가 보니 그 자리에는 피를 흘리고 있던 아이와 상길의 부친이 쓰러져 있었다. 
이 난리로 상길의 부친은 팔이 부러졌고, 사흘간 꼼짝도 못 하고 누워있어야 했다. 
 
상길은 너무 화가 나서 주변 점포 어른들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회개 망칙한 짓이냐며, 크게 따졌다. 그 상황을 보고 왜 아무도 말리지를 않았는지 큰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어른들이 반대로 상길을 나무랐다. 
날파람판에 왜 끼냐는 것이었다. 잘못하다 맞아 죽을 수 있는데, 거기를 뛰어 들어간 상길의 부친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날파람' 상길도 어릴 적 황해도에서 석전 같은 것을 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런 놀이는 행인들이 지나다니지 않는 들이나 강가에서 하던 놀이였다. 
그런데 여기 평양 애들이 하는 날파람은, 돌맹이도 아닌 맨손으로 두들겨 패는 것도 이상한데, 행인들이 이렇게 많이 다니는 시내 한복판에서 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변 어른들 말로는 한동안 금지를 시켰는데, 갑자기 다시 시작이 된 것 같다는 것이다. 
 
상길은 분이 터져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날 아버지를 때리던 그놈들의 얼굴이 계속 아른거려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다짐을 했다. 
'이놈들 내가 찾아서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  
어린 상길의 이런 위험한 다짐은 곧 현실이 되고 말았다. 
서당에 가서도 또래 아이들에게 물어보고, 서당이 끝나면 동네를 돌아다니며 수소문을 했다. 그렇게 며칠 후, 아버지를 때린 놈들을 찾게 되었다. 
딱 보아도 상길보다 키도 크고, 나이도 두서너 살은 더 되어 보였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분을 참지 못한 상길에게는 그런 문제는 문제도 아니었다. 
상길은 주머니에 작은 돌멩이 세 개와 양손에도 돌멩이를 하나씩 쥐고, 그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물었다. 
'너희들이 시내에서 날파람을 벌인 놈들이지?! 그날 너희들이 때린 울 아버지가 팔이 부려졌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길은 돌을 쥐고 있던 손으로 한 놈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가볍게 상길의 주먹을 피하더니 무릎으로 상길의 배를 쏘아 올렸다. 
상길은 숨이 막히는 고통을 느끼며, 그 자리에 뻗어버렸다. 순간 거기 있던 아이들 몇이 누워있는 상길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상길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는 아이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온몸이 쑤시고 간신히 걸음을 떼어서 집에 돌아왔다. 피죽이 되어 돌아온 상길을 본 가족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상길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부친이 상길을 나무랐다.  
'너의 마음을 알겠지만, 그런다고 해결이 되겠느냐! 다시는 그런 멍청한 짓을 하지 말아라!' 
 
며칠 자리에 누운 상길은 분하고 원통해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몸이 회복되고 다시 서당에 나간 상길은 또래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해야 싸움을 잘할 수 있는지, 또 날파람하는 아이들과 싸울 수 있는지, 
그랬더니 아이들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갖가지 이야기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상길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쭈욱 들어보니, 한결같이 박치기가 최고라는 것이다. 
집에 돌아온 상길은 아이들이 가르쳐 준 방법들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느 정도 박치기에 정수를 깨달았다고 생각한 상길은 자신을 때린 아이들을 찾아가 다시 도전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그동안 연마해온 박치기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제대로 때려보지도 못하고 피죽이 되어버린 것이다. 
또 그런 몰골로 집에 왔으니 부모의 마음은 오죽하랴. 
아들이 두 번을 그렇게 당해서 온 모습을 본 상길의 부친도 이제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점포에 단골로 오는 어느 사내에게 부탁을 했다. 
이 사내는 한때 주먹패에서 이름을 날렸는데, 날파람판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했었다. 
사내에게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사내는 상길의 부친에게 이렇게 말했다. 
'돈이 좀 있어야 할 텐데, 제대로 배우려면 돈이 많이 들어간다우. 여기 약방에 가보시오. 맞은 데는 거기서 만든 약이 좋소.' 
그렇게 어느 약방을 소개 받은 상길의 부친은 날을 잡아 상길을 이끌고 그 곳으로 찾아갔다. 
상길의 부친은 약방 주인에게 소개 해준 사내의 이름을 말하며, 아들이 맞고 다니지 않도록 스스로 몸을 호신하는 방법을 가르쳐달라 부탁했다. 
약방 주인이 일렀다. '돈이 조금 들어 갈거요.' 
잘나가는 점포 주인인 상길의 부친은 돈은 걱정하지 말고, 잘만 가르쳐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날 이후로, 상길의 수련이 시작되었다. 
약방 주인이 상길에게 일렀다. '앞으로 너에게 박치기를 가르쳐 줄 터인데, 시키는 대로만 잘 따라오너라. 두 가지 법만 배우면 어디 가서 맞고 다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먼저 상길이 약방 주인에게 배운 것은 네 곳에 점을 찍어 놓고 뛰는 것이었다.  
점찍기(옛날에는 '솟아 돌기'라고도 불렀다.)라고 불리는 이 연습은 다리 힘과 도약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그 점이 가까이 있었다가 다리 힘이 붙으면서 네 점이 조금 멀어지고, 다리 힘이 조금 더 붙으니, 그때부터는 지게를 지고 점찍기를 할 수 있었다. 
머리로 받는 기술은 안 가르치고 뛰는 것만 가르치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힘들고, 지루했지만, 상길은 군말 없이 약방 주인이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 
다리에 힘도 붙고, 뛰는 법도 썩 잘하니, 그다음부터 모서리 다지기를 시작했다. 
박치기에 필요한 진짜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 여섯 모서리와 목의 힘, 박자 등을 익히는 것인데, 이때부터는 상길도 재미가 붙어서 서당과 점포에 나가 있는 시간 외에는 점을 찍고, 모서리를 다지는데 시간을 쏟았다. 
 
그렇게 복수도 잠시 잊고, 박치기 수련에만 빠져 있던 어느 날, 
점포 근처가 소란스러워서 나가보았다. 한동안 골목 점포 주인들의 항의로 시내에서는 뜸했던 날파람판이 다시 벌어진 것이다. 
여기저기 고함 소리에 사람들이 흙먼지를 날리며 치고받느라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상길은 이때다 싶었다. 그리고 그 난장판으로 뛰어 들어갔다. 
여기저기 곡소리가 나고 주먹과 발길질이 난무하는 가운데, 상길은 사람을 찾고 있었다. 
바로 아버지를 때리고 자신을 때린 그놈들, 
상길은 골목 모퉁이에 서있는 그놈들을 발견했다. 아마 싸움이 끝나가니 곤란해지기 전에 이 판을 빠져나가려는 심산이었다. 
상길은 그놈들을 따라 갔다. 
곧 골목 한편에 상길과 다섯 놈이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놈이 상길에게 일렀다. '이놈 봐라. 이번에는 진짜 송장을 만들어 놔야겠구나.' 
그렇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퍽! 소리가 나더니, 상길이 아닌 다른 놈이 뒤로 뻗어버렸다. 
또, 연이어 퍽! 퍽! 순식간에 상길 앞에 있던 다섯 놈들은 코가 깨지고, 눈두덩이 찢어지고, 이가 부러지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상길의 박치기에 모두 나가떨어진 것이다. 그동안 열심히 수련해온 결과였다. 
 
※ 안상길은, 
날파람이나 박치기에 관한 내용을 조사하면서 다양한 의견들을 듣게 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날파람과 박치기는 다르다는 것이다. 
동네 패싸움 같은 날파람 판에서 박치기 기술이나 훈련법이 발전되었을리 없으며, 아마 박치기는 과거 무인들이 하던 기술 중에 하나였을 것이고, 그 기술이 민가에 흘러가 날파람 같은 편싸움에서 종종 보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과 함께 하나의 근거처럼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장사로 알려진 '안상길'이다. 
참고로 상길은 가명이고 성만 공개했다. 
복수 활극 같은 위 이야기만 보면, 무협지 같은 곳에서 단골처럼 볼 수 있는 가벼운 내용이지만, 상길이 수련했다는 '점찍기'와 '모서리 다지기' 부분은 그렇게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점찍기는 오래전에 솟아 돌기, 솟구치기, 튀어 오르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런데 '점찍기'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 계기가 바로 박상길의 자손들이 그렇게 바꾸었다는 것이다. 
상길의 이후 삶은 평탄했다고 한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설도 있다.) 
부친의 점포를 물려받아서 장사를 했고, 수완도 아주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멋지게 복수한 박치기 실력은 주위에 소문이 퍼져지면서, 싸움 좀 한다는 주먹패들도 상길을 피해 다니게 된다. 
이 당시에 박치기는 아주 실력 있는 싸움꾼들의 기술이었으며, 날파람과는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상길의 부친이 큰돈을 주고 약방 주인에게 배우도록 했다는 것이다. 
날파람꾼들 중에서 구할 수도 있었을텐데, 다른 은둔 고수를 찾아간 것부터가, 박치기와 날파람은 그 기법과 방식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분명 다른 의견도 있다. 날파람꾼들 중에서도 유명한 이들은 돈을 받고 호신술을 가르치기도 했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당 조만식'선생 같은 경우다. 
 
이후, 상길에게 박치기를 가르친 약방 주인은 또 한 명의 제자를 받게 되는데, 상길의 어린 사촌 동생(조카라는 의견도 있음)이었다.  
상길의 이야기를 듣게 된 상길의 작은 고모부가 아들을 약방 주인에게 보낸 것이다. 
상길의 사촌 동생은 점찍기를 아주 잘했다고 한다. 다리 힘이 좋아서 어지간한 담은 다 뛰어넘을 정도였다고 하니, 
재밌는 건, 상길의 사촌 동생은 이 약방 주인에게 약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이리저리 약방 주인의 수제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약방 주인은 몇 년 뒤, 당시 경성, 지금의 서울 을지로(과거 구리개)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상길의 사촌 동생도 따라가게 된다.  
상길의 사촌 동생은 택견도 잘 했다고 한다. 이후 서울에서 싸움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또 상길의 손자도 박치기로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점찍기 훈련은 두 가지 형태로 전해지는데, 하나는 그냥 '점찍기'라 부르고, 다른 하나를 '황해도식'이라고 부른다.  
그 황해도식 점찍기를 처음 시작한 인물이 '안상길'이다. 
  


● 뛰어 받기 선수, 김기락 ● 
 
김기락은 1901년 평안남도 성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떴고, 가족은 어머니와 여동생 둘이 있었다. 
그래도 부친이 살아생전 남겨 놓은 땅이나 재산이 조금 있어서 먹고사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기락의 모친은 다른 어머니들과는 조금 달랐는데, 평소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던 남편의 뜻을 자식들에게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기락과 기락의 여동생들에게 글공부가 끝나고 남는 시간에는 뒷산에서 활을 쏘개 했다. 
 
기락이 14세 때였다. 
하루는 집에 장사꾼이 찾아왔다. 여러 가지 잡화를 파는 장사치였는데, 마당에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물건을 풀어 놓고 이것저것 보여주기 시작했다. 
기락의 모친이 살 것이 없다고 보내려 했지만, 장사꾼은 오히려 큰 소리를 내며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다. 
아마, 여인 혼자 자식들을 키우는 집이라고 들었는지, 강매를 하려고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기락이 화가 나서 장사꾼에게 달려들었는데, 상대가 되질 않았다. 
길거리에서 잔뼈가 굵은 장돌뱅이를 어린 소년이 어찌 이긴단 말인가, 
평소 활만 부릴 줄 알았지, 정작 맨손으로 싸우는 판에서는 요령이 없으니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보다 못한 기락의 모친과 여동생 둘이 활을 들고나와 장사꾼을 겨누었다. 
그제야 장사꾼은 물건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마당 밖으로 나갔다. 
 
며칠 후, 기락의 모친은 친정 남동생에게 부탁을 해서 한 사내를 집으로 부르게 된다. 
송 씨라고 불리던 사내는 오래전 기락의 외조부 밑에서 일을 봐주던 사람이었는데, 젊은 시절 백두산에서 수련을 했을 정도로 무예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기락의 외조부가 돌아가신 후 남긴 재산이 꽤 있었는데, 오랜 시간 집에서 고생한 송 씨 앞으로도 따로 남기셨다고 한다. 
송 씨는 그 돈으로 장사를 하면서 살고 있었다. 
오랜만에 아씨를 보고 반갑기도 했지만, 사정을 들으니 안타깝기도 했다. 
 
송 씨는 열흘에 한 번씩 기락의 집을 찾아왔고, 한번 오면 사흘씩 있다가 갔다. 
그리고 그 사흘 동안 기락에게 싸움을 가르치게 된다. 
송 씨는 먼저 기락에게 점찍기로 다리 힘을 기르게 했는데, 조금 다르게 가르쳤다. 
평평한 땅바닥이 아니라, 산길 오르막에서 가르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래주머니까지 메고 하는데, 기락은 죽을 맛이었다. 
얼마 후, 다리에 힘이 생기고 멀리 튀어 오르게 되었더니, 다음으로 모서리 다지기를 수련 했다. 
 
마지막으로 송 씨가 가르친 것은 뛰어 받기였다. 
순간 튀어 나가서 어깨와 박치기가 동시에 들어가는 뛰어 받기는 한번 걸렸다 하면, 반드시 쓰러지게 만드는 무서운 기술이었다. 
다리힘이 좋아진 기락은 2년이 지나, 성인 남자 10걸음을 한 번에 뛰어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걸음도 얼마나 빠른지 가끔 송 씨와 함께 장을 다녀왔는데, 멀리서 보면 두 사람의 걷는 발은 보이지 않고, 썰매를 타듯 미끄러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기락의 뛰어 받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기락의 앞에서 이 정도 거리면 안전하겠지는 없다.' 
 
※ 김기락은, 
김기락은 가명이다. 
김기락의 뛰어 받기는 아주 유명했다.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지는데, 
기락의 모친과 막내 여동생이 1919년 3,1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여동생은 그 자리에서 죽고, 모친은 끌려갔다가 옥사를 하게 된다. 
이 사건 이후에 기락은 독립군이 되고 싶어 재산을 정리하고, 남은 여동생과 함께 고향을 떠나게 된다. 
이때 뜻을 함께 한 여러 사람들이 동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서 일본군의 검문에 걸리게 되었는데, 그냥 둘러대고 지나가면 되는 상황이었음에도 기락은 일본군의 심기를 일부러 건드리고 싸움을 건다. 
그 순간, 일본군의 손이 검을 뽑기 위해 허리춤으로 손이 갔고, 뽑으려는 찰나, 기락의 뛰어 받기가 더 빠르게 들어가서 얼굴을 들이 받아버렸다. 
여기서 함께 있던 사람들과 힘을 합쳐 검문소에 있던 몇 안 되는 일본군을 척살하게 된다. 
 
말 그대로 일본군의 발도술보다 기락의 뛰어 받기가 떠 빨랐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후부터 기락의 뛰어 받기는 왼발에서 튀어 나가기 시작한다. 
오른손으로 뽑은 칼을 막으면서 뛰어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장면이기는 하지만, 뛰어 받기를 눈으로 보거나 직접 해본다면, 전혀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증언에 의하면 기락은 뛰어 받기를 할 때, 박치기만 썼던 것이 아니라, 칼로 상대의 배를 찔러 넣기도 했다고 한다. 
 
기락은 여동생과 만주에서 지냈다. 
해방 후, 여동생은 결혼한 남편과 서울에서 지내다가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이때 여동생은 기락과 연락이 끊어졌다. 
여동생과 몇몇 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기락은 일본군들뿐만 아니라, 마적때들도 무서워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 밤에는 기생, 낮에는 날파람꾼, 윤여하 ● 
 
윤여하는 187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얼굴이 이뻐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는데, 여하의 부모님도 하나뿐인 외동딸을 애지중지 키웠다. 
여하의 부친은 젊은 시절 보부상으로 돈을 모아서 논을 샀고, 평양 인근에 정착해서 농사를 지었는데 그럭저럭 살만했다. 
누가 봐도 평범한 가정이었다.  
 
누가봐도 평범한 농사꾼인 여하의 부친에게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는데, 바로 동네에서 알아주는 날파람꾼이었다. 
주먹과 무릎 쏘기가 얼마나 빠른지, 날파람판에 나갔다 하면, 장정 대여섯이 작살나는 것은 순간이었다. 
힘든 농사일로 쌓인 피로와 고민들을 날파람판에서 씻을 수 있어서, 여하의 부친에게는 단비 같은 자리였고, 귀한 놀이였다. 
거기다 솜씨도 너무 좋아 어린 시절부터 크게 다치지 않고, 항상 이겨서 오니 자신에게 딱 맞는 재주였다. 
그러나 여하의 모친은 날파람판에 나가는 남편이 못마땅했다. 
석전판이나 날파람판이 아무리 놀이라고 해도, 간혹 병신이 되거나, 심지어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가정도 있는 사람이 겁도 없이 그런 곳을 다닌다니, 울화통이 터졌다. 
그런데 여하의 생각은 달랐다. 
날파람판에서 펄펄 날아다니는 아버지를 보면, 너무 자랑스러웠고, 자신도 아버지 같은 날파람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 딸의 마음을 아는 여하의 부친은 여하에게도 날파람을 가르쳤다. 
딸이 자신처럼 날파람판에 끼는 것을 바랐던 것이 아니라, 당시 불안했던 정세에 금지옥엽 귀한 딸이 험한 꼴은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여하는 6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날파람을 배웠는데, 멕사리와 탁냉이 내리기, 무릎 쏘기 등을 익히게 된다. 
부친을 닮아 그런지, 여하의 탁냉이 내리기는 빠르기가 제비 같고, 매섭기는 범 같았는데, 이유는 돌멩이를 던지는 석전을 통해 팔의 힘을 길렀기 때문이다. 
 
어느 날, 여하는 부친의 날파람판을 구경 갔다. 가까이 있으면 다칠 수 있기 때문에 먼발치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앞줄에 있는 젊은 사람들이 발길질을 하고 욕을 하며 어루대기 시작했다. 
점점 흥이 고조되자, 이윽고 함성 소리가 들렸다. '셋가라!', '겟세라!', '게서!', '나간다!' 
여기저기서 치고받고 갈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난리 통에 여하의 부친은 펄펄 날아다니며, 종행무진 상대를 쓰러뜨렸다. 
그런데 어디선가 난데없이 몽둥이를 든 이들 몇이 달려 나와 여하의 부친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열댓 명이 나타나 몽둥이를 휘두르는데, 딱 봐도 어디서 놀다가 온 매질꾼들이었다. 
여하의 부친과 부친의 벗들이 함께 상대를 했지만, 매질꾼들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그 순간, 여하는 그 난리 통에 뛰어 들어가고 말았다. '아버지를 구해야 한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 몸이 먼저 반응하고 만 것이다. 
뛰어 들어가자마자 쓰러져있는 사내의 등을 밟고 뛰어올랐다. 그리고 몽둥이를 들고 있는 한 놈의 면상을 사정없이 갈겨버렸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던 또 다른 놈의 급소를 무릎 쏘기로 올려 버렸다. 
이제 두 놈 보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이 상황을 본 매질꾼들이 여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매질꾼 하나가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돌이 날아온 것이다. 
여하 부친의 벗들이 여하를 구하기 위해 돌을 들고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매질꾼도 숙련된 석전꾼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난리가 정리되었고 매질꾼들도 도망을 갔다. 결국 누가 사주를 한 것인지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분명 그 판에서 여하의 부친을 노린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여하의 부친은 이때 머리를 다쳐서 며칠을 누워 있다가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부친이 세상을 뜨고 난 후, 여하의 모친도 슬픔과 절망으로 병을 얻게 된다. 
논까지 팔아가면서 약 값을 마련했지만, 모친도 큰 차도 없이 1년 후 부친을 따라 세상을 뜨게 되다. 
부모를 다 잃은 이때 여하의 나이는 16세였다. 아주 꽃다운 나이였다. 
또래 여자아이들이 대부분 시집을 가는 나이였다. 
그런데 여하는 당시 또래 아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스스로 기생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시집갈 생각도 없고, 혼자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는 것도 엄두가 나질 않았다. 
무엇보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놈들을 찾고 싶었다. 듣기로 매질꾼이든 날파라꾼이든 그냥 놀이로 노는 인간이 아니라, 내기에 환장한 놈들은 대부분 주먹패들이고, 그런 놈들이 득실대는 곳이 기생집이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하는 스스로 기생집을 찾아가 춤과 소리를 배운다. 
빚을 지고 팔려오거나 관기로 끌려온 것이 아니라, 제 발로 왔으니 선생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거기다 예의 바르고 부지런한데다 똑똑하기까지 해서 여하에게 여러 가지 일을 맡기게 되었다. 
이때부터 여하의 이중생활이 시작된다. 
밤에는 기생집에서 소리를 하고 춤을 추고, 낮에는 사내처럼 꾸미고 날파람판이 있으면 찾아다녔다. 
여하는 금세 날파람판에서 이름을 날렸다. 
날파람판에서 여하를 '감당개(검은 개, 검둥이)'라고 불렀는데, 이유는 항상 얼굴에 검은 숯을 바르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미모를 감추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여하는 날파람뿐만 아니라 석전도 잘했는데, 탁냉이 내리기를 할 때, 주먹이 나갈 수도 있고 순식간에 돌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윤여하는 26세에 시집을 갔다. 
날파람판에서 한 번도 얼굴을 맞아본 적이 없었기에, 저녁에는 기생집에서 화장을 한 윤여하를 볼 수 있었다. 
 
※ 윤여하는, 
실존 인물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컸던 인물이다. 
밤에는 기생, 낮에는 날파람꾼이라는 이야기는 너무 매혹적이라, 드라마나 영화 소제로 손색이 없다.  
윤여하(가명)의 이야기는 손자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실제 삶은 이렇다. 
부모가 다 돌아가신 후, 기생집으로 직접 갔다고 하는데, 원래 여하는 춤도 곧잘 췄고, 노래도 잘했다고 한다. 
그래서 친척의 추천으로 간 것이다.  
여하는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똑똑하기도 했고, 논을 판돈으로 소개받아 간 기생집에 약간의 투자?도 했었다. 
그러다 보니 주로 운영을 도왔고, 또 자신의 시간을 쓸 수 있으니 날파람판에도 간 것이다. 
여하가 날파람판을 찾아다닌 이유는 위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부친을 다치게 한 주먹패들을 찾기 위한 것도 있고, 본인 스스로도 부친처럼 싸움을 좋아하는 부류였던 것이다.  
실제로도 윤여하의 외모는 빼어났던 것 같다. 기생집에서도 손님들이 자주 찾았고, 길에서도 따라오는 사내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얼굴을 가리기 위한 방법으로 검은 숯을 칠하고 싸움판에 간 것이다. 
'감당개'는 평안도 방언인데 실제로 쓰던 별명이었다. 
 
날파람에 있는 기법이라고 전해지는 것 중에 '멕사리(멱살의 평안도 방언)' 라는 것이 있다. 
오래전에는 이 멕사리를 춤처럼 움직이며 익히는 기법이 있었는데, 이것을 멕사리춤 또는 멕살춤으로 부른다. 
그런데 윤여하가 이 춤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기 쉬운 방법을 찾다가 춤의 형태로 정리했다는 것이다. 
발의 움직임은 '모두 걸음(까지발 걸음의 평안도 방언)'으로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 탁냉이 내리기를 잘했는데, 석전처럼 무거운 돌을 던지며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외모와 다르게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많았다. 
무릎 쏘기, 지금의 격투기에서 볼 수 있는 니킥과 비슷한데, 이 기법도 잘 썼다고 전해진다.  
날파람꾼들 이야기 중에서 남자들도 많지만, 윤여하의 이야기가 그 이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부분들이다. 
기술을 오래 기억하고 전하기 위해 춤의 형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나, 같은 자세라도 맨손으로 쓰다가 돌을 들면 석전이 되는 변화 무쌍한 형태로 시도했다는 것들이 대단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윤여하가 날파람판을 돌아다닌 것은 2년 남짓이라고 한다. 
기생집 외에도 다른 사업에 투자를 했는데, 잘되어서 돈을 꽤 벌게 된다. 
또 당시 조선에 선교를 하러 들어온 외국인 여자 선교사들이 지방을 돌아다닐 때, 경호를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남편은 장로교 목사로 활동했다.
 

● 나는 왜놈만 받아! 따닥의 진수, 최 광 ● 
 
최 광은 1905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담배밭을 일구셨는데, 7살 이후부터 3살 위 누이와 함께 부모님을 돕기 시작했다. 
밭일이 끝나면 어린 광은 유일한 취미를 즐기기 위해 친구들과 냇가로 뛰어갔다. 
그곳에서 석전을 하며 놀았는데, 어른들이 서로 던지면 다칠 수 있으니 나무로 표적을 만들어 놓고, 그곳만 던지라고 일렀다. 
 
일요일이 되면 광의 모친과 누이는 작은 보따리를 들고 새벽 일찍 집을 나섰다. 
평양에 있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다. 
이 당시 동네에는 교회를 안 나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았다. 마을 입구에서 다들 모여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평양까지 가는 것이었다. 
모친과 누이가 교회를 가면 집에는 광과 부친만 남아있었다. 
광의 부친은 안사람과 딸이 교회에 가는 것을 말리지는 않았지만, 본인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어색하다는 이유로 함께 가지는 않았다. 어린 광도 마찬가지였다. 
모친과 누이가 교회를 가면, 광은 동네 아이들과 모여 또 냇가로 뛰어간다. 
그리고 돌을 모아서 과녁 맞히기를 하며 놀았다. 
원래 석전은 사내라면 누구나 즐기던 놀이였지만, 동네 어른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었다. 
석전을 할 때마다 사람이 심하게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있어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부탁을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른들이 아이들에게도 석전을 못 하게 했고, 놀더라도 사람에게 던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맞추며 놀게 했다.  
 
어느 일요일, 
광의 모친과 누이가 평양에서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였다. 
마을 어귀에서 술취한 일본인 두명이 광의 누이를 보고 희롱을 한 것이다. 모친이 말리려 그들에게 메달렸는데, 몇 번을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모녀의 비명 소리에 행인들이 모여들었고, 일본인들은 그 자리를 허겁지겁 뜨고 말았다. 
이 일로 광의 모친과 누이는 며칠 간 앓아 누웠는데,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도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이때 어린 광의 분노가 일본을 향해 뿌리내리게 된다. '왜놈들, 언젠가는 내가 복수 해줄 테다.' 
 
광이 11살이 되었을 때, 동네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광에게 일렀다. 
'근처 동네에 날파람을 한다는데 우리도 가볼까?' 
광은 솔깃했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어리다고 쉽게 낄 수 없는 놀이판이었다. 
두 녀석은 동네에서 날파람판을 많이 놀아본 4살 위 형에게 부탁했다. 기본적인 것만이라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날파람판에서 뭘 알아야 하는지, 상대를 어떻게 쓰러뜨려야 하는지를 배우고 싶었다. 
그렇게 동네 형을 졸라 처음 배운 것은 가까운 거리에서 박치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광은 이 박치기가 쉽지 않았다. 
또래 애들보다 키가 작아서 머리가 상대의 얼굴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광에게 동네 형은 다른 방법을 알려 주었다. 상대의 얼굴 보다 조금 낮은 명치를 받으라는 것이다. 
'명치를 정확하게 받으면 상대가 앞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그날부터 광은 상대의 명치를 기준으로 친구와 함께 열심히 연습했다. 
그리고 준비가 되었을 즘, 첫 날파람판에 서게 된다. 부모님이 알면 한바탕 난리가 날 수 있으니, 비밀로 하고, 조용히 출전을 한 것이다. 
광에게 첫 날파람판은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판도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대 여섯 판을 더 끼면서 싸움에 눈을 뜨게 된다. 
광은 혼자 새로운 기술도 터득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명치를 받고 상대가 몸이 앞으로 기울면, 팔뚝으로 얼굴을 들어서 또 한 번 더 받는 것이었다. 
또 반대로 뛰어서 상대의 얼굴을 먼저 받으면, 바로 이어 조금 낮은 명치를 연달아 받는 '따닥'을 익히게 되었다. 
자기만의 기술을 익힌 광은 싸움의 도를 터득하게 된다.  
18살이 된 광은 평양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밤마다 일본인 거주 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래서 술에 취한 일본인 주먹패들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어서 때려눕히고는 했다. 
일본인만 골라서 명치나 얼굴에 박치기를 갈긴 것이다. 
광은 고향인 정주에서부터, 태천, 운산, 향산까지 원정을 다니며 일본인들을 괴롭혔다. 
 
※ 최 광은, 
최 광이 쓰던 '따닥'은 평안도식이 아닌 함경도식이라 불리던 기법이다. 
뛰어 들어가 상대의 명치를 받고, 바로 그 자리에서 상대의 아래턱을 받아 올리는 연속 기법이었다. 
그리고 간혹 상황에 따라 무릎 걸이를 연결해서 쓰기도 했다. 
최 광이 한번 들어가 받으면 손바닥으로 연달아 박수를 두 번 치는 것처럼 빨랐다고 한다. 
진짜 '따닥 걸이'의 표본이었다.   
석전이나 날파람뿐만 아니라, 씨름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최 광의 모친과 누이가 일본인들에게 봉변을 당했을 때, 누이가 얼굴에 큰 상처를 입게 된다. 이 사고로 누이의 얼굴에 흉터가 남게 되는데, 최 광은 누이의 얼굴 흉터를 볼 때마다 일본인들에 대한 원망이 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일본인들만 골라서 때리다가 결국 잡혀서 옥살이를 하게 되고, 이때 옥에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왼 팔을 못쓰게 된다. 
이후, 기독교인이 되어서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전해지지만, 
몇 가지 이야기가 더 있다. 
후에 독립운동가였던 김원봉을 도와서 의열단 요원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용은, 옥에서 나온 후, 기독교에 입교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길선주 목사의 생애를 듣게 된다. 
길선주 목사는 목사가 되기 전 선도를 수련하던 도인이었다는 말을 듣고, 최 광 자신도 팔을 고치고자 선도 훈련을 병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팔은 결국 회복하지 못했지만, 다른 재주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본인의 싸움 기술과 선도를 하다 얻게 된 새로운 재주를 가지고 의열단을 도왔다는 것이다. 
이때 최 광과 선도 수련을 함께 했던 사람이 있는데, 훗 날 사람들은 이를 '정 영감'이라고 불렀다. 
정 영감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는 '최 광이 더 뛰어 나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 팔꼬방 귀신, 김문규 ● 
 
김문규는 1913년(추정) 평양(추정)에서 태어났다. 
문규의 모친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부친과 남동생 셋이 살았는데, 부친은 일본인 가게에서 점원 일을 했고, 문규도 일찍부터 남의 집 머슴으로 일을 했다. 
그렇게 해야 가족이 먹고살 수 있었다. 
문규는 남동생 셋의 공부를 위해 자신의 학업을 일찍이 포기했다. 
이런 문규를 보는 부친의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문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저녁이 되어서 일이 끝나고 오는 길에 문규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이 있었는데, 
일본인이 운영하는 유도 도장이었다.  
몇 해 전 이곳 도장이 홍보를 하기 위해 길 한가운데서 시범을 보인 적이 있는데, 그 모습에 문규는 심장이 터질 것 만 같았다. 
그 유도가 너무도 배우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 사내라면 저런 무예는 할 줄 알아야지.' 
그러나 일이 끝나면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에 가서 쉬어야 했고, 무엇보다 도장을 다닐만한 형편이 되질 못했다. 
그런 문규는 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도장 안에서 메쳐지는 소리 나 기합 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었다. 
그렇게 이루지 못하는 꿈을 곱씹으며 지내던 어느 날, 
바로 밑에 동생이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냈다. 본인도 일을 해서 집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부친보다 문규가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공부를 그만둔다는게 아니라, 잠깐이라도 일을 하겠다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일을 할 곳도 찾았고,' 
평소 공부를 잘했던 둘째에게 학교 선생님이 과외 일거리를 소개해 주신 것이었다. 
부잣집 자녀들이라고 하는데, 시간도 괜찮고 보수도 넉넉했다. 
이 일을 계기로 문규는 조금 숨통이 트였고, 그렇게 꿈에 그리던 유도 도장을 찾아가게 된다. 
문규는 도장에 가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도장이라고 들었는데, 정작 지도를 하시는 사범님이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도장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수련을 하고 있었다. 
사범님은 일본에서 유학 시절 유도를 수련하였고, 조선에 오자마자 도장을 연 것이다. 
문규는 사범님을 진심으로 존경했고, 열심히 수련에 임했다. 
 
어느 날, 사범님이 문규를 불렀다. '문규야, 유도하는 이들과 싸울 때는 어설프게 손을 뻗지 말아라.' 
사범님의 이야기에 문규는 살짝 당황했다. 싸움이라니, 
사범님은 문규에게 도장에서 하는 유도가 아닌 길거리 싸움에서 쓸 법한 기술을 알려 주고 있었던 것이다. 
사범님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자신이 일본 유학 시절, 조선인이라고 무시하는 놈들을 제압하기 위해 유도를 시작했는데, 가끔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어 싸움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 싸움에서 자신이 깨달은 것 중에 하나가 어설픈 주먹은 오히려 유도가에게 잡히기 쉽고, 또 한번 잡히면 그것으로 끝이 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먹이 아닌 팔꿈치(팔꼬방)로 가격하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고 한다. 
상대에게 뛰어 들어가서 팔꿈치로 얼굴이나 가슴 등을 치라는 것이다. 
문규는 존경하는 사범님이 이런 기술을 가르쳐 주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군말 없이 있는 그대로 익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기술을 실제로 길에서 쓰는 일이 일어난다. 
하루는 셋 째 남동생이 피떡이 되어 집에 돌아왔는데 내용인즉슨, 학교에서 오는 길에 동네 주먹패들에게 걸려 돈도 뺏기고 얻어맞았다는 것이다. 
동생의 이야기를 들은 문규는 당장 주먹패들을 찾아갔다. 동네 부근에서 몰려다니는 주먹패들인데, 대 여섯 명 정도 되었고, 여기에 두목 격인 녀석은 문규보다 한 살이 많았다. 
또 그놈은 학교에서 유도부로 활동하고 있는 싸움꾼이기도 했다. 
문규는 그놈의 면전까지 다가가서 일대일 대결을 청했다. 그리고 싸움이 시작되는 찰나, 그놈이 문규의 멱살을 잡고 당기는 순간 문규는 그대로 끌려가는 듯하다가 팔꿈치로 그놈의 얼굴을 갈겨버리고 말았다. 
싸움은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너무 싱겁게 끝나버려서 주위에 있던 다른 아이들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주변 학교에 소문이 났고, 유도 좀 한다는 일본 학생들이나 조선 학생들이 문규에게 도전했지만, 팔꿈치 가격 한방으로 다 패하게 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김문규를 팔꼬방(팔꿈치) 귀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김문규는, 
유도를 수련한 김문규가 박치기꾼들 이야기에 나오는 이유가 뭘까? 
먼저 김문규에게 유도를 가르친 사범은 4, 5년 정도 도장을 운영하다가 접고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고 한다. 
문규도 함께 독립운동을 했는지는 모른다. 
당시 많은 싸움꾼들이 문규를 찾아와 팔꿈치 쓰는 법을 배워갔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그들에게 자신을 가르친 사범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우리 사범님은 일본 유학 가기 전에 날파람꾼이었는데, 팔꿈치만 잘 쓰시는 것이 아니라 박치기도 잘 하셨다.' 
그러니까 사범은 유도를 가르치지만, 싸움의 베이스는 날파람이었다는 것이다. 
 
김문규는 팔꿈치를 자유자재로 쓸 줄 알았고, 박치기도 곧잘 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 유도를 가르치는 일본인 사범들이 길거리 싸움에서 가장 두려워한 기술이 박치기 다음으로 팔꿈치였다고 한다. 
오죽하면 도장 입구에 박치기 금지, 팔꿈치 치기 금지 같은 것을 적어두기까지 했다고 한다. 
문규는 잠깐 주먹패에 몸을 담기도 했고, 유도 도장에서 사범으로도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남동생들은 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가졌지만, 김문규는 줄곧 혼자 살다가 한국 전쟁 때 북한군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까지 동생들의 삶을 먼저 생각하는 따뜻한 맏 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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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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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조선 땅에서 하던 무술도 별 특별할 거 없고 타 지역 전통권들처럼 무기술, 권법 섞인 종합무술이란 거지
12:59
25.08.06.
홀연히 나타나서 방망이 돌리는 법 알려주고 사라지신 임씨라는 분... 아무리 봐도 임호 선생님 같은데...;;;
17:54
25.08.06.
best 익명_956741
서울에서 온 함경도 출신 사람 <-- 이미 이것부터 심상치 않음.

택견 태기질의 어원이 함경도의 태기치다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랑 심지어 가르쳐 준 것도 하필 송덕기 옹이 할 줄 안다고 하셨다는 방망이술이 오버랩되는 육모인데 이걸 칼 쓰는 방법대로 쓸 수 있다는 단서까지 달림.

미친 떡밥덩어리 그 자체임 ㅇㅇ;
18:00
25.08.06.
+ 평안도 출신 최광은 석전꾼이자 씨름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하고 좌익 계열인 김원봉을 도와 의열단을 훈련시켰으며 기독교인이었다...? 이건 PJLH에 나왔던 임호선생님 쪽 동선이랑도 좀 겹침

함경도 출신 임 씨 선생님 이야기도, 예전 PJLH에서 언급된 최운산 등 인물들과 이후 글에서 언급된 좌익 기독교인 독립운동가들이 함경도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태기치다' 어원과만 엮이는 게 아닐 가능성이 큼.
00:15
25.08.07.
이 글이 처음 올라올 때 올해 초에 유튜브 시작할 거라는 댓글을 봤었는데 언제 시작하시나요?
22:15
25.08.05.
2등 익명_465205
흐미.. 이 긴 글을.. 교정 전에 글을 올리셨네
오타도 많을텐데
아마 프로젝트에서 무예파트는 이 달 부터 교육 시작한다고 들었음요
유튭은 전수자들 교육이 되면 할걸요
택견쪽이랑 교류한다고 들었는뎅
22:40
25.08.05.

저번 글 보고도 생각했지만 잽이 쪽 기술이 실랏, 칼리, 아이키도랑 비교되는 게 흥미롭네. 지금 택견이 무기술 쪽으로 얘기 많이 나오고 있는데 마침 잽이랑 비교된 실랏, 칼리, 아이키도 셋 다 무기술 기반이니까

잽이로 추정되는 무술 배우셨다는 분도 잽이랑 택견이 칼리랑 엄청 비슷하다면서 실제로 단봉 휘두르는 법도 익혔다 하셨고

10:46
25.08.06.
결국 조선 땅에서 하던 무술도 별 특별할 거 없고 타 지역 전통권들처럼 무기술, 권법 섞인 종합무술이란 거지
12:59
25.08.06.
홀연히 나타나서 방망이 돌리는 법 알려주고 사라지신 임씨라는 분... 아무리 봐도 임호 선생님 같은데...;;;
17:54
25.08.06.
익명_956741
서울에서 온 함경도 출신 사람 <-- 이미 이것부터 심상치 않음.

택견 태기질의 어원이 함경도의 태기치다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랑 심지어 가르쳐 준 것도 하필 송덕기 옹이 할 줄 안다고 하셨다는 방망이술이 오버랩되는 육모인데 이걸 칼 쓰는 방법대로 쓸 수 있다는 단서까지 달림.

미친 떡밥덩어리 그 자체임 ㅇㅇ;
18:00
25.08.06.
+ 평안도 출신 최광은 석전꾼이자 씨름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하고 좌익 계열인 김원봉을 도와 의열단을 훈련시켰으며 기독교인이었다...? 이건 PJLH에 나왔던 임호선생님 쪽 동선이랑도 좀 겹침

함경도 출신 임 씨 선생님 이야기도, 예전 PJLH에서 언급된 최운산 등 인물들과 이후 글에서 언급된 좌익 기독교인 독립운동가들이 함경도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태기치다' 어원과만 엮이는 게 아닐 가능성이 큼.
00:15
25.08.07.
그쪽이지. 게다가 임호 선생님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여운형 등 주요 인물들과도 엮였으니만큼 본 글의 떡밥요소를 파볼 가치가 있음.
22:25
25.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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