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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의 정립 - 백병전이란 대체 무엇일까?

익명_45390696
1571 0 24

https://cafe.daum.net/historywar/Nws/2629?listURI=%2Fhistorywar%2FNws

 

본인이 제시한 스레 때문에 역겔에서 며칠동안 대토론이 벌어졌군요. 그러나 이것이 백병전이라는 개념에 대한 서로간의 이해 차이 때문에 진흙탕 토론으로 번질 뻔한 일이 조금 있었던 것으로 본인의 책임을 통감합니다.

그렇다면 송태조조광윤이 조선군의 무능을 통감했던 백병전 능력, 백병전의 개념은 대체 무었일까요?

- 세계 여러 나라에 걸쳐 백병전이라는 것은 군대와 군대의 최종적인 승부 결정을 위해 거의 반드시라고도 말할 수 있을 만큼 행해져 왔습니다. 여기서 백병전이라는 것은 <냉병기를 사용한 Close-Combat> 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백병전이라는 것의 의미는 말 그대로 칼이나 창을 이용한 영거리 전투 그 이상은 아닙니다.
이것에는 기병전이나 보병전 모든 것이 다 포함되며 누가 싸우던 냉병기를 이용한 영거리 전투로 정의할수 있습니다.

제가 백병전 능력의 보완을 위해 야전축성이나 성곽을 필요로 할 것을 주장했던 만큼 지형이나 야전축성을
이용한 변수는 제외하도록 하지요.

이러한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군대는 많은 고심을 하였으며 그 발전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서양입니다. 서양은 과거 그리스-로마의 선진적인 군사제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문명이 단절되고 북방의 바이킹들에 의해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전투양상이 원초적인 수준으로 돌아갑니다. 그 이후 백병전이라는 전투 상황에서의 승리를 위해 점진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고 결국은 세계 제일의 백병전 능력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그들을 통해 백병전 능력이란 무엇인지 보는 것이 이상적이다 하겠습니다.

가령 백병전 능력이란 또한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 그대로 <칼이나 창 등 냉병기를 사용한 영거리 전투에서 승리하는 능력>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형태가 가장 백병전 승리에 이상적이었는지 보기만 하면 됩니다.


역겔에서 백병전 능력의 유무를 따지면서 <개인의 영거리전투능력>을 곧 백병전 능력으로 직결시키시는 분들이 많으심에 조금 놀랐습니다. 백병전에서 개인무예가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유럽에서 15세기를 거치며 대부분 소멸되었습니다. 과거 로마의 예를 들자면, 켈트인들이 오랫동안 로마인들과 싸워 왔습니다만, 이들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서도 언급하고 있듯 로마인의 60cm검에 비해 거대한 90cm의 검을 한손으로 사용하고 방패를 들었으며 체격과 힘도 로마인을 압도했습니다. 이 경우 개인적인 무기 사용 능력이나 힘이라는 면에서 켈트인이 우월했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로마군은 무기의 열세와 막강한 켈트인의 파상공세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승리를 지켜냈으며 이것은 전열의 구성, 백병전에 알맞도록 진화된 로마군의 전술, 그것을 위한 무기였던 글라디우스와 필룸. 하나처럼 움직이는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등의 우월함으로 흔히 평가되고는 합니다.

이후 백병전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바로 <전열을 구성, 잘 짜여진 명령체계, 기본을 이루는 전술과 그것을 위한 병기체계>로 굳어지게 되었으며, 흔히 혼자서 뛰쳐나가기를 좋아하고 환상적인 무술실력을 선보이며 일당백으로 적을 쳐부수는 이미지로 굳어진 중세의 기사들도 사실은 전열을 구성하여야만 승리할수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는 1191년 9월 7일 벌어진 아르수프 전투에서 더욱 잘 드러납니다. 이 전투에서 기사들은 우리가 흔히 아는 영웅주의의 화신같은 모습과는 다르게 사자왕 리처드의 명령을 따르며 적의 화살공격을 침착하게 견디며 적의 기병돌격을 격퇴시키고 이후 엄청난 밀집을 통한 일제 기병 돌격을 통해 살라딘군을 참패시킵니다. 이후로도 기사들의 명성은 전장에서 전열을 구성하여 일제 돌격을 통해 적진을 붕괴시키는 능력을 통해 얻은 것이며 결코 나홀로 돌격으로 무언가를 해낸 적은 없었습니다.

이 경우 개인무예의 화신으로 알려진 중세의 기사들조차 <전열의 구성이 백병전 승리의 비결> 임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 중세시대를 지나 르네상스 시대에 달하면 유럽의 백병전 능력은 더더욱 개인무예의 수준을 떠나 <전열을 구성, 잘 짜여진 명령체계, 기본을 이루는 전술과 그것을 위한 병기체계>의 공식을 철저하게 따르게 되는데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스위스 용병단의 파이크 전술입니다. 스위스 용병단의 파이크 전술은 이후 전 유럽 군사체계의 기본이 되고 당시 1476년 Grandson전투에서 여전히 우월하다고 여겼던 기사를 격파하면서 새로운 백병전의 최강자로써 등극했습니다. 이후 파이크 대형이 백병전의 황제라는 사실은 17세기 초까지 변함없이 유지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일본의 경우를 보지요. 일본의 파이크라 할수 있는 나가에 야리(長炳槍), 비록 유럽의 그것처럼 기병을 의식하여 만들어진 물건은 아니지만 그 형태나 운용법에 있어서 유럽의 파이크 대형과 여러모로 유사한 측면을 가집니다. 오다군의 2간 창(2間:364cm)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무기는 집단을 이루었을때 그 어느 무기보다 우월한 전투능력을 제공하고 민병들도 쉽게 배울 수 있었으며 그 길이에서 나오는 위력으로 오다, 타케다, 미요시, 아사쿠라, 아사이 등 일본의 영주들에게 급속도로 퍼진 무기입니다. 이러한 무기들은 사무라이들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는 아시가루 병력을 통해 운용되며 개인무예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일본의 백병전 풍토를 단숨에 장창 집단전 체제로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무기로써 유럽인들에게도 상당한 놀라움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제시한 조선군의 백병전 능력의 부재에 대해서 두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일본의 백병전 체계를 상회하거나 혹은 대등한 수준의 백병전 전술 체계가 있었음을 증명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저 백병전과는 상관없는 몇몇 전투를 나열하거나 개인 무예 수준의 백병전이 벌어져 소규모의 우세를 증명한 정도로는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를 뒤엎을 수는 없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화기와 투사무기를 중시하여 화기수준은 높았으나 조선군이 백병전 보병방진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검과 창은 비웃음을 당할 정도로 짧았고 대규모의 정규군이 대치한 야전에서 백병전 상황에 돌입하였을 때 우세를 유지하여 적 백병전 병과를 패퇴시킨 사례도 찾아볼수 없었고 오히려 일본군의 백병전 능력에 대하여 전율하는 실록의 기록은 많으며 이후 삼수병체계의 도입을 통해 백병전 전문 병과를 양성하려는 노력만 보아도 조선에 그럴듯한 백병전 전술이나 전문병과가 전무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조선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야전이라야 제가 이전에 조선군의 약점 보완책으로 제시했던 야전축성을 통해 우위를 확보하거나 아니면 성곽을 통해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한 정도인걸요.


결국 저의 말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백병전이란? <냉병기를 사용한 Close-Combat>
백병전 능력이란? <칼이나 창 등 냉병기를 사용한 영거리 전투에서 승리하는 능력>
유럽의 예를 통해 본 백병전에서 승리하는 비결이란? <전열을 구성, 잘 짜여진 명령체계, 기본을 이루는 전술과 그것을 위한 병기체계>

일본보다 조선이 백병전 능력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일본의 백병전 전술체계나 병장기에 대해 그 수준을 상회하거나 최소한 뒤지지 않을 만한 조선의 전술체계와 병장기를 증명하면 O.k.>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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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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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익명_90446217

임란 당시 일본군의 백병전 능력이 조선군보다 뛰어났다는 건 알만한 사람들이면 전부 다 동의하는 명제 아닌가...

21:02
24.01.07.
평균적으로 그랬단거지 항상 그런게 아님.조선도 당연히 백병전에서 뛰어난 장수와 군사들이 있었고 정유재란 때는 일본군이랑 백병전으로 싸워서 이긴 전투도 많았음
02:54
24.01.08.
2등 익명_45390696
알만하지 않는 사람들은 또 아니라서...
21:20
24.01.07.

송태조가 조선군 백병전 능력을 어떻게 알수있냐 저승에서 사륜안 씀?

02:53
24.01.08.

내가 예전에 역사전공자가 쓴 블로그에서도 조선군 백병전 관련 글 가져왔는데 또 기어와서 뇌피셜 싸는 놈들이 있네 ㅋㅋㅋㅋ

02:55
24.01.08.
https://yugakkwon.com/taekkyeon/190878?_filter=search&search_target=title_content&search_keyword=%EC%A1%B0%EC%84%A0%EA%B5%B0

이게 백병전 능력이 딸리는거냐?
02:57
24.01.08.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홍계남은 양성현(陽城縣) 사람으로, 홍언수의 서자였으며, 담력과 용맹이 있고 활쏘는 데에 능하여 금군(禁軍)에 소속되었다고 한다. 이후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들어갔는데, 일본인들은 그가 말타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며 그의 이름을 기억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수원에서 충의위를 맡고 있던 홍언수가 의병을 일으켰고, 홍계남 역시 아버지의 군대에 가담했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홍계남은 아버지의 군사를 따라 적을 쳐서 여러 번 싸워 승리를 거두었고 적의 귀를 베어 온 것이 거의 백여 개에 달해 인근에 진을 친 일본군이 위축되어 감히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홍언수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해 적의 목을 많이 벤 공로로 수원 판관에 임명되었으며 홍계남은 경기 조방장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홍계남이 일이 있어서 다른 군진에 간 사이, 일본군이 기습을 감행해 홍언수가 전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홍계남은 급히 돌아왔으나 이미 군대가 패하고 아버지가 죽어 시신 마저 적에게 빼앗기자 단기로 적진에 쫓아가서 크게 외쳤다고 한다.
너희들이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나도 너희들에게 죽겠다.

연러실기술에 따르면, 일본군은 홍언수의 시신을 던져 돌려준 후 곧 군사를 내어 사면으로 포위했다고 한다. 이에 홍계남은 왼손으로 아버지의 시신을 안고 오른손으로 칼을 휘둘러 대적하니 적이 감히 대적하지 못했다. 이후 돌아와 아버지의 시체를 진중에 놓아두고 쫓아가 두어 명의 머리를 베자 적이 더욱 두려워했다. 이 뒤로는 거리와 마을에서 일본군이 노략질할 때 사람들이 홍계남의 이름을 부르면 그들이 반드시 도망쳐 달아났다고 한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홍계남은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고자 격문을 돌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난이 이와 같이 심하여 승여가 서쪽으로 파천하니, 만백성이 의탁할 데가 없도다. 눈을 들어 강산을 보매 그 누가 간장이 찢어지지 아니하랴. 이 땅에서 먹고 살고 혈기를 가진 자들은 모두 마땅히 창을 베개 삼고 모든 간고(艱苦)를 참으며 임금과 아버지를 위하여 복수해야 할 것인데, 내가 불행이 이 참혹한 처지를 당하여 흉한 칼날 아래 아버지와 형이 모두 목숨을 잃었으니, 어찌 구차스럽게 살기를 원하여 이 적들과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있겠는가.
인하여 생각건대, 원근의 선비와 백성들이 나와 같이 참혹하고 비통한 일을 당한 이가 반드시 백이나 천으로 헤아리는 정도에만 그치지 아니할 것이므로 이에 여러 장사들을 모집하여 한 군대를 만들어 복수하는 군사라고 이름하여 부형의 깊은 원수를 갚으려 하는데, 제군은 어떻다 하겠는지 모르겠다. 그대의 아버지, 형, 아내, 자식이 참살당하여 해골이 들판에 드러나서 원혼이 의탁할 데 없이 황천이 아득한데, 우리가 홀로 편안히 물러나서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황천에 혼령이 있건대 감히 내가 아들이 있고 아우가 있다 하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털끝이 쭈뻣하다. 제군이 만약 이 말을 옳다고 한다면, 부형과 처자의 원수가 있는 이들은 마땅히 각기 징발하고 모집하여 무기를 준비하여 날짜를 약속하고 발정하여 종천의 원통함을 조금 풀어서 <춘추>의 의를 저버리지 아니함이 어떠하겠는가. 이상을 8도에 통문함.

이후 홍계남은 안성에서 아버지가 이끌던 의병들을 수습해 100여 명을 모아 산 꼭대기에 보루를 쌓고 양천(陽川)·안산(安山) 두어 고을의 지역을 굽어보며 군사를 주둔시키고 적의 헛점을 틈타 동서로 습격하여 많이 참살했다. 이에 일본군이 감히 그 지역에 들어가지 못해 경기 지역과 호서의 여러 고을이 그를 의지했다.




지역을 굽어보며 군사를 주둔시키고 적의 헛점을 틈타 동서로 습격하여 많이 참살했다. 이에 일본군이 감히 그 지역에 들어가지 못해 경기 지역과 호서의 여러 고을이 그를 의지했다.

또한 홍계남은 충청 병사 신응협(申應恊), 전라도 조방장 이유의(李由義)와 함께 죽산에 주둔한 적을 협공하여 횃불을 드는 것으로 신호를 삼고 밤을 틈타 진군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유의의 전라도 군이 몰래 죽성 밖 5리 지점에 도착하여 홍계남과 신응협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일본군이 먼저 알고 기병을 파견해 앞뒤로 덮쳤다. 그 바람에 이유의의 전라도 군은 크게 패해 무너졌고 죽은 자가 길에 겹겹이 쌓였다. 이에 홍계남과 신응협은 철수했다.

선조 25년(1592년) 9월 13일, 비변사는 수원의 물자가 풍부하고 군민이 많으니 적을 만날 때마다 사살하여 명성을 크게 떨친 홍게남을 수원 판관에 제수하자고 건의했고, 선조는 이를 따랐다. 이후 홍계남은 통정 대부로 진급했고 한양을 탈환할 태세를 갖췄다. 선조실록 선조 26년 1월 11일자 기사에 따르면, 당시 안성군에 주둔한 홍계남의 군사는 300명이었다고 한다.

선조 26년(1593년) 정월, 일본군은 용인현, 양지현, 죽산부를 한성과 부산 간의 유일한 교통로로 확보하여 대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때 소모사 변이중(邊以中)은 천안군과 양성현 일대에 군대를 머무르게 하고 적을 격퇴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옛날의 계책을 따라 전차와 마소를 준비한 뒤 죽산에 이르러 우거(牛車)를 편성한 후 대형을 학익진으로 짜고 죽산성을 향해 돌격했다. 이에 일본군이 출격해 반격하면서 불을 질러 수레를 태우니, 수레에 있던 군사가 모두 타 죽고 변이중은 모두 몸만 빠져 나왔다. 이때 홍계남이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와 구원해 일본군의 수급 몇 급을 베어 변이중의 군대를 가까스로 수습하고 적의 추격을 뿌리쳤다.

선조 26년(1593년) 6월 19일, 일본군 10만 명이 진주성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홍계남은 전라 병사 선거이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에 왔지만 능히 방비할 수 없음을 알고 말했다.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나 안 쪽을 지킴만 못하다.

그러나 김천일이 소리를 높여 반대하자, 홍계남은 선거이와 함께 운봉에 진을 쳤다. 이후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 공격했을 때, 홍계남은 높은 곳에 올라 바라봤지만 적의 기세가 매우 강하자 감히 진주성을 구원하지 못했고, 결국 진주성은 6월 29일에 함락되었다.이후 홍계남은 이빈 등과 함께 남원으로 철수해 원천원에 진을 쳤고, 선거이는 호산원 산성에 진을 쳤다.

이때 일본군이 진주성에서 출격해 구례현에 들이닥치자, 백성들이 태반이나 상해를 입었고 마을이 불태워지고 성곽이 무너졌다. 남원의 군민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 흩어져 하룻밤 사이에 성을 비우고 빠져나갔다. 일본군은 또 곡성에 들어가 주민들을 거의 다 살육했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이 때 홍계남은 단기로 정탐하다가 화정에서 적을 만나 적병 3명을 벤 후 적이 대대적으로 이르자 원천으로 물러났다고 한다.

8월 7일, 일본군 수천 명이 산동촌을 분탕질하고 숙성령으로 향했다. 이때 홍계남과 이빈의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가 장관(將官)들이 먼저 달아난 자를 좆아 잡으니 무너졌던 군사가 도로 진정되었다. 이후 송대빈이 기병 300여 명을 두골봉 안과 방축림 숲에 매복시키고 스스로 천여 명을 거느리고 숙성령 위에서 적의 진로를 막았다.

이에 일본군이 물러나 둔산령을 넘어 수지 등 촌락을 약탈했다. 이에 낙상지가 정예군을 보내 길을 나누어 추격하고, 사대수가 기마로 돌격해 따라가 죽이니, 일본군이 순자강을 건너 곡성의 촌락을 약탈하고 살육한 후 구레를 거쳐 진주로 철군했다. 홍계남은 송대빈, 이빈, 선거이와 더불어 남원성으로 들어와 적의 재침에 대비했다.

선조 26년(1593년) 11월 2일, 일본군이 울산에서 출격했다. 그들은 3일에 안강부(安康府)를 약탈해 수많은 백성들을 살육하고 곡식 수천석을 거두어갔다. 이때 고연백, 홍계남, 권응수, 이수일 등은 경주에서 적의 공세에 대비했지만 감히 적과 맞서지 못했다. 그러다가 명나라 장수 오유충(吳惟忠), 낙상지(駱尙志), 마우경(馬禹卿)이 일본군을 공격하여 적병 수십 명을 죽였지만 얼마 후 일본군이 반격을 가해오자 능히 당해내지 못하고 크게 패해 2백 명이 죽고 많은 병사들이 포로로 전락했다.

이에 홍계남이 출격해 적병 수 명을 죽이고 잡혀가던 명군 70여 명을 구출했다. 이후 홍계남은 그동안 남쪽 변방에서 고생한 공로로 선거이, 정희현, 권응수, 백사림, 한명련과 함께 청람(靑藍) 삼승포(三升布) 2필을 하사받았다. 또한 안성에 거주하는 친모와 적모(嫡母), 처자에게도 식량이 지급되었으며 각종 부역도 면제받았다
03:07
24.01.08.
아무리 막강한 군대라 해도 배고프고 갈증나면 못싸우는게 당연지사. 가토도 이를 알고 결사적으로 반격하여 태화강으로 식수 조달에 나섰으나 조·명 연합군은 이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고 결사대는 출격하는 족족 개발살나서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한 번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기병 중심의 부대를 내보냈으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당했다. 이러다보니 가토는 포위망 돌파를 포기하고 죽기살기 농성으로 전환할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에 이르러 일본군의 식량 사정은 최악을 달려서, 농성전의 핵심인 조총수에 한정하여 하루에 생쌀 한 홉을 지급했다. 그나마도 물이 없어서 생쌀을 먹어야 했다.
03:09
24.01.08.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선 7월 10일조에 7월 20일 왜군이 진산으로 내려와 관사를 불태우고 금산으로 돌아갔다고 적고 뒤에 전라도 관군의 병력 집결 현황 등 다른 내용을 적은 뒤에 다음 기사를 실었다.
금산의 적 수천여 명이 진산(珍山)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약탈하니 이현(梨峴)의 복병장(伏兵將)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 동복 현감 황진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막아 싸웠다.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퇴각하는 바람에 적병이 진채(陣寨)로 뛰어드니 우리 군사들이 놀라 무너지는지라, 권율이 칼을 뽑아들고 후퇴하는 아군을 베며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오르고 황진도 역시 상처를 움켜쥐고 다시 싸워 우리 군사 한 명이 백 명의 적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기계를 다 버리고 달아났는데 30여 명을 베었다.
03:12
24.01.08.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웅치 전투 이후 본대를 이끌고 이치로 진군하자 전주에 입성했던 권율은 황진과 함께 이치로 이동하여 목책과 장애물을 설치해 방어전을 준비한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부대를 2개 부대로 나누어 교대로 공격하면서 조선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려 했다. 일본군 부대가 장애물 지대를 통과하자 조선군은 화포로 일본군을 타격하고, 목책에 가까이 오자 화살과 돌 세례를 퍼부었다. 일본군은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후방의 조총 사격 지원을 받으면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 권율은 방어진을 돌아다니며 군사들을 격려하였는데, 전투를 피하고 숨어있는 병사를 발견하면 몰래 그 병사의 군모에 표시를 한다음 일본군의 공격이 잠시 주춤할 때 그 병사를 잡아 목을 베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군의 공격에 조선군 전력이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를 타개하고자 권율은 황진과 편장 공시억, 위대기에게 일부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측면에서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당황하여 공격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때 황진의 활약이 눈부셨다. 황진은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샀던 일본도 2자루를 휘두르며 일본군을 베고 다니고, 상대가 멀리 있으면 강궁으로 적을 사살하였다. 일본군이 황진을 포위해 참살하려했으나 황진의 무용에 당해내지 못했고 결국 조총으로 일제사격을 가해 황진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은 다시 사기가 올라 조선군을 맹렬히 공격했고 결국 목책 일부가 무너져 내부로 일본군이 진입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황진의 부상으로 사기가 주춤한 조선군은 사기가 더 떨어졌고 방어진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이에 권율은 도망치는 병사들을 잡아 즉결 처분하면서, 몸소 일본군에 돌격하여 적병을 베며 사기를 독려했다. 한편으론 예비 병력을 투입하여 일본군을 다시 방어진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오후 4시가 되도록 일본군은 조선군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여기에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대가 금산성으로 진격한다는 첩보가 들어오면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철수를 결정하여 일본군은 퇴각하고 말았다
03:13
24.01.08.

석성령-장덕산 전투
회령과 명천을 탈환한 정문부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길주성 탈환 작전에 착수했다. 정문부는 군대를 3개로 나누어 경성 이북 출신 군사 1000명을 자신과 정현룡이 맡아 길주성으로 진군했고, 길주 출신 군사 1000명을 고령 첨사 유경천에게 줘서 갯마을에 진을 쳐 일본군을 감시하게 했으며, 경원 부사 오응태에게 길주 양리와 서북보의 토병 1000명을 인솔해 복병으로 삼게 했다. 또한 인의 지방 사람 원충서에게 군사 200명을 줘서 길주 불쪽 야간창에 진을 치게 했고, 명천에서 300명의 기병을 차출해 고참에 배치시켰다.

1592년 12월 3일(음력 10월 30일), 일본군 1,000명은 명천 갯마을 가파리를 약탈하고 돌아오던 중 석성령에서 원충서의 병사 200명의 급습을 받았다. 일본군은 적의 갑작스런 출현에 놀라 후퇴하다가 곧 적의 숫자가 아군보다 열세하다는 걸 깨닫고는 반전해 원충서의 군대와 맞서려 했다. 그때 고참에 매복해 있던 방원 만호 한인제의 기병 300명이 원충서와 합류했고, 여러 복병들도 원충서와 합세했다. 이에 일본군 장수 5명이 400명의 정예 군사를 이끌고 돌격했으나, 조선군이 기병을 중심으로 돌격전을 펼치자 보병뿐이었던 일본군은 퇴각해 길주성에서 동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장덕산(長德山)에 이르렀다.

정문부는 즉시 분견대를 파견해 장덕산 꼭대기를 선점했고, 일본군이 산을 올라가며 총포를 쏘자 유경천이 기병대를 이끌고 산 위에서 돌격해 적병을 격퇴했다. 여기에 고경민이 미리 군사를 서쪽 산 밑에 잠복시켰다가 즉각 포(砲)를 쏘며 차단하니 일본군이 퇴각하여 계곡으로 숨어들자 의병이 사방에서 모여 포위했다. 이날 밤에 눈이 내리고 추위가 심하여 일본군은 모두 얼어 쓰러져 싸우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의병대는 산에 불을 지르고 계곡을 수색해 일본군 병사 6백명의 수급을 베었다. 조선군은 이 전투에서 깃발 20개, 갑옷 50벌, 투구 8벌, 창 16자루, 조총 26자루, 탄환 646개, 화약통 15개, 말 118필, 수많은 일본도 등을 노획했다.

03:17
24.01.08.
길주 공방전
가까스로 살아남은 일본군은 길주성으로 퇴각해 성을 굳게 지킨 채 나오지 않았다. 정문부가 세 부대를 모두 모아서 성을 포위하자, 일본군은 성벽 위에 올라 조총을 쐈다. 이에 정문부는 무작정 공격했다가는 아군의 피해가 클 것을 우려해 일단 물러난 뒤 성 주위를 완전히 포위해 적이 땔감을 얻을 수 없게 했다. 이때 일본군 1개 부대가 마천령 아래 영동관 책성(嶺東館柵城)에 주둔하면서 임명촌(臨溟村)을 불태우고 노략질했다. 그러자 정문부는 군사를 돌려 공격해 쌍포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파하고 수급 60개를 베었다. 이후 일본군은 길주성과 영동관 책성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정문부는 군대를 둘로 나눠서 포위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땔감을 구하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얼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1593년 1월 초, 안변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는 길주의 상황이 위급하다는 보고를 받자 본군을 이끌고 북으로 진군하면서 "재차 관북을 평정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단천 군수 강찬이 정문부에게 군사를 합하여 요격하자고 청하자, 정문부는 유경천 등 기병 수백 명을 보내 단천으로 가게 했다. 이후 1월 21일 2백 명의 일본군 선봉대가 단천에 이르렀을 때 강찬이 이끄는 단천의 조선군이 교전하다가 일부러 패하는 척하며 후퇴하자, 일본군은 이를 급히 추격했다. 이때 마침 매복해 있던 유경천의 복병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와 정면을 막고 후방을 차단하면서 일제히 공격하니, 일본군은 100명의 전사자와 수십명의 부상병을 남기고 겨우 30명만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가토가 며칠 후 자신이 이끄는 군대를 이끌고 몰려오자, 유경천은 급히 퇴각했다. 정문부는 가토의 본대가 마천령을 넘어오자 3천의 의병대를 이끌고 영동책 외곽에서 맞서 일본군과 3번 교전했으나 모두 패했다. 결국 정문부는 길주성 포위를 풀고 경성으로 후퇴해 농성 태세를 갖췄다. 가토 기요마사는 폭설로 인해 북쪽으로 진군할 길이 모두 끊긴데다 아군의 피해가 누적되었고 보급품도 부족해 북상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길주성과 영동책에 주둔한 일본군을 모두 철수시키고 밤에 남쪽으로 돌아갔다. 정문부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함흥에 이르렀지만, 가토가 이미 안변으로 돌아갔기에 미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북관 대첩은 조선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03:41
24.01.08.
도원수 권율이 치계하기를,

“별장 한명련이 충청도 방어사(박명현)와 합세해서 왜적을 토벌하면서 공주ㆍ회덕 지경에 이르러 유숙하다가, 왜적이 진산으로부터 산길을 경유하여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2일에 잠자리에서 아침밥을 먹고 나서 변을 기다렸는데 왜적의 선봉이 갑자기 이르러 서로 교전하였습니다.

'얼마후에는 수많은 왜적들이 크게 쳐들어와 종일토록 힘껏 싸워 쏘아 죽인 것이 거의 2백여 명에 이르렀지만, 중과부적인 데다가 날도 어두워져 다만 6급만 베어가지고 왔기에 그 귀를 베어 올려 보냅니다.

''이날 싸움에서 앞을 다투어 돌진하고 좌우로 분격하여 머리를 벤 것이 매우 많았는데, 창황한 나머지 전장에 버려두고 다 가져 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힘껏 싸운 사람에 대해서는 권장하지 아니할 수 없기에..
조선왕조실록 1597년 9월 7일 기사中
03:44
24.01.08.
경기 감사 홍이상이 치계하였다.
(중략)
별장 한명련이 소초평에서 싸워 참살한 바가 매우 많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9월 13일 기사中
03:45
24.01.08.
양호가 처음 내려올 적에 파죽의 형세로 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기쁨에 넘치어 노소 남녀가 얹고 지고 와서 곡식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적은 이에 앞서 청야를 하였기 때문에 30리 밖에서 나무와 마초를 가져오게 되니 인마가 기갈이 심한 데다 더구나 눈ㆍ비가 그치지 아니하여 의장이 얼고 젖으므로 밤에도 눈썹을 못 붙이고, 사망자가 많았다.

왜의 구원병이 수로와 육로로 함께 이르러 오므로 제장은 “잠시 물러가서 군사를 휴식시키고 다시 공격할 것을 계획하자.”고 청하자, 양호는, “내가 대군을 가지고서 조그만 성을 포위하여 이미 십여 일이 되었는데, 지금 좌차한다면 이는 황상을 저버린 것이라, 죽어도 후퇴할 수 없다.”고 했는데, 굳이 청하여 마침내 허락하고 돌아와 경주를 지켰다.

방수장ㆍ노득공ㆍ진우충ㆍ한명련 등이 적의 꾀에 빠져 포위되었으나 겨우 포위망을 헤치고 죽음을 면했으며, 남은 군사는 다 함몰당했다.
성호사설 제 25권 경사문 中
03:46
24.01.08.
상이 이르기를,
“나의 의견으로는 기용할 만하다. 그리고 한명련은 어떤 사람인가?”
【전공으로 항오(졸병) 가운데에서 발탁되어 당상으로 승진하였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그의 군대는 이미 지쳐 있으며 단지 40~50인이 있을 뿐인데도 날마다 교전(交戰)할 때처럼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소신이 때때로 불러다가 재주를 시험해 보았는데 말 달리고 칼 쓰는 것이 가장 날랬습니다.
..(중략)..
“다른 일은 알 수 없으나, 적중에 종횡무진 돌격한 것은 분명합니다.

당상관의 신분으로서 졸오(卒伍)와 같이 처신하여 산비탈을 오르내릴 때 혹 걸어다니기도 하였는데, 같은 당상관들이 비웃기라도 하면 의(義)로써 그들을 나무랐다고 하니, 이 일은 매우 가상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우리 나라 사람이 하지 못하던 일로 매우 가상한 일이다. 그의 나이가 얼마인가?”
조선왕조실록 1596년 10월 21일 기사中
03:48
24.01.08.
싸움이든 전투든 전쟁이든 기본적으로 적이 잘하는 분야에서 똑같이 잘하는게 아니라 적의 무기를 카운터치고 상쇄하는게 기본인데 대가리 빠개지는 소리를 하고 있네.
정사에 일본도 들고 설치던 일본군 편곤 월도 협도에 다 갈려나간 기록은 한번도 안 읽어봄??
03:51
24.01.08.
https://m.blog.naver.com/kkumi17cs1013/221159945995
이거 읽고와라
03:52
24.01.08.
명나라 제독 마귀가 말하기를
귀국인 가운데 정기룡ㆍ김응서ㆍ한명련은 모두 의협심이 대단한 사람들로
왜적을 잘 사살하니 함께 적을 토멸할 만합니다.'''
..(중략)..
지난번 아군의 대구와 삼가 전투에서는 한명련이 선전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5월 11일 기사中
04:05
24.01.08.
제독(마귀)이 말하기를, "저도 들었는데 이순신이 아니었던들 중국 군대가 작은 승리를 얻는 것도 어려웠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국왕께서는 조선의 여러 장수 가운데 누가 양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순신 · 정기룡 · 한명련 · 권율 등이 제일이라고 여깁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8월 15일 기사 中
04:05
24.01.08.
백병전으로 무조건 승부결정이 낫다는 증거가 있음?
04:07
24.01.08.
요동에 자문을 보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전라도 병마 절도사 최원(崔遠)이 8월 6일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강화 부사(江華府使) 윤담(尹湛), 월곶진 첨절제사(月串鎭僉節制使) 이빈(李蘋) 등과 배를 타고 진격하니 적이 퇴각하여 토성(土城)으로 들어갔는데, 제군(諸軍)이 2백여 명을 사살하고 수급 92과(顆)를 얻었습니다. 적도 1천여 명이 영천군(永川郡)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7월 28일 경상 병사 박진(朴晉)이 돌격장(突擊將)인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권응수(權應銖) 등에게 응모한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본군(本郡)을 포위하게 한 다음 포(砲)로 성을 공격하고 불을 질러 관사(官舍)와 창고(倉庫)를 불태우자 적도들이 놀라 무너졌습니다. 장졸들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자 적들은 불로 뛰어들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무수히 많았으며 수급 5백 17과(顆)를 베었습니다.

황주 목사(黃州牧使) 김진수(金進壽)는 이달 24일 별장(別將) 차은로(車殷輅) 등과 요로(要路)에 매복하였다가 왜적 5백여 명이 평양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만나 함성을 지르며 어지럽게 화살을 날려 수급 22과를 참획하고 말 45필을 빼앗았으며 투구·갑옷·총포(銃砲) 등의 물건을 노획하였습니다.

8월 18일에 왜적 1천여 명이 이천(利川)으로 침입해 오자 복병장(伏兵將)인 훈련원 봉사 이열(李悅) 등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니 적도들이 무너졌고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수급 54과를 참획하였습니다. 왜적 6백여 명이 토원(兎院) 지방의 가옥을 불태우자 양주 목사 고언백(高彦伯)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니 적이 산기슭으로 도망쳤는데 수급 62과를 참획하였습니다. 충청 감사 윤선각(尹先覺)이 제장(諸將)과 청주(淸州)를 진격하여 포위하자 적군 6백 명이 나와서 포(砲)를 쏘아댔습니다. 공주(公州)에 있던 승려 영규(靈圭)가 모집한 승군 8백 명을 거느리고 함성을 지르며 돌입하자 제군(諸軍)이 승세를 타고 수급 51과를 참획하였는데 남은 적은 밤을 틈타 도망쳤습니다. 이상을 조찰(照察)하시기 바랍니다.

왜적이 각 지방에 가득하여 날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각기 지방의 해당 장수들이 참획하고는 있으나 대세가 꺾이지 않아 갈수록 흉포를 부리고 있습니다. 아울러 또 평양의 왜적과 황해·함경 두 도의 적도들이 성세(聲勢)가 서로 연결되어 수시로 출몰하는데 본국의 군사들은 피로가 너무 극심하니 민망할 뿐입니다."

【상이 자문을 보고나서 이르기를,"중국 조정에서 으레 상을 내리니 미안하다. 나는 이 자문을 보내지 않았으면 싶다." 하니, 대신들이 아뢰기를,"중국에서 적을 사로잡았다는 내용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중국 조정에서 매번 상을 내리니 내 마음에 미안하다. 이런 뜻을 비변사에 내려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니, 비변사가 아뢰기를,"수급을 바치는 것은 당초 상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각처에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으니 중국군이 속히 와주기를 바라는 뜻에서였습니다. 수급이 이미 압록강을 건넜으니 이번은 우선 그대로 보내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04:32
24.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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