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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일기 속 교사 임호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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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선생님과 관련하여 이제껏 많은 정보들이 공유되었고, 그 정보가 너무 많아 택견을 넘어 근현대사 연구에 버금가는 성과를 얻고 있지만, 다시 초기의 관심사로 돌아와서 송덕기 옹과 만났을 임호선생님의 모습에 집중한 고찰도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끄적여 봅니다.

개인적인 공부에서 시작한 글이다보니 전문적인 양식(미주, 각주, 참고문헌표기)을 고려하지 않고 썼습니다. 그 어떤 개인의 영달이나 상업적인 목표가 없으니 혹시 보시는 분들 중 원출처의 저자 분이 계산다면 양해부탁드립니다. 비판과 정보공유는 항상 환영합니다.

 

Ⅰ. 들어가며

하재일기에 따르면 지규식이 양평군 남종면 분원리에 세운 학교에는 두 명의 교사가 장기 근속하였다. 유태영(柳泰永)이 음력 190647일부터 음력 19072월까지 가르치다가 병으로 퇴직하였고, 음력 1907216일부터 음력 1911611일까지는 지평에서 온 정경시(鄭慶時)가 근무하였다. 유태영은 기존에 지역 교원으로 일하던 인물로, 인근의 영화법률학교의 교사출신이다. 그리고 정경시는 양평군에 본적을 둔 지식인으로서 훗날 1919323일 김종학 등과 함께 용두리시장 장날 독립만세를 고창한 독립운동가이다.

학교의 개교일인 음력 47일의 학교 주요 관리자 명단을 보면 교장에 김종한(金宗漢), 부교장에 양근군수 양재익(梁在翼), 총무장에 김유정(金裕定) 등이 올라 있다. 본래 음력 115일에 부임한 군수가 교장으로 차정되었지만, 중앙 정계의 거물인 김종한이 이름을 올리면서 부교장으로 밀려났다. 그도 그럴 것이 김종한은 순종비 순정효황후의 숙부로 그밖에도 예조판서를 지내고 독립협회 위원, 조선은행, 한성은행 발기인을 지냈던 중앙 정계의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임호가 등장하는 것은 개교이후 2년이 지난 19084월이었다. 정경시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보조교사를 필요로 하여 서울에서 초빙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임호와 함께 온 교사로 김영제(金永濟), 지달원(池達)이 소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교직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시간은 몇개월 되지 않는다. 같은해 1115일에 임호는 학교 교무를 사퇴했다는 소식이 기록되어 있으며, 12월에는 서울로 올라간다.

임호는 그 이후에도 계속 지규식과 왕래를 한다. 19092월에 서울에서 내려와 교사 초빙 및 학부 보조비 이야기를 하고는 1달 뒤 서울로 돌아가는가 하면, 4월에는 밤이 깊은 밤에 내려와서는 하루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임호가 돌아가는 날 모든 학도들이 우천에 나가 전별하고 돌아왔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학교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날 분원의 학도 정윤봉이라는 인물은 임호를 따라가더니 13개월 뒤 임호와 함께 돌아오기도 한다. 지규식이 전하길 그들은 함경북도까지 갔다가 왔다고 한다.

임호가 분원학교에 내려온 시점이 1907조선의 군대해산이후라는 점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1907년 일제는 헤이그특사를 빌미로 고종 퇴위와 정미칠조약을 강요하였다. 조선 군중과 무장군인의 저항이 일었기에 일제는 군대해산을 서둘러야 했다. 그렇게 731일 밤중에 조정을 위협하여 그 다음날 해산식을 강행하였다. 이 시점을 기점으로 무관학교 출신의 무관들이 사립학교의 체육교사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지규식이 세운 일명 분원학교 역시 기본적으로 지역민이 자발적으로 세운 사립학교였지만 주변 학교와의 합병을 통해 공립학교로 포섭되는 중첩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특히 19088월에는 일제가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사립학교에 대한 제재인 사립학교령을 시행하여 불이익을 주었으므로 무관 출신의 교사들이 활동하기 좋지 않은 시기였다. 이런 복잡성은 임호의 심상치 않은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본 논문에서는 20세기 초반의 대한제국의 사회적 배경과 공동체의 움직임을 통해 하재일기 속 하나의 사건을 해석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같은 시기의 문헌들을 살피어 임호의 행적을 추적하여 임호의 사회적 위치와 지규식과의 관계성에 관해 분석하는 일이 동반되었다. 그 끝에서는 대한제국기의 체육교사가 사회전반에 끼친 영향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는 체육의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대목이다.

 

Ⅱ. 대한제국의 병식체조와 체육교사

18952월 고종이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고, 교육의 3대 강령으로 지((()의 양성을 강조하였다. 당시 체육이라는 용어가 정립되기 이전에 이러한 개념 정립이 불러온 파급력은 컸다. 같은 해 관립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되고 체조가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되었다. 이 체조는 지금의 운동이나 경기와는 성격을 달리 했다. 이는 병식체조가 강조되었다는 점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곧 군사훈련과도 같았고, 그 속에는 군사력증강이라는 기대가 서려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1906년부터 관립학교 위주의 조선 병식체조 교육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일제가 조선의 병식체조교육의 애국주의적 성격을 의식하고 제한하기 시작한 것이다. 1906년 통감부가 생기고 각 학교령이 공포되면서 고등학교(지금의 중학교)의 병식체조과정만 남겨두고 모든 관공립학교의 병식체조를 보통체조와 학교체조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1907년 이후로는 관립학교에 무관학교 출신의 교사들이 관립학교에 파견되었다는 문헌기록이 없다.

1908년 관립한성사범학교와 고등학교를 시작으로 일본인 체조전문가들을 교관으로 부임해 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907년 군대해산이라는 사건은 일제의 의도와 반대되는 또 다른 파생효과를 낳기도 했다. 바로 초기 병식체조교육을 담당했던 육군무관학교(연성학교) 출신들이 일선 사립학교로 퍼져 나가 교사를 자원하게 된 것이다.

관공립학교에 비해 사립학교는 교육과정상 일제의 영향을 덜 받았다. 사립학교 중에는 을사조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을 목적으로 세워진 곳도 더러 있었다. 이러한 경우 민족의식고취 교육과 군사훈조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병식체조를 매우 중시하였다. 일부는 목총을 사용한 군사 훈련까지도 행하여졌다.

다만 이러한 활동은 외부의 노출을 의식하여 공론화되지 못했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설립된 근대의 사립 교육기관은 5,000여 교에 이르렀지만 1903년부터 1910년 사이에 사립학교에 파견된 교사의 공식적인 수는 17명 뿐인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형국에도 사립학교 설립이 진전을 거듭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군단위로 시행된 의무교육 덕이 컸다. 군수들을 중심으로 의무교육의 시행에 동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지원과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도내 지방관과 유지신사 등에 의한 민회 민의소 설립도 병행되었다.주민들은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는 한편 적극적인 참여를 마다하지않았다. 일례로, 인천민의소의 강연회 연설회 개최는 새로운 가치관에 입각한 사회질서를 모색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변화에 부응하려는 노력은 주민들 주요 관심사로서 등장했다. 이러한 공동체에 대해 일제는 1908826일자로 반포된사립학교령이나 1920년대에 제정된 민회취제규칙등을 시행하여 탄압하고자 했다.

 

 

Ⅲ. 20세기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과 체육

 

 

개항 이후 조선에서는 사회진화론이 크게 유행하였고, 근대 체육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사회진화론, 즉 힘을 가진 자가 살아남는다는 약육강식의 이론 위에 세워졌다. 그중에서도 조선에 크게 영향을 미친 인물은 영국의 허버트 스펜서(Hubert Spencer, 1820-1903)이다. 지금에서야 다윈의 진화론을 확대해석하여 문화에 적용하는 것이 비판받고 있지만, 당대에는 그러한 시각이 자리잡지 못했다.

오히려 상무정신이나 강건한 신체에 대한 주목에 힘이 실렸다. 덕분에 당대 대표 지식인에게 근대 체육은 환영을 받았다. 이중 독립운동에 관여한 이들은 신채호, 박은식, 여운형 등이 있다. ‘조선 체육의 아버지라 불리는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별칭에 걸맞게 스포츠를 개화나 자강의 수단으로만 인식했던 대부분의 지식인과 달리 스포츠 자체를 즐기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스포츠를 단순한 도구적 수단으로 보지 않고 체육을 통한 민족해방을 추구했다

지규식은 19097월에 여운형과의 접점이 생긴다. 사기그릇을 개량하는 일로 모인 자리에 그가 있었다. 19098월 지규식은 여운형 씨가 교사를 초빙하는 일로 만나 뵙기를 원한다.”는 말을 우윤기를 통해 전해듣는다. 그리고 한 달 뒤 여운형이 내방하였다.

지규식은 격동의 시대에 사립학교를 운영하면서 독립운동가와 군관출신의 체조교사들을 만나온 것이다. 그는 1906년에 이미 이웃 아이들에게 체조를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소년단의 이름은 자신회(自新會)이다. 자신회는 19072월 을사오적 처단과 계몽운동을 목표로 결성한 단체이다. 1월부터 결사대를 모집하고 자금을 모금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보였으나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1907년에는 좀 더 본격적으로 학도들을 대상으로 한 체조 교습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190712월 여전히 자신회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김순필 집 발인이 자정에 출행하여 가동을 전인하여 보냈다. 자신회(自新會) 학도들과 연반계 계원이 교외로 호송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거사를 실패했음에도 여전히 그 조직이 관리 및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Ⅳ. 임호의 사회관계망 분석

 

하재일기에서 임호가 등장하기 1년 전인 19074, 남한산성에서 이용식(李容植), 선영근(宣永根), 박길현(朴吉玄)이 내려왔다. 이 중 박길현은 체조 교사로 5월부터 학도들의 체조 교습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908년에정윤봉 김영제, 지달원, 임호가 왔을 때 이미 남한산성 일행은 떠난 뒤였다. 일기에 언급되는 일이 없었을 뿐더러 1909 3에는 학교에 체조 교사가 없어서 지규식이 김영제에게 간청하여 학도들과 함께 가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지규식이 김영제에게 간청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태껏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체조 교사의 역할을 하던 이가 따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 교사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확인되는 이는 임호이다.

체조 교사로서 임호를 살펴보기 앞서 그의 행적 대해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하재일기 내에서 임호라는 인물에 대한 단서를 주는 대목을 살펴보자. 우선 19094월에서 1년 넘게 사이 임호와 관련된 기록에 공백이 있고, 19107월 기록에 임호가 분원학교의 학도 정윤봉과 함께 함북에 다녀왔음이 적혀있다. 1909~ 1910년의 기간 전후의 함경북도와 그곳에서 목격되는 임호라는 인물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종락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의연금을 보성학교(普成學校)에 맡겨 놓고 봉류표(捧留票)를 받아 가지고 왔다. - 1907122

 

 

지규식과 함경북도의 상관관계는 사립보성학교라는 매개를 통해 먼저 확인할 수 있다. 이때의 보성학교는 서울에 있는 동명의 학교가 아닌 함경북도 경성지역에 있는 학교이다.  이 학교와 관련된 주요 인물은 설립자인 이운협을 비롯하여 서일·김영학·김정규·현천묵 등과 대한협회 경성지회원, 경성지역 의병전쟁 지도자 등이었다. 이렇듯 사립보성학교는 대한협회 경성지회가 운영한 대표적인 근대교육기관이다.

계몽단체인 경성지회의 회원들은 학교 운영비 마련과 교육내실화를 위한 일환으로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이는 의병진에 대한 군자금으로 활용되는 등 경성인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기반이나 마찬가지였다. 보성학교의 위치역시 군대해산 이후 의병전쟁을 전개하는 중심지였다. 이곳을 관총하는 인적관계는 후일 중국 동북지역이나 연해주 등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든든한 밑거름이되었다.

임호가 지규식을 만났던 시기는 1905년 체결된 을사조약 그리고 1910년의 결술국치를 사이에 둔 기간이기도 하다. 임호가 분원학교에 오기 전 1907함경도의 개간지 일제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가 함경도로의 여정을 떠난 19099 4 북경주재 일본공사 이주인 히코키치(伊集院彦吉)와 청 외무부 상서회판대신 양돈언(梁敦彦) 사이에서 간도협약이 체결되었다. 임호가 함경북도에서 돌아온지 한 달 뒤 지교식은 암성사(義菴聖師)라고 불리었던 손병희를 만났다. 손병희는 천도교의 3대 교주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임호는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가와의 관계성을 보이고 있다. 시간이 흘러 191931일 만세운동이 지나간 이후, 1921415일 북간도 용정에 천도교 종립학교 동흥학교가 개교했다. 그리고 1922년 길림성 연길현 용정촌의 동흥중학교에 임호(林虎)라는 교사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관계성으로 미루어보아 임호는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 위에서 함경북도를 거쳐 간도지역으로 활동영역을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교사로서의 임호 뿐만 아니라, 사회운동가로서의 면모도 같이 살핀다면 그 이름을 더 많이 목격할 수 있다. 1921년에는 동아일보에는 노영거주조선인 교육연구연합회의 발기인으로 김영학, 강양오, 한구현과 함께 임호를 언급하고 있다. 1905년 을사조약 이래로 각계의 민족지도자를 통해 퍼진 구국운동은 교육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임호의 정체성은 교육구국운동 일선에 있었던 인물로 정의할 수 있다.

 

. 제자를 통해 본 체육인 임호의 교육

 

임호의 생몰기간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교육자의 특성상 제자들의 거취를 통해 그의 활동기간을 되짚어 볼 수 있다.  체육계에서 임호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흥미로운 구간이 있다. 바로 무형문화유산 택견의 전승자 명단이다. 초대 기능보유자로 등재된 송덕기는 자신의 스승으로 임호를 언급한다. 그는 임호에 대해 장안 8장사로까지 불리웠다고 전했다. 그러나 뛰어난 기예에도 불구하고 그를 무관이라고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를 기억하면서 서당에서 교육을 하던 한학자로 떠올린다.

지금껏 공립학교와 사립학교를 언급해왔기에 서당이라는 시설이 언급되는 것이 어색할 수 있다. 일제 역시 조선의 전통 교육기관인 서당이 자연스럽게 사라질 구시대의 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제가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에 대한 간섭을 자행할 수록 이를 대체하는 서당의 입지는 커져만 갔다. 이는 송덕기가 임호를 알고지낸 18년의 기간에 부합하는 역사적 서술이다.

송덕기가 임호를 만난 시점이 12세일 적이며 그 후 4년간 택견을 깊게 배웠고 임호와의 인연을 18년간 이어갔다고 전한다. 첫 만남의 시기는 그의 묘비에 적힌 생몰기간을 역산하면 1905년으로 추정되며, 택견을 수학했던 4년은 1905 ~ 1908년에 해당한다. 그리고 인연을 이어갔던 세월은 18, 1922년까지의 기간이다. 앞선 정보들과 비교해보면 지규식의 학교에 근무하기 전 서울에 머물 때의 송덕기를 가르쳤으며 1922년 간도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인연이 단절되었다고 볼 수 있다.

송덕기와 임호의 사제관계는 송덕기의 아버지인 송태희를 통해서 맺어졌다. 둘의 나이는 20세 정도 차이가 났으며 송덕기가 택견을 배울 당시 함께 수학했던 사람이 10명 정도 더 있었다고 한다. 김영덕, 이귀돌, 이태환, 신봉기, 김성환, 하봉근, 고재덕, 유상태 등이 그들이다. 이 중 임호에 대한 언급을 남긴 사람은 송덕기 뿐이었지만, 다행히도 송덕기는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되면서 많은 면담 자료를 남기었다.

 

(임호 선생님은) 과묵하고 점잖은 편이셨지만, 운동을 가르치실 때는 대단히 엄하셨다.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도기현(2003)-

 

(송덕기 옹은) 임호 선생은 인격적으로도 훌륭하신 분이고 기술적으로도 표범과 같이 날쌘 분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임호 선생은 짚단을 차고 담장을 뛰어넘고 소나무 사이를 제비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마치 날으는 범과 같았다. 한다. 사방의 적을 양손으로 어르고 왼발 바른발로 차 넘기는 기술은 마치 번개치듯 했다고 자랑한다. -태권도지, 이석호, 1971-

 

(송덕기 옹은) 택견을 시작한 이래 스승의 말씀을 좇아 몸과 마음을 소중히 지켜왔다고 회고하고, 마음을 지키는 일이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또한 훌륭한 무도를 스승에게 배웠으면 그 기술을 간직하기를 부모 섬기듯 하고, 잊거나 잃어서는 안되며 그 기술을 남용하는 것은 불량한 짓임을 강조했다. -태권도지, 이석호, 1973- 

 

송덕기의 구술에 따르면 임호는 필운동에 적을 두고 집안이 반한 처가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그의 장인은 학교의 교장이었다.   장인의 입장에서 임호가 동네 아이들을 상대로 택견을 가르치는 일에 시간을 쏟는 것이 탐탁치 않았을 법도 한데, 송덕기의 시야에서 이를 나무랬다는 감상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오히려 임호는 주변에서 택견의 일인자로 유명했다고 전한다.

송덕기는 추후 조선보병대에서 체조를 가르치는 일을 한다. 송덕기는 그의 일대기에서 근대식 체조를 배웠다고 언급한 적이 없다. 그가 운동을 배운 이력이라고는 임호에게 택견을 배운 것 뿐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그 당시의 체조라는 말은, 지금의 체조와 같은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 최소한 조선보병대에서 쓰인 그 말은 병식체조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옳다. 어쩌면 임호와 송덕기 사이에서 행해진 교육은 학교교육에서 동떨어져있던 것이 아닌 운동장이 구비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에 행해진 체육교육의 옛 형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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