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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잡지 개벽 제48호 논설

익명_027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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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노예 직업에서 자유 직업으로

 

〈본문 p.96〉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전의 기생은 궁중이나 지방 관청에 소속되어 **관리의 소유물(노예)**이었으며, 어떤 자유도 없었다.

정절이 짓밟히는 것은 물론이고, 때에 따라서는 생명조차 자유롭지 못했다.

그들이 들이는 노력에 대해 특별한 보수는 없었고, 다만 관리의 호의로 옷이나 물품 등을 받는 정도였다.

이것은 마치 짐승에게 먹이를 주는 것과 같았다.

(※ 관리를 제외한 타인과 몰래 성관계를 맺는 행위는 별개의 문제이다.)

 

특히, 궁중 연회(예: 임금의 탄신일, 왕실 혼례 등) 때,

지방에서 선발되어 서울에 올라오는 기생들(소위 ‘진연참례’)은

지방 관청이나 궁중에서 여비조차 지원받지 못하고,

자비로 억지로 참가해야 했으므로,

표면적으로는 ‘궁중 연회에 참석하는 일’이 큰 영광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매우 큰 고통을 안고 있었다.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액례별감(掖隷別監)’ 등에게 잠시 의탁하여

의복과 음식을 빌려 의존하게 되었다.

(이것이 소위 ‘포주(抱主)’ 제도의 기원인데,

실제로는 이 ‘오입장(誤入匠)’이라 불린 이들이 스스로 나서서 기생을 도와준 것이다.)

 

그러나 갑오개혁 이후 관청기강이 정비되면서,

기생제도를 독점하던 관청 중심의 화류계는 거대한 격변을 맞게 되었다.

즉, 궁중과 지방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기생 명부(妓案)**가 철폐된 것이다.

이른바 **‘삼백 명의 분대(粉黛, 기생)’**가 한순간에 모두 흩어져, 자유로운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기생들은 교육 수준이 낮고,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능력이 없어,

수백 년간 신음하던 노예의 굴레에서는 벗어났으면서도,

진정한 자유의 삶을 살 수 없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서울에서는 이른바 **포주(抱主, 기부妓)**의 노예가 되었고,

지방에서는 소위 수양부, 수양모의 노예가 되어

끝없는 착취와 강요 아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했다.

 

꽃피는 봄날, 밝은 달밤에

수많은 남성을 맞고 보내며,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가면 웃음과 무정한 봄(성)을 팔았다.

그러나 이 부당한 수입은 전부 포주나 수양부모의 손에 들어갔고,

정작 몸을 바쳐 희생하는 당사자에게는 아무런 대가도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영업에 정해진 연한도 없었다.

그저 어떤 부유한 고객이나 유흥남성이 빨리 **첩으로 삼아 ‘낙적(落籍)’**해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릴 뿐이었다.

이것이 어찌 인간 사회의 죄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신성한 자유의 바람은 결국 화류계까지 불어오기 시작했다.

비록 천한 직업이라 할지라도,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일하고자 하는 흐름이 점차 확산되었고,

어떤 이는 우호적으로, 어떤 이는 소송 등을 통해

포주나 수양부모와 결별하여,

대체로 소위 ‘무부기(無夫妓)’, 즉 자기 소유의 자유 직업인 기생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근래 서울 화류계에서 일어난 거대한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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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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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익명_027747
왜 기생을 다룬 조선해어화사에 택견에 대한 기록이 있는지는 이걸로 설명이 된 게 아닐까
13:23
25.07.12.
2등 익명_439006
당시 지식계층과의 사교를 중요시했던 기생이 교육수준이 낮았다? 좀 갸우뚱한데? 기생이 아닌 창기에 대한 관념이 뒤섞인 발언 같네. 일본식 공창제가 도입된 일제강점기였던 걸 고려해야 할 듯.

조선 전기의 서울 기생들은 나흘에 한 번 관습도감에 나가 악기와 춤을 배웠다. 추운 11~1월과 더운 5~7월은 쉰데다 나흘에 한 번 꼴이었기에 나머지 시간은 연습에 할애하거나 생업에 종사했다. 이후 성종 대에 관습도감을 다른 관서와 통합하여 장악원이 되었는데, 이 때에도 체제는 관습도감과 유사할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가곡과 악기를 배울 땐 스승을 정해 그 스승에게 배웠는데, 부지런하게 배우지 않으면 스승도 함께 벌을 받았다. 또한 관습도감 제조에게 기예 시험을 봤는데, 능하지 못하면 벌주고, 심하게 못하면 돌려보냈다고 한다. 재색이 없어도 돌려보내 일정 이상의 수준을 유지했다. 주요 지방은 교방을 설치하여 교습했는데, 기생이 많으면 거주를 위해 기생청(妓生廳) 혹은 기생방(妓生房)이라는 별도의 거주 공간이 있었다. 교습 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나 한양과 비슷했을 것이라 여겨진다고 한다. 관습도감에서는 가곡과 당비파, 현금, 거문고, 가야금, 장구, 아쟁, 향비파, 해금, 대금, 소금, 필률 등 다양한 기악을 익혔다고 한다. 악기는 능하지 못한 자는 한 가지만을, 능한 자는 여러 악기를 배웠다.

애초에 기생이 체계화된 이유가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종합 예술인을 양성하는 것이었던지라, 기생이 되는 일은 어지간한 사대부들이 관직에 오르는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무지막지한 난이도였다. 당장 갈고닦는 것만 해도 온갖 춤과 노래, 급에 따라 판소리나 잡가, 민요, 온갖 기악, 화술, 용모, 각종 재주뿐 아니라 선비들이 공부하는 것들을 똑같이 공부해야 했다. 어찌보면 선비들과 교류를 하는 직업이니 당연한 일. 여기에다 옷을 짓고 자수를 놓는 일 등 당대 여인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들 역시 연마해야했다. 심지어 지역에 따라 말을 타며 재주를 부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해도 일정 수준을 만족하지 못하면 신세가 천양지차로 나뉘고 허락되는 예술 종류마저 제한되었다. 유일한 이점은 엄격한 복식금제의 유일한 예외 대상이라는 점이다. 하나만 제대로 하는 것도 어려운데, 혼자 만능 엔터테이너이어야 했던 이들이다.
15:35
25.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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