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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거리/스압] 카포에라와 브라질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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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작년 쯤 들었던 영국 에식스 대학(University of Essex)의 철학, 역사 및 융합 학문 연구 교수님이신 Matthias Röhrig Assunção(이하 마티어스 교수)의 포럼, 그리고 구글링과 GPT의 힘을 빌려 최대한 알기 쉽게 정리해봤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뇌피셜도 섞여있고, 아직 연구 중인 부분도 많으니, 그냥 재미삼아 흥미위주로 읽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

 

 우리가 카포에라 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춤으로 위장된 무술이라는 키워드, 또는 화려하고 아크로바틱한 춤과 신나는 음악, 게임, 철학 등이 결합된 문화 또는 무술일 것입니다.

 

 16세기,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받는 브라질로 아프리카 출신(주로 앙골라, 콩고, 요루바 등...) 노예들이 대거 이주하게 됩니다. 아프리카 출신 여러 민족의 노예들은 이미 춤과 무술이 결합된 전투기술 - 이 중, 그나마 자료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것은 앙골라의 전통무술인 응골로(N'golo)라는 무술이 있습니다. - 이 전승되고 있었고, 춤과 노래, 종교적 의식 등이 융화되는 현상이 있었고 이것이 카포에라의 원형이라 추정됩니다. 거기에 실제로 폭동과 반란, 탈주노예들의 게릴라전의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모임이 금지된 점도 있었지만, 이것은 하나의 문화면서 동시에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춤과 북, 신앙은 포르투갈의 카톨릭 신앙의 규범에 어긋난 것으로 간주되어 탄압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점은 주로 카포에라 앙골라의 음악에 다신교인 오리샤(Orixas: 각 신은 대자연, 인간의 삶과 연결된 영적 존재)들을 섬기는 깐동블레(candomble) 신앙에 관한 이야기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노래에 카톨릭 성모, 성인을 찬미하는 가사가 나오기도 하는데 이것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겉(입)으로는 카톨릭의 성인을 섬기고 속(마음)으로는 오리샤를 섬김으로써 그 신앙을 비밀리에 이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시: 성모 마리아-바다와 어머니의 여신 예만자(Yemanja), 성녀 바르바라 - 바람과 폭풍의 여신 이앙사(Iansa), 성인 조지 - 전쟁과 철의 신 오궁(Ogum)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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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poeiras ou danse de guerre des nègres 

(Capoeira or the Dance of War)

Johann Moritz Rugendas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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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yage Pittoresque et Historique au Brésil』

(브라질의 화보 역사 여행)의 삽화에서 발췌

Jean-Baptiste Debret

1820-1830년대

 

하지만, 카포에라 라는 단어가 포르투갈의 식민기록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2세기가 더 지나서인 18세기 후반기입니다. 이 카포에라의 어원은 실제로 농업용어로, ‘덤불밭, 버려진 잡목림’ 등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노예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해서 포르투갈 정부는 이 ‘집단성’을 경계한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즉, 이 18세기 후반기의 카포에라는 무술이 아닌, (노예들의)싸움, 폭동, 무장조직은 물론 종교의식에 의한 춤과 노래, 그리고 연주까지 당시 노예들의 활동을 범죄로 규정하고 이를 규제하는 맥락으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브라질의 독립은 1822년에 이루어졌고, 이 때 브라질 제국이 수립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노예제도는 계속 유지되고 있었으며, 여전히 흑인 인구 대다수는 노예 신분이 유지된 상태였습니다. 당시 브라질의 수도는 히우 지 자네이루(Rio de janeiro 우리가 ‘리우’라고 부르는 그 곳이 맞습니다.)였고, 탈출노예, 해방 흑인, 혼혈계 하층민들이 도시의 빈민으로 밀집되며 항구의 노동자층, 해방노예 공동체를 통해 자유흑인, 혼혈 빈민, 심지어 가난한 백인 노동자 층 에게도 확산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당시부터는 리우의 빈민가에 흘러들어간 이들이 카포에라젱(capoeiragem)이라는 범죄조직화가 되면서, 그들이 싸우는 기술을 카포에라 카리오카(*Carioca: 리우의 사람, 스타일을 뜻하는 지역명)라고 구분 짓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흔히 아는 갱단의 활동(시민갈취, 세력다툼 등), 심지어 지주 또는 지역유지의 용병이나 정치깡패 활동을 목적으로도 고용되어 더욱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반면, 한 때 식민지의 수도였던 바이아 주에 있던 도시 살바도르에서는 오랜 기간 아프리카의 문화와 전통이 짙게 남아있는 지역으로, 흑인 공동체의 종교, 의례, 음악문화가 뿌리깊은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은 리우와 달리 카포에라는 춤, 음악, 공동체 의례의 일부로 보존되었으며, 당시 리우와는 달리 하나의 ‘문화’로써 자리 잡았으며, 이 문화가 현대 카포에라의 전신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폭력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리우처럼 대규모 폭력집단이나 정치깡패로 조직화된 정도는 아니었다고 GPT가 분석해주는군요.)

 

* 즉, 리우와 바이아를 아울러 우리가 알고 있는 “춤으로 위장된 무술”이란 카포에라의 이미지는 이때부터 생겨났다고 보면 되겠군요!

 

 그렇게 노예제는 1888년되었고, 1889년에 브라질 제국은 쇠퇴하고 공화정이 출범하게 됩니다. 노예제가 폐지되었음에도 이 흑인 해방민들은 생계기반이 갖춰져있지 않아 특히 리우와 같은 대도시의 빈민층, 거리 조직, 갱단으로 재편되는 경우가 많아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게 되고, 이 카포에라를 ‘반사회적 집단의 폭력행위’로 간주하고 도시의 치안을 강화하기 위해 1890년에 결국 ‘카포에라 금지법’이 공화정 법에 의해 명문화(明文化)되어 공식적으로 제정됩니다.

 

"어? 그 전에도 계속 금지가 아니었어?"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1. 18세기 후반 ~ 19세기 후반: 폭력패거리를 카포에라젱(capoeiragem)으로 규정, 카포에라를 금지한 것이 아닌, 폭력/치안 방해 행위의 처리를 위한 경찰의 관습적 단속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2. 공화정 초기 공식 법 제정: 이전에도 단속을 피하기 위해 춤과 노래, 악기와 같은 예술적 요소가 추가되었으나 카포에라 자체를 “노상 싸움”자체로 규정하고 금지, 이 법은 아래 후술할 내용으로 1930년도에 완화되고 1940년도에 폐지되었습니다.
 

Capoeira-carioca-lamparina.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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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발행된 브라질의 유명한 일간지 《O Malho》, 《Careta》 같은 풍자·시사 잡지에 실린 당시 삽화들은 ‘카포에라 카리오카(Capoeira Carioca)’라 불리던 리우 거리의 실전 무술과 ‘말란드루(Malandro)’라 불리는 도시 하층민 깡패 문화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카포에라는 무기(몽둥이, 나이프)를 활용한 난투와 기습전의 요소를 포함해 ‘카포에라젱(Capoeiragem)’이라는 속어로 불리며 범죄와 강하게 연결되었다. 이 삽화들은 카포에라가 단순한 춤이나 놀이가 아니라, 리우데자네이루 거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말란드루들이 몸에 익힌 실전 격투술이었음을 보여준다.(GPT 요약)”

 

카포에라가 법적으로 금지되고, 당시의 인식을 벗어던지기까지,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이 언급되는데요, 바로 메스트리(Mestre) 빔바(Bimba)와, 메스트리 파스치냐(Pastinha)입니다. 

 

 

 

 1930년대 현대 카포에라 전신 중 한 명인 카포에라 헤지오나우(Capoeira Regional)의 창시자인 메스트리 빔바는 1930년대에 기존의 폭력 이미지를 벗기 위해 카포에라 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바이아 지역 전통 격투기(Luta Regional Baiana)’를 발표하고 경찰, 군인, 정치인 등 상류층을 상대로 시범을 보임으로서 ‘브라질 전통 무술’임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기술적인 특징으로 바이아 지역의 카포에라 앙골라를 토대로 바투키(Batuque:19~20세기 초 바이아에서 유행한 흑인계 격투기 또는 레슬링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정보가 없어요.), 실전 싸움을 통한 호신술로 보강하고자 Luta Real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어 접목 시키고 현대적인 무도 체계로 표준화 시켰다는 부분이 공식적인 기록입니다.
(그 밖에 연구자들이나 제자들의 구전이나 가설을 통해 Capoeira Carioca의 기술 차용설, 동양무술의 영향 가설 등도 있지만, 공식적인 문헌이나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제복 착용, 청결 유지, 금연, 금주, 범죄금지, 학교를 다니거나 직업을 가질 것 등, 건전한 수련생의 양성을 강조함으로서 각종 상류층에게 카포에리스타의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 노력은 결실은 맺어 금지법이 폐지되지 않았음에도 1937년 브라질 최초 공식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정부로부터 국가 공인 무술학교로써 예외를 두어 공식 수련 허가를 받았습니다.

 

 

 반면, 카포에라 앙골라(Capoeira Angola)의 창시자인 메스트리 파스치냐는 카포에라를 아프리카의 전통과 놀이, 예술로서의 카포에라를 보존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아이들, 학생, 예술가들을 제자삼아 지역 공동체와의 연결, 메스트리 빔바와 같은 목적으로 “앙골라 스포츠 센터 (Centro Esportivo de (Capoeira) Angola)"라는 스포츠 센터를 설립하여 단속을 피하며 앙골라의 역사성, 철학적 요소, 전통 의식(악기, 노래, 공동체성)에 중점을 둔 교육으로, 폭력이 아닌 문화유산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습니다.
 또한, 지역 음악가, 화가, 문인 등과 협업해 카포에라 앙골라를 문화 운동으로 보급하고, 
이것은 나중에 UNESCO와 연결되는 브라질 민속유산 보호 흐름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행적을 요약하자면, "거리에서" 금지된 카포에라를 "스포츠센터, 체육관"등으로 설립하고 등록하여 다른 이름의 무술, 또는 문화 예술로 가르치는 편법으로 살아남고 인식개선에 힘썼다고 보면 되겠네요 ^^;

 

 이상으로 지금의 카포에라가 있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최대한 간단하게 다뤄보려 했는데 또 글이 길어졌네요. ^^; 앞서 말씀드렸듯,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고, 역사와 전통성 논쟁에 대하여 뭔가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것 같아 분위기를 조금 환기시키고자 최대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적어봤습니다.

 

 또한 택견과 카포에라가 역사적인 측면에서 어떤 공통점이 있고 차이점이 있는지 비교해보고자 정리가 필요했던 시점이라 따로 적어놨던 글을 고민하다 조심스레 올려봅니다.

 

 가끔 글을 올리거나 댓글을 달기는 하지만 제가 카포에라 수련자고, 늘 카포에라 관련 글만 올리다보니, 

택견과 너무 상관이 없어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언제나 즐겁고 또 안전하게 수련하시길 바라겠습니다!

 

p.s PC에 적은걸 그대로 긁어와서 가독성이 망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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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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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익명_319549
카포에라 관련 글 올려주실 때마다 정독하고 있습니다. 이번 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20:53
2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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