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에서 다시보는 택견 기사 (권충일 편)
권충일이라는 인물은
이제 저장소 사람들에게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일일히 찾아보는 일은 또 별개이니
자세히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거다.
그러니,
이참에 같이 알아보도록 하자.
그에 대한 소개는
1934년과 1935년 기사에서 확인된다.
그중 신원파악이 어느정도 끝난
1935년 기사를 보자.

그는 기독교인(권신일)의 아들로
아펜젤러 목사가 선교학교로 세운
배제고등보통학교(배제고보)를 나왔다.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중도퇴학하고
인천에서 노동조합과 청년동맹 활동을 하였다.
그의 주활동지는 인천과 수원!

앞서 밝혀졌듯
인천청년동맹의 위원명단에서는
권충일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청년동맹의 소집 공간은
인천외리무도관이다.


이는 짧게 '인천무도관'이라고도 불리는 공간으로
신간회 인천지회 임시사무소로도 사용되었다.
그럼 이 '인천무도관'이
택견과 권충일과 관계가 있느냐?
그렇다.

인천무도관은 창립한 년도에
인천의 노동연맹과 청년연맹의 후원으로
창립기념무도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그 반응이 꽤 좋았는지
일주년이 되는 해에 다시 무도대회를 연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덱현(택견)이 등장한다.
그리고 택견의 등장의 중심에는
택견 선수 권충일이 있었다.

무도대회는 유창호씨의 개회사와
강제원씨의 일장연설이 있은 후
"각종무도시합"을 시작하였다.
이 시합의 하이라이트로 언급된
마지막 문장을 보자
"각종 무도의 시합은
만장 관중의 무도에 대한 자극을
여한바이 다대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최종
권충일군의 택견과 나주연군의 권투는
과연 장쾌(후략)"
택견과 권충일 그리고 인천무도관의
관계성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인천무도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체육관은 아닌듯하다.
아니면 최소한 대회 호황으로 자신감을 얻은게 분명하다.
1930년에 창립3주년에는 씨름대회까지 개최를 하는데
여기에도 인천의 권충일이 나타난다.
그는 씨름에서 준결승까지 올라가
막상막하로 겨루었다.

그러더니 4주년기념 무도대회에서는
권충일이 심판으로 나온다.
더 정확히는 유도 진급시험의 두 심판을
"교수 유창호, 교사 권충일"라고 소개하는데
무도관을 대학이나 학교처럼 운용했다거나
지금의 관장과 사범을 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튼 권충일은 무도에 진심이고
그 베이스는 택견이며
자신의 기술을 유도에 녹여낸듯 하다.


그런가하면 인천무도관이 설립된지
1년 정도 되었을 1929년의 기사에는
권충일의 검속(유치장행?)과 함께
수원 북수리에 무도관 설립을 하고
무도대회를 추진있음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같은 해 7월에 무도대회를 열였다.
지역의 유명한 무도가이자
한 무도관의 설립자인 권충일은
그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여기서 부턴 신문기사가 아닌
근현대인물자료를 참고한다.
[용의 조선인 수록 내용]
이름: 권충일
생년월일: 1907년 7월 22일
출신지: 경기도 인천부 신화수리 196번지 (본적)
현주소: 블라디보스토크 하마탄 국제직업학교
활동: 1931년 7월 인천에서 발생한 일본-중국 충돌 사건 관련자
1932년 초 일본을 거쳐 도항함
블라디보스토크 하마탄 국제직업학교에 입학하여 주의 연구 중이라고 함
인물평: 민족주의자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작성일자: 1935년 12월 6일
생년월일: 1905년 7월 16일
죄명: 치안유지법 위반
형기: 2년
입소연월일: 1935년 12월 6일
출소연월일: 1937년 1월 28일
형무소명: 서대문형무소

촬영: 1935년 11월 1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권충일은 1950년 6월 30일
[지역문화칼럼니스트의 글]
https://www.incheo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142
권충일로부터 유도, 권투, 택견 등
격투기를 배우거나 야구, 축구, 정구 등
기구운동을 배운 아동과 청년들이 있던
신화수리와 만석동에서는
순사를 린치한다거나 물건을 던지는 등
배일정신을 표출하는 일이 많았다.
권투선수 최관오, 건달 정인옥,
박유필 등이 지역에서 이름있었으며
1945년 8월 20일 애관극장에서
200명의 청년이 모여 결성한
‘인천보안대’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어쩌면 마계인천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권충일의 말로에 관해서는
집에서 인천경찰에게 부역자 혐의로 체포
월미도 제방에서 경찰과 해전대에 의해
총살을 당하는 비극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