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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조선 후기를 기준으로 보면

익명_765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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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이외의 계층들의 입장에선 군대(중앙군)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나름 성공한 인생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높음.

 

그 이유는 조선 후기 오군영의 재정이 어떻게 운영되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는데,

 

1. 훈련도감
임란 시절 만들어진 최초의 군영이자 구성원들이 무예 실력이 좋아 금군, 호위청 등으로 전출이 잦았던 조선의 실질적인 중앙군. 둔전 경영, 생선과 소금 판매, 시장에서 땔감, 숯, 건초 강제징수, 세곡 운송업(전라도 연해안 일대), 서적(군사훈련용 병서, 시문집, 국정수행 서적 등) 인쇄 출판 판매 등을 하면서도 재정이 모자라 삼수미세(三手米稅)라는 특별조세까지 유지하면서 재정을 조달함.


이 삼수미세는 임란때 만들어져 1894년 갑오경장까지 유지되었던 세금인데, 징수실적을 보면 1648년에는 약 4만석, 1671년에는 2만 5천석, 1691년에는 5만 5천석, 1701년에는 4만 9천석에 이르렀고 당시 조선의 1년 조세가 10만~15만석 정도로 추정된다는 걸 감안하면 훈련도감 혼자서 한 해 세수의 30~40%만큼의 돈을 잡아먹던 조직이란 얘기임;;

 

2. 어영청
후금 방어 목적으로 수립된 부대. 숙종시대 이후에는 군영이 주전의 특권, 다시 말해 화폐발행권을 받게 됨. 이 주전의 이익이 엄청나서 한때 10만 냥에 달했다고 할 정도. 

 

3. 금위영
인조시대 정초군과 현종시대 훈련별대을 섞어 만든 부대. 본래라면 보인에게 징수하는 미포로만 운영되어야 했으나 1684년 따로 토지를 매입하여 둔전을 설치함으로써 군영운영의 새로운 전례를 만듬. 전남 완도의 약 70결을 매입하여 둔전으로 확보하였다 함.

 

4. 수어청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가 설립한 군영. 수어청은 처음부터 둔전을 설치하고 둔전에 둔병을 배치하여 그들이 납부하는 둔세를 주요 재정기반으로 하였음. 수어청의 둔전은 경기에 17곳, 충청 4곳, 강원 3곳, 황해 8곳 등 전국에 총 48곳에 이르렀으며, 둔전의 규모는 다른 군영들과 비교해서 가장 컸다고 함. 그 규모는 약 1852결에 해당. 


이 규모가 어마무지 한 게, 인조시대를 기준으로 농토 1결은 10,809 제곱미터인데 이걸 평수로 환산하면 최소 600만평의 농지가 수어청에 할당된 둔전이었다는 얘기임 ㅇㅇ

 

5. 총융청
경기도의 군대를 개편하여 만들어진 군영. 총융청의 재정기반은 둔전과 환곡이었으며, 둔전을 통해 확보한 재정을 환곡을 통해서 그 규모를 키움. 약 10%의 이자를 받았고, 한때는 모곡의 양이 조선 전체 세수의 3분의 1 규모에 해당할 정도로 그 양이 짐작이 될 거임.

 

하지만 문제는 위의 수단 전부를 동원해도 오군영 전부가 재정을 확실하게 확보할 수가 없었다는 것인데(...) 조선 말 백골징포로 대표되는 군포가 말썽을 부린 근본 원인이 저 오군영의 재정 조달을 위해서였던 걸 보면, 역설적으로 국가의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세도정치 시기에조차 백성 전체의 등골을 뽑아서라도 어떻게든 중앙군의 규모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곳이 조선이란 얘기임 ㅇㅇ.

 

그리고 이런 전말을 살펴보면 어째서 후기 조선군에 천민들이 대규모로 들어가는 한편 군이 세습화되는 양상이 나타났는지를 추적할 수 있음.

 

1) 양반 사대부들이 독점하는 문관들과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출신을 덜 따짐(신분세탁 가능)

2) 일단 들어가는 데 성공하면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고 자식 세대의 취업까지 얼추 보장됨

3) 조직들의 한 해 운영비가 나라 세수의 30~40퍼센트를 넘는 수준의 미친 이권덩어리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다, 무도특채! 충분히 노려볼 만 하지 않았을까.

 

옛날엔 택견을 잘 하면 먹고살 수 있었다던가, 택견꾼들이 소를 내놓으라고 하면 군말 없이 내놓아야 했다는 송덕기 옹의 증언엔 저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지 않나 싶음.

 

무력과 이권을 쥐고 있던 군인/중인 계층이 하던 게 택견이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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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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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익명_765268
이제 보니까 무를 천시한 게 아니라 손에 칼 쥔 놈들이 하는 짓들이 워낙 양아치여서 그랬던 게... 읍읍
16:49
24.12.09.
best 익명_521090
옛날에 택견했던 인간들 패악질 업보로 지금 택견하는 사람들이 힘든건가?
16:58
24.12.09.
원래라면 저렇게 비대해진 군 계급이 관료 계급을 밀어내고 주류를 차지하려는 시도가 생기고 계급적 정체성을 무예에서 찾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겠지만(일본의 무가vs공가처럼) 양란 이후 훨씬 더 교조화된 유교 이데올로기 및 청나라의 감시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음. 결국 조선 군영 문화가 메인 스트림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서브컬처로 머무르게 된 거지.

일본의 경우엔 헐렁한 유교이념 + 섬나라의 독자적 외교 관계가 가능하니 막부 체제라든가 반대로 대정봉환 메이지유신처럼 내부에서 역동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지만.
18:51
24.12.09.
익명_765268

합법적 깡패라는 말보다 정확한 묘사가 없는 게, 훈련도감 같은 경우엔 대놓고 세도정치의 자금줄 역할을 했던 조직이기도 했던 모양이라 여러 모로 구성원들의 위세가 당당했지 싶음.

좋은 말로 할 때 소 내놓을래, 아니면 군영으로 끌려가서 얻어 터지고 소도 뺏길래? 의 이지선다를 건 셈인데 말은 다 한 거...

16:47
24.12.09.
도대체 조선이 어딜 봐서 무를 천시 했다는 것인가!
16:43
24.12.09.
익명_765268
이제 보니까 무를 천시한 게 아니라 손에 칼 쥔 놈들이 하는 짓들이 워낙 양아치여서 그랬던 게... 읍읍
16:49
24.12.09.
익명_416428
원래 칼 든 놈들이 하는 행실이 동서양 막론하고 대동소이하긴 함 ㅋㅋㅋㅋㅋ
16:56
24.12.09.
원래라면 저렇게 비대해진 군 계급이 관료 계급을 밀어내고 주류를 차지하려는 시도가 생기고 계급적 정체성을 무예에서 찾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겠지만(일본의 무가vs공가처럼) 양란 이후 훨씬 더 교조화된 유교 이데올로기 및 청나라의 감시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음. 결국 조선 군영 문화가 메인 스트림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서브컬처로 머무르게 된 거지.

일본의 경우엔 헐렁한 유교이념 + 섬나라의 독자적 외교 관계가 가능하니 막부 체제라든가 반대로 대정봉환 메이지유신처럼 내부에서 역동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지만.
18:51
24.12.09.
3등 익명_521090
옛날에 택견했던 인간들 패악질 업보로 지금 택견하는 사람들이 힘든건가?
16:58
24.12.09.
저러고도 재정이 부족했던 이유는 근본적으로 국가재정 전체 규모가 너무 작아서... 조선 인구가 동시기 일본 인구의 1/2이었고 전근대 생산량은 인구수에 비례하는데 재정수입은 1/10도 안 됐음... 이건 구한말 근대화 실패까지 이어지지.
18:34
24.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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