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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LH (3) - 광주에서 함북까지

익명_50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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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LH 링크 모음
PJLH (1) - 여섯 명의 임호
PJLH (2) - 봉오동부터 용정까지


 

 

진웅은 민속학 전공생으로, 윗대태껸을 수련했다.

일전부터 태껸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스포츠인류학회 소속으로 활동하는 등

각종 문화연구에 익숙했다.

 

태경은 진웅에게

임호 연구에 대해 공유했고,

진웅은 <하재일기>에 등장한 임호를 찾아내어

태경에게 전달한다.

 

이 임호가 바로

서울의 교육자, 4번 임호다.

 

 

하재일기란, 도공 지규식이 

1891년부터 1911년까지

20년 7개월간 작성한 일기다.

 

하재일기에는 지규식의 일상은 물론,

당대 사회상과 문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그는 사비로 학교를 세워,

분원리(현 경기도 광주) 아이들에게 

신식 교육을 제공했는데,

해당 학교의 교사로 임호가 등장한다.

 

4번 임호의 정보를 요약하면:

- 임호는 서울에 산다.

- 1908년 4월 교사로 초빙된다.

- 임호는 학교에 계속 머물지 않고 이리저리 오간다.

- 1909년 4월 임호는 분원리를 떠난다.

(모든 학생들이 나와 배웅한다)

- 1910년 7월 함경북도에서 복귀한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내용인듯 하나,

주목할 점은 임호와 함께하는 인물이다:

- 지달원

- 김영제

 

먼저 지달원은 이름이 특이하여

자료 검색이 비교적 용이하다:

- 그는 종로구 청운동 출신이며,

- 춘천에서 교사로 활동한다.

- 기독교인으로, 기독교인과만 소통한다.

- 독립운동 조직 및 선언서 배포에 연관되며,

- 독립협회 결성 참여

- 이승만과 여운홍(여운형의 동생) 등과 함께 미국으로 이동

- 대한통의부 군자금 모집 참여 등

독립운동 관련 활동에 다양하게 연루된다.

 

한편 김영제는 비교적 흔한 이름이나,

- 지달원이 기독교인과만 소통한다는 점,

- 지규식 역시 기독교인이라는 점

 

태경은 이 2가지 사항을 미루어보아

그 역시 기독교인이라 추론했다.

 

다행히 김영제라는 이름으로

활동반경이 일치하는 인물은

1명뿐이고, 그 역시 기독교인이다.

 

김영제는 초창기 선교 목사로:

- 선교사 그리어슨과 함께 활동하며,

- 함경도, 북간도 지방에서 교회 설립 및 선교

- 여운형과 강릉에서 교육운동 참여 등

 활발한 활동 기록이 남아 있다.

 

먼저 눈에 띄는 사실은

김영제와 지달원 모두

여운형과 연관성이 있다는 점이다.

(당시 여운형은 기독교인)

 

한편, 김영제 목사와 활동한

그리어슨 목사의 경우

 

항일 비밀결사단체 신민회가 

이동휘를 함경도로 파견하여

그가 구국운동을 조직할 때

큰 도움을 준 인물이다.

 

이동휘는 1909년 그리어슨을 만나

외국인 선교사의 보호 하에

전도 및 교육, 구국사업을 진행한다.

 

이동휘는 북간도 지방 기독교인을 결집하여

항일 결사단체 광복단을 조직하는 등

기독교 계열 항일운동을 지속하다가,

 

약 10년 뒤 2번 임호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립한다.

 

 

그렇다면 2번 임호와 4번 임호가

동일인물이라 할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2번 임호가

교사로도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4번 임호 역시 교사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한편 하재일기에서 임호와 함께 활동하는

지달원, 김영제 역시

독립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인물로,

2번 임호의 활동 양상과 중첩된다.

 

특히 2번 임호가 북간도~함경도 지방에서 활동했다는 점과

김영제가 북간도~함경도 지방에서 선교자로 활동한다는 점 역시

눈여겨볼만한 포인트다.

 

여기서 우리는 

한일합병 이전 진행된 구국운동의 흐름과

기독교의 연관성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기독교 계열 구국운동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전덕기 목사로,

- 독립협회 조직

- 을사늑약 반대시위

- 헤이그 밀사 파견

- 상동(엡웟)청년회 조직

- 신민회 조직 등

교과서에 실릴 법한 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기독교는 당시 신문물로서

지식인들이 주목하는 학문이었고,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한

굵직한 활동에서 드러나듯

구국운동~항일투쟁 과정에는

기독교 계열 인사들이 집중되었다.

 

독립협회 조직에

- 이동휘(2번 임호)

- 지달원(4번 임호)

 

상동(엡윗)청년회 조직에

- 이동휘(2번 임호)

- 지달원(4번 임호)

(지달원은 상동청년회의 의지를 이어 춘천엡웟청년회를 결성)

 

신민회 조직에

- 이동휘(2번 임호)

- 김영제(4번 임호)

(이동휘가 신민회 파견을 받고 그리어슨과 활동할 때,

김영제 역시 그리어슨과 선교 중)

 

이렇게 서로 다른 임호의 주변인물이

기독교 계열 구국활동에서

연속적으로 겹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번 임호의 기록은 1920년대,

4번 임호의 기록은 약 10~15년 전이다.

 

이동휘는 4번 임호와 동시대에

기독교 계열에서 활동하다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했고,

 

그가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할 때

2번 임호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가 임호가

자신의 노선을 이동휘와 함께

사회주의로 변경하는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가설은 아니다.

 

정황과 개연성을 고려할 때,

사회주의 무장독립투쟁가 임호와

서울 - 광주 - 함경도를 오간 교육자 임호는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가 태껸의 임호,

1번 임호일 수도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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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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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익명_381879
임호라는 인물에 대해 자료가 이렇게나 많이 남았다는 것도 신기하네. 이런 자료들이 영원히 택견꾼들의 무관심 속에 묻혀있었을 지도 몰랐다는 게 참...
11:10
2시간 전
저희도 찾으면서 느낀 건데
1) 역사 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이 얼마 안 됐어요. 10,15년 전에는 검색 자체가 안 되는 자료입니다.
2) 단편적인 자료만 보면 모르고 주변 인물까지 같이 추적해야 찾을 수 있어요.
3) 자료에 언어적 장벽이 있습니다. 강 관장님과 저는 한문 한자에 익숙해서 비교적 수월했고, 영어 중국어 일본어까지는 해석할 수 있어요. 문제는 러시아 쪽 자료에 아직 접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4) 고용우, 이준서 선생님께서 증언해주신 내용이 큰 힌트가 되었습니다.
5) 최호림, 봉오동과 같은 사이드 이벤트가 없었으면 동력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거에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맞아 떨어져서 가능한 연구였던 거죠 ㅎㅎㅎㅎ
11:40
1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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