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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견과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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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우(송덕기 택견명인에게 1969년~1985년 가르침을 받음)의 인터뷰(2015.9.20., LA)에서 독립운동과 택견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진술하였다.

 

1996년 11월경에 LA에 맥도날드 옆 그랜드 스위트 호텔 옥상에서 대한택견에서 택견 시범을 보이는 자리에서 박 선생님을 처음 만났는데 그때 80대 후반이었죠. 이남석 사범님이랑 옆에 앉아계시는데 어떤 분이 택견을 하셨다는 거야. 내가 태껸수련장할 때 나를 좋아해가지고 한 달에 2번은 세리토스에서 내려오셨지, 붓글씨를 잘 쓰시고 그때 수신연무라고 걸려 있는 게 그때 썼던 거지, 어려서 택견하는 모습을 많이 봤는데 본인은 흉내만 내봤다고... 그런데 사촌형님이 명동에서 사업을 하셨는데 택견의 고수였다고 그랬어요. 박 선생님이 당시 중학생이었을 때 만주에 독립운동하려 가기 전에 후미진 곳에 저녁에 서너 명씩 모여서 택견을 배워서 갔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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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송덕기 택견명인에게 1984년~1985년 1년 6개월 가르침을 받음)의 인터뷰(2015.11.07., 원주)

“할아버지(송덕기)는 일제 강점기 유도하는 사람이 택견 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맞고 갔다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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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69권에 보이는 소화 17년(1942.11.2.) 작성된 박도병 신문조서(제6회)에서는 당우체육회와 관련된 ‘택견부장 박춘병’이 두 차례에 걸쳐 언급되고 있다. 송도건(松島健) 외 4명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 피의사건에 대하여 원산경찰서 堂下경찰관주재소에서 작성된 신문조서이다.

 

국사편찬위원회(2015.10.27.)에 질의한 결과 朴春秉의 직함은 박도병 신문조서(6회)에는 ‘脚戱部長’으로, 그리고 증인 김해진호 신문조서에는 ‘脚技部長’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 ‘脚戱’와 ‘脚技’를 국사편찬위원회 해당 책자에서는 모두 ‘택견’으로 번역하였으며 이들 자료를 번역한 한학자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쳤고 일본어 초서를 지도하는 선생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어서 그들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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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권(2011년 3월 8일)은 「LA 중앙일보」‘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3’의 초기 이민자들의 애국심 1 에 한인 상당수 광무군(대한제국군인)의 내용에서 1977년 취재 당시 99세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말년 을 보내고 있었던 1세 동포 白雲 양주은(梁柱殷) 翁2)의 주장이다.

 

일본사람들이 그때 시절에는 원수니까 일본사 람과 맞부딪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막 조져댔거 든. 그러니 일본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이 사람을 잘 친다면서 그 사람들과 맞서지 말라고 저희들끼리 권고하고 주의를 주고 그랬단 말이야. 왜 그러냐 하 면 그때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서울에서 군인이었 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택견을 하는 거야. 두발로 이마를 차는 것인데 이런 사람들이 일본 사람을 치면 한사람이 일본사람 열 스물을 쳐. 그러 니 일본사람들은 아이고 한국사람 말도 말라고 사 람 잘 친다고. 그래서 일본사람들이 한국 사람한테 달려들지를 못했어(천문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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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형(1984)은 ‘無形文化財傳受實態調査 택견’에서 일인을 제압한 김경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 대화리 뱀개마을에 유명한 택견꾼이 많아서 애오개 택견꾼들과 겨루었다 하는데 金烱云은 택견의 神技를 지녔다. 서울 장안에 갔다가 어떤 韓國人 하나가 日人 세사람에게 모듬매를 맞는 것을 보고 의협심이 강한 그는 달려들어 발길질 서너번에 日人 셋을 눈깜짝할 사이에 거꾸려뜨리고 말았다 한다. 그는 그뒤로 韓國人을 괴롭히는 日人巡査들이 밤낮으로 잡으로 왔기 때문에 숨어서 살았다 한다. 日人들이 몇차례 체포하려 들었으나 번개와 같은 그를 잡을 길이 없었다 한다. 日人들이 택견을 禁한 것도 택견꾼 가운데 人士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보형(前 문화재위원)의 인터뷰(2015.8.7. 노원)에서 김경운은 어깨를 밟고 다니면서 일본순사들을 무찔렸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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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기 할아버지도 근무하셨던 조선보병대는 독립운동가들이 여럿 있는데,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투척했던 장진홍 의사가 1914년부터 1916년까지 조선보병대에서 근무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원식을 처단한 양근환 의사도 1910년대 중반에 조선보병대에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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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고 고생이 너무나 심하여 나는 때때로 죽고 싶은 생각이 많이 나서 산중이나 물가에 가서 홀로 운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곤란하게 사는 중에도 주색잡기에 침혹하여 방탕한 생활을 은근히 계속하니 나는 점점 버린 사람이 되었다. 소고 장고 두드리며 노래하고 춤추기와 탁견하고 편싸움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살림에는 힘을 쓰지 아니하니 식구의 생활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어렵게 되었다.”

태껸꾼 출신이자,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이필주 목사가 고백한 젊은 시절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이필주 목사에게서 택견을 배웠을 거라 추정되는 인물이 바로 쌍권총으로도 유명한 김상옥 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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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ITDlWk_8QQY

택견과 3.1절이 뭔 상관이냐는 댓글에 화가 나기보다는 서글픈 감정이 복받쳐서 올려봤다.

그래도 택견이 명색이 전통문화이자 일제 때 사라질 뻔했는데,

3.1절과 뭔 상관이냐는 말은 지나치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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