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견이 조선시대에 만들어진거라는데
https://m.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3108345
윗 글에서 택견이 조선시대에 만들어진것 같다고 하는데 설득력 있는듯.
예전에 택견의 다른 이름이 박양박수 박양서각이라는 말이랑 박양이 사람 이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이게 뭐지 싶었음.
그리고 박양이라는 사람이 실제로 있었는지도 의문이었는데 저 글 보고 왠지 그럴듯 하다는 생각이 들었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798년에 최초로 택견이라는 단어가 기록됐고,
저 무예가 출중했다던 박양이라는 사람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게1513년임.
그런데 그게 집안이 반역으로 풍비박산 났다는 얘기더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쨌든 박양이 외방에 있어서 잡으러 간다는 얘기는 있었는데 잡혔다는 얘기는 없는거 보면 안잡혔을 수도 있을거 같고.
잡혔다고 하더라도 택견을 만들어 퍼트린게 선전관으로 일하면서 일수도 있으니까 이부분은 큰 문제가 안될거 같음.
시기를 보면 왠지 설득력이 있는게 박양이 살던 시기랑 택견이 기록된 시기의 순서가 맞음. 동시에 택견 기록이랑 박양 살던 시기 차이가 300년 좀 안되는데,
300년 정도면 택견이 한사람에게서 만들어진 후 점차 퍼져나가 한 지역에서 성행해 백과사전 같은 곳에 기록될 정도의 이름값을 가지기 적당한 시간인거 같음.
그리고 택견이 서울 일부에서 행해졌다는 거나, 택견을 향유했던 계층도 겹친다는 점, 박양이라는 이름과 무예를 잘했다는 점, 그리고 선전관이라는 직위에 무예특채로 뽑혔다는 점.
이런 점들이 내 상상력을 미친듯이 자극하는 중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론 아무리 떠들어봤자 추측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겠지만 뭔가 그럴듯하고 재밌어보여서 한번 끄적여 봤음.
저 글 보고 막 싸지른 글이라 문법도 안맞고, 횡설수설한거 같아도 좀 봐주셈ㅋㅋㅋㅋ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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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걸 뒷받침하는 문헌자료가 아예 전무하다는 거.
대개 사이비 무술들이 지금 니 댓글하고 똑같은 논리를 써먹는다.
그리고 아무리 후계자 분들 말씀이래도 문헌자료가 없으면 확실하다는 소리를 하면 안 되지.
정작 그 분들도 자신들은 '그리 들었다'는 정도로 말씀하시는데, 니가 확실하다고 하면 어떡하냐?
뜬금없이 사이비 무술 드립이 나와서 어질어질하긴 한데 님이 하나 심각하게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정정해줌.
님 말처럼 문헌 자료가 없어서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원론적으로 맞기는 하지만 택견 같은 경우엔 문헌의 교차검증이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는 말 자체가 아예 의미가 없음.
왜냐하면 그나마 있는 문헌 자료라는 게 실제로 택견을 한 사람이 남긴 게 아닌 것들일 뿐더러 그 내용도 굉장히 단편적인 것들밖에 없어서 상호 교차 검증이 불가능한 수준이거든.
그렇기 때문에 신뢰도만 따져 보면 좆문가가 쓴 건지, 아니면 그래도 택견을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 쓴 건지 구분조차 불가능한 문헌 자료들보다는 오히려 구한말 최후의 택견꾼이었던 송덕기 옹의 제자분들의 증언이 더 높은 편임. 왜냐하면 최소한 그 분들이 하는 증언은 송덕기 옹께 택견에 대해 배우고 들은 거에 바탕을 둔 거니까.
그런데 박양박수 박양서각 같은 경우엔 고용우, 이준서 선생 이 두 분의 증언이 일치하는데다, 위대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에서 뜬금없이 박양이란 인물을 택견의 중시조로 내세울 이유도 없다는 걸 감안하면(위대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의 신뢰도에 의심의 시선을 보낼 수도 있는 내용이니) 오히려 저 증언의 신빙성이 커짐.
내가 말한 '확실하다'에 뭔가 엄청 긁힌 것 같으니 이건 나도 철회하겠지만, 택견인이라면 택견에 관련된 문헌 자료가 교차검증이고 뭐고 아예 할 수가 없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걸 모를 수가 없을텐데 그런 문헌 자료를 들고 와서 후계자 분들의 증언의 신뢰 여부를 따지려고 하는 건 ㄹㅇ 첨 봤네.
ㅇㅇ 나도 좀 경솔하게 확실하다는 말을 쓴 것 같음.
개인적으로 송덕기 옹의 제자들이 둘 이상이 한 공통된 증언이면 완벽하게 배치되는 다른 증언이 있지 않는 한 일단 신뢰하는 입장이라 그렇게 쓴 건데 앞으론 주의해야할듯.
그런데 참, 자료가 없어도 너무 없는데다 제자들간의 수련 기간 차이나 협회 사이의 알력다툼까지 끼어서 증언도 서로 일치 안 하는 경우도 많고, 어디에서만 따로 나오는 증언도 많고...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되어줘야 할 문헌 자료는 백과사전 한 줄 정도 내용이고.. 알면 알수록 존나 답답함.
[[사적 연구 방법]]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C%A0%81_%EC%97%B0%EA%B5%AC_%EB%B0%A9%EB%B2%95
<목격자의 증언>
R. J. 셰퍼는 목격자의 증언을 검증하는 점검 목록을 제공한다.
1. 저술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와 다른 것인가? 언어는 현재 사용되는 의미와 다른 것인가? 문장이 풍자적이지는 않은가?(즉, 말하는 것과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2. 저자는 보고하는 사항을 어떻게 관찰하였나? 저자가 느끼는 것과 관찰 대상은 같은 것인가? 저자가 보고, 듣고, 만져보기에 적당한 위치에 있었나? 저자는 적절한 사회적 관찰 능력을 갖고 있는가? 즉,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가? 그 외에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예를 들면 법률이나 군사) 저자는 배우자나 비밀경찰에 위협받고 있지 않았나?
3. 저자는 어떻게 기록하였나? 저자의 기록 능력은 어떠한가?
3-1 기록 능력과 관련하여, 저자는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 저자는 기록 작성을 위해 충분한 시간이 있었나? 기록에 적합한 장소가 있었나? 적절한 기록 용구가 있었나?
3-2 저자가 관찰했을 때부터 기록했을 때까지의 시간은? 꽤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나?
3-3 저자가 보고하려는 의도는? 누구를 위해 보고하였나? 그 때에 주변의 인물이 왜곡을 요구하거나 권장하지는 않았는가?
3-4 의도하였던 진실성에 외부의 관여가 없었나? 보고 사항에 무관심하여 의도하지 않은 왜곡의 가능성은 없는가? 저자 자신이 손해가 되는 내용을 적게 되어 왜곡할 가능성이 있지는 않았나? 저자는 우연으로 또는 항상 정보가 주어져 의도적으로 오류를 유발할 가능성은 없었는가?
4. 저자의 언급은 본질적으로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지는 않나? 즉, 인간성에 반하거나 일반 상식에 배치(背馳)되지 않는가?
5. 정보의 유형에 따라 관찰과 보고가 쉬운 경우가 있음을 명심한다.
6. 글 내부적으로 모순이 있지 않은가?
루이스 곳샬크는 추가적으로 생각할 사항으로, '해당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사안에 따라서는 흔히 일어나거나 충분히 가능한 일이어서 오류나 거짓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갸라한은 대부분의 정보가 '간접적인 목격자'로부터 나옴을 지적하였다. 이들은 해당 장소에 있지 않았으나 다른 이들로부터 그 내용을 전해들은 것이다. 곳샬크는, '역사가는 이따금 소문에 의한 증거를 사용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어쨌거나, 2차 목격자의 정보를 사용하는 경우 이들을 전적으로 신용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1) 목격자는 어떠한 1차 증언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 2) 2차 목격자가 1차 증언을 대체적으로 정확히 보고하는지, 3) 그렇지 못하다면, 목격자는 1차 증언을 얼마나 상세하게 보고하는지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2)번과 3)번 질문에서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다면 역사가는 1차 증언의 전체 또는 요점을 제공받은 것이며, 이러한 경우에는 목격자의 정보에 대하여 1차 증거와 같이 테스트를 한다고 설명하였다.
<구전>
길버트 갸라한은 구비 전승의 경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광역 조건'이나 여섯 가지 '상세 조건'을 만족하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 광역 조건
1-1 전승은 중단 없는 일련의 목격자들에 의해 지속되어 일어난 일에 대한 직접적인 최초의 보고자로부터 채록되는 생존하는 전달자 또는 최초로 기록을 시도한 서술자까지 도달하여야 한다.
1-2 여러 평행하고 독립적인 일련의 목격자들이 있어서 문제되는 내용을 증명해야 한다.
2. 공식화된 상세 조건
2-1 전승은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알려질 만한 일 같은 중요한 사건을 보고해야 한다.
2-2 전승은 최소한 한정된 시간 이상은 일반적으로 그렇다고 여겨져야 한다.
2-3 이러한 '한정된 시간' 동안, 이에 대한 이의가 (해당 사실의 부인에 관심있는 사람으로부터의 이의를 포함하여) 제기되지 않았어야 한다.
2-4 전승은 상대적으로 한정된 지속 기간을 갖는다. (기타, 갸라한은 최소한 구전에 의한 기억이 뛰어난 문화에서 최대 한도를 150년을 제안하였다.)
2-5 전승이 지속되는 동안 비평 정신이 충분히 발달하여야 하며, 비평 조사의 필요 수단이 바로 사용 가능하여야 한다.
2-6 전승이 옳지 않다고 여겼다면 충분히 이의를 제기했을 문제의식을 갖는 인물이 그러한 이의를 제기하지 말았어야 한다.
전승을 증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는데, 고고학적 유물에 의한 증거와의 비교가 그 한 예이다.
카더라 취급하는게 아님. 님 말대로 비교 검증을 할 수 없는데 '확실하다'고 하는 거에 내가 좀 긁혔음.
예전에 여기서 송도수박 쪽 할배가 억지 부리던게 생각나서 좀 발끈했음. --;;;
[[구술사 연구]]
https://namu.wiki/w/%EA%B5%AC%EC%88%A0%EC%82%AC%EC%97%B0%EA%B5%AC
김귀옥(2014)에 따르면 구술사연구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도, 소위 "기록 없는 사람들", 즉 국가폭력의 피해자, 전쟁 피해자, 사건사고의 피해자, 사회적 피억압자 등, 자신의 경험과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 가는 사람들의 역사를 연구의 형태로 담아낼 수 있다. 물론 소위 "엘리트구술" 이라 하여, 피억압 엘리트들, 예컨대 반체제 운동가나 민주화 운동가, 재야 정치인, 혁명가 등의 경험을 남기는 것도 가능하며, 국내에서는 비단 피억압자들이 아니더라도 전직 대통령 참모진이나 외교관 등의 엘리트들도 많이 연구되고 있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권력화라는 점에서 구술자의 연구참여도가 대단히 높은 '권력 평등한' 연구에 속한다는 점도 질적 연구자들에게 매력적이다. 또한 통계나 공문서와 달리, "왜?" 에 대한 대답이 용이하다는 것 역시 많은 연구자들이 구술사연구를 채택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학문적으로는 문화(사학), 일상(사학), 지역(사학) 등에 탁월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인정되고 있다. 사회적으로도, 아픈 기억으로부터 구술자를 해방시키고 이들의 문제를 의제화한다는 대의가 있다.
구술사연구의 한계는 없을까? 김귀옥(2014)에 따르면, 구술사연구는 구술자의 기억에 의존하므로, 기억의 정확성이 떨어지고 왜곡되는 과정에서 '사실 그 자체' 가 아닌 '사실에 대한 재현' 을 연구하는 것이 된다. 또한 구술자가 처한 맥락 속에서 사투리, 은어, 토착문화 등에 대한 사전 이해가 없으면 연구가 어렵고, 주관성이 개입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논하기 위한 목적에는 적합하지 않다. 또한 비록 권력화를 보장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연구를 하는 사람은 연구자이므로, 연구자가 녹취록의 해석권을 갖고 자의적으로 해석할 힘이 있다. 이 문제 때문에 연구자는 자신의 해석을 절대화해서는 안 되며, 자신이 놓친 '더 큰 전체' 는 없는지 통찰력 있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구술사연구는 사학계에 굉장한 논란을 불러일으켜 왔다. 긍정적으로 보는 논자들은 구술사연구가 학계에 '열린 사관(史觀)' 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사학계의 주류 패러다임은 역시나 레오폴트 폰 랑케(L.von Rankes)의 역사실증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명확히 실증되고 교차검증될 수 있는 사료들을 바탕으로 전체사(total history) 및 경제사 등을 연대기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구술사연구는 이런 흐름에 있어서 거의 철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수준에서부터 일종의 '빅엿'(…)을 날리는 방법론이었기 때문.
구술사연구는 본질적으로 구술자의 구술배경과 의도를 찾아가는 데 초점을 맞출 뿐, 역사를 실증하거나, 역사적인 사실(fact)을 찾거나, 이미 확립된 역사의 일부 누락된 부분을 찾아 메우거나, 기존의 문헌과 사실관계를 비교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연구라고 볼 수 없다. 이는 구술자료 특유의 (위에서 설명했던) 주관성에 기인하는데, 많은 사학자들이 구술자료의 '왜곡', '비공식성', '불확정성', '불명확함' 을 들어서 사학적 가치가 없는 자료 내지는 문헌적 자료에 비해서는 2등 자료인 것으로 간주해 왔다. 그래서 90년대 즈음의 국내 구술사 연구자들도 이 문제로 고생을 많이 했으며, 초기에는 "문헌적 자료의 보완적 자료", "나름대로 객관성을 보장할 수 있는 자료" 라는 식으로 세일즈를 시도했지만, 구술자료가 대량으로 존재하고 KCI 등재저널도 하나 만들어낸 2010년대에는 조금 여유가 생겼는지 주관성 자체가 단점이 아니라 하나의 장점이라고 차별화를 꾀하는 중이다.
구술사에 호의적인 연구자들은 물론 소위 '사실과 구술 사이의 간극' 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 간극조차 사실의 일부로 봐야 한다거나, 사실로부터 변형된 부분을 사실 자체로부터 체계적으로 떼어놓으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비판한다. 또한, 구술자료가 문헌자료에 비해 더 주관적이라는 주장은, 문헌자료의 편향성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관점이라고도 비판하고 있다.[23] 또한 이들 연구자들은 일명 "기억투쟁"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기억은 비공식적이고 낮은 수준의 역사가 아니며, 역사는 공식적이고 확정된 기억이 아니고, 오히려 역사는 기억과 기억 사이의 투쟁이라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대문자 역사" 의 담론을 전복하자는 말도 된다.[24] 요컨대 구술사 연구자들은 실증될 수 있는 사실을 추구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념적으로서가 아니라, 방법론 자체가 사실의 추구와 너무나 괴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술채록의 경우, 실제로 연구자가 "...지금 말씀하신 바가 사실이라는 것이죠?" 라고 질문할수록 구술자는 자신없어하거나 당혹스러워하는 경향을 보인다. 구술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 사실의 서사적 재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술사는 사학계의 연구방법론임에도 정작 사학계보다 사회과학계에서 더 잘 써먹는 연구방법론이 되었다. 사학계가 구술사연구에 대해서 불편해하고 부담스러워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문헌들이 존재하는데, 상기한 바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사학계가 구술사연구를 받아들이게 되면 과거의 사실에 대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연구가 현재 시점의 복잡한 정치적 동학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설명한 기록학에서의 의미와 유사하기도 하다.) 다시 말해, 사학이라는 학문적 정체성이 "과거를 논하는 학문" 인가, 아니면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는 학문" 인가로 갈릴 수 있는 거대한 떡밥이 된다는 얘기다. 구술사연구의 전복적 성격, 즉 "기록 없는 사람들" 의 많고 다양한 대항기억들을 내세워서 기존에 확립된 연대기를 전복시키는 성격 때문에, 사학계는 구술의 가치를 인정한다 해도 구술채록 이상으로는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한다. 게다가 이런 대항기억이니 뭐니 하는 것에 대해서도 "포퓰리즘적 역사쓰기를 할 셈이냐" 면서 항의하는 중.
결국 이러니 저러니 해도 택견은 구술사 연구 중심으로 가는 수밖에 없는듯.. 중립성 문제라던가 기억 왜곡 문제 같은 한계도 있겠지만 사적 연구 방법은 검증을 할 수 있는 자료 자체가 없다시피해서 더 노답이나 마찬가지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