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디스토피아의 마지막 택견꾼이 되어버렸다] 完

익명_44342702
107 0 0

**본 글은 택견저장소 창작물 코너에 연재해온 자작소설의 마지막 회차입니다. 아직 앞의 글을 못 보신 분께서는 목록으로 돌아가 이전 내용을 보고 오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미 지쳐버린 유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의외의 소강상태가 이어졌기에 퍼뜩 눈을 떴다. 1분대장은 다리가 기계에 엉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제길!”

 

유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11번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떨리는 몸으로 살기 위해 움직인 유진은 자신을 멈출 수 없었다. 유진 자신이 서있던 자리를 빠르게 박차고 나와 1분대장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를 밟아 디디며 떠올라 무릎으로 그의 목뒤로 타고 올라갔다.

 

.. 보는 눈이 좀 늘었나

 

1분대장은 체념한 듯 말했다.

 

유진은 1분대장의 손이 닿는 곳에 있으면 위험하다는 판단에 의해 한 행동이었지만, 그것은 1분대장이 이미 알고 있던 기술이었다.

 

유진이 다리를 꼬아 1분대장의 목을 감싸고 팔꿈치로 그의 머리를 연신 가격했다.

 

그가 진정할 수 있게 되었을 때 1분대장은 의식을 잃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내 역할은 여기까진가... 죽기 전에 다른 생존자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11번은 시야가 뒤틀리는 것을 보며 넋두리를 했다. 겨우 서 있던 11번의 몸이 뒤집히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기계의 조각이 그의 몸을 꿰뚫고 올라오자 그는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무덤이 완전히 내려앉았다. 유진의 제련된 몸이 그곳을 빠져나오자 선조들의 무덤이 역할을 다한 것마냥 무너졌다. 그리고 피어오른 붉은 모래먼지 사이로 유진이 종적을 감추었다. 그 자리에는 0구역의 마지막 수호자의 혈흔만이 남아있었다.

 

영웅은 처음부터 없었어. 지금 이곳에서 탄생하는 건 희생자 뿐이야.’

 

생존자는 그 수호자의 시신을 수습하며 생각했다. 그것은 더 이상 누구도 맘대로 하도록 두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3년에 걸쳐 뼈와 살이 와해되고 묻히는 사이에 그와 같은 말이 세상에 공표된다. 글자 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말로써.

 

유진의 엄포가 세상에 전해지자, 전운을 몰고 오는 위험인물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게 피어났다. 세계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전대미문의 테러범. 질서를 유린하고 법을 횡단하는 배반의 상징. 자신을 키워준 부모를 죽이고 무덤을 파헤친 희대의 패륜아. 모욕스러운 칭호들이 유진의 목에 걸렸다.

 

그러나 두려움이 커질수록 그에게 주목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태호가 몸을 담았던 반란군과 곳곳의 자경단이 그를 추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각오한 자에게 허락되는 힘이었다. 그렇게 유진은 권력자들과 같은 무대에서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이 싸움은 얼마나 많은 추종자를 확보하는가에 결정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끝에 새 시대를 열 해답이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시대의 피해자들이 거대한 희생자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들은 한없이 목말라 있었다.

 

 

#Epilogue

 

유진은 죽은 줄 알았던 충일을 만났다.

 

일어나계셨군요

 

유진은 멀쩡히 서서 기다리고 있는 그를 보고 놀랐다.

 

그렇게 된 지는 조금 됐다.”

 

저를 기다리고 있었나요?”

 

네가 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충일은 전과 달라진 유진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이제 해줘야 할 이야기가 많을 거 같구나

 

충일은 그동안 미뤄왔던 이야기를 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현암이 죽고 우리는 그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전쟁 중에 만들어진 어떤 기록의 존재를 알게되었지. 인간의 움직임에 대한 장대한 데이터를 알고리즘으로 구현한 것이었다.”

 

무덤에 있던 그 기계군요

 

정확히는 그 안에 들어있는 거지

 

충일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빅데이터니 딥러닝이니 하는 것들에서 나온 거였어. AI는 상용화를 넘어 고도로 발전된 수행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마침내 인간의 문화를 담아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피어났지.”

 

기계가 인간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된다니... 신이라도 되려고 했던 건가요?”

 

지금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군.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발상이었어. 하지만 사실이었다. 인간은 스스로 피조물을 만드는 절대자가 되려고 한 거야. 그리고 그 오만한 연구를 실현시키기 위해 가장 인간다운 무언가를 찾아 다녔지.”

 

현암이 가지고 있던 그것말인가요?”

 

아니, 가지고 있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아. 그들이 착취하려고 했던 것은 그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었던 이니까.”

 

몸을 착취해서 기계에 담아낸다니 유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충일과 같은 언어로 대화하고 있음에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배운 그것이 이란 말인가. 몸은 이미 가지고 있지 않았나. 혼란 속에서 유진은 솔직해지기를 선택했다.

 

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그것을 제게 전해주셨다고 하시려는 것이라면 저는 받은 것이 없다고 답변하게 될 것입니다. 선문답에는 이제 지쳤습니다.”

 

충일은 눈을 크게 떴다. 그 눈에 담긴 감정은 배신감이나 실망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벅찬 기대에 의한 것. 놀라움에 따른 확장된 동공이었다.

 

그거야 말로 정답이다.”

 

전 분명 선문답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런게 아니다. 내가 너에게 아직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이 정답이라는 거야.”

 

유진은 화가 나려고 했다. 그러나 다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섵부른 판단을 하기 전에 충일이 선수를 쳤다.

 

 나는 너에게 아직 기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동작을 해보라고 강권했을 따름이지. 이제부터 남은 시간 동안에는 내가 너에게 그것들의 이름을 알려줄 거야. 이름에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들어있다. 이름을 알려준다는 것은 내가 나의 스승님인 현암에게 물려받은 권위로 너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유진은 이제야 모든 정보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11번이 무덤 속에서 했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무제와 한주가 자신에게 기대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정신 나간 인류가 손대고자 했던 그것이 무엇인지. 몸이자 문화이며 그동안 기계가 도달하지 못했던 영역. 그것은 인류가 잊어서는 안 되는 사명. 그러나 너무나 당연해서 묻지 않고 있던 행위였다. 유진은 더 이상 따지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공손하게 물었다.

 

그럼, 그렇다면... 제가 배워야 하는 이 기술들, 그것의 이름도 있나요.”

 

그래. 거기서부터 시작해야만 하겠지.”

 

그 이름이 뭐죠?”

 

우리가 배웠던 그 문화, 우리의 몸이 지닌 이름은

 

유진은 침을 삼키며 올곧은 자세로 귀를 기울였다.

 

택견이다. 우리는 그걸 택견이라고 부른다.”

 

택견

 

유진이 따라서 발음했다.

 

너는 그걸 배우고 익혀서 망각된 문화를 되살려야 한다. 너 자신이 이 땅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나는 그걸 위해 너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줄 것이다. 다 배우면 살아남아라, 그리고 전해라 한낱 인간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세상에 보여줘라.”

 

충일은 인간의 욕심이 향하는 기술의 창조나 정치적 권위를 논하지 않았다. 유진이 보아왔던 세상 속에서 인간을 괴롭히던 것들이 아닌 새로운 가치를 제시했다. 몸을 되찾는 것만으로 인간일 수 있다. 거창한 정신이나 패권을 두고 싸우지 않아도 된다. 싸우겠다면 두 손 두 발로 자신의 심장을 걸고 나아갈 따름이다. 세상은 몸의 연장일 뿐,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타오르는 불 속에 갇혀 뜨겁게 고통에 사무치던 유진의 몸은 거푸집을 부수고 나와 세상과 만났지만 이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여렸다. 충일의 가르침이 있기 전까지의 유진은 상처가 밖으로 드러나 있는 막 달궈진 철이었다. 그러나 충일이 가르쳐주는 이름들은 유진을 망치질하고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더욱더 단단하게 몸을 굳혀줄 것이다.

신고공유스크랩

한달이 지난 게시글은 로그인한 사용자만 토론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공유

퍼머링크

삭제

"[디스토피아의 마지막 택견꾼이 되어..."

이 게시물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