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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기 옹 스승 임호 선생이 젊었을 적 택견판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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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대략 1860-90년대의 택견판, 정확히는, 이름이 '택견'이었는지 '수박'이었는지 뭐였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서울을 중심으로 성행했던 모종의 격투 스포츠에 대해,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을 살펴보면 대충 이랬다고 함.  

 

일단 주로 음력 1월에 대회가 개최됨. 마을 대항전(택견 식으로 말하면 '결련') 형식으로. 

 

경기 방식은 주먹질 발차기 니킥 자유롭게 허용. 그러니까 택견으로 치면 서기택견보다는 결련택견에 가까운 방식이었던 거지. 만약에 그 격투기가 택견이었다면 '호신술로 익히는 / 과격한 방식의 택견'을 왜 결련택견이라고 불렀는지 유래가 딱 설명이 되는 거고. 

 

참고로 참가자들은 프로 선수들이었음. 전업이었는지 알바였는지는 몰라도 하여튼 부자거나 마을 단위인 스폰서가 대주는 돈을 받고 싸움판에 올랐다는 거. 물론 경기 승패를 두고 노름판이 벌어졌음은 말할 것도 없고. 

 

양 선수단이 돌아가면서 일대일로 피 튀기는 결투를 벌이면, 각 마을의 응원단이 선수들 못지 않게 치열하게 응원전을 벌였음.

 

돌과 몽둥이를 든 채로. 

 

싸움 구경하다가 뭔가 조금만 시비 걸 거리가 생기면, 예를 들어서 상대편이 반칙기 같은 걸 쓰거나 우리 편이 밀리거나 하면, 언제든 판에 뛰어들어서 몽둥이를 휘두르고 돌을 던지며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그런 식의 패싸움이 빈번하게 벌어졌음.

 

설령 경기가 무사히 마무리되더라도 그걸로 끝이 아니었음. 마치 후속 행사처럼 반드시 돌과 뭉둥이를 동원한 패싸움이 벌어졌음. 길게는 그런 싸움이 며칠씩이나 이어졌고 사람 죽어 나가는 일도 비일비재했음. 그런 전쟁 같은 패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노약자들은 대문을 잠그고 밖에 나오지 않았고 행인들은 길을 돌아가야 했음. 그러니 후속 행사가 아니라 그게 본 경기고 맨손 싸움판은 오프닝 경기 같은 거였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음.

 

이쯤에서 드는 의문: 그런 일이 벌어질 때 국가는 뭘 하고 있었는가?

 

정답) 아무 것도 안함.

 

사또니 원님이니 하는 고을 수령들 절대 안 말리고 오히려 즐겁게 구경했음. 심지어 자기들이 선수로 뛰기도 했고.

 

이상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의 놀이 문화였음. 

 

레퍼런스는 김영만, 심성섭, '조선말 외국인의 기록을 통해본 택견', <한국체육과학회지> 제23권 제1호, 2014에, 나의 상상력을 약간 가미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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