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검술의 신화와 딜레마
일본군이 시대착오적인 검술관을 가지고 2차대전에 이르는 현대전의 시대까지도 병사들의 검술훈련에 집중하고 그 검술능력도 높았다는 시각이 있으나, 실제로는 별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부실한 점이 있었다.
1차대전 이전까지는 각국의 군대에서 군도술을 교습하였으므로 교범을 비교해 볼 수 있는데, 군도술만큼은 일본이라고 해서 더 나을 것 없이 대체적으로 동일한 내용과 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대의 핵심인 총검술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미국 육군의 1917년 총검술교범(Notes on bayonet training - compiled from foreign reports)에서는 1차대전의 참호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교통호와 야전축성장애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참호에 돌입하여 찌르기와 공격해오는 적을 참호에서 올려 찌르는 방법, 개머리판을 이용해 가격하는 방법과 기본적인 총검 대 총검술, 맨손으로 총검을 제압하는 기법까지 다양한 내용을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대척점에 있는 일본육군 1915 교범의 총검술 파트를 보면 3가지의 찌르기와 그에 대한 3가지의 방어법이 존재할 뿐, 다양한 상황에 대한 대처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2차대전에서도 미군FM 총검술파트(FM 23-25 Bayonet)에서 일대일, 일대다, 2대3 등의 다양한 조우 상태에서의 전법과 더불어 개머리판의 적극적인 사용, 적 나이프와 총검 탈취, 트레이닝 스틱을 이용한 훈련법 등을 교습하는 데 비해 일본군 1934교범에서는 1915교범의 3가지 찌르기와 방어법에 근접격투와 몸통박치기가 덧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군이든 미국군이든 징집된 병사로써 원래 일반인이었으므로 결국 군대에서 어떤 교육을 받는가가 역량을 결정하게 되는데, 일본군은 오히려 교육내용면에서 부실했다. 이 점 탓에 영미군 포로를 이용한 총검술연구에서도 일본군이 밀렸고,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 해병대에게 적극적으로 총검돌격을 걸었으나 오히려 체격과 기술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양손군도술 측면에서도 1차대전 이후 신설된 양손군도술은 실전과 많은 괴리를 가지고 있어서, 토야마 육군병학교에서 독자적인 진검술교리를 연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나 실제 토야마학교의 진검술교리를 배울 수 있었던 인원은 매우 적었다. 1934년 교범이 1차 상해사변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정되었으나, 군도술의 내용은 1915년의 내용을 바탕으로 매우 일부의 요소만 약간 변경된 것이었으며 여전히 죽도와 호구를 이용한 시합형태의 교습을 중심으로 삼는 만큼 근본적인 문제점이 해결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가장 실전적이라고 여겨진 토야마 육군병학교의 교범조차도 기본적으로 돌격하여 내려베기(수직, 좌우 대각선)과 찌르기만을 가르치기 때문에 고전검술의 관점에서 보면 기초 중의 기초만을 가르치는 데에 지나지 않았다. 직접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토야마 학교 진검술조차 이러했던 만큼, 이러한 현실속에 일본군만이 특별히 검술을 잘 했기를 바라기는 어렵다.
사실 이는 '군도술'이기 때문에 가지는 근본적인 한계이다. 군인들을 데려다놓고 기존의 검술 수련처럼 수년 이상을 진득히 수련하며 소양을 쌓아 가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군대의 검술인 군도술 체계에서는 필요한 동작들만을 추려 속성으로 익혀서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가령 일본군의 양손군도술 체계에는 검술의 기초 중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검으로 적의 검을 상대하는 기술' 자체가 없다. 20세기 초중반 당시의 전쟁터에서 적군과 칼을 맞대고 싸워야 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과감히 빼 버리고, 그 대신 군도를 빠르게 뽑아 강하게 베어 적군을 신속하게 참살하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일본군이 검술의 프러페셔널처럼 여겨진 것은 2차대전까지도 장교준사관들이 군도를 패용하고, 중일전선에서는 특히 하사관병도 카타나를 패용하는 것을 묵인하여 그 인상이 특이하게 받아들여진 점, 그리고 프랑스식의 정신교리를 채용하여 공격적인 전술과 백병전을 선호하는 행동, 그 선두에서 장교가 칼을 빼들고 돌격을 선도하는 모습을 전쟁 내내 보여준 점이 강한 인상을 남긴 탓이 크다.
비슷한 예로 중국군의 항일대도가 있다. 이쪽은 영미군과 직접적으로 공동전투를 벌인 적은 거의 없어서 서구에서의 인식은 적으나 중국 내부에서는 항일투쟁의 상징으로까지 부각되는 물건이다. 그리고 사실 패용비율과 실전투입으로 따진다면 일본군도보다 훨씬 많이 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