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정신이 투철해야 무술이 발전할까?
동아시아의 역대 유목제국들(흉노, 유연, 선비, 돌궐, 위구르, 거란, 몽골, 만주 등등)이 상무정신, 숭무문화의 끝판왕들인데 얘네들한테서 유래한 무술이라는게 손에 꼽을 정도 밖에 없지 않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상무정신이 투철해야 무술이 발전한게 아니라, 무술이 돈이 되니까 새로이 무술시장이 형성되고 그로인해서 상무정신이 마케팅용으로 강화됐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음.
그리고 상무정신이란게 오늘날로 치면 전사(warrior)사회-문화에서 형성되고, 오늘로 치면 군사주의의 일환으로 환원될 수 있는데 전쟁 중이 아닌 이상 평시의 나라에서 이런 문화를 긍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던게 꼭 불합리했던 건 아니였다는 생각이 들어. (현대에 들어서 이런 문화가 가장 강하게 남은게 38선 이북의 선군정치 국가니까...--;)
댓글 7
댓글 쓰기교과서는 최신 학계 동향을 반영하지 못 하고, 일반 대중들도 다 아는 내용은 오해와 착각이 점철된 경우가 많음.
우선, 개념분리가 명백히 할 필요가 있는데, '군사기술'로서의 무와 '민간호신술 및 결투술'로서의 무는 엄연히 다른 차원의 개념임. 똑같이 무라고 칭하지만 사실은 별도의 장르들임.
1. 고려, 조선은 무를 천시하고 탄압한 국가였는가? NO. 상식적으로 실존적 군사적 위협이 언제나 상존했던 나라가 망할려고 작정하지 않는 이상 군사기술로서의 무를 천시하고 탄압할 이유가 없음. 그리고 무를 천시하고 탄압하는데도 무력(武力)이 절대적으로 필요함.
2. 숭문천무(崇文賤武)하면 무술이 발전하지 못 하는가? 글쎄... 애초에 우리가 지금 마주하는 현대무술들 대다수가 숭문천무 시기를 기점으로 <민간 호신술 및 결투술>의 수요가 대중적으로 일어나서 무술시장이 형성되고 그게 발전되서 내려온 경우들이 많음. 오히려 전쟁이 끝나고 군사기술로서의 무의 필요성이 약해지던 시대가 되면 군 격투술 및 무기술이 민간으로 흘러들어가서 민간호신술이나 격투 스포츠화가 될 때 되려 기술들이 크게 발전함. 참고로 이건 중국이나 일본 쪽 무술연구가들이나 무술사 연구가들이 먼저 한 주장들임. 위 댓글에도 나왔지만 일본에서 무술이 천시되던 메이시 유신 시대를 기점으로 오히려 현대 일본 무도가 새롭게 정립되어 발전하는 계기가 됐음.
돌궐 몽골 빼곤 다 지금 남아있는 나라가 없잖음?ㅋㅋㅋ 심지어 멸망한지 아주 오래됨. 최소한 일본이나 한국처럼 지금까지 나라가 쭉 이어져 와야 뭔가의 명맥이 유지되고 파생되거나 하지
돌궐 몽골 그 둘도 멸망했다가 지금 겨우 살아난거고. 유대인들처럼 똘똘 뭉쳐 자기들만의 문화를 대대로 이어왔다면 모를까, 예시로 드신 민족들은 중국 러시아 내에서 이미 섞이고 치이고 다 찢어져서 다 흩어지다시피 함.
비교가 적절하지 않다고 보는데
돈이 돼야 사람이 몰리니 해당 분야가 발전하는 건 맞음. 근데 나라에서 대대적으로 천시하고 탄압하면 어지간해선 발전 못함
돌궐 몽골 빼곤 다 지금 남아있는 나라가 없잖음?ㅋㅋㅋ 심지어 멸망한지 아주 오래됨. 최소한 일본이나 한국처럼 지금까지 나라가 쭉 이어져 와야 뭔가의 명맥이 유지되고 파생되거나 하지
돌궐 몽골 그 둘도 멸망했다가 지금 겨우 살아난거고. 유대인들처럼 똘똘 뭉쳐 자기들만의 문화를 대대로 이어왔다면 모를까, 예시로 드신 민족들은 중국 러시아 내에서 이미 섞이고 치이고 다 찢어져서 다 흩어지다시피 함.
비교가 적절하지 않다고 보는데
돈이 돼야 사람이 몰리니 해당 분야가 발전하는 건 맞음. 근데 나라에서 대대적으로 천시하고 탄압하면 어지간해선 발전 못함
걔네들이 멸망했던 기간보다 존속했던 기간이 더 길었는데 존속했던 기간동안 무술이 발전했다고 보기 힘들지 않음?(전근대 시절의 무술이란 오늘 격투스포츠 같은게 아니라 군사기술의 일환으로 병과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니까)
딱히, 비교가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지진 않는데?
그리고 일본도 메이지 유신 때 무술을 구습의 일환으로 천시하고 폐도령 같이 탄압한 역사가 있었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각 유파들이 먹고살니즘에 입각해서 비전, 비기들을 공객하며 무술이 대중화되면서, 전통 무술이 현대적인 스포츠와 교육의 형태로 탈바꿈하는 필연적인 변모의 과정을 겪으며, 현대 무도로의 발전이 되려 촉진된 계기가 되지않음?
그리고 요즘 저장소에서도 공개되는 역사자료에 의하면 조선도 딱히 무술을 천시하고 탄압한 건 아니지 않나?
물론 지배층에서 문을 무보다 더 높게 쳤지만 그렇다고 그게 무를 천시까지 했다고 보긴 힘든데...
애초에 고려 중기에 이미 한 번 괄시했다가 난리난 일이 있었던 데다, 무엇보다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부터가 무관이었고,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 무인 세력이 없었다면 역성혁명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무반을 무시하는 건 창업군주를 낮잡아 보는 것이나 다름없지. '대우가 낮다'와 '괄시하다'는 전혀 다른 개념이지 않음?
시험을 통해 무관(군 장교)을 선발하는 제도는 세계사적으로 볼 때 매우 독특하고 드문 사례일텐데? 대부분의 전근대 국가에서는 군사 지휘관을 혈연, 귀족 작위, 혹은 현지 영주나 장군의 임명(추천)을 통해 선발했으니, 오히려 무를 제법 대우해줬다고 볼 수 있지 않나?
특히 조선 후기의 무과는 만과(萬科)로 불리면서 하층민과 양인들에게 신분 상승의 거의 유일한 통로이자 체제 불만을 완화하는 장치로 기능도 함.
지배층 중에 무를 천시한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게 지배층 전반의 시각이라 보긴 힘들고, 하층민과 양인들 중에는 (유리천장은 있었겠지만) 무술을 통해서 출세하겠다는 시각으로 무를 숭상한 사람들이 많았을텐데?(당장 송덕기 옹 인터뷰만 봐도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으로 먹고 살았던 시기도 존재했고...)
멸망한지 한참 오래됏는데 애초에 지금까지 이어져왓다고 보긴 힘들지. 본문에서도 나왔듯 논지는 "그때부터 유래해 지금까지 이어져온 게 있냐 없냐"임.
일본을 예시로 들면 외부에 의해 나라가 뒤집히고 문화가 송두리째 바뀐 일이 없음. 때문에 문화가 이어져 와 지금 수많은 파생무술들이 생겨난 것이고, 본문에 나온 여타 국가들은 이미 과거 러시아 중국 왕조들에 의해 궤멸당하고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지 오래임. 무술은 고사하고 자체 문화 자체가 없어져버린 건 당연함
예시를 들거면 유럽 주요 국가들이나 조선 일본같이 지금까지 어느정도 쭉 이어져 온 나라들을 들어야 맞지 않을까 싶은데.
그리고 저장소 의견은 저장소 의견이고, 고려 조선 둘 다 문을 숭상하고 무를 낮게 취급한 건 교과서에서도 나와있는, 일반 대중들도 다 아는 내용임
교과서는 최신 학계 동향을 반영하지 못 하고, 일반 대중들도 다 아는 내용은 오해와 착각이 점철된 경우가 많음.
우선, 개념분리가 명백히 할 필요가 있는데, '군사기술'로서의 무와 '민간호신술 및 결투술'로서의 무는 엄연히 다른 차원의 개념임. 똑같이 무라고 칭하지만 사실은 별도의 장르들임.
1. 고려, 조선은 무를 천시하고 탄압한 국가였는가? NO. 상식적으로 실존적 군사적 위협이 언제나 상존했던 나라가 망할려고 작정하지 않는 이상 군사기술로서의 무를 천시하고 탄압할 이유가 없음. 그리고 무를 천시하고 탄압하는데도 무력(武力)이 절대적으로 필요함.
2. 숭문천무(崇文賤武)하면 무술이 발전하지 못 하는가? 글쎄... 애초에 우리가 지금 마주하는 현대무술들 대다수가 숭문천무 시기를 기점으로 <민간 호신술 및 결투술>의 수요가 대중적으로 일어나서 무술시장이 형성되고 그게 발전되서 내려온 경우들이 많음. 오히려 전쟁이 끝나고 군사기술로서의 무의 필요성이 약해지던 시대가 되면 군 격투술 및 무기술이 민간으로 흘러들어가서 민간호신술이나 격투 스포츠화가 될 때 되려 기술들이 크게 발전함. 참고로 이건 중국이나 일본 쪽 무술연구가들이나 무술사 연구가들이 먼저 한 주장들임. 위 댓글에도 나왔지만 일본에서 무술이 천시되던 메이시 유신 시대를 기점으로 오히려 현대 일본 무도가 새롭게 정립되어 발전하는 계기가 됐음.
?우선 제도적으로 고려 시대 무신정변과 같은 군사 쿠데타의 재발을 막기 위해, 군사 지휘권을 가진 무관들을 문관들이 통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음.
또한 문과 합격자는 고위직(정승 등)으로 올라가는 길이 활짝 열려 있었지만, 무과는 진급의 한계가 명확한 경우가 많았음.
그리고 감시장치들도 많았기 때문에 탄압하는 데 그리 어렵진 않았다고 보여짐
실제로 무관들은 여러 방면에서 차별을 느낄 만한 환경에 있었는데
지휘권의 문제로 치면 전시 상황에서 군대를 총괄하는 도원수나 체찰사 같은 최고 지휘관직은 대개 문관이 맡았음. 무관은 실무적인 전투 지휘에 집중하는 구조였고, 계급상으로도 하위직에 몰려있었음. 따라서 애초에 나라 차원에서 무과출신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음
사회적 인식상으로도 가문 내에서는 문과 합격자를 배출하는 것을 훨씬 더 영광스럽게 여겼음. 특히 무과는 왜란 후 과거 선발을 남발하면서 무과 위상은 더 낮아짐. 원래 수가 많아질수록 위상은 낮아지는 법
정확히 말하면 국가 차원에서 탄압하고 천시하되, 필요는 하니 채용은 하겠다. 대신 힘을 주진 않겠다
가 고려 조선 정부의 인식이었음 인식이었지 무를 숭상?글쎄..
군대차원에서의 무술과 민간차원 무술을 명확히 구분하라고 했는데, 대개는 긴밀히 연결돼있음.
애초에 군대 또는 경찰무술로 채택하는 것 자체가 민간에서 어느 정도 인프라가 깔려 실전성을 인정받은 종목을 채택하는 것이고 이건 현대에도 크게 적용됨.
대표적으로 일본 경시청이나 여러 국가 군대에서 유도를 정식 무술로 채택한 배경을 예시로 들 수 있겠음
1.
문관들이 무관들을 통제하는 것과 무를 천시하고 괄시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임.
애초에 무를 천시하고 탄압했다는 것 자체가 사실이 아님.
무를 탄압하는데도 상당한 무력이 필요하는데 이게 모순이라고 안 느껴짐?
고려시대에는 문관들이 군사지휘권을 행사했다고 하고 무관들은 하급관료개념으로 문관에 지배되었다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그렇다면 군사지휘권을 행사할수도 있다는 문관들이라는 사람들이 단순히 글공부나 하고 문약에 빠진 그런식의 교육만 받고 양성된 사람일까?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이지만 선비라는 사람들이 글만 읽고 병서공부나 무예와는 무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엄청난 착각임.
고려시대이후로 지금까지의 관직체제를 본다면 문관이 무관을 다스리는 모양새라는 것은 동일함. 하지만 국방부장관이 참모총장이하 장성들의 상관으로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지고 문관을 존중하고 무관을 비하한다라는 식으로 비판할수 있음?
고려시대의 문무관직간의 관계를 해석하자면 문관은 군사지휘권에서 관리자로 행세하고 무관이라는 존재는 그 아래에서 군대의 실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이라고 봐야 함.
조선시대때 무를 천시하여 임진왜란등의 병란을 당했다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과연 무를 천시해서일까? 국방정책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단순히 숭문천무라는 논리로 비약하는 건 이젠 좀 지양해야 할 문제임.
조선시대에 무를 천시해서 임진왜란의 병화를 당했다라고 평가한다면 오늘날에 와서도 군비축소를 주장하는도 무를 천시하는 발상의 연장선이라고 주장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지.
메이지 정부도 서양을 따라잡기 위한 '근대화'를 우선함. 그 과정에서 무사를 대신해 「교육을 받은 지식인(문관)」이 국가 운영의 주도권을 잡는 체제(숭문) 로 전환해, 봉건적인 무사의 무장 집단을 해체(억무) 해 갔음. 하지만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전통무예에서 현대무도의 전환과 발전이 일어남.
2.
차별이 있었다는 걸 부정하는게 아님.
지금도 어느 분야든 인맥이나 출신에 따른 유리천장은 존재함.
근데, 유리천장이 존재한다는 것과 탄압이나 천시가 존재한다는 건 좀 다른 이야기지.
밑바닥에서 유리천장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는 것도 신분상승임.
무관 양성을 위한 무학(武學)을 별도의 학교로 설립해야 하느냐? 하는 무학별설 문제의 논란이 조선전기와 후기에 있었음. 조선 전기의 경우에는 훈련관(訓練觀)에 병가(兵家)의 공자(孔子)라 일컬어지는 강태공(姜太公)의 사당인 무성왕묘(武成王廟)를 설립하자는 것이었음. 문무병중(文武幷重)의 원칙에 따라, 묘학(廟學)의 구조를 갖춘 성균관과 향교의 제도를 준용하여 훈련관에 무묘를 설립해 훈련관을 명실상부한 무학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주장임. 그러나 별설론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무묘를 별도로 건립하면 공자는 문(文)을 전업으로 하고, 태공은 무(武)를 전업으로 한 것이 돼 문무일체(文武一體)의 도에 맞지 않는다는 반대론에 부딪혀 현실화 되지는 못함.
무학이 창설되는 선조대이후에도 무학 설치령 직후의 성여신과 18세기 중반의 이익 등에 의해 무학별설론이 다시 제기됨. 이것은 선조대에 창설된 무학이 애초 별설론자들이 구상하던 무학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임. 별설론자들이 무학교육의 근본으로 강조하였던 무성왕묘가 설립되지 않은 것임. 대표적인 인물로 유형원은 '문무의 도는 본래 둘이 아니고, 학교도 두 종류가 있을 수 없다'는 무학별설 반대론이 여전히 우세했기 때문임.
이런 논란들을 보면 무가 천시받고 탄압받았다는 건 너무 비약에 가까운 주장임.
차등이나 차별이야 있을 순 있지만 무슨 국가 수준의 천시와 탄압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건 너무 무리수임.
조선의 무인이 천해? 그건 일제 잔재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72082
3.
군대무술은 군인들을 데려다놓고 기존의 무술수련처럼 수년 이상을 진득히 수련하며 소양을 쌓아 가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군대무술 체계에서는 필요한 동작들만을 추려 속성으로 익혀서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지향함. 역설적으로 그게 전략전술적으로 전투력 양성에 불리하기 때문임. 그래서 오히려 기술의 고급화나 고등화가 일어나지 못 함. 크게 필요가 없으니까.
지금 언급한 유도가 무술을 천시하고 탄압했던 메이지 유신 때 가노 지고로가 만든 무술임.
가노 지고로가 유도를 만들고 보급하던 때 일본무술이 어떤 취급을 견디면서 생존과 발전을 모색했는지 알면 이런 소리 못 함.
참고로 가노 지고로는 전통 사무라이에게서 유술을 배운게 아니라, 정골사(正骨師)라 불리던 대체의학자들에게서 유술을 배웠음. 가노의 스승인 정골사는 자신의 진료소 옆의 작은 공간에서 유술을 가르쳤다. 가노는 대련에서 유술 선배를 이기기 어려워 했고, 처음에는 전 스모 선수에게 배운 스모 기술을 사용했지만 효과가 없자 서양의 캐치 레슬링에 관한 책에서 배운 기술들을 사용해서 효과를 보고 유도를 만들 때도 참조함.
게다가 전근대 전쟁상황에서는 근대유도의 기술들은 크게 쓸모가 없음.
만약 전근대 무사가 근대유도를 보면 이걸 전쟁터에서 어떻게 써먹고 병사들에게 어떻게 가르칠거냐고 되려 반문할껄?






1.
문관들이 무관들을 통제하는 것과 무를 천시하고 괄시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임.
애초에 무를 천시하고 탄압했다는 것 자체가 사실이 아님.
무를 탄압하는데도 상당한 무력이 필요하는데 이게 모순이라고 안 느껴짐?
고려시대에는 문관들이 군사지휘권을 행사했다고 하고 무관들은 하급관료개념으로 문관에 지배되었다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그렇다면 군사지휘권을 행사할수도 있다는 문관들이라는 사람들이 단순히 글공부나 하고 문약에 빠진 그런식의 교육만 받고 양성된 사람일까?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도 마찬가지이지만 선비라는 사람들이 글만 읽고 병서공부나 무예와는 무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엄청난 착각임.
고려시대이후로 지금까지의 관직체제를 본다면 문관이 무관을 다스리는 모양새라는 것은 동일함. 하지만 국방부장관이 참모총장이하 장성들의 상관으로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지고 문관을 존중하고 무관을 비하한다라는 식으로 비판할수 있음?
고려시대의 문무관직간의 관계를 해석하자면 문관은 군사지휘권에서 관리자로 행세하고 무관이라는 존재는 그 아래에서 군대의 실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이라고 봐야 함.
조선시대때 무를 천시하여 임진왜란등의 병란을 당했다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과연 무를 천시해서일까? 국방정책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단순히 숭문천무라는 논리로 비약하는 건 이젠 좀 지양해야 할 문제임.
조선시대에 무를 천시해서 임진왜란의 병화를 당했다라고 평가한다면 오늘날에 와서도 군비축소를 주장하는도 무를 천시하는 발상의 연장선이라고 주장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지.
메이지 정부도 서양을 따라잡기 위한 '근대화'를 우선함. 그 과정에서 무사를 대신해 「교육을 받은 지식인(문관)」이 국가 운영의 주도권을 잡는 체제(숭문) 로 전환해, 봉건적인 무사의 무장 집단을 해체(억무) 해 갔음. 하지만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전통무예에서 현대무도의 전환과 발전이 일어남.
2.
차별이 있었다는 걸 부정하는게 아님.
지금도 어느 분야든 인맥이나 출신에 따른 유리천장은 존재함.
근데, 유리천장이 존재한다는 것과 탄압이나 천시가 존재한다는 건 좀 다른 이야기지.
밑바닥에서 유리천장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는 것도 신분상승임.
무관 양성을 위한 무학(武學)을 별도의 학교로 설립해야 하느냐? 하는 무학별설 문제의 논란이 조선전기와 후기에 있었음. 조선 전기의 경우에는 훈련관(訓練觀)에 병가(兵家)의 공자(孔子)라 일컬어지는 강태공(姜太公)의 사당인 무성왕묘(武成王廟)를 설립하자는 것이었음. 문무병중(文武幷重)의 원칙에 따라, 묘학(廟學)의 구조를 갖춘 성균관과 향교의 제도를 준용하여 훈련관에 무묘를 설립해 훈련관을 명실상부한 무학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주장임. 그러나 별설론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무묘를 별도로 건립하면 공자는 문(文)을 전업으로 하고, 태공은 무(武)를 전업으로 한 것이 돼 문무일체(文武一體)의 도에 맞지 않는다는 반대론에 부딪혀 현실화 되지는 못함.
무학이 창설되는 선조대이후에도 무학 설치령 직후의 성여신과 18세기 중반의 이익 등에 의해 무학별설론이 다시 제기됨. 이것은 선조대에 창설된 무학이 애초 별설론자들이 구상하던 무학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임. 별설론자들이 무학교육의 근본으로 강조하였던 무성왕묘가 설립되지 않은 것임. 대표적인 인물로 유형원은 '문무의 도는 본래 둘이 아니고, 학교도 두 종류가 있을 수 없다'는 무학별설 반대론이 여전히 우세했기 때문임.
이런 논란들을 보면 무가 천시받고 탄압받았다는 건 너무 비약에 가까운 주장임.
차등이나 차별이야 있을 순 있지만 무슨 국가 수준의 천시와 탄압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건 너무 무리수임.
조선의 무인이 천해? 그건 일제 잔재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72082
3.
군대무술은 군인들을 데려다놓고 기존의 무술수련처럼 수년 이상을 진득히 수련하며 소양을 쌓아 가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군대무술 체계에서는 필요한 동작들만을 추려 속성으로 익혀서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지향함. 역설적으로 그게 전략전술적으로 전투력 양성에 불리하기 때문임. 그래서 오히려 기술의 고급화나 고등화가 일어나지 못 함. 크게 필요가 없으니까.
지금 언급한 유도가 무술을 천시하고 탄압했던 메이지 유신 때 가노 지고로가 만든 무술임.
가노 지고로가 유도를 만들고 보급하던 때 일본무술이 어떤 취급을 견디면서 생존과 발전을 모색했는지 알면 이런 소리 못 함.
참고로 가노 지고로는 전통 사무라이에게서 유술을 배운게 아니라, 정골사(正骨師)라 불리던 대체의학자들에게서 유술을 배웠음. 가노의 스승인 정골사는 자신의 진료소 옆의 작은 공간에서 유술을 가르쳤다. 가노는 대련에서 유술 선배를 이기기 어려워 했고, 처음에는 전 스모 선수에게 배운 스모 기술을 사용했지만 효과가 없자 서양의 캐치 레슬링에 관한 책에서 배운 기술들을 사용해서 효과를 보고 유도를 만들 때도 참조함.
게다가 전근대 전쟁상황에서는 근대유도의 기술들은 크게 쓸모가 없음.
만약 전근대 무사가 근대유도를 보면 이걸 전쟁터에서 어떻게 써먹고 병사들에게 어떻게 가르칠거냐고 되려 반문할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