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술] 구한말 편쌈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 모음
1. 평양 사람들은 머리에 돌 맞은 상처가 없으면 남자의 치욕으로 여기고, 석전에서 패해 집에 도망쳐오면 어머니가 이를 질책하여 돌려보냈다고 한다.
2. 구한말 시기 석전(편쌈)으로 유명한 곳은 京城(경성, 한양)과 平壤(평양)이다.
3. 이들 지역에서는 수천, 많을 때는 수만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에게 돌을 던지고 마지막엔 짧은 몽둥이(棍棒)로 단병 접전을 하여 진 쪽이 아주 참패를 해야 끝이 났으며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
4. 정월에 들어서 대중이 화제로 삼고 또 열광하는 큰 연중행사는 석전이었으나 京城(한양)의 그것은 석전이라는 말은 당치 않다. 의례히 말하는 사람이 이것을 편싸움이라고 했다.(한양 석전판의 특이성?)
5. 한양 편쌈판의 불문율은 넘어지면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강대(서대문 밖 녹개천 지역)의 매질꾼들은 아주 악질이라 쓰러진 사람한테도 몽둥이를 휘둘러 자주 물의를 빚곤 했다. 실제 한양 편쌈에서 매년 한둘씩 죽어 나간 사람들이 죄다 그런 식으로 죽었다.
6. 성내 매질꾼의 장기는 발차기를 잘 하고 육모를 잘 다룬다는 것이다(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과의 연관성).
7. 성내 매질꾼의 특기는 횡렬 산개로 단체적으로 몰아 들어가는 것이다.(단체로 진을 형성해서 치고 들어간다는 것에서 한양 매질꾼들 중 상당수가 군영 출신임을 짐작 가능)
8. 성내 매질꾼은 미련하지만 힘이 센 강대 매질꾼에 비해 힘에서는 약했지만 몸이 날쌔고 꾀가 많았다(전술적 행동을 벌였다는 묘사인 듯)
출처 : https://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101_0050&fileName=kn_101_0050.pdf
1. 조선 후기(영조 재위기)를 기준으로 가장 규모가 크고 치열한 석전은 평양 지역의 석전이었다.

위의 작자 미상의 그림에 묘사된 평양의 석전에서는 두 패거리들이 막대기를 들고 싸우고 있는데, 후반부의 백병전을 묘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2. 평양은 ‘석전향(石戰鄕)'이라 불릴 정도로 석전이 성행했던 지역이다.
3. 석전을 목격한 구한말의 군인들은 석전에서 사력을 다해 싸우는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군인의 자질이 있다고 말했다.
4. 석전의 후반 봉전에서 사용한 곤봉은 주로 상대편의 머리통(...)을 때리는 데 사용했다.
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07_0030_0030
1. 정월 대보름 서울의 동서남 3대문 밖의 사람들이 두 패가 되어 몽둥이나 돌을 들고 만리현에서 싸움을 벌이는데 이를 변전(邊戰:편싸움)이라 불렀다.
2. 만일 3문밖 사람이 이기면 경기도 지방에 풍년이 오고, 애오개편이 이기면 그 밖의 지방에 풍년이 든다고 했는데 이 싸움에는 용산이나 마포의 불량 청소년들이 작당하여 애오개편을 들었다고 한다.
(아마 도기현 회장님이 언급하신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으로 풍흉을 점치는 행사를 벌였다는 이야기가 여기에서 와전된 것 같음.)
https://ko.wikipedia.org/wiki/%ED%8E%B8%EC%8B%B8%EC%9B%80%EB%86%80%EC%9D%B4
댓글 4
댓글 쓰기의도적으로 죽이거나 병신 만들어 놓고 재수가 없었다, 로 퉁치고 넘어갈 수 있는 수단이었단 말 아녀.
석전에서 패해서 도망쳐 오면 집에서 쫓아냈다는 건 뭐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