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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역사] 본래 편쌈이란 양각법(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과 함께 몽둥이(육모)를 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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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무형유산 결련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과 석전의 상관성 연구 - 김영만, 최종균 -

 

 일종의 무예를 연습하는 것이다, 라는 매일신문(1922)에서 인터뷰를 하였다는 시골 노인의 증언은 사실 역사적으로도 충분히 검증이 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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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척석군(擲石軍)이라는 명칭의, 무려 태조 이성계 시절부터 이어진 유서 깊은 부대가 있었고, 또한 이들이 장기로 삼았던 투석이 조선 중기까지는 엄연히 군사적으로 활용된 기록들이 남아있기 때문임.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활쏘기, 말타기와 더불어 석전을 잘 하는 사람을 뽑아 척석군이라는 부대를 만들어 훈련시켰을 뿐만 아니라 직접 이를 사열하기까지 했고, 이 부대는 세종 때 이르러 재정비 되었는데 세종은 저 척석군 모집을 징병이 아닌 자원(自願)을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는 한편, 척석군들을 조직함에 있어 공상천례(工商賤隷)에 대해서는 호세(戶稅)를 면제하고 양가의 자제를 서용(등용)하라고 교지를 내림.

 

요컨대 척석군을 순수 자원입대자로만 구성시키고, 세금 감면와 같은 특혜를 제공했다는 얘기인데, 흥미로운 건 이 척석군이 굉장히 정예한 부대였다는 사실임.

 

1421년(세종 3) 5월에 세종은 상왕인 태종이 병중인데도 불구하고 석전 구경을 희망하자 종루에서 석전희를 행하였는데, 좌편은 방패군 300명이고, 우편은 척석군 150명이 겨루었음에도 번번이 방패군이 척석군을 이기지 못하자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던지 방패군 측의 무관들이 기병돌격을 벌이기까지 했는데도 역으로 돌과 몽둥이에 얻어맞아 쫓겨나고, 돌격을 한 무관 중 하나는 낙마해서 척석군에게 말까지 빼았기는 참사가 벌어짐.

 

https://youtu.be/ASYrqaLobVQ

 

이에 태종이 석전희를 중지시키고 방패군들을 불러모아서, 너희들은 대체 왜 절반도 안 되는 숫자의 애들한테 자꾸 지냐고 추궁하자(본인 재위 기간에 만들어진 부대이기도 하였으니 더 빡이 쳤을 가능성이 높음) 이에 대한 방패군의 변명이 가관인데,

 

"저녁 놀이 눈부시고, 바람과 티끌이 얼굴에 불어와 돌을 볼 수가 없어서 졌습니다." 라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무려 상왕인 태종 앞에서 꿍얼거림 ㅋㅋㅋ

 

이에 방패군의 변명대로 장소도 바꿔주고, 돌을 던지지 못하게 규칙을 바꿔 몽둥이만 가지고 육박전을 벌이게 하였음에도 방패군이 이기지 못하니까(...) 태종이 "늬들이 정예한 보졸이라더니 죄다 겁장이냐!" 하고 화를 내면서 다음에는 척석군 40명을 뽑아 방패군을 돕도록 하자(340 vs 110) 이번엔 방패군은 모두 도망가고 오직 척석군 40인만 앞장서서 싸웠다 기록됨.

 

여기까지 읽으면 척석군을 상대한 방패군은 무슨 당나라 부대이길래 기병에 투석 금지에, 온갖 어드벤티지란 어드벤티지는 다 줬는데도 2대 1도 발리냐? 싶겠지만 저 방패군이 누구냐?

 


화면 캡처 2024-12-14 123826.png


 

바로 "수박희로 시험하여 선발된 자들로 구성된 부대였음."

 

그러니까 수박희로 용력과 싸움실력을 검증받아 채용되고, 무려 왕실의 행사에 나올 정도로 정예한 부대조차 2대 1로 싸웠는데도 도저히 척석군들의 상대가 안 되어서 왕과 태상왕이 친히 보고 있는 앞이었는데도 런을 쳐야 할 정도로 몰렸다는 이야기임.

 

그리고 이렇게 정예한 척석군들의 사기와 질을 유지하기 위해 세종은 매년 단오 때마다 종루가(鐘樓街)에서 교전(交戰)하도록 하였는데, 비록 조선 후기에 들어 총화기가 널리 보급되어 투석이 군사적 가치를 잃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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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무형유산 결련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과 석전의 상관성 연구 - 김영만, 최종균 -

 

어쩌면 단옷날 지방에선 석전을 벌이고, 한양에선 석전의 상위호환인 편쌈을 벌이는 전통이 구한말까지 이어진 건 척석군으로부터 이어진 편쌈의 전통과, 그 위세에 대한 전승이 구한말까지 꾸준히 내려왔던 결과가 아닐까?

 

잘 읽었다면 추천 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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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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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 척석군 전통이 구한말 편싸움까지 단절없이 잘 전승된 건지는 모르겠음. 왜란 때 백병전의 참담한 실패로 중국, 일본 검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니. 안동 석전꾼들이 맹활약한 기록은 있는데 한양 편쌈꾼이 그렇게 활약했다는 얘기는 없거든. 석전 자체는 잘 전승된 거 같지만 몽둥이 쓰는 봉전(棒戰)이 구한말까지 전해졌냐 하면 장담하기가 어려운 듯. 중간에 한번 단절이 있었고 양란 계기로 다시 부활했을 가능성이 높지.
15:20
24.12.14.
ㅇㅇ 그랬을 가능성도 충분함.

다만 선조가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한양을 버리고 도망친 이유가 이미 당시에 조선 초기 중앙군이었던 오위 체제가 사실상 무너진 것과 다름 없어, 한양에 남은 군사로는 수도방어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란 걸 떠올려 보면 당시 한양에 편재되어 있었을 척석군이(혹은 그 제도가) 제대로 남아 있었는지부터 따져야 하는 레벨인 게 문제인 듯.

그리고 이후에도 활약했다는 말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것도, 근본적으로 병사가 제대로 모이기도 전에 한양이 뚫려 버렸기 때문일 거라...(한양이 초고속으로 먹혔는데 한양 출신 병사들이 활약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니...)

아무튼 가능성은 양쪽을 다 열어두는 게 맞는 것 같음.
15:46
24.12.14.
익명_950896

나는 이것도 좀 회의적인 게 한 번 사라졌다가 부활했다고 하기엔 임란 이후 과거의 전례를 따라서 척석군을 재조직 하였다던가 하는 기록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기록보다는 석전이 사람을 심하게 상하게 만드니 금지한다(덤으로 씨름도) 같은 명령들만 주구장창 나와서...

그리고 조선 후기 들어서 돌을 던지는 것 외에도 몽둥이를 들고 육박전을 벌인다는 편쌈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와 다량의 기록상의 증언들이 나오는 곳이 한양과 평양 이 두 대도시라는 걸 생각해 보면, 중간에 단절이 있었다가 양란 이후 부활했다기보단 원래부터 군영과 같이 군사 문화가 살아있고 지속적인 인구 유입이 있는 공간에서만(평양도 조선 북방군의 주요 거점이었음) 석전에서 몽둥이를 쓰는 봉전(棒戰)이 명맥을 유지했다가 더 정답이 아닐까 싶음.

석전에서 봉전에 대해 언급이 되는 내용들을 보면 스크럼을 짜서 질량으로 상대의 전열을 뚫어버린다던가, 위장 잠입을 하여 상대 마을의 집에 쳐들어가기도 하는 등의 전술적 면모들을 보여주는데 이건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해 보지 않은 민간인들로서는 하기 어려운 행동이고, 매질꾼들 중에서 그런 전술적 행동을 주도하는 일종의 '리더'나 전문적 군사작전을 훈련받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기도 함.

이런 인물들이 모이기 어려운 지방에선 서서히 전문성을 요하고, 신체적 피해를 심하게 입히는 봉전이 사라져 갔지만 도시민들 가운데 군사계층이 유의미하게 존재하는 한양과 평양에선 구한말까지 명맥을 유지했다는 게 더 맞는 것 같다고 봄.

12:23
2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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