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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역사] 최근 오군영과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의 관련성을 탐구중인 윗대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 갤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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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 조선검술러 갤럼이 올려준 글 가운데 흥미로운 논문을 다룬 글이 있어서 나름대로 분석을 해 봤더니 꽤나 재미있는 결과가 나와서 공유해 봄.

 

리스펙을 위한 링크 1 : https://yugakkwon.com/taekkyeon/255310
리스펙을 위한 링크 2(논문) : https://www.riss.kr/link?id=A106904415

 

일단 해당 논문은 1795년 치루어진 중순에서 각 군영별 무예 합격자들을 비교해 본 것으로, 중순은 조선 후기 각 군영의 군사(군관 + 병사)들에게 활쏘기 및 무예[단병접전]를 권장, 습득시키기 위해 실시한 시험이자, 동시에 고된 군역을 감당하고 있는 군사들을 위무하기 위한 행사이기도 했음.

 

이 중순의 특징은 [장용영, 용호영,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초융청, 수어청 등. 중앙의 군영에서만 실시되었고 지방군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인데, 시행 초기에는 1년, 혹은 2년에 한 번씩 실시해 합격자들에게는 포상을 내리는 등, 국란시 조선 왕조 최후의 방패이자 창이 되어줄 군사조직인 오군영 병사들의 정예화와 동기부여를 위해 조선 왕조가 한 노력들 가운데 하나였음.

 

물론 상시 동원중인 중앙군의 규모가 1만을 넘다 보니 합격자들의 숫자도 그만큼 많았던지라 나중에 들어선 조선 왕조의 고질적 문제점이었던 세수 부족 때문에 훈련을 통과해도 포상을 못 받는 등의 문제가 생겨, 2년에 한 번 하던 것이 4년이 되고, 급기야는 8~9년에 한 번 실시가 될까말까 하게 바뀌기는 했지만(...) 일단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구식 군영이 혁파되기 전까지는 나름 꾸준하게 치루어진 행사 겸 중간평가였던 걸로 보임.

 

중순에 대한 설명은 이쯤 하고 이 글의 본론에 대해 들어가 보자면,

 

아래의 그림은 1795년 장용영에서 치루어진 중순과, 시기적 편차는 좀 있지만 각 군영들이 남긴 중순의 기록들을 합친 것으로 군영별로 군사들이 어떤 종목으로 시험에 합격하였는가를 나타내는 표인데

 

흥미로운 것은 [각 군영마다 특장을 보이는 무예들이 있었다]는 사실임.

 

KakaoTalk_20241210_222421939.png

내용 요약
장용영   월도(33.7%), [권법(20.8%)], 쌍검(10.4%), 교전(10.4%)
훈련도감   [권법(47.8%)], 평검(쌍수도의 다른 이름. 47.7%)
용호영   용검(쌍수도의 다른 이름. 47.9%), 월도(40.7%)
금위영   제독검(42.3%), 월도(20.7%)
어영청   제독검(30.2%), 월도(30.2%)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권법 같은 경우 장용영과 훈련도감에서 집중적으로 합격자를 배출하였다는 사실인데, 장용영은 총원 1975명 가운데 430명(21.8%)이 권법으로 중순을 합격하였으며,
[훈련도감]은 총원 3675명 가운데 무려 1799명(47.8%)가 권법으로 중순을 합격함.

 

표를 보면 알겠지만 저 권법 합격자 1799명이라는 숫자는 장용영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군영들(용호영, 금위영, 어영청)의 중순 합격자들의 총합보다도 많은 인원수임.

 

반면 용호영, 금위영, 어영청 등에선 권법을 중순의 시험과목으로 선택한 이들이 전혀 없거나 10명을 넘지 못함을 알 수 있음.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한 분석을 위해선 먼저 각 부대들의 특징과 구성원들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음.

 

[부대 설명]
장용영

훈련도감의 정예부대인 별기군(別技軍) 가운데 특출난 무예실력을 지닌 이들을 추천하여 뽑은 관직이 무예별감인데, 이들 중에서도 무과에까지 합격한 초 엘리트 30여명을 모아 정조가 만든 개인 신변 부대 장용위를 기원으로 함.
이후 장용영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대규모로 조직을 확장해 기존 한양 내부에 위치한 삼군영(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자원을 이속 받고, 둔전을 위해 서울 외부 지평, 양근, 가평, 파주 등에 거주하던 수어청의 군병을 추가로 이속받는 등 독립적인 군영으로서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정조 사후 폐지됨.

[특기할 점으론 군영들 가운데 진법 훈련, 개인 무예 훈련 등이 가장 무예도보통지에 충실한 곳]이었다 함.

훈련도감 오군영을 통틀어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 중앙군으로, 순수 전투인원 5000여명과 그걸 지원하기 위한 병력 300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양반이나 중인, 양인 뿐만이 아니라 천민이나 승려도 군사로 채용될 수 있어 천민들은 훈련도감의 병사가 되는 것을 면천의 기회로 여겼다 함.
무술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소속된 별기군(別技軍) 가운데 각 군영의 무예 교련관이 되거나 왕실의 호위무사가 될 수 있는 무예별감을 추천하여 뽑기도 하였으므로 [타 군영보다 신분제의 영향력이 적은 한편 실력주의적인 기풍이 있던 것으로 보임.] 
한양의 방위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손보고자 하였던 영조 시기에는 지방에서 대규모로 도감군을 모집하여 한때 훈련도감의 구성원들 절반 이상이 지방 출신의 병사들로 이루어졌던 시기도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게 되자 자연스럽게 구성원이 한양 출신들(한양 토박이 + 정착한 군인들의 후손)로 변하게 됨.
조선 후기에 이르러선 반 세습제에 가까운 양상도 나타났으며, 왕십리 인근에서 배추를 재배하는 등 상업적 농업으로 생계를 보태거나 부업으로 상행위에 나서는 등의 활동을 보임.
용호영 무관들로 구성된 금군.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를 합쳐 구성된 군영으로 내삼청, 금군청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총 인원이 700여명 정도였던 데다 궁궐과 사대문을 방위하고, 왕을 호위하는 등의 임무에만 투입되었기에 [군영이기보다는 일종의 근위 호위 부대에 가까웠던 조직.]
금위영 오군영 가운데 가장 늦게 설치된 군영으로, 장기적으로 복무하는 직업군인들로 이루어진 훈련도감이 주는 재정 압박을 완화하고자 훈련도감의 인원 중 일부와 현종 시기 설치된 정초영을 통합하여 만들어진 군영임.
금위영에 속한 병사들은 [지방에서 소집되어 2달 간 근무하는 번상병 제도로 운영]되었으며, 총 병력 편제는 약 1만 7000여명이었으나 번상병 제도의 특징상 최대 편제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상시 복무하는 병력은 625명이 고작이었다고 함.
어영청 인조 시기 후금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국왕의 친위대로 신설되었던 병영.
하지만 숙종 시기에 들어서자 그놈의 예산 문제로(...) 위의 [금위영과 유사하게 지방에서 징병된 병사들이 순번에 따라 근무하는 번상병 제도로 운영]되게 바뀌었으며, 급기야 3년에 한 번 꼴로 징집되어 몇 달 간 한양에서 군역을 지는 식으로 바뀌어 고종 시기에 다다라선 "어영청은 군대도 아니다"는 뜻의  "어영비영"(御營非營)이란 말이 돌았고 이것이 오늘날 일을 흐지부지하게 처리한다는 "어영부영"의 어원이 되었을 정도였던 부대.

 

결론적으로 이와 같이 각 부대 별의 구성원들의 특징을 살펴봤을 때,

 

진짜배기 엘리트 무관들로 구성된 [용호영]의 경우, 별감 직을 역임하던 중인들과 영조 시기 수도 방어 전략을 대규모로 수정하는 과정에서 지방에서 편입된 몰락한 향반 출신의 무관 집안, 그리고 면천을 위해 병사가 된 양인과 천민으로 구성된 하급 군사 계층의 무술이자 문화에 가까웠던 걸로 추정되는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과는 사회/계급적 연결점이 미약]해 권법의 응시자가 전체의 3.3% 밖에 없었다고 추정할 수 있으며.

 

순번이 돌아올 때마다 지방에서 모집된 뒤 단체로 상경해서 일정 기간 동안 군역을 지고 돌아가는 식으로 운영되었던 [금위영] [어영청]의 경우, 한양의 지역 문화/무술에 가까웠던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물리적 접점이 많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함.

 

마찬가지로 위에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중순 시험표에 있는 [수어청][총융청]의 경우도 위에서 언급된 금위영/어영청과 유사한 경우였다 볼 수 있는데,

 

20211210092358129897286.jpg

(수어청의 대장이 병사들을 지휘한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수어청은 남한산성의 방위가 주 목적이었기에 경기 남부를 관할하고 있어 그 [구성원이 한양과 물리적 거리가 있던 군영]이었으며, 이는 북한산성(탕춘대성)을 방위하는 군영이었던 총융청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과의 사회문화적 연관성을 점쳐볼 수 있는 권법의 응시자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결론낼 수 있을 듯함.


애초에 무예 시험의 합격자 자체가 수어청은 14명, 총융청은 53명인 시점에서 말이 중앙군이지 사실상 지방군이었다고 봐야....

 

반대로 [장용영][훈련도감][구성원의 대다수가 한양 출신이었다]는 것이 특징이며 냉병기가 현역이었던 시대에 유달리 [권법]을 무예시험의 과목으로 선택한 합격자가 많았다는 것이 독특한 점으로 [편하고 익숙한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시대를 안 가리고 나타나는 인간 보편적 특성]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무기를 휘두르는 것 만큼이나 상대를 치고, 차고, 던지는 것에 익숙한 것이 조선 후기 한양의 병사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이는 곧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이 한양에서 굉장히 성행하였다는 하나의 증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음.

 

거기다 특히 [훈련도감의 경우엔 지역적 연고까지 더해졌다]고 볼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게

 

군영 위치.png

도성 방위.png

이와 같이 군영의 위치를 기록한 그림과 도성 방위에 있어 훈국(훈련도감)이 담당하였던 지역을 확인하면 [훈련도감의 군영 3개가 모여 있는 위치와 담당하고 있는 작전지역이 서울의 서쪽, 즉 과거에 우대(윗대)로 불리웠던 지역]임을 확인할 수 있음.

 

다시 말해 훈국 병사들의 상당수가 저 우대 지역에 살았다는 이야기이고,

 

4406f429167383333e8e744e4c3bb58b.jpg

 

저 우대 지역이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이 성행했다는 지역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가 잘 아는 송덕기 옹께서 사셨던 서촌이 위치해 있는 걸 생각해 보면 매우 의미심장한 결론이 나오는 게 아닐까?

 

 

제리인사-존중.gif

(대충 잘 읽었으면 개추 박으라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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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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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익명_817813
오군영이 나중에 2군영으로 감축될 때 무위영은 훈련도감, 용호영, 호위청을 합쳐 만들고, 장어영은 어영청, 금위영, 총융청을 합쳐 만들었다는데, 무위영을 위대, 장어영을 아래대로 볼수도 있지 않을까 싶음.
12:40
24.12.11.
사실 군영들이 통폐합되던 1890년대와 본문의 중순이 실시 된 1795년에는 100여년 간의 시간적 공백이 있어서 정말로 그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긴 함.

특히 어영청과 금위영 같은 경우는 평상시 편재된 병사들이 두 군영을 합쳐서 1000여명을 넘을까 말까 하던 군영이라 작전이나 훈련을 훈련도감에서 차출된 병력과 함께 했다고 하니...
15:57
24.12.11.
2등 익명_572676
훈련도감이 아예 윗대 지역을 관할하는 군영이었구만... 그래서 병사들이 다들 택견을 할 줄 알았고, 합격자의 절반도 권법으로 시험을 통과한 건가.
지역적 연고 확실하네.
12:53
24.12.11.
일단 병사와 군관들 가운데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꾼이 많았던 건 확실한 듯.
16:02
24.12.11.

윗대 지역과 훈련도감의 위치가 겹치기 때문에 훈련도감에 택견 수련자가 많았을 거란 의견은 납득되지만, 권법 응시 비율과의 연관성은 좀 지켜볼 문제인 것 같음.

훈련도감 합격자를 보면 권법 말고 쌍수도 역시 거의 절반을 차지하잖아. 굳이 택견이랑 관계없어도 그냥 단순하게 훈련도감에서 쌍수도와 권법이 시험 가성비 종목으로 유행했을 뿐이란 가정도 가능해서 근거로 삼기는 좀 애매한 거 같음.

실제로 링크된 논문의 어영청중순등록 년도별 합격자를 보면 어느 시기에는 쌍수도가 전체 80퍼를 먹을 정도로 대세였다가, 또 다른 시기에는 제독검이 70퍼를 차지하는 등 그냥 유행 따라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물론 권법이 인기 있던 이유가 훈련도감 병사들이 택견에 능숙해서 그런 것일 가능성도 있지만, 반박할 거리가 없진 않다는 거지.

13:48
24.12.11.

ㅇㅇ 본문의 내용도 확정이기보단 일종에 가설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아직 많은 게 부족한 게 맞음.

다만 훈련도감 군영들의 위치 및 주 활동 반경이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이 성행하였다는 서촌을 비롯한 우대 지역과 겹치는 점.

그리고 2인 1조가 아니면 시행하기 어렵다는 권법 시험에 타 군영들과는 달리 상당수의 병사들이 참여하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이 아니었을까 추정 할 수 있을 것 같긴 함.

15:40
24.12.11.
익명_531357

논문 읽어봤는데 권법을 시험쳤다는 그 내용도 과연 무예도보통지의 2인 1조 연무였는지도 좀 애매한 게 팩트인듯.

논문 초입부에서 분명하게 언급되는 무예[단병접전]는 시험관의 주관과 의사가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구절이나, 조선검술러가 올린 글에 나온 것처럼 상부에서 이러저러하게 하라는 전교를 내렸음에도 군영에서 은근슬쩍 씹어버리고 제멋대로 해버린 사례들도 있는지라 윗선(정조)에선 교범인 무예도보통지의 권법을 시험치라고 했지만 군영에선 그냥 평소에 본인들이 하던 택견 경기로 퉁쳐버렸을 가능성도 꽤나 크다고 봄.

무엇보다 기술적으로 보면 택견이 무예도보통지의 태조장권보다 훨씬 실전적인 편이고, 애초에 태조장권은 무예도보통지에서도 무기 쓰기 전에 몸을 만드는 반 체조취급 받는 기법들인데 그걸로 무예 시험을 퉁쳤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잖음.

 

심지어 저 1795년엔 한창 정조가 군제개혁에 박차를 가하던 시점이라 중순 합격자들은 포상까지 받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걸 일개 품새로 떼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좀...

20:59
24.12.11.
익명_430427
윗대 라는게 신한승선생이 송옹과 동시에 문화제 지정받기위해 설정한 구분일뿐이다. 신한승선생을 그렇게 까면서 또 그용어는 서용하네
15:47
24.12.11.

지역 구분입니다. 한양은 옛날부터 상촌(윗대, 웃대, 우대) 하촌(아래대) 등의 명칭으로 지역을 구분해서 부르곤 했어요.

https://museum.seoul.go.kr/www/board/NR_boardView.do?bbsCd=1019&seq=20171006140456335&sso=ok

16:17
24.12.11.
익명_410571
이건 시발 뭔 ㅋㅋㅋㅋㅋ 난독증인 건지 아니면 그냥 하고 싶은 말만 찍 싸고 가는 건지
11:16
24.12.15.
익명_455218

태껸이 선비무예라는 슬로건은 이제 지워야겠네...
근데, 권법 합격자 수가 저렇게 많으면, 별 연관이 없을꺼라고 여기던 권법과 태껸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고민 좀 해봐야겠는걸?

17:41
24.12.11.
송덕기 옹께서 회고하시길 임호 선생은 싸움도 잘 하셨지만 한학에도 조예가 깊으셨다고 하셨으니 문무겸비를 한 사람이 선비의 원형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크게 틀린 말도 아닌 걸로~
18:47
24.12.11.
권법과의 관계는 있기야 있는데 비중이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 권법 합격자 수는 많지만 기술도 빼먹고 의미없이 시늉만 낼 정도로 대충 훈련되고 있다고 무예도보통지에 기록된 점.
2. 태껸 관련 기록과 전승에서 수박과 씨름(각저)은 자주 언급되고 아예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권법은 전혀 언급되지 않음.
3. 송덕기옹께서 무예도보통지 권법편을 직접 보시고는 닮은 게 없다고 말하신 점.

러프하게 추정하자면 수박, 씨름이 80~90%, 권법은 10~20% 정도의 비중이 아닌가 싶음.
14:52
24.12.12.
익명_662501
솔직히 아예 관계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거 같은데...?
어차피 택견이 수박에서 온건 거의 확정이잖음. 조선군이 사실상 고려군에서 그대로 계승된거나 마찬가지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고려때 부터 수행해온 수박이 그대로 이어졌다고 보는게 맞는거 같음.
그리고 외부에서 달랑 책한권 가지고와서 권법이라고 해봤자 기존에 활발히 하고있던거(수박, 택견)를 밀어낼수 있을리가 없다는건 당연한거고, 그 당시에도 무예도보통지 권법을 그냥 체조정도로 생각했다던데 과연 '체조'기술을 자기네들이 원래 하고 자부심마저 있던 '무술'에 굳이 합치려고 시도 했을까? 심지어 자기단련용이 아니라 실제로 싸울때 쓰던거에 굳이 비효율적인 체조를 합치려고 했을까?
솔직히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어보이는데...? 뭐 굳이 가능성을 찾아본다면 택견이나 수박에서 하던 몸풀기 부분 정도에는 도입될 수 있었을거 같긴 함. 어찌되었든 체조 취급이었으니까.
19:30
24.12.12.
익명_245238

원래 형, 카타, 품새는 체조적 성격도 띄는거라서 오늘날 격투계에서 비하적 의미로 쓰이는 '체조'와는 뉘앙스가 좀 다를껄? 통지 권법의 유래가 태조장권인데, 이게 현대 중국전통무술의 기원 중 하나라서 그렇게 비하될 위상은 아님. 그리고 무예도보통지에서도 태조장권 32세를 그대로 행하지 않았고. 이래저래 변형과 재구성을 거친거(태조장권을 그대로 구성한 것이 아니라 갑, 을이 같은 타이밍에 투로를 전개해 상호 공수를 주고받는 구성이 되도록 구성하려 애썼기 때문에 태조장권 상의 자세를 이래저래 변화시킴, 참고로 이런 변형과 재구성에 조선에서 이미 행하고 있던 전통무술들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조심스레 하시는 분들도 있고.)

17:51
24.12.13.
익명_093055
애초에 무예도보통지에 병기를 익히기 전 수족을 원활하게 하고 지체의 힘쓰기를 익히기 위한 것이라고 적혀져 있던거 보면, 이미 그 당시에도 무예도보통지의 권법이 맨손으로 싸우기 위한 기술이라는 인식이 없었다는거나 마찬가지지.
앞에서 체조취급이라고 말한것도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이거 때문이고.
그냥 책에 적혀있는 그대로 무기술 배우기 전에 몸만들기 위해 배우는 체력단련용 체조라고 해석하는게 맞다고 생각함. 그리고 적어도 그 당시에 권법을 싸울때 쓰기 위해서 배우는 사람은 없었을거 같은데;;
또 택견이 무예도보통지에 영향을 끼쳤다는건 설명할 수 있어도 그 반대는 설명이 안되지 않나...?
19:25
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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