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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박치기와 날파람

익명_539660
641 0 19

   태권도 선교회에서 얼마전에 올라온 보고서 일부라네요.

너무 흥미로워서 올려봅니다.

진짜 진짜 궁금합니다/

 

   
 

● 잊혀진 몸짓 '평안도 박치기'
평안도 출신 박치기 고수 하면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이 바로 '이성순'이라는 사람일 것이다. 
'시라소니'라는 별호로 더욱 유명한 이 사람의 행적은 실로 전설과도 같다. 각종 드라마나 영화에서 묘사된 시라소니의 싸움 실력은 가히 상상을 불허하며, 솔직히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의구심마저 들게 만든다.
2, 3미터가 넘는 거리를 날아가 들이받는 기법들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기술 하나하나를 실제로 보고 싶고, 또 너무 궁금했다.
전해진 이야기로는 박치기 실력이 대단하다기보다 원래 싸움의 달인이었던 것이다. 그런 달인에게 박치기라는 무기가 탑재되었으니 그 파괴력은 엄청났을 것 같다.

지금은 과거 고향의 박치기를 기억하는 평안도 태생들은 거의 남아 계시지 않는다. 대부분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 온 후, 고향을 다시 가지 못한 분들이다.
주변의 도움으로 어렵게 만나게 된 분들은 이 전설적인 기술을 세상에 내놓지 못한 아픔을 가지고 계셨다.
7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유명한 주먹들이나 무술인들이 어떻게 소문을 듣고 알음알음 찾아와서 가르침을 구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아픈 과거와 신앙인의 삶을 이유로 다 잊어버렸다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제는 그 아픔에 한 조각 같은 박치기를, 얼마 남지 않은 삶에서 고향의 향수로 기억하며 이야기 해 주셨다.
그리고 우리도 사라진 그 희미한 몸짓을 다시 찾아보고자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 평안도 박치기 이야기
길쌈<길에서 배운 싸움>의 한 종류였던 평안도 박치기의 시작을 이제 와 정확히 찾기는 어렵다.
다만, 이야기나 역사 속에 담긴 내용들로 유추해 볼 때, 그 시작을 아주 먼 고구려까지로 보는 견해도 있는듯하다
당시 고구려의 전투력과 그 위상을 생각한다면, 어떤 싸움 기법을 갖다붙여도 다 소화할 것 같은 뛰어난 전사들이었기에 충분히 가능성 있는 견해라 믿고 싶다.
아무튼, 그런 위대한 고구려의 위상을 마음속 깊이 연모하지만, 이번에 조사한 평안도 박치기의 역사는 지금 보다 조금 가까운 시대에서 찾게 되었다. 

일단 평안도 사람의 기질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평안도는 옛날부터 중국과 교류가 많은 지역으로 사람들의 성품이 진취적이고 대륙적이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평양부의 풍속조에는 팔조지교(八條之敎), 효용웅강(驍勇雄强)이라고 되어있다. 
순후는‘인정이 두터움'을, 부과는 '희떠움'을, 효용웅강은 '남자답고 용감함'을 의미한 듯 표현된다.> 
또 맹호출림(猛虎出林:호랑이가 숲에서 나옴)이라는 비유도 자주 쓰인다.
그만큼 성격은 억세고 용맹했던 것이다. 
재밌는 기록 하나를 꼽자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속기록에 남아 있는 내용으로, 이연호 의원의 발언에 '평안도 사람의 주먹은 흉기다'라고 되어 있다.
당시 평안도 사람들의 호전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는 기록 중에 하나다.

이를 증명하듯 과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평안도 출신의 걸출한 주먹이나 무술인들이 꽤 있었다.
이성순(시라소니), 이화룡, 강창수(나카무라 히데오: 가라데 권도회 창시자)등, 이름이 알려진 이들 외에도 박치기와 주먹으로 전국을 종횡무진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
이런 이유들로 평안도 사람들은 이렇다 라고 정의 할 수는 없지만, 분명 이들의 피속에 남다른 투쟁 본능이 흐르는 건 사실인 것 같다.
평안도 사람들이 싸움에서 박치기를 즐겨 사용하게 된 이유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중 재미있는 몇 가지 설을 소개하면 다음 과 같다.

 

*고구려 때부터 내려오던 몸짓 설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뿌리나 과정은 알 턱이 없다.
과거 막강한 고구려 군사들의 격투 기법 중에 하나가 박치기였고, 그 기술이 이북 사람들의 DNA 속에 깊이 박혀있다는 것. 어디 관련 역사 사료가 있다면 꼭 보고 싶다.


*보부상들의 길쌈 설
평양과 개성에서 활동하던 보부상들이 도적이나 산적들로부터 자신이나 상단을 지키기 위해 시작된 호신술의 일종이라는 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에게 받은 '부보상(보부상이 아닌 부보상이 맞는 표현이라고 한다.)'이라는 이름으로 그 자부심이 높던 집단이었다.
평소 국난이 일어났을 때나 암행어사의 업무에도 투입이 되었다고 하니, 주먹 꽤나 쓰던 이들임에 틀림없다.
이야기는 이렇다. 
주먹으로 치고받고 싸우면 손에 흉터가 남게 된다. 이런 손으로 장사를 허락받기 위해 타 지역의 상무사를 찾아가면 보부상이 아닌 도적이나 산적들로 오인받게 되고 허가가 나지 않는다. 
심지어 평안도에서 온 상단이라고 하면 팔도에 소문난 그 기질로 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주먹보다 초랭이에 가려 그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 박치기를 많이 쓰게 되었다는 것.
또 보부상은 많은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발의 컨디션이 아주 중요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발차기는 피하게 되었다. 
보부상이 지게를 짊어지게 되면, 무게 균형이 약간 앞으로 쏠리게 되는데, 그 자세가 앞으로 뛰어들어가 박치기를 더 잘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왠지 길쌈이라는 단어가 보부상과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평안도 남자들의 길쌈 설
평안도 남자들은 걸음걸이가 빠르고 그 보폭이 넓었다고 한다. 
겨울에 눈이 쌓여 발이 푹푹 빠져도 걸음은 빠르게 걸었다고 하니 평소에는 오죽할까,
그래서 걷다 보면 작은 바람에도 갓이 뒤로 벌러덩 넘어가기 일쑤였다. 또 걸을 때마다 옷소매가 펄럭이는 게 싫어서 뒷짐을 지고 빠르게 걸었다.
그러다 싸움이라도 나면 뒷짐을 지고 있는 자세에서 이미 갓이 넘어가 있는 상태로 뛰어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의 싸움 기술로 자리 잡혔다는 설이다.
재미있는 일화 두 가지를 소개한다.
조선 후기 때 평양 인근 기방에 놀러 온 한양 선비와 평양 선비가 싸움이 났는데, 평양 선비는 이미 갓을 벗어버리고, 한양 선비의 갓을 내려서 얼굴을 가리게 하고 머리로 받았다고 한다. 
이 박치기 한방으로 한양에서 온 선비는 그 자리에서 혼절해 죽어버렸다.

타 지역에서 평양 구경을 온 사람이 길을 가다 갓이 벗겨진 선비를 보게 되었다.
양반으로서의 행실을 지적하면서 갓이 벗겨진 사람에게 갓을 똑바로 쓰라 명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선비는 이렇게 답했다.
"오늘 내 이마로 들이받아 죽일 놈이 있으니 댁은 참견 마시오"
이런 파이터들이 우글 거리는 곳이었다고?
(이 설에는 반대 의견이 있다. 박치기 자체가 갓을 쓰고 다니던 양반들이 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신분이 낮은 천민들의 길쌈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더 많다.)


*석전꾼에서 시작된 설
평안도는 석전으로 유명했다.
마을끼리 돌을 던지며 노는 이 무시무시한 스포츠를 애나 어른이나 심심찮게 즐기는 곳이었다. 심지어 석전판에서 돌에 맞아 생긴 흉터 하나 없는 깨끗한 이마를 가진 남자는 사내 대접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평안도 석전은 무식하게 돌을 한 무더기 가져다 놓고 미친 듯이 던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다양한 기술이 존재했고, 심지어 전문 석전꾼들은 강습을 하거나 타 마을로 용병처럼 불려 가기도 했다.
쌍날리기, 깎음돌, 제비띄우기 같은 기술들은 그 위력이 어마 무시하다.
우리가 어릴 적 강가에서 던지던 물수제비도 석전 훈련의 일종이었단다. 도망가는 상대가 물로 뛰어들었을 때, 물 위로 나온 머리만 맞추는 연습이었다고,
(물위에 떠있는 오리를 사냥하기도 했다는데..)
그만큼 위력적이고 다양한 기술들이 존재하는 평안도 석전판에서도 지켜야 하는 법도가 몇 가지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손에 돌을 쥔 채로 상대를 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심한 부상을 방지하거나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막기 위해, 가까이에 있는 상대에게 돌을 던지는 것도 금했는데, 하물며 손에 돌을 쥐고 상대를 치는 것은 이미 살인을 하고자 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래서 양손에 돌을 들고 있는 손을 쓰지 못하니, 근거리에서 박치기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 
손을 못쓰면 머리로, 뭐든 던지고, 치고,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다.


*유배지에서 오해로 시작된 설
조선시대 때 평안도 희천이나 삭주는 유배지로 소문난 곳이었다.
가깝게는 한양에서부터 멀게는 부산 동래에서까지 유배를 가는 지역이었다.
유배인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굳이 찾아볼 필요가 없다.
신세를 한탄하며 과거를 후회하고, 쌓인 분으로 없는 병까지 생겨 단명하기 쉬운 것이 유배지의 삶이었다.
당시 한양보다 학구열이 낮았던 평안도 유배 지역의 양반들은 한양 같은 곳에서 유배를 온 유배인들과 친분을 맺어서 성리학이나 새로운 학문, 풍습 등을 알고 싶어 했다고 한다.
어느 날, 한양에서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를 온 양반이 있었다. 이 양반은 나름 학문의 깊이가 깊어 평안도까지 소문이 나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 양반에게는 특이한 취미가 한 가지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멀뚱히 서서 집 서까래에 머리를 받는 것이었다.
그걸 본 사람들은 죽으려고 꽝꽝 받는 것도 아니고, 가볍게 통통 받는 것이 혹, 머리를 맑게 하는 한양의 신식 수련법인가 생각했다.
사실 그 양반이 아침부터 서까래에 머리를 받는 것은 헛똑똑이였던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일종의 가벼운 자해였던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은 일종의 건강 수련법 정도로 본 것이다.
이렇게 동네방네 소문이 나서 박치기가 생활 체조처럼 자리를 잡혔다는 이야기이다.
내용만 보면 당시 관서 지방 사람들을 깎아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어느 시점 때의 실상을 담았는지 모르지만, 실학의 한 갈래인 북학파의 고장이며, 기독교의 부흥으로 개화의 선두에 있었던 조선 후기의 관서를 생각할 때, 더 오래전 아니면 그냥 뜬 소문인 것 같다.


*어느 평양감사의 전설
압록강 인근으로 쳐들어오는 북방 오랑캐를 상대하기 위해 고민하던 어느 평양감사의 이야기다. 
군사가 턱없이 부족해서 훈련도 받지 않았고, 무기도 변변치 않는 백성들을 모아서 오랑캐들과 싸우게 되었는데, 감사는 이들을 끌고 나가 싸우자니 눈앞이 깜깜했다.
어느 세월에 무예와 병법을 가르쳐 전쟁에 끌고 나간단 말인가,
하루는 머리도 식힐 겸, 마당을 거닐고 있는데 열린 대문에서 남루하기 짝이 없는 여자아이가 기웃거리는 것이었다.
감사는 그 아이가 가여워 집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종에게 시켜 밥을 차려 주라고 일렀다.
밥을 다 먹은 아이는 마당에 있던 영감에게 와서 감사 인사를 한 뒤 감사에게 물었다.
"무슨 고민이 있으십니까?"
감사는 재밌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해서 여자아이에게 농을 섞어 이렇게 말했다.
"싸움을 잘하는 법을 생각하고 있었단다."
여자아이는 감사의 대답을 듣고,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다음 날, 여자아이가 다시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어떤 늙은이와 함께 찾아왔다.
감사는 속으로 여자아이의 조부인가 보다 생각하고, 이번에도 종을 시켜 두 사람에게 밥상을 차려주라 일렀다.
두 사람은 밥을 다 먹고 감사에게 와서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여자아이가 감사에게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싸움을 잘하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감사는 반신반의하며 늙은이에게 물었다.
"어찌하면 빠른 시간 내에 지금 백성들에게 싸움을 가르쳐서 오랑캐를 상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늙은이가 답했다.
"키가 큰 놈은 머리로 받고, 작은 놈은 무릎으로 올리면 됩니다. 이것을 익히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오래전 조상들은 소뿔이 달린 투구를 쓰고 적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말한 늙은이는 몇 가지 비법을 알려주고 여자아이와 돌아갔다.
감사는 다음 날부터 장정 몇을 뽑아 전해 받은 비법대로 훈련시켰는데, 석 달이 지나니 이들은 여느 장수 못지않은 싸움꾼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몸을 날려 수련을 할 때마다 옷자락에서 바람이는 소리가 나곤 했는데, 후에 이들이 모여 훈련하던 곳을 '날바람터'라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날파람'인가?
후에 평양감사는 여자아이와 늙은이를 찾으려 했으나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 박치기와 날파람
박치기와 함께 평안도 지역에서 전해지는 무술로 여러 사료에 거론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날파람'이라는 무술이다.
날파람 또는 날파름의 어원이 '나는 바람', '바람이 날듯', 평양감사의 전설처럼 '날바람터'에서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날파람에 관한 내용이 언급된 평안도 출신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아래 두 사람이 있다.

 

*고당 조만식 선생
어린 시절의 조만식은 병약하였고, 아버지는 강인한 정신력을 키워주려 노력하였다.
한번은 동네 아이들에게 얻어 맞고 울면서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부친은 그때 울고 온 아들에게 '사내 자식이 창피하게 얻어맞고 다니려거든 밥도 먹지 말거라'하며 벌을 세웠다 한다.
그 뒤 체력을 단련하고 격투기의 일종인 날파람을 호신술로 익히면서 날파람의 명수로 이름을 날렸다.

 

*도산 안창호 선생
춘원 이광수가 쓴 도산 안창호 전기에 도산이 세우고자 한 이상촌의 계획 일부가 나와있는데 이런 내용이다.
"운동장에는 아동 유희장을 부설할 것이요. 부락 전원인 남녀 노소가 다 체육의 이와 낙을 받도록 할 것이다. 체포와 각종 기계 운동도 하려니와 무거운 것 들기, 재주 넘기, 날파람, 태껸, 주먹싸움, 검술, 그네, 널뛰기, 달음박질 등 무릇 체위를 향상하고, 활발하고 모험적인 정신을 기르며, 몸을 보호하는 것과 군인이 되기에 필요한 재주도 배울 것이다. 생략"

위 두 위인 외에도 역사 속에 날파람을 알고 있거나 수련했다.라는 분들이 더 있다.
그럼 정확히 날파람은 무엇일까?
이번 연구와 자료 수집에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다. 그분들 중 세 분의 대화 내용을 정리했다. 
먼저 두 분(선생1/현 93세, 선생2/현 91세)은 일제 강점기 해방 막바지부터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서북청년단에서 잠시 활동한 분들이다.
이 두 분은 어릴 적 고향(평안도)에서 평안도 박치기 또는 날파람을 수련했고, 청년단에서도 여러 사람들에게 기술을 전수받으셨다. 
그리고 또 한 분(선생3/현 70세)은 유명한 날파람꾼으로 알려진 부친에게 젊은 시절 여러 가지 기술을 전수받으셨고, 한때 아버지에게 배운 기술과 본인 개인적으로 수련한 유도 기술로 주먹 세계에 몸을 담으신 적이 있었다.
다른 분들도 더 계시지만, 대화 내용을 공개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분은 이 세 분이 전부다.
그마저도 이 세 분은 이름을 밝히길 원하지 않으셨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대화 속에 들어있다. 
지금부터 박치기, 날파람, 난다리 이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기자: 장로님, 날파람이 정확히 무엇입니까?

◇선생1: 싸움이지. 오래전에 평안도에서 전해지던 싸움인데, 호신으로 익히는 거지.
박치기가 날파람의 기술이야.
평안도 박치기, 평양 박치기라고 얘기하기도 하는데, 그건 날파람에 있는 기술 중에 박치기만 연습한 사람들이 부르던 말이고,

◇선생2: 주먹으로 아구리(턱)도 치고, 발로 턱도 차는 기술도 있는데, 박치기나 무릎으로 올리는게 유명하지.

◇기자: 날파람이 평안도에만 있나요? 황해도나 함경도는 없나요?

◇선생2: 위에도 있는데, 평안도 만큼 유명하지는 않지. 함경도도 전라도처럼 '코부랑깽'이라고 뛰어들어가서 코나 귀를 물어뜯는 기술이 있는데, 이게 무서워. 순식간이야.

◇기자: 물어뜯는다. 잔인하네요. 날파람은 기술이 몇 가지나 전해지나요?

◇선생1: 지역마다 다르지. 서네 가지만 전해지기도 하고 어디는 열 가지 넘게 있기도 하고, 어떤 설명서가 없어. 그냥 이 동네는 뭘 잘하더라. 저 동네는 뭘 잘하더라, 아니면 이 사람은 뭘 잘하더라. 저 사람은 뭘 잘하더라 식이야.
서당에서 애들 모아서 글 가르치듯이, 옛날에는 날파람꾼 하나 불러서 돈주고 아이들 붙여서 가르치고 그랬거든, 호신술이지.
나중에 잘 써먹는 것들은 청년단에서 정리했지.

◇기자: 어디 자료에 보니까. 날파람을 평안도식 택견을 부르는 말이다.라는게 있던데요.

◇선생1: 무슨. 그걸 같다고 보면 안 되지. 내가 어렸을 때도 택견은 말만 들었지 본 적이 별로 없어. 손자가 영상으로 보여줬는데, 잡고 넘기고 하더만, 날파람에는 걸고 넘기거나 잡고 넘기는 게 없다고, 그냥 치는 거야. 발차기도 내가 배운 건 턱 차는 게 다야. 
또, 무속적인 부분도 있고,

◇기자: 이번에 날파람 6가지와 훈련법 3가지를 알게 되었는데요. 이 기술이나 훈련법의 유래가 궁금합니다.

◇선생1: 아까 택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왜정때 왜놈들이 문화를 말살한다고 택견을 못하게 했다며? 그런데 그게 좀 이상해.
택견이 진짜 대단하면 우리가 청년단(서북청년단, YMCA)시절에 그걸 배웠겠지.
근데 싸움에 도움이 안되니까 안했을거 아니냐고,
그리고 왜놈들이 나라를 죽일라고 별 짓을 다 한건 맞는데, 무술을 못하게 해? 그게 말이 되냐고? 그럼 활도 못 쏘게 하고 씨름도 못하게 해야지. 그건 다하는데 택견만 못하게 해?
택견을 진짜 잘하면 펄펄 날아다닌다는데, 그런 사람을 못 봤다고 내가
모르지 진짜 잘하는 사람은 그 당시에 만주에서 독립군이었던지, 저 어디 산에 들어갔겠지.
자, YMCA가 일제 때 들어왔단 말이야.
우리가 당시에 평안청년회, 평남동지회, 혁신청년회 이런 모임들이 모여서 청년단을 시작 한거야.
그때 YMCA에서 시작했는데, 당시에 청년단 시작하기 전에 YMCA에 가면 일본 무술, 권투, 레슬링, 기계체조를 배울 수 있었다고, 청년단 시작되기 전에 거기서 운동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레슬링 하던 황병관씨도 거기서 배웠다고,
청년단이 시작되면서 다들 좌익 때려잡겠다고 주먹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아나?
밥 먹는 시간 빼고는 모여서 권투하고 레슬링 배우고 그랬어.
그때 우리 전통 무술이라고 하는 걸 연습하는 사람을 못 봤다. 그런데 박치기는 하더란 말이야.
날파람 잘한다는 형님들이 있으면 가서 배웠다고, 박치기는 주먹쟁이도 못 막아.
손으로 얼굴을 막고 있으면, 그 막고 있는 손까지 받는데. 박치기는 코뒤(콧등)만 받는게 아니라, 명치, 어깨 다 받는단 말이야.

◇선생2: 이북 출신 중에 택견 한 사람을 못 본거지. 서울은 했겠지.
 우리도 그때는 어렸어. 우리가 흐릿하게 기억하는건 거의 해방이 얼마 안 남았을때라. 
그 이전에는 왜놈들이 못하게 했는지는 모르지. 뒤에 가면서 민심을 잡을려고 조금 풀어줬는지도 몰라. 
이게 옛날에 날파람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편 싸움으로 많이 했거든, 지금 패싸움 말이야.
양편에서 몇이 나와 가지고 발로 위협을 하면서 으름장을 놓는다고, 그러다 갑자기 양편에 숨어 있는 우리 편 애들이 '가자!'하고 소리 지르면 그때 정강이를 딱 차고 그냥 들이받지.
이때는 발로 턱도 차고, 배도 차고, 발을 많이 썼어.
발차기를 잘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맞아서 꼬꾸라진 애들 등을 밟고 공중에 떠서 또 받고 했지.
이렇게 모여서 맨날 패싸움을 하니까, 왜놈 순사들이 가만두냐고,
날파람 꾼들 중에 참 못된 사람들이 많았다. 애들한테 가르치고 저거 패싸움 때 꼭 불러서 앞에 세웠거든


------- 중략 --------


◇선생2: 그 시라소니같은 사람도 YMCA와서 운동할 때가 있었는데, 그럼 동생들에게 박치기 하는 걸 가르쳐 주고 그랬지.

◇선생1: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날파람 기술이 오래전 기술인지, 아니면 그 당시 YMCA에서 권투나 일본 무술 같은 걸 한 사람들이 약간 변화 시켰는지는 몰라.

◇기자: 그럼 서북청년단이 만들어진 기준으로 날파람의 기술 변화가 있겠네요.

◇선생2: 그렇지. 아니 더 전에 YMCA가 1900년대 초에 들어왔는데, 그때 변했을 수도 있지.

◇기자: 이번에 주신 기술에서 멕사리(멱살) 같은 기술은 걸리면 죽겠구나. 싶었습니다.
지금 봐도 전혀 군더더기 없는 기술 같구요.
당시에 명동 사단이나 청년단의 전투력이 왜 엄청났는지 이해가 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경상도에서 불리던 '난다리'도 궁금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난다리'라는 단어는 곧 박치기,라고 할 정도로 일종의 고유명사였거든요.

◇선생1: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80년도쯤에 친한 형님을 여기 초량에서 만났거든, 그때 그 형님 고향이 신의주였는데, 내가 물어봤었다. 난다리가 거기 말이요? 하니까, 아니래.
그럼 어디서 나온 말이요? 하고 물어보니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피난 내려온 이북 사람들이 부산에서 자리 잡겠다고 부산 건달들하고 피 터지게 싸웠거든. 
그때마다 튀어 들어가서 박치기를 하는데, 그게 부산 사람들이 보면 신기했단 말이지.
그러니까 평안도 사람들이 싸울 때마다 부산 사람들이 이랬다는 거야.
'저바라, 이제 난다이. 난다이. 날아 박는다이' 자네도 부산이 고향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또 하나는 오래전에 평안도는 유배지니까 여기 부산 지역 양반들도 죄지으면 평안도로 유배를 보냈단 말이야.
그 사람들이 유배 풀리고 돌아와서 '평안도 사람들은 싸울 때 난다이' 이 말이 난다리가 된 거라고, 그런 말도 있고,

◇기자: 아, 예
표준어로 바꾸면, '저것봐, 이제 날거야.' 그래서 '난다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난다리'로..
재밌네요. 어디서는 '나는 다리' 다리가 날아가듯 한다.에서 나온 표현이라고 하던데요.
피난 때 생긴 거랑 조선시대 때 유배지에서 생긴 거랑 차이가 큰데,

◇선생2: 그것도 말이되네. 난다리라는 말이 경상도에서 많이 쓰거든.
그런데 유배지에서 내려온 말이면 오래도록 썼을 건데, 

◇선생1: 자, 정리하면, 오래전부터 있던 날파람이 청년단이 생기면서 조금 변했고, 또 그게 6/25전쟁 겪으면서 부산으로 피난 간 이북 사람들 때문에 난다리가 생긴거고,
그런게 아닌가 싶다.
시라소니 그 양반한테 싸움을 배운 부산 사람이 몇 있는데, 그 양반들은 다 난다리라고 부르데,
그 양반이 진짜 날아다녔지.
그 양반 말고도 박치기로 유명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기자: 이번에 소개 해주신 그 장로님 아들분에게 나머지 기술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난다리는 지금 수집한게 4개 기술입니다.
확실히 날파람하고 차이가 있었습니다.

◇선생2: 더 세련되겠지. 색도 좀 빠지고,

◇기자: 예, 맞습니다.
예전에 박치기 관련 내용 수집하면서 너무 막연했거든요. 날아가서 받아라. 들어가면서 받고, 나오면서 또 한 번 더 받아라. 따라가면서 따닥 받아라.
이게 말만 들어서는 머리로 상상이 안되더라구요.
근데 이번에 보면서 한 번에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 진짜 되는 기술들이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 중략 --------


◇선생1: 우리가 지금부터 얼마나 더 살겠나? 고향 밟아보는 건 이미 포기했고, 옛날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면서 살생 한 걸 생각하면 그 죗값을 어찌 다 치르겠나 싶고, 지금처럼 예수 못 만나고 은혜 아니면 살 길이 없다.

◇선생2: 회개하면서 사는거지.

◇기자: 네, 저도 생각날 때 마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런데 두 분 정말 정정 하십니다.
관리를 너무 잘하셔서, 백세 때도 이렇게 또 뵈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전에 말씀하신 칼 든 사람하고 싸운 내용도 궁금합니다.

◇선생1: 백살은 가겠지, 
그거는 나도 직접 본 게 아니라 들었거든, 6/25 때 부산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뭐 돈이 있나? 피난민들이 다 힘들지.
그래서 처자식 먹인다고 일을 해야 하는데, 당시에 돈을 많이 주는 게 뱃일이었거든, 전쟁이 끝나고 다시 고향으로 못 가니까, 자리도 잡고 해야 되니까.
배를 타던지, 지금 남포동이나 자갈치 가서 일을 하던지 해야 했단 말이야.
이때 배를 탄 사람들이 거기 일본을 많이 갔거든, 그 항구에는 꼭 그 지역 건달이 있거든, 해방된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 그 왜놈 야쿠자들이 조센징, 조센징하고 시비를 건단 말이다.
그걸 가만히 놔두나? 그것들이 모인 술집에 밤에 가서 다 들이받고 오는 거지.
왜놈들이 조선 사람들 박치기하면 벌벌 떨었다.
그런데, 그 야쿠자들은 칼 들고 다니잖아. 그거 뽑아들고 휘둘러도 소용없다.
정강이 차고, 로켓트처럼 튀어가서 받고 하는데, 왜놈들 똥을 싼다.

◇선생2: 그때 고향 사람들 중에 배탄다고 일본 가서 칼 맞고 온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싸움을 잘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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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이런 실전적인 기술이 어쩌다 사라지게 되었을까요?
지금은 다들 소문만 무성하고, 야인시대 같은 드라마에서는 신비스러운 기술처럼 보여지고, 언제부터 사라졌을까요?

◇선생1: 세상 살기 좋아지면서 없어진 거지. 
요즘 누가 매일같이 이념이니 정치니 하면서 싸움하고 때려죽이고 이런 세상이 아니잖아. 또 박치기 잘한다고 밥을 먹여주나? 싸움질 하다가 신세 망치지.
또 예수 믿으면서 삶이 변화되었는데 더 소용이 없잖아.

◇기자: 전통 무술의 한 형태로 잘 보존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선생2: 그래, 그걸 조장로 아들하고, 이XX씨 아들이 해볼려고 사람들 만나고 다녔잖아.

◇기자: 예, 그 두 분 때문에 정리가 좀 되었습니다.

◇선생2: 택견도 있고, 씨름도 있고 하지만, 맨손 싸움 기술 중에 너무 피를 많이 봤다.
살생을 많이 한 기술이다 이거지. 근대까지, 사라진데 이유가 있을 거다.

◇선생1: 세월이 많이 흘렀고, 사람들 생각도 이제는 많이 바뀌었으니까, 나는 '우리 몸짓'이라는 말이 좋더라고, 

◇선생2: 우리나 이번에 만난 사람들 이름 안나가게 조심하고.

◇기자: 네, 당연하죠.

◇선생1: 어차피 X대표가 사람들한테 이거 가르치면, 부산 사는 누구하면 뻔하잖아, 

◇선생2: 그걸 누가 안다고,

◇기자: 제가 조심하겠습니다. 지금 이 대화 정도는 살짝 공개될 수 있습니다.

◇선생1: 다른 건 찾았나? 방방곡곡을 다니네. 돈 많이 깨졌지?

◇선생2: 또 뭐뭐 찾았나?

◇기자: 네, '동래 야와라'라고 부르던 '꺾기'하구요.

◇선생1: 경상도 꺾기. 재끼기라고도 한다.

◇기자: 네, 맞습니다. 그리고 '개성 접장 검무', 그거 지금 얘기중입니다.
저 궁금한게 날파람 훈련법입니다. 조금씩 해보고 있는데, 어느 정도 해야할지,

◇선생1: 점찍기, 그거 참 많이 했다.
그게 멀리 뛰는 게 아니라, 발이 땅을 차주는 훈련이거든, 멀리 뛸려고 하지 말고 오래 해라. 매일 해야 되는 거라, 나중에는 걸음이 빨라진다.
뛰어 받기는 상대랑 하면 되고, 그거는 옛날에는 모래주머니나 조그만한 포대에 안 쓰는 이불을 넣어서 했는데, 지금은 좋은 운동기구가 많으니까 좋은 걸로 하면 되지.
그래도 점찍기를 많이 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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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시라소니 그분의 싸움을 직접 보신적이 있으시다고,

◇선생2: 몇 번 봤지. 제일 기억에 남는 게 부산 첫 피난 왔을 때, 셋이랑 붙는 거를 봤지.

◇선생2: 내가 그 당시에 18살쯤인가 했는데, 우리는 그 양반하고 겸상도 못했어.
나이 차이가 많이 나잖아.

◇기자: 그 상황이 궁금합니다.

◇선생2: 당시에 부산에 피난 온 평안도 출신 중에 박치기로 유명한 사람들이 몇몇 있었거든, 그중에 키가 작은 양반이 XXX장로야.

◇기자: X선생님 부친이요?

◇선생2: 그래, 키도 작은데 펄펄 날았다고, 이 양반이 날파람 기술을 많이 알고 있었다고, 부산에 피난 온 사람들은 이 양반이 사라소닌줄 알았지.

◇선생1: 우리나 누가 시라소닌지 알아보지, 남들이 어찌 알아.

◇선생2: 그때가 가을인데, 저녁에 친구랑 팥죽 한 그릇 먹자고 가는데, 저기서 싸움이 났다고 구경꾼들이 모인 거야. 사람들 말 들어보니 시라소니가 싸운데,
그래서 궁금하니까, 가보니까 시라소니가 아니고, XXX장로야. 
앞에 세 놈이 서 있더라고, 그 중에 한 놈이 X장로한테 '야 니가 사라소니야?' 물으니까, X장로가 내가 아니고 곧 올 거야, 하는데 진짜가 온 거라,
이씨하고 XX장로는 서로 친했거든, 그래가지고, X장로는 뒤로 빠지고 진짜가 세명 앞으로 걸어가는데, 순간 맨 오른쪽 놈을 뛰어 받기로 받았어. 그리고 가운데 놈한테 뒤로 안기듯이 하면서 머리 뒤로 코를 받더라고, 그런데 맨 왼쪽 있던 놈이 넘어가는 가운데 놈을 지가 안은 거야. 그때 면상이 들어날거아냐, 그걸 주먹으로 치니까 끝났어. 기가 차지. 
그때 이거다 싶어서 X장로하고 시라소니 그 양반 따라다니면서 조금씩 배웠지.

◇기자: 이제는 기술을 알고 들으니 머리로 그려집니다. 그래도 보통 빠르지 않으면 쉽지 않을 텐데요.

◇선생1: 그 양반은 빠르기도 했지만, 머리가 좋아. 싸움을 밥 먹듯이 하니까 판세를 금방 읽거든.

◇선생2: 이때, 이 양반 말고도 시라소니라고 불린 사람이 몇 명 있었다. 다 이북 사람이고 박치기도 하니까, 그런갑다. 한 거지
나는 시라소니보다 X장로님한테 많이 배웠다. 부산에서 같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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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저는 난다리 기술 중에 '걸이'라는 기술이 처음에는 상대와 상대 사이의 '거리'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기술에 걸려서 '걸이'더군요.
이번에 배운 따닥 걸이, 팔꼬방 걸이, 무릎 걸이 같은 기술은 너무 신기했습니다.
이런 명칭은 누가 만든 건가요? 

◇선생1: 그건 기술을 가르쳐 준 사람 때문에 생긴 거지. 처음부터 이 기술 이름은 이거다. 저거다. 하고 가르친 게 아니거든, 이럴 땐 이리 하고, 저럴 땐 저리해라.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술을 기억하고 전수해 주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붙은 거지.

◇기자: 지금은 이 날파람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장로님, 선생님 외에 그 두 분, 또 몇 분이나 계실까요?

◇선생1: 거의 없지 싶다. 저 이북에는 하고 있겠지.

◇기자: 이북이라, 글쎄요. 전에 북한 영화 '평양 날파람' 잠깐 보여 드렸잖아요.
그냥 태권도 같던데요.

◇선생2: 없어. 있어도 다 돌아가셨지.

◇선생1: 또 몰라, 어디 아직 살아 있을지, 옛날에 날파람으로 이름 좀 날린 사람들은 다 평양으로 모였들었거든, 주먹 좀 쓰니까 큰 물에서 놀고 싶을거 아니야,
이건 나보다 더 이전 이야기인데, 평양에 큰 부흥이 일어났거든, 알지?

◇기자: 네, 평양 대부흥 말씀이시죠? 장대현 교회에서,

◇선생2: 그래, 장대현 교회

◇선생1: 이때 평양이 난리가 났다. 여기저기서 회개하고 예수믿고, 난리가 났다고, 이때 정말 많은 싸움꾼들이, 어, 저 날파람꾼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실력 좋은 사람들이 다 날파람을 그만뒀단 말이다.
이기풍, 길선주, 조만식 선생 다 알아주는 싸움꾼들이었잖아.
나도 어릴 때 들었지만, 이기풍 목사 같은 양반은, 하루 밥 세 끼에 싸움 네 끼였다 했다고, 

◇선생2: 조만식 선생은 예수 믿기 전에 돈 빌려 쓰고 안 갚는 거 찾아가서 두들려 패고 받아 오고 했다는데, 그 당시 날파람은 무속적인 훈련도 있었다더라고, 예수 믿는데 그걸 할 수 있나 못하지.

◇선생1: 저, 저 길선주 목사, 서양 선교사 키가 얼마나 커, 그걸 한 번에 뛰어 넘고 했던 사람이야. 저 선도를 해서 공부가 깊었다고, 교회에서 한국선교 배워줘서 알잖아.

◇기자: 네, 사실 그걸로 시작한 거니까요.

◇선생1: 그래, 선교역사하고 물리는 부분도 있고, 그러니까 우리가 X대표를 만났지. 뭐 무술단체니 뭐니 그런 거였으면 볼 일이 없지.

◇기자: 네, 맞습니다. 저도 우리 몸짓이라는 제목으로 시작은 했지만, 한국 선교 역사의 한 부분과 박치기 이야기가 이렇게 연결되리라 생각은 전혀 못했거든요.
지금 태권도 선교팀하고 프로그램 연구를 하면서 원래 목적은 태권도를 이용한 호신술을 좀 더 탄탄하게 만들거나, 품세를 현실에 맞게 풀어서 태권도 발전에 도움도 되고, 태권도 선교에도 도움이 되어보자 거든요.

◇선생1: 그리고 뒤에는 또, 여러 가지 사건 있잖아. 같은 동포 한테 그게 무슨 짓이야. 지금 생각해도 바보 같은 놈들, 그게 애국인줄 알았다고, 그때 그걸 겪고 자신이 한 짓을 후회하면서 많이 떠났지. 우리도 그렇게 떠났고,
내가 봤을 때는 그렇게 날파름은 없어진거야.

◇선생2: 죄지, 큰 죄인이지. 이제 이 세대가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잘 이끌어 가야지.
X대표는 태권도는 안했다 했지?

◇기자: 네, 저는 태권도는 배운적이 없습니다. 저는 선교팀에서 다른 걸 가르쳐서,

◇선생1: 태권도가 우리 무술이지. 무술인데, 그 뿌리나 그 모습을 보면 일본 무술 색이 너무 들어가 있잖아. 어쩔 수 없는 사실이고,

◇선생2: 태권도에 박치기를 섞으면 되겠네, 택견에도 박치기가 있나?

◇기자: 택견에도 박치기 기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날파람처럼 다양하지는 않구요.
전에 XXX장로님 아드님이 하신 말씀 중에 일본 유도도 연구를 많이 했다고 들었거든요.

◇선생1: 일본 유도는 쎄다. 그건 잡히면 끝난다고, 그래서 유도좀 배운 사람들을 불러서 기술도 배우고, 또 어째야 방어도 하는지, 이런 연구를 많이 했다.

◇선생2: 그래서 그때 보면, 유도, 레슬링 잘하는 사람은 날리는 주먹이나 발차기는 그냥 잡아서 던져버려, 그게 참 빨라. 그래서 유도나 레슬링 하는 사람하고 싸울때는 주먹이나 발보다 팔꼬방(팔꿈치)이나 무릎을 써야된다. 그거는 잡기가 힘들거든.
그 XXX장로, 시라소니랑 친했던 그 양반이 가르쳐준게 있는데, 멕사리(멱살)가 잡히면 이미 끝나, 그러니까 잡으로 손이 오면 그거 살짝 보내고 바로 받으라더라고, 잡히고 난뒤에 받지 말고, 

◇기자: 아, 그럼 반응이 빨라야 겠네요. 

◇선생1: 싸움꾼은 항상 몸이 준비되어 있어야지. XXX장로, 이XX, 이 두 사람이 진짜 날파람 달인이지.

◇선생2: X장로님은 키도 작은데, 대단했지.

◇선생1: X장로말고 남해 사람 하나 있잖아. 배타던 사람. 서북 출신이 아닌데, 잘했지.

◇선생2: 아, 그래요. 그 양반도 박치기로 유명했지. 일본가서 야쿠자들 때려잡고 했잖아.

◇기자: 아, 그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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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전에 옛날 날파람꾼들은 속보 훈련을 많이 했다고 하셨거든요. 일종의 하체 훈련으로 생각하면 됩니까?  

◇선생1: 옛날 보부상들 걸음법인데, 이걸 보고 축지법이니 뭐니 하긴했다. 그냥 속보야. 빨리 걷는 방법인데, 

◇기자: 그와 비슷한게 점찍기 훈련 같은 거죠. 그걸 많이 해도 도움이 된다고 하셔서,

◇선생1: 그래, 도움 되지.

◇기자: 그리고,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고민 중인 그 기술을 어디에 넣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꺾기나 재끼기로 분류를 해야 하는지, 날파람이나 난다리 기술로 봐야 하는지,

◇선생2: 뭐, 어떤거?

◇기자: 순간 손목 꺾는 기법 말입니다. 제가 아는 거랑 비슷하다고 말씀드린,

◇선생2: 아, 그거, 그거는 애매해. X장로가 그걸 누구한테 배웠는지 모르겠는데, 날파람에는 못 본 것 같거든, 오래전에 유도하는 사람한테 배웠는지 알 턱이 있나.

◇선생1: 유도에 그런 기술이 없다. X장로가 일본 애들한테 그걸 배웠을 리가 없잖아. 

◇기자: 전에 제가 영상을 보여드린 거 기억하시죠? 인도네시아 무술이라고, 실라트, 거기에 똑같은 기술이 나오거든요. 신기했습니다.
뭐, 무술이라는게 연구하다보면 겹치는 기술들이 당연히 있게 마련인데, 너무 비슷해서.

◇선생1: X장로가 인도네시아가서 배워 왔을리는 없고, 어디 도사한테 배웠는지, 우리도 그 뿌리는 몰라. 한번 연구해봐라.

◇기자: 쉽지 않겠는데요. 지금 그 기술은 제가 배운지 좀 되었거든요. 같이 연습하는 사람들하고 해봤는데, 다들 신기해 하더라구요. 대부분 의견이 일본 합기에서 온 기술 같다고 하고, 합기도가 관절기를 많이 하니까요.

◇선생1: 근데, X장로가 그걸 보여주고, 가르치고 할 당시에 합기도라는 무술이 없었거든, 나는 기억이 안나.

◇선생2: 나도 그거는 뒤에 봤지 싶다.

◇선생1: 그래서 그 기술은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를 못하네, 뿌리를 모르니,

◇기자: 네, 일단 그러고 있습니다. 

◇선생1: 거기 택견 하는 사람한테 물어보지. 거기는 그런거 없나?

◇기자: 꺾는 기술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쪽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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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예전에 얘기 하신 내용 중에, 80년도, 박치기를 엄청 잘하시는 분이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선생2: 아, 그래, 그 한국에서 올림픽 할 때, 그때 찾아왔었지. 

◇기자: 그 분 얘기 좀 해주세요.

◇선생1: 누구?

◇선생2: 아, 그 왜, 공수부대 있었던, 태권도 잘하는 사람 있잖아요. X장로 아들하고 날파람 같이 공부하고 했지.

◇선생1: 아, 그래, 그래, 그 친구는 진짜 무술인이지. 

◇선생2: 그 양반이 태권도를 잘 해가지고 공수부대원이 된거거든, 그래가지고 나중에 광주사태 있잖아, 들어봤지? 

◇기자: 네, 잘 알죠.

◇선생2: 그래, 거기에 간거라, 공수부대가 가서 얼마나 죽였냐 말이야.
그래서 거기 가서 그 참상을 보고, 그만 제대 해버렸어. 그리고 태권도 도장을 하는데, 자기 아버지가 부산에 있는 X장로 한테 가서 박치기를 배워라. 그러면 태권도 실력도 늘고, 더 좋지 않겠냐, 한거야.
그런데 X장로님은 그때 나이도 있고 하니까, 아들한테 얘기 한거지.
그래가지고, 그 친구하고 X장로 아들하고 같이 연구를 많이 했다고, 나중에 물어봐라.

◇선생1: 우리도 자주 만났지.

◇선생2: 그래, 우리도 자주 봤는데, 사람이 열정이 있어. 뭔가 이렇게 숨어있는 기술들, 우리 전통 호신술 같은 걸 많이 찾아 다니더라고,
얘기를 가만 들어보니, 그 양반 조부가 평안도 강서 출신인데, 날파람을 잘했다는 거야. 그래서 어릴 때, 할아버지 한테도 배우고, 아버지 한테도 배우고 했데,
그래서 뭘 아는고 보니, '날 씌우기' 같은 걸 하더라고, 그런데 주먹 쓰는게 희한해.
나도 못보던 거라, 가볍게 툭 치는 것 같은데, 이게 맞으면 이 다음에 운신을 못해.
참, 그래서 그건 어디서 배웠냐, 했더니 조부가 일러줬다 그래, 

◇기자: 아, 네, 저도 방법은 들었습니다.

◇선생2: 그래, 그게 그렇게 위력이 있더라고,

◇기자: 그럼 그 태권도 하시던 분의 부친이 X장로님하고 아시던 분인거죠?

◇선생2: 그래, 6/25때 전쟁에서 같은 부대에서 알게 된거라, 

◇선생1: 그랬다가 그 이산가족에서 만났나 그래,

◇선생2: 맞다, 왜 그 옛날에 이산가족 찾아주고 하는 거 했잖아, 거기서 어찌 다시 만나게 됐다. 나도 그리 기억한다.

◇기자: 아, 가족도 아닌데 이산가족에서 찾으실 정도면, 그분 실력이 좋으셨다고,

◇선생2: 잘했다. 펄펄 날았지. 태권도 하니까 발 잘쓰지, 주먹도 잘쓰지, 거기다 박치기도 잘하니까, 뭐 옛날 시라소니 딱 그 양반 같지.
그런데 일찍 갔어, 그게 안타깝지.

◇기자: 네, 사고로, 참, 수련한다고 결혼도 안하셨다고 들었거든요. 아, 그 영감님 얘기도 다시 한번 해주세요.

◇선생2: 아, 정씨, 그 양반 참 재밌어. 장로님, 정씨 영감님 기억나요?

◇선생1: 아, 나고말고, 오래 살았다. 백살 넘게 살았잖아.

◇기자: 두 분도 그렇게 사실 겁니다.

◇선생2: 무슨, 

◇기자: 그 정씨라는 영감님은 고향이 어디셨어요?

◇선생1: 그 영감은 평양이야, 나랑 살던 동네에서 그리 안멀어.

◇선생2: 그 영감은 도 닦던 사람이라, 자기 말로는 더 살려면 더 살 수 있는데, 귀찮다고, 힘도 어찌나 좋고, 몸도 날랜지. 
90먹은 영감이 길을 걸으면 발이 빨라서 젊은 애들이 못 따라가, 쭉쭉 나간다고,
키도 작은 영감이 몸무게도 얼마 안나가, 그런데 어찌나 빠른지, 정강이를 차고, 사람 가슴을 머리로 받는데, 순식간이야.

◇선생1: 그때가 언젠고, 젊은 애들 두 놈인가, 영감집 담벼락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영감이 저리가서 피라고 호통을 쳤어, 근데 이 놈들이 영감한테 대들었는데, 한 놈은 불알을 차뻐리고 한 놈은 명치를 받아 버린거라,
그때 동네 사람들이 많이 봤지, 그때가 90먹기 직전이라, 참, 그런 걸 어디서 보냐고, 

◇기자: 도인 맞으시네요. 얼마나 훈련을 하셔야 가능할까요?

◇선생1: 평생 했지.

◇선생2: 그 정씨 영감 아들도 잘했지. 영감 돌아가시고 그 자식들은 외국으로 이민 갔거든,

◇기자: 과거 고향분들하고 모임은 하십니까?

◇선생1: 아니, 안 한 지 오래됐지. 거의 다 돌아가셨고,

◇기자: 저 긍금한게, 전에 경북에서 뵌 분이 얘기해 주신 건데, 옛날 날파람에 무기를 쓰는 법이 있었다고 하셨거든요.

◇산생1: 접장이 하던거?

◇선생2: 아니, 그거는 보부상이 하던 칼춤이고, 왜 옛날에 방망이도 쓰던거,

◇선생1: 함경도 육모방망이, 그거?

◇기자: 네, 그 육모방망이 얘기도 하셨습니다.

◇선생1: 그거는 날파람에 있던 건지, 날파람 하던 건달들이 가지고 다닌 건지 알 수 없다.

◇선생2: 옛날에 날파람꾼들 중에는 건달이 많았거든, 그러니까 육모방망이하고 도끼 같은 거 많이 들고 다녔다고 해. 그거 얘기하는 거지.
석전도 많이 하니까 돌멩이도 가지고 다니고,
또, 옛날 박치기 잘하는 사람은 육모라는 말을 쓰는데, 한 곳으로만 받는 게 아니라, 여섯 모서리로 받는다고, 육모 방망이처럼 머리를 그렇게 쓰는 거지,

◇기자: 아, 육모가 그런 뜻도 있습니까,
그리고 육모 방망이 관련 내용은, 원래 날파람에서 하던건지는 모르네요.

◇선생1: 그건 몰라. 함경도 애들이 육모를 잘 썼다.

◇기자: 네, 한 가지 더 신기한 게 있습니다. 박치기를 훈련하셨던 분들 중에 그 장로님도 그렇고, 정영감님, 이XX선생님, 또 그 외 다른 분들중에 머리가 아프시거나 뇌 이상 오신분이 없으시더라구요.  

◇선생1: 그래서 훈련이 중요하지. 옛날 레슬링처럼 머리로 머리를 받으면 골이 상하지. 그건 나이 먹고 골병든다.
받는 위치도 알아야 하고, 체중도 실어야 하거든, 그런 게 준비 안 되면 좋은 기술을 배워도 안 통해.

◇선생2: 옛날 어른들이 우스갯소리로 그런 얘기를 많이 했거든, 이북 사람은 머리가 굵어서 잘 받고, 서울 있는 중간지역은 다리가 길어서 발을 잘 쓰고, 그 밑에 남쪽에는 팔뚝 힘이 좋아서 씨름을 잘한다고, 그런 얘기 많이 했다고,

◇기자: 아, 재밌네요. 

◇선생1: 그런 말이 있었어?

◇선생2: 가끔 들었어요. 어른들이 많이 했는데, 왜
이게 뛰어 들어가서 받는 거는 젊을 때는 잘 되는데, 나이 먹고 몇 미터씩 튀는 거는 안되지, 또 그게 머리도 다칠 수 있고, 날파람에 박치기만 있는 게 아니잖아. 주먹으로 치고, 팔굽 쓰고, 무릎 쓰고, 그 상황에 맞는 걸 그때그때 잘 쓰는 게 달인이지.
저기, 정영감처럼 도가 튼 사람은 뛰어 받을 일도 없어.

◇기자: 발차기, 박치기, 주먹이나 씨름, 이런 기술이 다 모이면 좋겠습니다.
 아마 최고의 종합 무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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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어른 들이 아직 정정 하십니다. 기운도 좋으시고,

◇선생3: 젊은 시절 날파람 해서 건강하신 거지. 점찍기도 많이 하셔서 다리 힘도 아직 좋으시고. 나도 옛날에 날파람 기술 찾아볼 거라고 한참 돌아다니면서 여럿 만나봤는데, 아버지 소개로도 보고, 그중에 그래도 박치기나 난다리를 제일 많이 기억하시 분은 그 두 분일 거라, 지금 생존해 계신 분 중에서, 아버지 돌아가시고, 이XX씨 아버지도 돌아가신 후에는 무술 좀 한다는 사람들이 그 두 분을 많이 찾았지.
프로레슬링 하는 사람도 박치기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고 했으니까,

◇기자: 이번에 저도 놀라웠던 게, 그런 명성에 비해서 잘 알려지지 않으신 분들이 많더라구요. 지금 아무리 찾아봐도 날파람을 할 줄 아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대한민국 어디서도 구할 수가 없거든요.

◇선생3: 이북에서 전해지던 무술이잖아요. 또 그걸로 유명한 사람들이 과거 청년단에 많이 있었고, 그 양반들 중에 실력 있는 분들이 신앙을 가지면서 자연스럽게 묻힌 거지.
드러내지를 않으니까, 또 무속적인 부분도 있었고,
그런 걸 가르쳐서 무슨 이익을 바라거나 하신 적도 없고, 뭐 무술 협회 같은 거 만들어서, 또 저걸 이용해서 건달 생활을 하신 것도 아니고, 나는 젊었을 때 잠시 그런 길로 빠졌었지만, 하나님을 늦게 만났지.
아버지하고 이XX선생 살아계실 때는 그 두 분하고 예전에 자주 만나서 연습도 하고 했어요.
나중에는 나하고 이선생 아들, 그 양반하고 훈련을 많이 했고, 우리 둘이는 그런 협회 같은 걸 해보고 싶었거든, 사실.

◇기자: 네, 그래서 자료 수집을 많이 다니셨잖아요.

◇기자: 이 선생님하고 돌아가신 X관장님하고 의견이 안 맞으신거죠?

◇선생3: 그렇죠. 이형은 저기 택견이랑 기술 교류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었고, X관장은 뭐 당연히 태권도고, 둘 다 의견이 있는데, X대표도 이번에 직접 몸으로 해봐서 알겠지만, 박치기 기술들이 빠르고 파괴력도 크잖아요.

◇기자: 네, 이번에 같이 기술 훈련하신 분들 중에 태권도는 5단부터 9단까지 계시고, 복싱, 주짓수 같은 경우에는 경력 20년 차도 계시는데, 다들 놀랬죠.

◇선생3: 그러니까요. 이형은 난다리가 아니라, 날파람으로 봤을 때, 그 역사적 흐름이 택견과 결이 비슷하다 하신거고, X관장은 속도나 파괴력, 실전성만 보면 태권도와 어울린다. 한 거지.
당시에 날파람이나 박치기 기술들 찾는 무술 단체가 많았거든.
아 거기도 있었다. 수박이라고 전통 무술 하시는 분이 있었어요.

◇기자: 수박은 옛날 우리 역사에 나오는 거 아닙니까? 전통 무예 얘기하다보면 꼭 나오잖아요.

◇선생3: 아버지가 어디서 우연히 보셨나봐, 이름이 수박인지는 모르겠는데 옛날에 고향에서 비슷한 걸 본 기억이 있다 하시더라고, 그래서 고향 사람인가 싶어서 한번 얘기나 해보까 하셨는데, 연세도 많고, 몸도 안 좋아지시고 하니까, 뭐 그렇게 지나갔지.

◇선생3: 그러다가, 나도 사업도 하고 가족도 건사해야 하고 하다 보니, 포기했지.
그리고 X장로님이 남들한테 가르치지 마라, 당부도 하시고, 이제는 너희들끼리나 기억하지, 사람들이 알면 또 힘든 과거 이야기가 나오니까,

◇기자: 과거가 참, 쉽게 잊을 수 있는 게 아니니,

◇선생3: 재밌는 게 나하고, 저 이형은 아들이 없고 둘 다 딸들만 있잖아,참, 지금은 외손자들이 커서 가끔 물어보는데, 딸들이 좋아하나,
우짜다가 이게 이렇게 말도 못 하고 쉬쉬하는 기술이 돼버린 건지.
그러니까 우짜노, 하나님 뜻인가 보다 했지. 
우리도 저 택견처럼 그 뭐고, 전통 무예, 협회 이런 거 신청하려고 했으면 벌써 했지. 그런데 시도도 안 했단 말이야.
사실 어른들이 다 반대했지. 기능 보유자들이 나서야 되는데, 그분들이 다 안 한다고 하니, 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니, 별 수 있나,

◇기자: 아마 속 사정을 모르고 사람들이 봤을 때는 뭔가 비밀리에 전해오는 비전 무술, 뭐 그런 느낌이 날 수도 있겠네요. 비밀스러운 집안 무예, 뭐 그런 거처럼,

◇선생3: 그럴 의도도 없었고,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닌데, 어떤 상황들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지. 비밀은 맞지.
그동안 공개를 안 했으니, 하긴 뭘 알아야 찾아오지. 옛날에는 어찌 살아계신 분들 소개 소개로 어찌어찌 찾아왔다 치지마는 그마저도 다 돌려보냈으니, 그 뒤로 뭔가 연결 고리가 없잖아. 이제는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르지.

◇선생3: 이런 이야기도 있었는데, 옛날에 평양에 온 외국인 선교사들이 날파람 같은 평안도 사람들 싸움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나 보더라고, 너무 잔인한 거지.
지금 씨름이나 택견은 서로 안 다치게 시합으로 가능하잖아. 근데 이건(날파람 종류) 어떤 스포츠라기 보다 급소만 치고, 어찌 되었든 상대를 골병 나게 해야 하니까, 거기다 패싸움처럼 할 때는 사람이 죽어나가고, 아예 근절을 시키려고 했다더라고,
얘기 들어보면 부적도 가지고 다니고, 어떤 주술적인 훈련도 있고 하니,
그 뒤에 공산당도 사람들이 모이는게 위협이 될 수 있으니 날파람을 못하게 했다고 하데,

◇기자: 아, 선교사들 입장에서, 네, 이해가 되네요. 북한도 그런 모임이 불안했겠죠.
.....이번에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친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옛날에는 가르치는 것도 잘 하셨다고 얘기 들었습니다. 훈련법부터 기술까지 다양하게 연구를 하셨다고 하셔서요. 부친께 배운 박치기 기술 중에 가장 기본은 뭐가 있을까요?

◇선생3: 모르는 사람들은 박치기에 무슨 기술이 있나 하거든, 그냥 받으면 된다 이거야.
그럼 주먹도 그냥 치면 되지 권투는 왜 해, 더 과학적으로 치려고 배우는 거잖아, 발차기도 그냥 하면 되는데, 태권도를 왜 하냐고, 박치기나 날파람도 그런 거지. 
우리 아버지는 머리로 머리를 받으면 안 된다고 하셨지. 그러면 뇌에도 충격이 크게 오거든, 안 좋다고, 그래서 턱이나 코를 많이 노리지.
앞쪽 좌우 모서리, 측면 모서리, 뒷면 모서리를 잘 이용해야 되는데, 연습을 많이 해야 돼요. 육모 단련이라고 하잖아.
큰 나무 같은 걸 잡고 박치기 연습을 하라는 사람들이 있던데, 그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뇌가 버티나? 못 버티지.
전에도 알려줬지만, 가볍게 스치듯이 받는 걸 먼저 해야 돼요.
옛날에 우리 아버지는 처음 박치기 배울 때 손가락 끝으로 모서리를 치면서 시작하셨거든,
해봤잖아.

◇기자: 네, 그거 은근히 아프던데요. 

◇선생3: 그러니까, 처음에는 톡톡 치듯이 해야 되지. 다른 데는 치지 말고, 알려준 거기만 치라고, 머리를 단련한다는 건, 주먹을 단련하는 거랑 다르거든, 세게 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서두르면 안 되는기라,
그거 하면서 목 근육도 단련하고, 스냅으로 받는 기술은 체중 이동이 생명인데, 그게 잘 되려면, 먼저 유연해야 된다고,
그리고 모서리, 턱 걸이, 따닥 걸이를 같이 해주면 금방 늘지.
옛날에 어른들은 누가 박치기 기술 배우고 싶다면 그냥 가르쳐 줬어요. 그런데 훈련법은 절대 가르치지 말라고 했지.
그래서 기술만 배우고 간 사람은 뇌에 문제가 와서 골병이 들었고, 왜 펀치 드렁크 있잖아.
평안도식 박치기 기술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기술만 아느냐, 훈련법도 같이 아느냐만 보면 돼요.
그런데 이런 게 있다 라고 동작만 보존할 거면 머리 단련은 안 해도 될낀데,

◇기자: 그 단련법도 보존해야죠. 그냥 알고 있는 것보다, 해 본 거랑은 다르거든요.
몇 개월간 어르신들 만나고, 조사하면서 느낀 게, 날파람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유독 부산이나 이쪽 경남 쪽에 많이 계시네요. 당시 한국 전쟁 때 많이 내려오신 거죠?

◇선생3: 그렇지, 같이 내려왔던지, 아니면 가족들만 피난 보내놓고, 본인은 전쟁터에 있다가 다시 오던지 그랬지.

◇기자: 장로님도 그런 케이스죠?

◇선생3: 맞아요. 우리 아버지도 가족들은 부산에 보내놓고 전쟁통에 계시다가 나중에 합쳤지. 나는 아버지가 40에 본 막내라, 그래도 전쟁 끝나고 태어났거든,
그리고 텃새라는 게 있잖아. 전국 팔도 사람들이 여기 다 내려와 있는데, 얼마나 정신이 없겠노, 묵고 살라면 맨날 싸우는 거지.
당시에 평안도 출신 중에 어린 사람들은 뭐 상관이 없지만, 처자식 딸린 사람은 전쟁이 끝났다고 이리저리 이사를 막 다니기 싶나, 그냥 눌러 사는 거지.

◇기자: 아버님, 저 장로님 얘기 들어보면, 일본에서도 찾아 올 정도로 대단 했다고 하시던데요.

◇선생3: 사람들이 자꾸 시라소니 아니냐고, 아니라고 해도, 저거들끼리 맞다 맞다 하고 그랬지. 일본에 가라데 하는 사람도 찾아오고, 뭐 다양하게 아버지한테 배운다고 왔는데, 아버지가 기억이 안 난다고 사람들을 피해 다녔지.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거든, 같은 가라데라도 한국 사람이 하는 거랑 일본 사람이 하는 거랑 다르다 그래. 그래서 무슨 말인가 물어보니까,
일본 애들의 격투 정신은 사무라이 정신이야, 길거리 보다 도장에서 하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거야. 기술 전수에 일단 집중한다 이거지.
그런데 한국 사람은 도장 밖에 상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연습한다는 거지.
당장 싸움판에 써먹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거야.
그래서 한국 사람이 싸움을 더 잘한다. 그런데 오래 못 간다는 거지.
몸이 금방 망가지잖아.
대신에 도장에서 더 열심히 수련하는 애들은 오래도록 하는 거지.
그게 같은 무술을 수련해도 오래하자와 빨리하자 정신의 차이지.

◇기자: 아, 우리는 빨리하자네요.

◇선생3: 그러니까,

◇기자: 저는 이번에 이거 정리하면서, 많이 느꼈거든요. 생각보다 기술들이 더 섬세하고, 과학적이다. 이런 걸 지금 군에서 가르쳐야 하는데, 싶기도 하구요.

◇선생3: 오래전에 특수부대 어디서 박치기 기법 몇 가지 가져갔지. 따닥 걸이를 배워갔었지.

◇기자: 따딱걸이는 걸리면 죽죠.

◇선생3: 아이고, 큰일나지.

◇기자: 체중을 실어서 친다는 게, 주먹이나 발차기랑 또 다른 느낌이었거든요.

◇선생3: 그 형님 얘기도 들었죠?

◇기자: 아, 이선생님, 네

◇선생3: 그 양반 아버지도 유명했거든,

◇기자: 네, 손이 엄청 빠르셨다고 하데요.

◇선생3: 유명하셨지. 4, 5명으로는 그 양반 넥타이도 못 잡아. 그 이선생께서 뛰어 받기 하실 때, 같은 스텝인데, 그 양반은 박치기를 안 하시고 어깨로 받으셨거든, 받치는 상대방은 날아가,
머리로 얼굴을 받는 것 못지않은 충격을 준다고, 이게 나보다 키가 작은 사람한테는 박치기가 위험하거든, 서로 각이 안 맞아서 얼굴이 아니라 머리로 머리를 때릴 수 있단 말이야.
그럴 때는 어깨로 들이 받아도 효과 있지.
나도 아버지한테 들은 얘긴데, 오래전에 이북 위 쪽에 소련 사람들이나 몽고 사람들이 덩치가 컸다더라고, 어지간한 주먹이나 발차기가 안 통했나 봐,
그래서 체중을 실어서 날아가 들이 받는 게 생긴 게 아닌가 하시더라고,
또 한번은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아버지랑 중국 무술 영화를 같이 봤거든, 보고 아버지한테, 옛날 날파람도 저렇게 빨랐어요? 하니까, 그러지는 않았다고 하시더라고, 누가 보면 막싸움 같기도 하고, 나중에 권투나 유도, 레슬링 이런 게 들어오면서 좀 더 빨라지고 섬세해지고, 발전한 것 같다 하셨거든,

◇기자: 아, 현대의 격투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셨네요.
그러고 보면 팔꿈치 기술은 정말 훌륭하거든요. 제가 한 17년 전에 본 거랑 같습니다.

◇선생3: 가볍게 받는 거 하고, 뛰어 들어가서 받는 거는 힘이 다르거든, 
가볍게 받는 거에도 사람이 엎어질 수 있지만, 버티면 다음 공격이 들어가야 되잖아, 그런데 박치기가 들어간 거리에서 주먹은 조금 타이밍이 안 나와. 그래서 팔꿈치가 딱이에요.
뛰어 들어가서 받는 것도 그래. 상대가 한 번에 갈 수도 있지만, 버티면 바로 따닥 들어가야지, 아니면 무릎 걸이로 연결하든지, 자, 보자고, 세 가지죠.
가볍게 받았는데 버티면 팔꿈치야.
뛰어 들어가서 받았는데 버티면 따닥이나 무릎이야.

◇기자: 무슨 공식 같네요. 우리 복싱에서 슬립, 위빙 연결되는 것 처럼,

◇선생3: 그래요, 그거랑 같지. 또 하나,
가까이서 받는 거는 탁냉이 올리는 것도 있고, 멕사리도 있고 한데, 뛰어 받는 거는 생각을 잘 해야지. 상대도 몸이 빠른 사람이면, 내가 뛰어 들어갈 때 그걸 가만히 보고 있나? 아니라고, 피해뿌지.
그래서 뛰어 받는 거는 씌우고 받던지, 주먹이나 팔꿈치, 발차기로 충격을 한 번 주고, 그다음에 뛰어 받아야 효과가 있지. 
날파람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재주보다 판이 중요하다.
그 판을 읽어야 된다고, 재주 좀 있다고 막 들이 받는 게 아니고, 처음에 얼굴을 받았으면, 또 따닥으로 같은 얼굴을 받는 게 아니라, 상대의 반응을 보고, 조금 아래 명치를 받든지, 그런 계산을 해야 실전에 유리하지.

 

-------- 중략 --------


◇기자: X목사님께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알고 계시더라구요.

◇선생3: 어제 뵙고 왔어요?

◇선생2: 누구?

◇선생3: 그 울산에 X목사님이요.

◇선생2: 아, 그 양반 조부가 날파람꾼이었거든

◇기자: 네, X목사님이 얘기하시는데 옛날에는 여자도 날파람을 배웠다고 하시데요.

◇선생3: 나도 아버지나 어른들한테 간혹 들었는데, 오래전부터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일제 때, 일본인들 행패가 심하니까, 자기 몸 하나 지키라고 호신술을 가르친거지.
옛날이야기 중에 여자 날파람꾼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또 호랑이 때려잡은 날파람꾼 이야기도 있고, 뭐 다른 이야기도 있어요?

◇선생2: 나도 그거지. 그게 처녀가 날파람 배워서 왜놈들 치고 다닌 거, 나무 위에서 기다렸다가 지나가는 호랑이를 뛰어내려서 주먹으로 잡은 거, 

◇기자: 호랑이를 주먹으로요?

◇선생3: 만들어진 이야기겠지. 아니면 작은 범 한 마리 때려잡고 소문이 와전될 수도 있고,

◇선생2: 왜, 있을 법하지. 힘 좋은 장사들은 가능하지.

◇기자: 주먹을 엄청나게 단련해야 겠네요.

◇선생3: 주먹 쓰는 법이 다르니까, 모양만 보면 석전꾼이 돌 던지는 자세거든, 이게 파괴력이 크다고,

◇기자: 네, 전에 탁냉이(턱)내리기 보면 투수가 공 던지듯이 치더라구요.

◇선생3: 또, 얼굴보다 눈, 코, 목 같은 급소를 치니까, 거기는 단련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 여자들이 해도 효과 있을 거야.

◇선생3: 손쓰는 방법을 XXX씨가 많이 알았는데, 나도 처음 보는 걸 하더라고,

◇선생3: 옛날에 XXX씨 아들 있다 아입니까?

◇선생2: 누구?

◇선생3: 일본에 오래 살다와서, 지금 서울인가 산다했던,

◇선생2: 아, 그래 그래, 기억난다.

◇기자: 그 분은 누구십니까?

◇선생3: 그 양반도 부친이 평안도 분인데, 그 양반 아버지가 전쟁 때 피난 왔다가 배를 타셨거든. 그러시다가 일본에서 하는 사업이 잘 되셨는가 봐. 가족들 다 데리고 일본으로 가서 꽤 잘 살았나 보더라고, 

◇기자: 아, 그 분 부친도 날파람으로 유명하셨습니까?

◇선생3: 아니, 그 부친은 그런 거 할 줄 모르고, 열심히 배 타신 분이지.
어른이 하도 성실하고 착해가지고 동네분들이나 고향분들 중에 유명했거든.
그래가지고 일본에 가서 사는데, 그 양반 부친 친구라면서 집에 자주 놀러왔다대, 뭐 재일교포지. 일본에 간지 오래된 양반이라더라고, 그런데 이 양반이 어릴 때, 부친한테 날파람을 배웠는데, 이게 보통 솜씨가 아니야.
듣기로는 이 양반 조부가 날파람에 미쳐서 날파람 좀 한다는 사람들 집에 초대해가지고 본인도 연습하고 아들도 가르치고 그랬나봐,
그래서 XXX씨 아들이 그때 이 교포한테 배웠는데, 나중에 나도 봤는데, 내가 모르는 형태가 많더라고, 지금은 그냥 서울로 가족들이 들어왔다만 들었지. 연락이 안돼.

◇선생2: 옛날에 하던 걸 지금 기억하겠나?

◇선생3: 글쎄요.
참, 그러니까, 이번에 X대표하고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 조금 후회되고 안타까운 게 뭐냐면, 80년도 때, X관장하고, 이형하고 같이 날파람 자료 모으고 다닐 때, 그때 우리 생각이 잘못된 거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어른들이 그 당시에만 해도 꽤 살아계셨는데, 그 기술을 배우고 싶지가 않더라고, 생각을 해보라고,
나는 유도를 했고, X관장은 태권도, 이형은 권투를 오래 해서 우리도 몸을 쓸 줄 하는데, 당시에 우리가 본 날파람이라는 기술 중에 한 80%는 못쓰겠더라고, 실전에 못써. 
또 진짜 실전에 쓰는 기술은 정말 몇 안 되는데, 이건 또 너무 레벨이 높아.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 무슨 환상에 빠져서 더 수준 높고, 신비한 것이 있겠지. 하고 다 무시해뿐거라.
분명 어딘가에 진짜 레벨이 높은 20%가 있을 거다 한거지.
그때 그 어른들이 알고 있는 것만 지금 모아서 간직해도 그게 얼마나 큰 재산이었겠냐고,
전통을 보존한다는 마음보다 어찌하면 실전에 잘 쓰일까, 이 생각만 한거지.
아버지도 살아계실 때, 이제는 날파람이라고 못 부르겠다 하셨거든.
당신도 어떤게 옛날 모습인지 가물가물 하셨으니까,

◇기자: 우리가 모여서 연습을 많이 해야겠습니다. 더 연구도 하고, 기도도 많이 하고, 이번에 이런 기회가 없었으면, 정말 이야기 속에나 나오고, 전설 같은 기술로 묻힐 수도 있었겠구나 싶기도 하고, 진짜 귀한 자료 얻어 갑니다.
지금 이 기술들은 요즘 유튜브 같은 곳에 올라오는 현대식 호신술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보급 시키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뭐 사실 저희가 지금은 조용히 연습을 하고 있는데, 나중에는 알려질 수도 있거든요.

◇선생3: 이제는 뭐 알려져도 상관없지. 나도 그렇고 여기 장로님도 같은 마음이지만, X대표가 택견에 가서 소개를 하든 태권도에 가서 소개를 하던 상관없어요. 그냥 옛날에 이런 게 있었다. 또 이런 걸 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복음을 전하고 있다면 되지.
그리고 이 기술들로 수입이 만들어져서 지금 해외에 나가있는 선교사들 후원이 가능해지면 너무 감사하고, 

◇선생2: 싸움을 연습해서 뭐할라고, 동작만 기억하면 되지. 

◇선생3: 뭐, 장로님도 그렇고 목사님도 그렇고, 나도 마찬가지고 생각날 때 기도 많이 할게요.
박치기 자료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역사가 교차되냐 말이야. 
평양 대부흥, 장대현 교회, 이기풍 목사, 서북청년단 뭐, 얼마나 많이 나오노.
좌, 우익으로 나뉘어서 민족끼리 싸우고, 그런 아픔은 절대 잊으면 안 된다고,  
이번에 고생 많이 했어요. 너무 오래된 거라 과장도 많이 되고, 모습도 바뀌고 했는데, 자료 정리가 쉽지 않지
어른들도 같은 생각이거든, 지금 이게 무슨 문화재가 되고, 전통 무술로 자리 잡히고 하는 건 원하는 게 아니니까, 겨루기 대회처럼 만들려고 무슨 규칙이니 뭐니 하는 거 넣으면 다 배리거든, 오염된다고, 그냥 이 모습 이대로 이런 게 있었다 라고 기억되면 좋겠어요. 우리 몸짓 기획이 그런 거라메,
지금 와서 그분들이나 나도 그렇고, 이런 기술을 보여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게, 한국 선교의 발자취 중에 한 부분이니까 가능한 거야.
사라진 싸움 기술 하나 찾았다 하고 취지가 다르잖아. 
한국 선교 역사도 오래됐잖아.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 봐야지. 그래서 그 장소나 선교사들 유품, 또 날파람 같은 또 다른, 저 잃어버린 몸짓이 있으면 다시 찾아보고, 그렇게 보존해야돼요. 이제는,

◇기자: 네, 맞습니다. 명심 하겠습니다.
 

 

● 인터뷰 요약
*평안도 박치기
평안도 박치기는 평안도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와 평안도 사람들이 자주 쓰던 맨손 격투 기법의 한 형태이다.
그 최초 시작과 발전 형태를 지금 와서 찾기는 어렵지만, 전쟁, 풍습, 기질 등의 특성 때문에 오랜 시간 전해져 온 건 분명하다.
또 그 위력과 실전성이 다양한 시대와 상황에 검증 되어 팔도에 그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이다.
평안도 사람들은 호신을 위해 이런 박치기만 집중적으로 연습을 하거나, 좀 더 다양한 격투 기법과 훈련법을 터득하고 싶다면, '날파람'이라는 무술을 수련했었다.

지금 전해지는 박치기 기법과 훈련법이 박치기만 훈련하던 사람들이 만든 것인지, 날파람꾼들이 전해준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내용이나 의견들을 종합해 유추해보건대, 날파람은 박치기와 격투 기법을 좀 더 체계적으로 훈련하기 위해 만들어낸 시스템이 아닐까,

*날파람에서 난다리로,
고당 조만식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고찬익 장로, 이기풍 목사등, 이들의 삶이나 자료에 등장하는 '날파람', 이 날파람은 평안도 박치기를 조사하면서 꼭 언급되는 단어이다.
날파람은 평안도 지역에서 전해져 오는 격투기 또는 호신술로 정확하게 체계가 잡혀 있지는 않다.
평안도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 기법들의 차이가 있고 명칭 차이도 있다.
아마도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여서 곁에 이는 바람을 뜻하는 우리말 '날파람'이 그 어원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여기에 평안도 방언이 섞이면서 지역별로 날파름, 날빠름, 날빠리 같은 변형된 명칭들이 생겨난 것 같다.
또, 날파람은 어떤 격투기나 호신술 시스템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도식 싸움, 박치기, 등을 총칭해서 부르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날파람에는 주먹, 팔꿈치, 무릎 찍기, 박치기 등 다양한 기법이 존재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박치기가 유명한 무술로 기억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주먹, 또 어떤 이들에게는 팔꿈치 기법이 강한 무술로 기억되었다.
뿐만 아니라, 주술적인 행위도 있어서 무속적인 색이 강한 수련법으로 기억하기도 했다.

이번 조사를 통해 날파람은 시대적, 문화적 흐름에 따라 몇 번의 변화 시기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먼저 평안도 사회에서 날파람의 보급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를 조선 후기로 보고 있다. 중국 대륙과의 활발한 교류로 시장이 크게 형성되고, 다양한 상권이 생겨나면서 자연스럽게 이권을 노린 주먹패들의 등장과 그런 범죄 집단을 단속하고자 한 사법 기관의 무력 행위 등, 이런 변화 속에서 주먹패들의 격투술로, 사법 기관의 호신술로 사용된 것이다.
이때의 날파람은 각 상황에 맞추어 여러 가지 기법들로 그 형태가 잡혀 있었던 것 같다.
증언에 따르면, 이때 주먹패들의 날파람에는 박치기가 있었지만, 관아나 포도청에서 연습하던 날파람에는 박치기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환경에 따른 기법 차이가 있었다. 이 당시에 날파람의 기법이 가장 다양했고, 연습이나 보급도 아주 활발했다.

두 번째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다.
평양이 기독교의 성지로 큰 변화를 겪으면서 당시에 유명한 날파람꾼이나 싸움꾼, 석전꾼들이 손을 씻는 일들이 많았다.
당시 날파람, 석전 같은 투기가 얼마나 심했는지, 외국인 선교사들이 자제를 시켰을 정도라고 한다. 거기다 무속적인 행위도 훈련에 포함 되어 있어서 더욱 단속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부흥과 상관없이 계속 날파람을 수련하던 이들은 YMCA 같은 신식 기관을 통해 권투나 레슬링, 일본의 유도 같은 현대식 격투기를 접하게 되었고, 이때 교류를 통해 기술적 변화를 갖게 되었다.
기록상 우리나라에 권투 시합이 시작된 것이 1910년~1915년 사이라고 하니 꽤 일찍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권투 하는 사람에게 쓸 수 있는 기법이나, 일본인들의 유도 기법을 피해 쓸 수 있는 것들이 이 당시에 개발되었다.

 

마지막 변화는 해방 후부터 한국 전쟁을 겪은 이들로 인해 시작된다.
기존의 길거리 싸움, 호신술을 넘어서 좌익 세력을 타도하고 공산당에 대응하기 위한 살인적인 기법들을 이때 연습하기 시작한다.
해방 후에도 당시 평안도 사람들이 모인 서북청년단의 훈련장은 YMCA였다.
(종로에 있던 YMCA는 한국 전쟁 당시 소실되었다가 1960년대에 재건되었다.)
기법을 강화하기 위한 체력 훈련이나 기능 향상 훈련들이 더 해지면서 파괴력도 높아지게 된다.
이 당시, 실전에 위력적인 박치기 위주의 훈련이 집중되면서 날파람이라는 명칭보다 '평안도 박치기, 평양 박치기'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
(평안도 출신들도 이때부터 날파람이라는 명칭을 거의 쓰지 않는다.)
'난다리'라는 명칭도 이쯤 나오기 시작한다.
서북에서 쓰지 않는 난다리라는 표현은 경상도에 더 많이 쓰이고 있었는데, 지금도 부산에는 '박치기는 곧 난다리'라는 식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국 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평안도 사람들의 싸움에서 유래된 단어라 보고 있다.
'나는 다리', '다리가 하늘을 날듯'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한 또 다른 견해는 위 대화중 9페이지를 참조하기 바란다.

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건, 날파람의 원형을 이제 와서 찾기에는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시대를 거치면서 현대의 격투 기법과 혼합 되었고, 다양한 실전 상황을 통해서 그 수준도 높아졌다.
선진국 교육(기독교)을 일찍 받아들인 당시 평안도의 개화 속도와 현대 스포츠에 높은 관심을 가졌던 청년 리더들의 노력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현대식 스포츠단의 최초 활동을 1906년 축구 조직인 대한 체육구락부나, 1904년 황성 YMCA 야구단 등으로 보고 있다. 이런 변화에 독립의 염원과 국력의 중요성 등을 강조하는 민족 지도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급물살을 타게 된다.
(서양 문물이나 기술이 우리 것 보다 더 좋다는 인식도 분명 함께 작용되었다.)

 

극 소수의 어른들이 오래전 모습을 가지고 계시기는 하나, 이분들도 처음 그대로의 모습이라 확신하지 못하셨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여러 무술인들이 박치기 기법이나 날파람 기법을 찾고자, 관련 인물들을 많이 찾아다녔다.
그러나 일찍이 종교에 입교 하거나 과거 역사적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기술을 배우고 전수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7, 80년대에 군부대로 몇 가지 기법들이 잠깐 전해졌다는 증언은 있었다.)
이번에 찾게 된 기법들은 과거 모습을 기억하시던 어른 몇 분과 잠시 무술을 업으로 삼아서 부친에게 배운 기법을 간직하고 계신 분들 때문에 가능했다.
놀라운 건 이분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무술 협회로 어떤 이익을 바라시거나 문화재로 등록되어 이름이 남는 것도 원하지 않으셨다.
그냥 선교 역사의 미미한 한 조각으로, 또 오래전 평안도 사람들의 기질과 얼이 담긴 몸짓으로 기억해 주길 바라셨다.

날파람, 평안도 박치기, 난다리 등, 다양한 이름들로 불리며 역사 속에서 잊힌 이 무술은 이제 그 본래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지만, 몇몇 분들의 기억을 통해 곧 사라 질 것 같은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이제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어도 상관이 없다.

 

 

● 기법 소개
정리 된 기법은 아래와 같다.
'평안도 박치기 또는 날파람'으로 기억하시는 분들이 전해준 기법과 한국 전쟁 이후 경상도에서 '난다리'로 불리며 새롭게 기억되고 있는 기법 두 가지 형태이다.
아래 기법 외에도 10여 가지가 더 있었지만, 두 가지 이유로 내용에서 제외했다.
첫째, 그 움직임이 현대의 격투기나 무술과 혼합되어 타 무도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한 기법이거나, 둘째, 당사자 본인만 아주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구현이 불가능 한 경우다.


□ 날파람 추측 기법
1, 훈련법
-점찍기
날파람에 있는 특이한 하체 훈련법이다.
오래전에는 보부상들이 하체의 힘을 기르고 속보를 익히기 위한 훈련법이었다고 한다.
운동량이 꽤 있다.

 

-주머니 치기
반사 신경과 동체시력을 강화하는 훈련이다. 손과 스텝을 빠르게 움직이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이 기법은 지역에 따라, 주머니 치기, 주머니 뺏기, 노리개 잡기 등으로 불린다.
주먹의 속도를 높이는데 좋은 훈련이다. 놀이로도 가능하다.

 

-모서리 다지기
박치기 지점과 목 근육을 훈련한다.
이 훈련을 통해 목 부상도 방지하지만, 박치기의 부위별 감각이 늘게 된다.
박치기 훈련에 이런 말이 전해진다고 한다.
<애기들은 한 모서리로 받고, 꼭 뛰어들어가 받는다. 꾼들은 육모'여섯 모서리'로 받고, 꼭 들어오면 받는다.>
고수가 되면 박치기 포인트 여섯 곳을 자유 자재로 쓴다는 것이다.


2, 멕사리(멱살)
상대가 멱살을 잡았을 때 쓰인다. 무릎과 팔꿈치, 박치기 세 가지가 연결되어 진행되는데 그 위력이 아주 크다.
원래 이 기법의 이름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냥 '상대가 멱살을 잡으면, 또는 어깨를 잡으면 이렇게 해라'이다.
지역에 따라 약간의 변형 기술이 있는데, 치는 방법이나 요령은 비슷하다.


3, 치기
-탁냉이(턱) 내리기
주먹이나 손바닥으로 상대의 턱이나 고막을 내려 치는데, 그 움직임이 흡사 석전에서 돌을 던지는 자세와 비슷하다.
상대가 권투의 가드처럼 얼굴을 가리고 있다면, 그 가린 손을 치고 내려치기도 한다.
오래 전 권투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기술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날파람에는 씨름이나 택견처럼 '다리를 걸어 넘기는 기법이 거의 없다'라는 대답이 많았다. 그런데 이 기법에서는 턱을 내리고 '작두 걸이'라는 기법으로 넘기기도 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몸으로 표현해 보면 아주 신빙성이 높은 주장이다.
요즘 MMA에서나 볼 수 있는 스탠딩 스윕스 기법과 아주 흡사하다.

 

-탁냉이(턱) 차기
발로 상대의 턱을 올려차는 기술이다.
날파람에는 유독 발차기보다 무릎을 쓰는 기술이 많은데,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평안도는 겨울에 아주 추운 곳이다. 그래서 동상을 예방하기 위해 신의 형태나 버선에 들어가는 솜의 양이 다른 곳 보다 많고 무겁다. 함경도는 말해서 무엇 하겠나,
아마 이런 풍습을 이유로 발차기 종류가 많지 않았을 것이다.'
 

4, 날 씌우기
-날 씌우고 부수기
뛰어들어가 상대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치듯이 하다가 무릎을 밟는다.
이 또한 여러 증언에 자주 등장하는 날파람의 대표적인 기법이다. 
손바닥 씌우기 다음 상대의 무릎에 체중을 실어서 부러뜨리거나, 밟고 올라 다시 무릎으로 얼굴을 치기도 한다.

 

-날 씌우고 무릎 쏘기
뛰어들어가 상대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치고, 무릎으로 상대의 낭심을 처 올린다.
여러 증언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실전에서 박치기보다 더 많이 쓰였다는 기법 중에 하나다.


5, 뛰어 받기
훈련 강도나 기량에 따라 3m 정도의 거리를 뛰어 받는 것도 가능하다. 
이 훈련은 어렸을 때나 집중적으로 많이 할 수 있다.
참고로 날파람으로 유명하신 분들 중에는 먼 거리를 점프해서 박는 것보다 근거리에서 가벼운 스냅으로 박는 것을 선호하신 분들이 더 많다.
경북 문경 출신의 고 김만기 장군이 한국 전쟁 당시, 자신이 목격한 서북 출신 병사들의 박치기 일화를 기록한 적이 있는데, 이 기술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두 가지 기법이 있는데, 모서리 받기는 2m~3m 정도를 뛰어 들어가며 받는 것이고, 발잔덩(발등)받기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상대의 발등을 살짝 밟으며 받는 기법이다.


6, 가지 치기
이 기법은 위 인터뷰에 잠시 등장하는 '정 영감님'이라는 분이 전해준 기술이다. 두 명을 동시에 공격하는 기법인데, 실전에 많이 쓰인 것 같다.


7, 칼 받기
-내려 치기
상대가 칼로 베거나 내려 찍을 때 막으면서 박치기를 한다.
오래 전 부터 있던 기법이라는 여러 증언이 있다.

-찌르기
상대가 칼로 배를 찌를 때 흘려보내면서 머리 뒤 측면으로 받는다.

 

 

□ 난다리 기법
1, 훈련법
-점찍기
날파람의 점찍기 훈련과 동일하다.

 

-따닥 걸이
머리의 정면과 뒷면을 이용해 순서대로 박치기를 하는 훈련이다.
날파람에서 따닥 걸이는 같은 머리 방향으로 두 번을 연달아 공격하는 것인데, 난다리에서는 정면으로 공격했다가 바로 체중 이동을 이용해 머리 뒤로 공격하는 따닥 걸이가 있다.
날파람에서는 없었다고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주머니 치기
날파람의 주머니 치기 훈련과 동일하다.

 

-모서리 다지기
날파람의 모서리 훈련과 동일하다.

 

-턱 걸이
날파람에도 있다 와 없다로 의견이 나뉘는 기법이다.
박치기 위치와 손의 응용 동작을 훈련한다. 움직임 형태만 보면 레슬링 잡기 연습 같기도 한데 이후에 만들어진 것 같다.
모서리 다지기와 함께 아주 중요한 훈련법 중 하나다.

 

-주먹 단련
날파람에는 주먹으로 나무를 치는 훈련만 있는데, 난다리에는 주먹을 쥐고 하는 현대식 푸시업 훈련이 함께 존재한다. 
근대 격투기에서 많이 하는 정권 단련과 흡사하다.
함께하는 훈련으로 치는 훈련이 있는데, 손목을 살짝 꺾어 치는 것이 특이하다.


2, 탁냉이(턱) 올리기
아래 네 가지 기법은 위 인터뷰에 잠시 등장하는 'XXX장로님'이라는 분이 아들에게 전해준 기법이다. 실전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쓰인 호신술로 여러 사람이 배워갔다.

-코뒤(콧등) 받기
상대의 손을 흘리면서 턱을 처 올리고, 코를 머리로 받는다.
순간적으로 사용하기에 아주 좋은 기법이다. 대신 몸이 빨라야 그 효과를 볼 수 있다.

 

-사창구(사타구니) 올리기
상대의 손을 흘리면서 턱을 처 올리고, 뒷꿈치로 낭심을 차 올린다.

 

-팔꼬방(팔꿈치) 꼽기
상대의 손을 흘리면서 턱을 처 올리고, 팔꿈치로 명치를 친다.

 

-코뒤(콧등) 찍기
상대의 손을 흘리면서 턱을 처 올리고, 그 손 그대로 코를 내려 찍는다.


3, 주먹 박기
상대의 명치와 얼굴을 차례대로 친다.
이 기술은 아주 과학적이며, 실전에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오래전 기법이리고 하기에는 너무 세련된 움직임이다. 키가 작은 싸움꾼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 같다.


4, 덩갱이 차기
정강이를 발로 찬다. 가끔은 주먹으로 얼굴을 치고 정강이를 차기도 하고, 정강이를 먼저 차고 얼굴을 치기도 한다.
난다리에 있는 유일한 발차기이며, 이보다 높이 찬다 해도 낭심까지다.
이성순(시라소니)씨가 자주 쓰는 기법이었다고 한다.


5, 걸이
-뛰어 걸이
날파람의 뛰어 받기 중 '모서리 받기'와 동일한데, 따닥 걸이, 무릎 걸이, 무릎 쏘기 라는 기법이 추가되어 있다. 
박치기로 유명한 이성순(시라소니) 이분의 주특기가 '공중 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는 것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 몇 미터를 뛰어 들어가 박치기를 한 후, 다시 무릎으로 명치를 찍어서 끝낸다는 것.
이 기법과 동일한 기법이 있는데, 바로 '무릎 걸이'라는 것이다.
(공중 걸이와 동일한 기법인지는 알 수 없으며 인터뷰에 응하신 분들은 공중 걸이라는 기법을 모르셨다.)
2m 정도를 한 번에 뛰어 들어가 받는 것은 뛰어 받기 훈련을 보면, 그리 어려운 기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 박치기를 전문적으로 훈련하거나 날파람을 훈련한 이들이 몇 미터 뛰어 들어가서 상대를 받는 것은 그렇게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평안도 출신 싸움꾼 중에 그 기법이 가능한 이들이 너무 많아서 전국에 다양한 시라소니가 존재했던 것이다.
몇몇 분들은 이성순(시라소니) 이라는 인물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 사람은 박치기를 잘해서 싸움을 잘하는 게 아니라, 원래 천재적인 싸움꾼이었다. 온몸이 무기였고 박치기는 그런 그의 무기 중에 하나인 것이다.'

 

-따닥 걸이
훈련에서 하는 따닥 걸이와 동일한데, 기법 연습 때는 상대가 움직여 준다.
상대의 손을 흘리면서 들어가 박치기를 하고, 다시 뒤로 움직이며 한 번 더 박치기를 한다. 
이 기법은 직접 보지 않으면 이해를 하기 어렵다. 난다리 기법을 이야기할 때 꼭 거론되는 기법이며, 장시간 훈련을 해야 가능하다. 2가지 응용이 있다.
이성순(시라소니)씨가 시작한 기법이라는 의견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팔꼬방(팔꿈치) 걸이
상대의 손을 흘리면서 팔꿈치로 치고, 무릎으로 처 올린다.
이 기법도 난다리 기법에만 보이는데, 한 번 걸리면 그 위력이 엄청나다.
따닥 걸이와 세트처럼 쓰이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팔꿈치와 무릎의 활용이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런 세련된 기법을 그 당시에 썼다는 게,
처음 이 기법을 만든 분이 누구인지 이제 와 알 수 없지만, 정말 수많은 실전을 겪은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이 기법도 이성순(시라소니)씨가 시작한 기법이라는 의견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옆구리 올리기
상대의 손을 들어 올리며 옆구리를 주먹으로 친다. 지금 권투의 바디 훅과 흡사하다.
동작은 아주 간단한데 그 위력이 크다.

 

-코뒤 치기
상대의 손을 들어 올리며 손등으로 콧등이나 눈을 치고 다시 들어가 박치기를 한다.
이 기법도 작은 동작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옆구리 올리기와 세트처럼 쓰이는 기법이다.
날파람에도 이 기법이 있지만, 난다리에 포함시킨 이유가 있다. 
상대의 손을 막아내는 작은 차이인데, 난다리를 기억하는 분들의 기법이 좀 더 과학적이다.

 

 

□ 그 외 기법
1, 편싸움
과거 날파람은 두 가지 형태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개인이 배우는 호신술, 또 하나는 여러 명이 편을 나누어 싸움을 하는 경기 방식이었다.
편싸움, 말 그대로 패싸움이다. 
과거에는 이런 형태를 경기, 시합이라고 불렀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시대에서는 더 이상 허용될 수 없는 스포츠임이 분명하다.
편싸움은 인원에 상관없이 두 편의 쪽수만 맞으면 된다. 대신 부상을 당한 사람이나 무기를 든 사람은 참가할 수 없다.
(과거에는 돌을 몰래 지니고 있다가 던지는 경우도 있었고, 육모방망이를 휘두르기도 했다. 또 석전을 하다가 편싸움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
각 편은 1진, 2진으로 나누어 서는데 1진은 같은 또래들이 서고 2진은 나이에 상관없이 다양하게 섞여있다.
1진은 상대편에게 욕도 하고 발길질을 하며 분위기를 고조 시킨다. 이때 어린아이들이 담배를 피우는 시늉을 하기도 하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시늉도 하면서 상대 편을 자극한다.
순간, '가자!'라는 구호가 들리면, 앞 1진에 있던 선수들이 뛰어들어가서 들이 받기 시작한다.
또 1진에서 약속된 몇몇 선수들이 허리를 숙이거나 자리에 앉으면 좀 더 날쌘 선수들이 이들의 등이나 어깨를 밟고 뛰어넘어 박치기를 하거나 발길질을 시작한다.
금세 여기저기서 피가 낭자하고 비명소리가 터진다. 심하게 다친 사람들은 의원에게 실려가고 아이들은 그만 때리라며 울고불고 난리가 난다.
황당한 건, 이 난리 통을 당시 사람들은 말리기보다 자리를 깔고 구경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편싸움으로 심하게 다쳐서 불구가 되거나, 심지어 죽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하니, 금지를 시키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거기다 구경꾼들은 이긴 편에게 좋은 구경 했다고 동전도 던져주고 했었다. 그러니 최대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판을 벌리거나, 또 판이 벌어지는 것을 미리 광고해서 구경꾼들을 모으기도 했다.
몇몇 분들은 이 편싸움이 진짜 날파람이라고 주장하셨다.
개인이 호신술처럼 배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기법들도 이 편싸움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기법들 중에 가벼운 제압?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
먼 거리를 뛰어 들어가서 치거나, 가까운 거리라도 급소만 야무지게 공격해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풍악을 울리고 서로 웃고 즐기며 경기 후에도 함께 회포를 풀 수 있는, 그런 민속놀이로 남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날파람을 기억하시는 분들 중에 이 편싸움을 제대로 보신 분은 몇 안 계신다. 
생각보다 빠르게 평안도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2, 꺾기, 손목잡기, 재끼기
이 기법은 난다리에만 포함되어 있고, 날파람에는 없다고 한다.
이 기법을 알고 있는 분이 주장하기로, 경상도에서 전해지는 관절기의 일종이며 '꺾기', '손목잡기', '재끼기'라고 불리었는데, 1900년대 초에는 일본인들이 '동래(東萊)야와라'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부산 동래에서 전해진 호신술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작이 평안도에서 건너 온 것인지, 경상도(부산)에서 시작된 것인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재끼기라는 단어만 보면 경상도 방언에 가까운 것 같다.)
기술만 보면 아주 섬세하고 실전 적이다. 관절기를 다양하게 쓰는 한국의 합기도에서 찾아보려 했으나, 똑같은 건 보지 못했다. 
오히려 해외 무술 중에 일본의 아이키도, 필리핀 칼리, 인도네시아 실라트 등에서 비슷한 것들을 발견했지만, 대부분 과거의 기법이 아니라, 최근에 재해석 되거나 만들어진 기법들이었다.
난다리에 있는 이 기법(꺾기, 손목잡기, 재끼기)중 현재까지 전해졌다고 추측되는 건 6가지이다.
사람별로 2가지, 1가지, 3가지씩 기억되고 있는 걸 모으니 6가지가 된 것이다.
신기한 건, 이 6가지 기법의 출처는 다 다르지만, 처음 상대의 손을 감아 잡는 법은 동일하다. (일반적인 합기도 관절기처럼 상대에게 손을 잡힌 상황을 푸는 방법은 없다.)
이 꺾기에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 세 가지를 소개한다.

 

* 6가지 기법 중 3가지를 소개 해주신 B씨의 이야기이다.
B씨는 70년대 후반까지 형사로 활동 하셨다. 이 분은 어릴 적, 평안도 출신 아버지에게 박치기와 꺾기 2가지를 배웠는데, B씨는 형사 생활하면서 박치기는 쓸 일이 없었지만, 꺾기 기법 2가지 만으로 많은 범인들을 제압하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73년도에 있었던 일화 하나를 소개 해주셨다.
지금의 부산 서동(동상동)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한 폭력배가 있었다. 두 달 정도가 지나 조방앞(현 범일동, 구 조선방직)에 나타났다는 정보를 듣고 잡으러 갔다.
범인이 있던 다방 앞에서 격투가 벌어졌고, 결국 범인은 제압 당했다.
범인은 후배 형사들이 차에 태워 경찰서로 갔고, B씨는 다방에 남아서 몇 가지 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다방에 계시던 영감님 한 분이 B씨에게 말을 걸었다. 당시에 70대 정도 되어 보이는데 양복이 너무 잘 어울리는 멋쟁이셨다고 한다.
그 영감님은 B씨의 실력을 칭찬하면서 다른 방법 한 가지를 알려 주셨는데, 움직임만 봐도 범상치 않은 분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 영감님에게 배우신 기법을 포함해 3가지를 알고 계신다.)
밀양이 고향인 영감님은 어릴 적, 꽤 부유하게 사셨다고 한다. 
당시 큰 형님이 서당에 다니면서 서당 훈장님에게 배웠다며 동생들에게 호신술 몇 가지를 가르쳐 줬는데, 그게 지금 꺾기라고 하셨다.
또 꺾기나 재끼기는 상대의 손을 빠르게 잡아야 하니, 이걸 잘하는 사람들은 '잡이꾼', '잽이꾼'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영감님은 이 꺾기의 출처가 오래전 경남 일대의 씨름꾼들이 경기가 아니라, 전쟁에서 쓰기 위해 개발한 것이라 했다.
이후 B씨는 아버지도 모르셨던 이 기법의 시작을 경상도로 확신하게 되었다.


* 6가지 기법 중 1가지를 소개 해주신 K씨가 본인의 숙부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1900년대 초 부산 동래에서 관기 제도 철폐로 직업을 잃은 기생들이 모여 '동래 기생조합'을 열었다. (이후 일본에 의해서 '동래 권번'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당시 동래 권번은 지금 부산 온천장 일대에 아주 크게 자리 잡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이권이 클 수밖에 없었다.이때, 권번에서 질 나쁜 손님들을 처리하고, 기생들을 보호하던 주먹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이 씨'였다.(기생들은 그를 '이 도사' 또는 '이서방'이라고 불렀다. 어떤 이들은 '임 씨'로 기억했다.)이 씨는 싸움을 잘했는데, 순식간에 상대가 지르는 손을 잡아 꺾어 부러뜨리거나 던져버렸다.그 빠르기가 고양이보다 빨라서 어떻게 잡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또 가끔은 급소를 쳐서 기절 시켜버리기도 하고, 또 어쩔 땐 이 씨의 몸에 손만 대어도 나가떨어졌다고 한다.당시 권번 주변에서 인력거 사업을 하던 '타이요'라는 일본인이 이 씨의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타이요는 일본에서 스모를 배운 사람이었다.타이요는 이 씨의 기술이 신기에 가까워 스승으로 모시고 몇 가지 배웠다고 한다.이 씨가 말하길, 자신이 하는 기술을 '잽이', '재끼기'라고 말했고, 어릴 적 본인의 아버지에게 30가지의 기예를 배웠다고 했다.자신이 아버지에게 배울 당시 일본인 청년 한 명이 찾아와서 함께 배웠는데, 아버지는 그 일본인 청년의 검술이 궁금해서 교류하셨다고 한다.그 일본인 청년은 이 씨 아버지에게 배운 기술을 '동래(東萊) 야와라'라고 불렀다고 한다.이 씨의 아버지는 보부상이었는데, 상단의 접장에게 틈틈이 배웠고, 또 그 접장은 절(지금의 경남 양산에 있는 내원사)에서 스님에게 배웠다고 했다.훗날 이 씨는 동래 권번에 온 양인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인이 되어 만주로 떠났는데, 주위 사람들은 선교나 독립운동을 하러 간 것이라 생각했다. 후에 소문을 듣고 그 기법을 배우기 위해 동래 주변을 뒤지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이렇게 기억했다.'더 이상 이 기술은 동래에서 배울 수 없다. 만주 가서 이 씨에게 배우거나 일본 가서 이 씨 부친의 일본인 제자에게 배워야 한다'


* XXX장로님 아들 J씨가 부친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첫 번째 이야기,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일본 검술의 무서움을 알게 되었다.
이런 위력적인 검술을 상대하기 위해 전쟁 후, 나라에서도 여러 가지 연구를 하기에 이른다. 
당시 부산에 이런 고민에 빠진 한 선비가 있었다. 의병으로 전쟁에도 나간 바 있던 이 선비는 일본 무술의 우수함을 인정하고 자신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적을 제대로 아는 것만큼 좋은 병법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왜관을 찾아가 무술 실력이 뛰어난 자를 찾게 된다.
그리고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이때 왜관에서 지내는 일본인들은 검이나 창을 따로 지닐 수 없었다. 그리고 관리도 아닌 듣도 보도 못한 집안의 양반이 자신의 검술 훈련을 위해 마음대로 일본인에게 검을 쥐여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결국 검술이 아닌 맨몸을 주로 쓰는 유술을 배우게 된 것이다. 또 재미있는 건 이 양반은 일본인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고 한다.
'칼이 없어도 맨손으로 칼 든 적을 제압하는 법을 가르쳐 주게' 
양반은 일본인에게 배운 기술의 이치가 너무 깊어서 자신과 같은 양반들에게 비싼 값을 받고 가르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경남 일대에 꺾기, 재끼기 같은 관절 기법이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이야기,
1920년대쯤, 조선 무도관을 설립한 '강낙원'에 의해 알려졌다는 것이다.
강낙원은 일본에서 검도와 유술을 배워온 사람인데, 독립운동에 참여하려 했다가 후에, 친일파로 돌아선 사람이다.
(아내 오현주와 함께 밀정으로 활동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에 연루되었다.)
당시 강낙원의 도장에는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함께 수련을 할 수 있었고, 이때 일본식 체술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렇게 처음 전해졌고, 한국 전쟁 당시 자연스럽게 전국적으로 퍼졌을 거라는 것,
(강낙원은 1920년대 당시 YMCA에서도 검도와 유도를 가르쳤다.)

 

 

3, 개성 접장 검무
이 검무는 평안도 박치기 자료를 모으는 과정에서 보부상들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갔고,  거기서 이런 것도 있었다며 갑자기 등장 한 것이다.
'접장 검무', '칠성 검무', '개성 검무', '개성 접장 검무'등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리었다.
과거 우리나라에는 지역별로 유명했던 검무가 많았는데 평양 검무도 그중 하나였다고 한다. 기생들이 잔치에서 추기도 했지만, 무속적인 의미도 강해 전쟁에서 승리를 기원하거나 풍년, 액막이 등으로 많이 추기도 했다.

조선 후기, 개성에 검무를 잘 추던 여인이 있었다. 굿이나 잔치에 자주 불려가고는 했는데, 나름 신통력 있는 무당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검무를 추러 간 잔칫집에서 한 남자를 알게 되었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무당이 가정을 가지면 신통력도 사라질 수 있어서 큰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사랑의 힘이란, 여인은 자신이 하던 일을 그만두고 결국, 사랑하는 남자와 가정을 꾸리게 된다.
당시 도적과 산적이 팔도에 넘쳐나서 상단들이 공격을 받기 일쑤였는데, 여인은 보부상인 남편의 안전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여인은 남편의 무사귀환을 위해 본인이 잘 하는 일을 시작한다. 
아침마다 일곱 그릇의 정안수를 떠놓고 칠성당에 기도를 드리면서 검무를 추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정성을 들이다 신령의 도움으로 새로운 검무를 알게 된다.
여인은 신령이 가르쳐 준 검무를 남편에게 가르치며 이렇게 당부했다.
'혹, 도적이나 산적이 나타나면 그들과 싸우지 말고, 상단 앞에서 주문을 외우며 검무를 추세요. 그러면 조화를 부려서 그들이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도망갈 것입니다.'
그 후, 남편은 상단의 접장이 되었고, 그가 있는 상단은 도적이나 산적을 만나도 무사했다고 한다. 
전설의 고향 같은 이 이야기는 실제 무속인의 부모님에게 검무를 배운 분이 들려주셨다.
검무 자체는 과거의 모습 그대로라고 하는데, 주문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선도나, 도를 논할 때, 지역의 특색에 따라 우도방, 좌도방으로 나뉜다는 설명이 있다.
'우도방은 철저히 외부의 귀신이나 영혼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부적을 사용하는 것도 배격한다. 오로지 수도자 본인의 심신을 수련하여 도를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좌도방은 어떤 준비물이 필요한데, 바로 주문과 부적이다. 
외부의 신들과 소통하고 그들과의 소통을 통해 득도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도방과는 달리 좌도방은 타력이나 자기 자신 이외의 외부적인 특정 대상물, 매개체 등을 동반하여 공부하는 모든 형태의 방식들을 말한다.'  (출처 : 네이버)

이 설명이 맞는다면, 접장 검무는 좌도방 수련에 가깝다.
실제 우도방과 좌도방의 지역적 발전 흐름을 보면 평안도는 좌도방에 속한다.
이번 자료 수집을 통해 다양한 내용들을 많이 알게 되었는데, 이런 접장 검무처럼 무속적 색이 강한 훈련법들이 많이 존재했다.
박차기 훈련에도 차력처럼 주문을 외우는가 하면, 속보(빠른 걸음)를 잘하기 위해서 주문을 외우거나 부적을 신발에 넣는 등, 다양한 형태의 무속 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거의 전해지지 않지만, 평안도 박치기와 더불어 평안도의 전통이나 날파람 같은 무술을 소개하는데 참고할 만한 내용이라 생각해서 여기에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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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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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 익명_767092
지금까지 날파람 관련 자료중에 젤 그럴싸함
00:24
2일 전
익명_193692
저런 것들도 영상이랑 기술들이 잘 전해져야 하는데...
안타깝네
01:47
2일 전
와 진짜 재밌게 잘읽었다 북한엔 이런 우리가 모르는 전통무술이 남아있을까? 궁금하다
02:50
2일 전
익명_278221
와 너무재밋어서 시간가는줄 몰랐네
05:59
2일 전
익명_998798
택견이랑 사회문화적 배경이 겹치는 부분이 상당하다는 것도 굉장히 흥미로운 포인트인 듯.

평양을 중심으로 날파람꾼들이 모였다.
석전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했다.
민 뿐만이 아니라 관에서도 날파람을 수련했다.
육모방망이를 잘 다뤘다.
어린애들도 어른에게 배워서 날파람을 했다.
상업이 발달해서 주먹패가 모이다 보니 발전했다.

ㄹㅇ 날파람과 평양이란 단어만 택견과 한양으로 바꾸면... ㅋㅋㅋㅋ
08:35
2일 전
혹시 이 글 출처가 있음? 링크 공유 주면 너무 고맙겠음
10:32
1일 전
익명_767092
위 보고서 쓴 단체는 (우리 몸짓 이야기)이고 위 태권도 선교팀은 (스포츠 선교팀)
곧 유튜브로 기술 영상 나온다고 함.
10:41
1일 전
익명_636103
몇몇 걸러야 하는 대목이나 이야기들도 보이기도 하지만, 일단 이런 자료들이 수집되고 널리 알려지는 건, 정말 반가운 일.
11:19
1일 전
익명_512419

최근 윗대 영상에 박치기 하는데 따닥 들어가던데   이글 표현중에 " 따닥" 나오던데 이게 그의미?

11:46
1일 전
익명_694326
아 이 보고서가 아마도..
같이 운동하면서 알게된 지인이 얘기해준거임
지인이 아는 운동 동호회에서 알게된 사람이 우리 몸짓 이야기라는 단체에서 기술 연구를 하게 되었다고함. 그게 작년쯤
지인이 아는 분은 복싱하고 태권도도 오래 했음.
처음에 거기서 박치기를 할때 훈련법과 기법 두 가지를 하는데 훈련법을 할때는 잘 몰랐는데 기술 훈련 하면서 깜놀,
실전성이 너무 높아서 그냥 여기 기술 몇가지만 배워도 이번생 호신술 끝이라고 할정도
또 하면서 느끼는건 시라소니라는 사람이 진짜 엄청난 사람이었다는 것을 자꾸 깨닫게 된다고함
지금 건대어디 허름한 체육관에서 모이는데 태권도 9단까지 고수들이 많다고 들었음
내년쯤 홈피나 유튜브 할거임
어떻게 소문을 듣고 지금도 거기 컨택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음
나는 발목 금가서 재활하느라 꿈도 못꿈 ㅠㅠ
'우리 몸짓'은 전통 같은 거 찾고 복원하는걸 하는데 무술만 하는게 아니라 다른 것도 있다함
아마도 위 보고서 출처는 우리 몸짓은 아니고 거기 있는 태권도쪽인듯
12:32
1일 전
익명_654582
얼마전에 위에 나오는 기법중 '따닥걸이'를 프로태권도에서 9단이 하는 걸 봤는데 진짜 신기함.
걸리면 죽을 것 같은 기술이었음.
15:01
1일 전
익명_834502
결국 박치기는 택견에서 할까~ 태권도에서 할까~
그만 티격태격하고 우리몸짓 여기나 가보시지~
15:16
1일 전
오 무슨 날파람에다가 잽이수 얘기까지 나오네 수박한다는 쪽은 정황상 송도수박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래플링없이 발만 찬다는 증언보면 수밝기(동이택견)쪽과의 연관성도 궁금하긴함
22:49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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