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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안 쓰이면 사라진다는 걸 대표적으로 보여준 조선 초기의 쇠뇌 기술 발굴.

익명_614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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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쇠뇌 관련 유물은 청동기 시대 출토된 단발식 쇠뇌의 방아틀 뭉치이다. 이 외에 고분벽화의 그림도 남아 있다.

 

신라 시대에는 구진천이 개발한, 천 걸음이나 화살이 날아가는 쇠뇌인 천보노(千步弩)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신라는 아예 쇠뇌만 다루는 전문부대인 노당(弩幢)을 따로 만들 정도였다. 662년에 평양을 포위했다가 군량이 끊어진 소정방에게 군량을 전해주고 오던 김유신이 도중에 호로하(임진강)에서 고구려군의 기습을 받았을 때 수많은 쇠뇌를 한 번에 쏘는 전법으로 고구려군을 거꾸로 궤멸시키는 전과를 세웠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신당서(新唐書)에는 신라가 관문에 항상 노사(弩士) 수천 명을 주둔시켜 지킨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는 노를 신라를 대표하는 무기로 봤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수질노, 수질구궁노, 팔우노 등 다양한 쇠뇌들을 제작해서 사용했다. 북계에 주둔했던 주진군 중에는 쇠뇌를 다루는 노병이 좌군에 편성되어 주둔했으며 별무반 편성 당시 쇠뇌를 다루는 정노군이란 부대를 신설하기도 했다. 예종이 정예부대인 정노반을 사열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고려시대에도 쇠뇌는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원간섭기를 거치면서 쇠뇌 제조법이 실전되었고, 조선 초기에 들어서면서 쇠뇌를 만들 줄 아는 이가 없어 왕궁에 있는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을 참조해서 쇠뇌를 만드는 지경까지 갔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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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52권, 세종 13년 5월 17일 경진 7번째기사/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병조에서 아뢰기를, "길주 사람 주천경(朱天景)이 스스로 노궁(弩弓)과 상양포(相陽砲)의 법을 자세히 안다고 말하니, 본인을 군기감(軍器監)에 >보내어 작게 모양을 만들어서 시험하게 하시기를 청하옵니다."하였다. 내장(內裝)에 마침 제용 부정(濟用副正) 구강(具綱)이 바친 자청준(磁靑樽) 한 벌이 있었는데, 그 준(樽)의 배에 그린 그림에는 손빈(孫臏) 이 나무를 깎아 흰 곳에 쓰기를, 방연(龐涓) 이 이 나무 밑에서 죽는다고 하였는데, 연이 와서 보자, 1만의 노궁(弩弓)이 함께 발사하는 모양을 그렸다. 군기 제조 총제 이천(李蕆)에게 내어 보이고, 인해 전교하기를, "이 노궁의 제도를 살펴보고 천경의 말을 참작하여 만들도록 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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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실록 기사. 노궁(쇠뇌)가 그려진 준(樽)이라는 것은 술항아리다.

 

이때부터는 군의 주력 투사무기가 국궁, 조선 중기 이후로는 화승총으로 넘어간다. 그래도 민간에서는 쓰였는지, 성종 때에는 쇠뇌로 호랑이 40마리를 잡았다는 용자가 왕에게 포상을 받기도 했다. 또 왜변과 여진족의 침공에서 쇠뇌는 상당히 자주 등장하며 조선 초기에도 북방에 대한 방어에 쇠뇌의 가치를 높게 보는 서술이 나타난다. 성종대엔 아예 새로 만들어서 다시 꽤 사용되었다고.

 

제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안 쓰이고 경시되면, 잊혀지고 사라져서 나중에는 술 항아리에 있는 그림으로 복원해야 한다(근대에 사라질 뻔하다가 송덕기 옹 덕분에 겨우 이어진 태껸이 오버랩된다). 유형문화재 같은 경우는 그래도 여기저기 복원자료들이 찌꺼기나마 남겨진다고 쳐도 무형문화재인 경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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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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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익명_213645
쇠뇌는 그래도 제대로 복원을 성공했나보네. 민간에서 꾸준히 사용되었다고 하는 걸 보면.
17:44
24.04.02.
익명_324664

중국 쇠뇌 바탕으로 복원했을껄? 원래 우리나라 전통 폴암무기였던 장검이 중국 월도나 협도 양식과 절충된 사례와 비슷하다고 여기면 될 듯.

11:53
24.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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