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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전투기술의 훈련보다 전투대형의 훈련을 더 중요시 했다.

익명_06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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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은 조선 최초의 실질적 군사력운용의 수단으로서의 병학으로서 "진법"을 편찬한다. "삼봉집"에 실린 "진법"에 대해서 정도전은 군사훈련에 있었서 두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전투대형의 훈련이며, 하나는 전투기술의 훈련으로서 과거 사병위주의 군사체제하에서는 후자위주로 훈련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비판하며 진법훈련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의 훈련(講武)하는 법을 보면, 징과 북(金鼓), 기치(旗麾)를 가지고 나아가서 물러서고 앉고 서는 절차만 자세히 가르치고, 창, 칼, 활, 화살을 가지고 치고 찌르고 활쏘고 말달리는 기술은 연습하지 않고 있으나, 이것은 생략하자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데 순서가 있어서입니다."

 

이를 통해서, 고려말 조선초의 군사훈련형태가 주로 개인무예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정도전의 "진법"상의 5개 진은 전형, 중축, 후형, 좌익, 우익으로 구성되는데, 전형과 중축은 적을 저지하고, 후형은 전형과 중축사이로 진출해 적을 유인하고, 유인책에 끌려들어온 적을 중축의 양익에 위치한 좌익과 우익이 적의 측방을 강타하여 양익포위를 달성하게 되는데, 진법상의 결진십오지도에 의하면 이러한 대형은 밀집대형이 아니라 5명단위의 2개 오를 가진 10명단위의 소패로 구성되며 5개의 소패가 간격을 가지고 1개 열을 구성하는 것이 1개 중패가 되며, 2개 중패가 2열로 배치되는 것이 1개 총패를 구성한다. 하나의 진은 각 면마다 2개 총패가 배치되어 4면에 총 8개총패가 내부에 1개 총패가 배치되어 900명이 최소단위의 五陣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진법"의 전투배치는 동양적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창병 밀집대형에 비해 전투단위부대의 유연한 기동 및 운용이 가능하다는 이점면에서 로마군의 초기 Maniple이나 Cohort와 같은 전술단위에 비견되어질 만 하며, 동시기 중세유럽에 비해 전술체계면에서 매우 이상적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보다 유연하고 단위전술조직을 완비한 집단전술은 척계광의 절강병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단위 병력이 유연하게 진형을 갖추고 변형시키고 기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로마군이나 척계광의 척가군이 지녔던 것처럼 이 전투대형은 백병전을 상정할 경우, 개별전사들의 개인무예의 수준, 기율, 용기가 일정 이상 보장되지 않아선 안된다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기병이 대열간의 간격으로 파고들거나 돌파하여 대열의 붕괴를 야기하기 용이하다는 문제점도 존재한다. 상대적으로 전술단위의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에 통제 및 운용, 유연성면에서 유리한 점과 동시에 전사 개개인의 전투기예의 수준과 심리적 강건성이 로마 군단병 이상으로(전술단위 크기면에서 볼 때) 요구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말 조선초기의 경우, 사병위주의 군사력 기반, 그리고 개인무예위주의 훈련체제하에서는 개별병사들의 수준이 이를 충족시킬 수 있었을 것이나, 태종이후 사병이 혁파되고 중앙집권체제가 확립, 병농일치라는 조선의 군사체계가 확립된 이후에는 이러한 전제조건이 충족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의 군사체계상에서 투사무기와 화약무기에 대한 비중의 증가, 비정규전 양상은 이러한 백병전상의 취약성을 가중시키게 된다.

 

세종대에 들어와서 조선의 실용적 병학의 르네상스시기가 꽃피게 되는데, 세종, 문종대의 병서는 조선 전기 군사체제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세종 3년 병조에서 "진도법"을 올렸는데 저자는 변계량으로 추정되어진다. 진도법에서의 부대편제는 5명을 1오, 2오를 소대, 5오를 중대, 10오를 대대로 편성하고 50명인 대대를 전투의 기본단위로 삼았다. 진형은 원진, 직진, 예진, 방진, 곡진을 기본으로 하였는데, 21) 외부에 정찰 및 유격전에 투입하는 유군기병의 운용을 비롯하여 진형의 최일선에는 팽배수(방패)를, 그 다음에는 창수와 창검수를, 그 다음에는 화통수와 궁노수를, 그다음에는 창기병을, 궁기병을 배치하는 병종구성을 취하게 된다.

 

진도법의 의의는 진법에서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유군기병의 운용을 언급하고, 또한 최초로 개인화기를 사용하는 화통수를 기재하여 이 시점에서 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수준으로 화기활용이 가능해졌다는 점을 적시하고 있다. 전열배치를 이후의 군사체계발전과 비교하여 본다면, 팽배수 직후방에 백병전에 참여하는 창수와 창검수가 배치되어 백병전 역량 및 중요도가 여전히 어느정도 견지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상대적으로 이후 가장 실전적이고 여진과의 전투경험이 고려되어진 "계축진설"과의 비교를 통해 이러한 측면을 고려할 수 있다. 세종 15년 7월 조선 초기 북방정벌의 명장 하경복이 편찬한 "계축진설"은 "진도법"과 함께 소규모 여진족과의 교전을 위한 병서로 평가되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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