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척계광은 왜구를 상대할 때 개인의 무예실력보다 집단전술을 더 중요시 했다.

익명_998010
26 0 0

조선후기의 군사체계에 있어 "기효신서"와 척계광은 핵심 벤치마킹의 대상으로서 그 근간을 이루는 전술체계임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백병전과 개인무예라는 요소에 대해서 척계광의 절강병법은 중핵을 이루고 있다. 조선 후기, 심지어 고종대에 이르기까지 살수대를 포함한 이러한 편제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며, 이를 대체할 어떤 군사체계상의 근본적 변화도 일어나지 못했다. 단지 기병의 강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조선 전기 "오위진법"과 관련한 고려와 "병학통"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병운용사례를 관측할 수 있으나, 조선 후기 군사체계는 기효신서의 법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효신서는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는데 가장 잘 알려진 판본은 1566년 왕세정이 가지고 있던 필사본을 바탕으로 편찬된 "왕세정본"과 1588년 이승훈이 척계광 사후 출간한 "이승훈본"이 있으며, 후자는 척계광이 북방에 부임한 이후 북방기병에 대응하는 전법을 소개한 연병실기의 내용을 추가한 것이며, 조선에 입수된 기효신서는 후자인 이승훈본이다.

 

 척계광 이전, 아니 척계광을 포함한 명후기의 군사체계에서 명군에 있어 중시되는 것은 개인의 무예수준이라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100근의 대도를 휘둘러 유대도라고 불렸던 유정이나 성격이 거칠었던 두송과 같은 장수들의 개인적인 무예나 용맹이 찬탄되는 바가 컸다. 유럽의 관찰자들이 본 중국군의 평시훈련에서는 기동훈련은 결여되어 있고 개개인의 무예솜씨를 중시했다고 한다.

 

 가정연간 절강참장으로 부임한 척계광이 본격적으로 왜구의 토벌에 나가기 이전까지, 10년간의 기간동안 중국인 해적과 지방신사층과 왜구들이 결합된 해적들은 연안지방을 약탈함으로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해적들은 왜구만으로 구성되지 않았고 통일된 지도부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규군적 성격을 띠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위소단위 군사체제가 흔들리고 있던 명군은 이에 적절히 대응할 능력을 상실해 있었다.

 

 또한 숫적으로 점유율이 압도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왜구는 통일된 지휘체계가 결여되어 있다는 한계를 소부대 단위에서의 우수한 단결력과 용맹성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초전래가 1543년인 다네가시마의 조총전래와는 달리 당시의 왜구는 화기나 조총을 사용한 기록이 거의 없으며, 사용한 경우는 노획한 중국대포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척계광은 기존의 개인무예중심의 군사체계를 혁신하고 농민을 중심으로 한 병력으로 "척가군"을 구성하고 절강병법을 실현시키는데 성공했다. 절강성 의오현의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병력채택방식에서 그의 전술적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제일 쓸만한 자는 시골에서 성장하여 견실한 사람으로 얼굴이 검고 키가 크고 장대하며, 고생을 많이 하여 손과 얼굴이 거칠고 가죽과 살이 단단하여 농사지은 기색이 있는 사람이요, 두번째 쓸만한 자는 싸움을 여러번 경험한 자로서 일찍이 적을 만났으나 공을 세우지 못한 사람이다. 그리고 제일 쓸 수 없는 자는 평시에 빈둥빈둥 노는 사람으로 얼굴이 빛나고 희면서 행동을 약삭빠르게 하는 자이며, 두번째 쓸수 없는 자는 간교한 사람으로 정신과 얼굴빛이 안정되지 못하고 높은 벼슬아치를 보아도 전혀 두려워 하지 않는 자이다."

 

"만약 무예가 뛰어나더라도 담력이 부족하면 위급한 상황을 당할 경우 죽음을 두려워하여 수족을 제대로 놀리지 못해서 평상시의 태도를 모두 잃는다."

 

 척계광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절강병법에 필요한 병력자원을 "용맹성"과 군율에 대한 순후한 "복종"을 제공할 수 있는 검박한 농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척계광은 교육을 통해서 소부대 전투기술을 함양함으로서 농민을 우수한 병력자원으로 재탄생시켰으며 개인무예에서 집단전술로서 부분적 전환을 이루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척계광당시의 조총의 신뢰성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척계광은 화기는 적과 접근하기 전에 사용하는 것이므로 주요무기로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신유전투를 제외한 경우 대체로 척계광은 수적우위를 기반으로 하여 속전속결을 채택하였는데, 초기의 병력손실을 감수하더라도 공세를 감행했다. 대체로 그의 상대는 왜구만이 아닌 다수의 중국인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공세로 붕괴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척계광은 이후 계주총병으로 부임하면서 북방의 오이라트부에 대한 방어체계를 혁신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연병실기"라는 저작과 같이 북방기병에 대응하기 위한 "거기보전"을 통해 전차를 중심으로 한 병력을 구성하게 된다. 이미 1447년 통병관 주면이 화차비전방안이라는 전차전에 대한 논의를 시작으로 가정 43년인 1564년에는 중앙군인 경영에 전차영을 건립하여 4000량의 전차를 보유하고 1569년 척계광은 계주에 7개 전차영을 설치하고, 전차영은 포로 무장한 중차 156량, 경차 256량과 보병 4000, 기병 3000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1568년의 척계광 부임 3년후인 1571년 오이라트부의 실력자 알탄이 명조정과 강화하고 순의왕에 봉해짐에 따라, 그의 재직기간동안 대대적인 정규전은 발생치 않고 그의 전차영이 실제 유효한지는 검증되지 못했다.

 

 척계광의 절강병법을 대변하는 초기 기효신서와, 이승훈본 기효신서에 내포된 연병실기상의 내용은 판이한데, 특히 소부대단위에서 이러한 차이는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절강병법의 핵심을 이루는 살수대는 "기효신서"에 따르면, 대장 1명, 취사병인 화병 1명, 등패 2명, 낭선 2명, 당파 2명, 장창 4명등 12명으로 구성된다. 조총부대는 대장 1명외에 조총수 10명과 화병 1명으로 마찬가지로 12명으로 구성된다.

 

 살수는 반드시 4초, 조총수는 1초의 비중을 가지게 되는데, 총 20%정도의 비중을 조총수가 가지게 된다. 16세기 초나 15세기의 화승총이나 석궁으로 무장한 병력이 파이크대형을 보조하는데 스위스군의 경우 20%정도 비중을 가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척계광이 절강에서 왜구와 교전할 당시의 명의 조총은 신뢰할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고, 왜구는 조총을 운용하거나, 대부대운용에 필요한 지휘체계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척가군은 강과 산이 많은 지형에서 유연하게 운용할 수 있는 백병전 위주의 소단위 전술체계를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살수대의 기본 전투진형인 원앙진의 운용기본개념인 장단상제(장병과 단병으로 서로 구제함)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두 등패수가 나란히 진열하거든 낭선수가 한 등패수를 담당해 비호하고, 장창수는 언제나 두명이 각기 한 등패수와 한 낭선수를 나누어 보호하며 단병(당파)은 장창수가 지치는 것에 대비한다."

 

 장단상제의 개념은 먼저 등패수가 적과 교전하고, 한명의 등패수를 한명의 낭선수가, 이 두명을 두명의 장창수가 지원하고, 2명의 당파수가 각기의 그룹에 대해 예비대의 역할을 한다. 당파는 화전수이기도 하기 때문에, 유사시 강력한 화기공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분명히 원앙진의 기본개념은 개인무예가 아닌 "집단전술"에 있으나, 소부대 집단전술이라는 한계를 가진다는 점이다. 이는 통합지휘체계가 결여된 왜구가 소단위집단에서 우수한 단병접전능력을 기반으로 공세를 감행하여 대열을 붕괴시키는 것에 대비하여 개개인으로서는 개인무예가 떨어지는 이들을 다양한 무기로 무장시키고 상호지원함으로서 백병전에서 우위를 달성하는 절강병법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1개 대간 거리는 1장(대략 3m)이다. 살수대의 장단상제적 운용상, 각 개인, 그리고 5명(등패수 1명, 낭선수 1명, 장창수 2명, 당파수 1명)의 1개 오(五)간에도 서로 유효하게 상호지원하기 위한 간격이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분명히 장단상제의 개념은 각 개인이 자신의 무예를 활용하기 보다는 상호지원을 통한 집단전술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각 단병무기를 이러한 형태로 혼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예에 기본하여야 함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이렇게 소단위부대로 운용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영향은 더욱 커지는데, 마리우스의 개혁 이후의 로마군 중장보병의 주요 전술단위가 Cohort였으며 120명단위의 Maniple은 전술단위의 중점으로서의 역할을 500명 수준의 Cohort에게 넘겨주었다는 점에서 12명단위의 1개 대단위로 병력을 구성한 절강병법이 얼마나 소부대단위 구축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살수대가 대규모 정규군이나 기병과의 교전에서 가지는 문제점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풍천유향에서는 척계광이 "기효신서의 진제는 왜적을 막기위한 제도이다. 만일 이 진제를 다른 지역의 방어에 사용한다면 적절히 변통하는 방법을 모를 염려가 있으므로 내 감히 이것을 자랑하여 동지들에게 가르칠 수 없다. 북방은 지역이 평탄하고 광활하여 오랑캐의 말들이 폭풍우처럼 달려오니 어찌 이 방법을 쓸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산과 강등 자연장애물이 있는 지형이 아닌 야전지형에서 간격이 크고 병력이 상대적으로 소산되는 구조인 살수대가 방호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계주에서 복무하면서 그 경험을 적은 "연병실기"에서 척계광은 1개 전차에 배속되는 병력구조를 기효신서에 비해서 화기위주로 대대적으로 개편하게 된다. 전차를 담당하는 정병대는 6명의 불랑기 운용병과 2명의 화전수, 그리고 전차장과 타공(운전병)으로 구성되고, 기병대로서의 살수대에서는 등패수 2명, 조총수 4명, 당파수 2명, 대장 1명과 화병(취사병) 1명으로 기존의 주된 단병인 장창수와 낭선수가 조총수로 교체되고 병력이 10명으로 감소되었다.

 

 실제로 당파수는 화전을 운용하는 병력이므로, 기병(奇兵)전력으로서의 살수대는 등패수 2명을 제외하고 전원 화기운용병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장애물지대가 많은 절강지역이 아니고, 소집단위주로 대부대 지휘통제능력이 배제된 왜구가 아닌 적, 특히 기병대를 가정할 경우에 살수대는 전투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살수대가 집단전술적 성격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개인무예에 그 기반을 두는 한계를 지닌다는 점은 조선후기 군사체계의 발전에 있어서 무예서의 간행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선조대의 "무예제보"를 비롯하여 영조대에 사도세자가 편찬한 무예신보, 1790년 정조 14년에 간행된 무예도보통지를 통해 집대성되고, 강조된 개인무예에 대한 지속적 관심은, 조선의 군사체계가 그 병종구성이 점차로 살수대비중이 급속히 줄어들고 대부분이 조총위주로 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프트웨어가 당시 조악한 조총과 상정한 적의 화기운용결여로 인해, 화기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은 초기 "기효신서"의 법제에 근간을 이루는 "병학지남"으로 집대성되었다는 점에 기반한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실제 가지고 있는 자원과 판이한 운용개념을 가지게 된 조선후기 군사체계는 기본적으로 현실성이 결여된 이론적 토대와, 화기전력중심의 구조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집단전술보다는 개인무예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는 기형적 구조를 띠게 되었다. 영조 23년 북병사 정찬술의 장계에, 기존의 살수 4초, 조총 1초의 법도를 따르지 않음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내용은 당시 조선이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는 병력자원구조에 역행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병학이론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기효신서의 저자 척계광 자신이 이미 연병실기를 통해서, 초기의 절강병법이 화기가 발전되고 일반화된 시점에서 적절하지 않음을 이승훈본 기효신서를 통해 확인해 주었다. 이를 인식할 여지는 병자호란의 경험을 통해 가능함에도, 조선은 개인무예라는 전근대적인 군사적 수단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과도기적 소부대 집단전술인 절강병법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여, 자신이 보유한 전력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창의적인 노력이 시도되지도 못하였다. 근대화시점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군사체계운용에 대한 논의가 양자 모두 이후 실패한 척계광의 절강병법과 연병실기의 전차전운용 중심이었다는 점은 이러한 한계를 재확인해준다.

 

단지, 조선 전기의 기병전술의 재적용을 통해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만은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화기중심의 보병전술체계의 부재는 조선후기 군사체계의 후진성을 확인해주는 가장 큰 요인임을 부인할 수 없으며, 또한 일본 전국시대에 이미 시현된 집단전술적 백병전술의 도입이전의 소부대집단전술수준의 과도기적 운용체제에 집착하고 이를 혁신하지 못했던 것은 경쟁과 충돌, 그리고 교역과 교류를 통해서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고 자신을 혁신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었던 조선의 환경과 역량부재에 있음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신고공유스크랩

한달이 지난 게시글은 로그인한 사용자만 토론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공유

퍼머링크

삭제

"척계광은 왜구를 상대할 때 개인의 무..."

이 게시물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