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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 개인의 무예수준이 전투자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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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서의 개인무예의 소멸: 유럽 군사사를 중점으로 - 1


전장에서의 개인무예의 소멸: 유럽 군사사를 중점으로


서유럽 전장에서 개인의 무예의 개념이 소멸된 것은 16세기가 끝나서야 가능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유럽 군사사의 중핵을 이르는 전쟁과정을 중심으로 이를 분석할 경우, 15세기 말에 시작된 이탈리아 전쟁과정에서 이미 본격적으로 개인의 무예가 전장에서 끼치는 영향이 신속하게 약화되었으며, 16세기 군사사의 핵심 축을 이루는 16세기 중반이후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주둔한 Army of Flanders군과 네덜란드군을 통해서, 그리고 서유럽과 긴밀한 연관관계를 맺으면서도 독특한 군사적 특성을 유지한 영국군과 아일랜드군을 통해서 이러한 요인들을 관측할 수 있다.

 

전장에서의 개별적인 개인의 무예수준이 전투자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고대 로마군을 비롯하여 중세에 이르기까지, 효과적인 전술단위와 전술운용을 보여준 로마군이나, 이보다 현격히 열위에 있었던 중세유럽의 군대에 이르기까지 개인무예는 군사적 능력을 성장시키는 중대한 수단으로서 작용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팔랑크스와는 달리 보다 짧은 글라디우스와 방패로 무장한 로마 중장보병의 전투는 보다 격렬하고 피가 튀기는 전투의 양상을 구축했고, 그러한 유혈은 대열의 붕괴가 즉각적인 패배로 이어지는 그리스의 전투양상처럼 이수스, 아르벨라 전투가 승자가 겨우 200, 300의 소수의 피해에 불과했던 반면 완벽한 전술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칸네회전의 한니발측의 피해가 5500명으로 전력의 10%를 상회한 것처럼 것처럼 1), 전투양상이 변화하는데 기여하였고 개인무예는 단위전술조직과 결합되거나 또는 비잔틴제국의 바랑기안 근위대처럼 화기가 본격적으로 전장을 지배하기 전까지 유효하게 운용되었다.

 

그러나, 화약이 전장에 본격적으로 접목되기 시작한 15세기부터 전투양상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 이전부터 개인무예보다는 전술적 수단, 조직으로서의 전투가 중세에서부터 강화되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장기적인 변화단계를 거쳐 16세기-17세기에 화약무기와 그러한 발전과 변화가 결합되면서 유럽 군사체계의 혁신적인 변화를 통해 동양을 비롯한 중앙아시아등 기존에 적어도 중세유럽보다 효과적인 군사체계를 보여준 문명권의 군사체계상의 열위가 도출되어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개인무예가 전장에 끼치는 영향이 점차 소멸되어가는 과정은 "화약"이라는 소재가 공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양과 서양간의 군사체계간의 격차가 생기게 되는 원인으로서 하나의 기준이 되어줄 수 있으리라고 보여진다.

 

1) 중세 유럽 군사사에서 시작되는 개인무예에 대한 위협


중세말 서유럽 전장의 특징은, 충격집단의 운용과 장궁-보병전술이라고 대변되어질 수 있다. 전통적으로 중세의 전장은 충격집단으로서의 "기사"와 보병들에 의해 전쟁이 수행되었다. 실제로 회전개념의 전투는 극도로 제한되었으며 거점방어개념의 전략으로 통일된 중앙집권국가의 부재는 전장을 기나긴 공성전 및 유격전의 양상으로 형성되게 만들었다. 실제 전장은 100여명 이하의 소수의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무수한 거점들과 100명에서 200명이 주둔한 소수의 거점과 극히 적은 대규모 병력이 주둔한 도시들에 대한 공성전, 유격전개념으로 이루어졌으며 15세기에 와서야 이러한 전장양상이 일시적으로 전환되었다.

 

 제한된 전투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중세의 전술의 특징은 충격집단의 운용으로 대변되어질 수 있다. Phlippe Contamine은 그의 저서에서 중세군대의 전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부대 대열은 3가지-기병, 하마기병, 보병-으로 분류되어질 수 있다. 첫번째 사례의 경우 기병들은 얇은 대열, 대체로 3에서 4열정도의 지속적인 대열을 구축하는데 1km넓이의 전장에 1500에서 2000명의 기병이 배치되게 된다. 이 그룹은 'Battle', 즉 주력부대로 구성된다. 이를 구성하는 전술조직은 Banners(bannieres)로서 이 조직은 가족단위, 혈연, 봉건주종관계를 토대로 구성되며 깃발이나 지휘관의 주위에 위치하거나, 동일한 함성(War-cry)에 의해 위치를 잡게 된다. 이들은 서로 간격을 좁혀서 대열을 이루며 이들사이에 사과나 자두하나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조밀한 대열을 이루어 Guillaume Guart의 저서에 의하면 '랜스사이로 바람이 지나갈 수 없을 정도"의 대열을 구축하며, 주력부대는 드물게 단일대형으로 충격을 가하지만, 대체로 대열의 부분마다 공격을 가하고, 오른쪽에서 전투가 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각 대열의 부분들은 Echelle라고 불리는데 이후 Company 또는 Squadron이라 불리게 된다. 이러한 기병대열은 적에게 공격을 가하여 적을 위협하여 대열을 흐트리도록 만들고 부대대열을 돌파하여 붕괴시킨다" 2)

 

이것은 가장 전통적인 기병의 운용수단으로 지속적으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14세기의 백년전쟁 이전에도 기병은 이러한 충격집단으로서만이 아니라 하마기병으로도 운용되었다. 1148년 신성로마황제 콘라트 3세는 그의 기사들을 하마시켜 싸우도록 지시했고 노르만 기사들은 1106년 Tinchebray전투와 1119년 Bremule전투, 1124년 Bourgtheroulde전투에서 하마하고 전투를 벌였다. 2) 하마전투는 백년전쟁에서 출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마한 기사들은 기율과 훈련면에서 이후 출현할 보병에 비해 약체였던 중세의 보병대에게 로마군에서 Centurion들이 한 등뼈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마한 기사들은 기동성을 상실하여 기존의 충격집단으로서 또는 공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지만 방어적인 전투에서 그들은 육체적인 힘과 전투기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병에게 강력한 사기진작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3)

 

중세 기사는 자신의 무예를 과시하는 처절한 전투와 랜스차지를 통한 살상, 그리고 대열속에서 검과 도끼, 철퇴를 휘두르는 토너먼트상의 이미지로 역사가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게 하였으나, 실제 전투속에서 중세기사에 대한 강조는, 물론 결정적 역할이기는 하였으나 과장되었다고 평가해야 적합하다. 1214년 Bouvines 전투에서 증명된 바와 같이 기병돌격은 분명히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나(역사가들은 결정적이란 애매한 표현을 즐긴다.)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전투 이전의 기동 및 통합적인 공세행동과정에 의한 것이었다. 3) 실제로 다수의 보병이 중세 기사들이 형성한 적 부대대열의 붕괴상황에서 이를 패주로 이어지게 하는 역할에 투입되었다. 중세 기사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대열을 무너뜨리고 돌파하는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즉 개인적 무예로서가 아닌 집단대열으로서 구현된 것이었다.

 

중세말기의 중장기병은 기존과 동일한 정치적 위치에 서지는 않았지만 기사의 후계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여전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빽빽한 대형을 구축하고 대형을 유지한 상태에서 전투를 위한 기동을 실시했으며 기율을 흩트리는 행동은 엄격히 규제되었다. 본격적인 돌격을 위한 Gallop은 50야드 이내에서 시작되었다. 중세 기병의 명성은 어디까지나 대열을 파괴하는 능력에 의해서 구축된 것이었고 전장의 지렛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사시속의 야성적이고 개인으로서의 전사가 아니라 기율을 갖춘 전사로서 전술적으로 운용되는 전술단위로서 전투에 임했다. 3)

 

즉 중세기사를 우수한 개인무예의 소유자로서의 전사로서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미 개인무예가 전장에서 끼치는 영향은 상대적으로 전사로서의 기사의 역할이 중요했던 중세유럽에서조차 비교적 낮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영향은 장궁-보병전술과 파이크전술의 출현으로 인해 가속되기 시작한다.

 

장궁-보병전술이 최초로 출현한 시기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에드워드3세의 군사행동의 첫 성과였던 1332년의 Dupplin Moor 전투였다. 로버트 브루스의 아들인 데이비드를 후원하는 측과 영국의 지원을 받는 Edward Balliol가 이끄는 영국궁 장궁병과 보병 및 하마기사들은 1314년 Bannockburn전투에서와 같이 스킬트론(스코틀랜드 저지대인들의 전통적인 창병집단운용형태)로 전위부대, 주력부대, 후위부대의 3개 대열로 접근해왔다. 영국군-Balliol군은 중앙에는 하마한 기사와 보병을 배치하고 이 대열 양측익에 영국 장궁병을 배치하였다. 스코틀랜드군은 중앙의 보병대열을 분쇄하기 위하여 전진해왔고 그들은 1302년 Coutrai 전투나 1304년 Mons-en-Pévèle전투의 플랑드르 창병보다 효과적이었고 공세적으로 운용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측익의 장궁병이 종심이 깊은 방진대형으로 전진하는 스코틀랜드 보병대의 측면에 사격을 가했고 측면의 대열은 점점 중앙쪽으로 쏠렸다. 중앙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야말로 움직임이 어려울정도로 밀집되었고 중앙의 영국-반란군측 보병과 하마기사들은 손쉽게 지나치게 밀집되고 지쳐버린 스코틀랜드 창병들을 물리쳐버렸다. 4) 창병운용 자체도, 중세의 기병이나 하마한 기사들에 대하여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궁-보병전술은 적어도 15세기의 Grandson이나 Morat전투에서 스위스군이 유사한 전술을 사용한 부르군디군을 격파할 때까지 분명히 유용함을 증명하였다.

 

이후 1333년 Halidon Hill전투에서 에드워드3세가 직접이끄는 전력이 이 전술의 유용성을 다시 증명하였다. 크레시 전투도 이런 양상으로 진행되었고, 갑주로 보호되지 않는 말에 탑승한 기병은 보병보다도 더 이러한 공세에 취약했다. 푸와티에 전투에 대해서 14세기 연대기 작가 Geoffrey the Baker는 영국 궁수들이 말의 다리부분을 향해 활을 쏘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4) 프랑스는 하마기사, Men at arms를 말에서 내리게 해 공세에 투입하는 방법을 도입하였으나 방어적인 전투에서 그들이 발휘한 위력과는 달리 기동력이 결여된 이 전력은 기다리고 있던 영국측 Men at arms들과 보병들에게 격퇴되었다.

 

장궁-보병전술은 부분적으로 개인무예에 의존한다고 볼 수 있으나, 투사무기가 전장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게 하였고(그것이 실질적인 살상력의 결과는 아니었으나) 또한 전술적인 수준에서 적의 기동, 전투능력을 마비시키고 최종적으로 우월한 방어대형이 이를 격파한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무예나 용맹보다 전술적인 운용에서 그 승리의 결과를 도출해낸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장궁-보병전술은 또하나의 측면에서 중요하다. 유럽 전쟁사에서 투사무기는 대체로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해왔다. BC 53년 Carrhae전투와 같이 파르티아 궁기병의 위력이 강조되는 전투에서조차 궁시자체는 로마군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억제하는 수단이상으로 시현되지 못했고, 로마군의 방어진을 분쇄한 것은 궁시나 돌격이 아닌 자중지란이었다. 530년 다라전투에서도 로마군과 페르시아군 모두 궁시를 사용했으며 양자 모두 복합궁을 사용했으나 이것은 전투 전체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복합궁이 조기부터 사용된 제정시대와 후기의 로마군조차도 이런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으나, 투사무기의 집중운용이란 개념이 영국에서 태동하여 이후 16세기초에 개인화기의 밀집운용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리란 것은 가정해볼만한 사항이다.

 

참고문헌

1. William Hazlitt "The Military Capabilities of Ancient Armies"
2. Phlippe Contamine, Translated by Michael Jones, "War in the Middle Ages"
3. Bert S Hall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4. Kelly DeVrie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전장에서의 개인무예의 소멸: 유럽 군사사를 중점으로 - 2

 

2) 중세 파이크 전술의 출현


야전상황에서 개인무예가 거의 배제된 집단전술로서 가장 전통적인 수단은 투사무기를 제외하는 경우 창병밀집대형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의 팔랑크스와 마케도니아의 사리사를 비롯하여, 동양에서도 신당서 23권에 장창대의 존재를, 구당서 199권에서는 고구려 북부욕살 고연수를 격파하는데 이적이 이끄는 장창보병이 큰 역할을 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5) 진한시대 정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육도'에서는 보병이 기병과 전차를 제압하는데 있어 장창과 쇠뇌를 언급하고 있다. 5) 한서(漢書) 49권의 조조(?錯)전에서는 흉노를 치려하는 한문제에게 “騎射에 뛰어난 강건한 흉노의 군사에 대하여, 漢軍은 평지에서 輕車나 돌격 기병으로 교란하면서 强弩나 長戟등 射程이 긴 무기로써 사용하며, 말에서 내려 지상에서 백병전으로 몰아가는 것이 유리합니다”라고 언급한바 있다.

 

보병의 장창밀집대형이 동서양에서 공히 사용된 것은 이것이 개인의 무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전술로서 유목민이나 봉건귀족과 같은 전사로서의 소양을 장기간 몸에 익히게 되는 이들과는 달리 농경민족의 보병대가 평시훈련을 최소화하더라도 가능케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창병밀집대형은 보병이 기병의 돌격으로 인해 대열이 붕괴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 정확히 말해 기병이 대열로 파고드는 것이 불가능하게 함으로서 농경민족이 평시 개인무예를 훈련치 않는 농민이 기병이나 보병에게 효과적으로 대응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각광받을 수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고대 서양에서 장창밀집대형을 활용했던 그리스나 마케도니아는 로마에게 패배했다. 로마군단은 짧은 글라디우스를 채택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장창이 글라디우스에게 취약하다는 결론으로 드러내어질 수는 없다. 로마군단은 그리스나 마케도니아가 가지지 못했던 전술조직과 우수한 기율과 용기를 지닌 마리우스의 노새들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전면에서는 로마군을 쉽사리 압도했으나, 대체로 긴 횡대를 이루는 대형으로 인한 유연성과 기동성의 부족과 전술조직의 결여, 그리고 측후방에 대한 심리적 취약성이라는 측면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첨언하자면 피로스와 같은 수준의 리더십이 공존하는 경우 로마측이 패배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후 그리스에는 그런 전술가적 자질이나, 리더십을 가진 인물도 없었다.) 또한 긴 횡대대형을 이룰만한 유효한 평원지대에서만 전투가 가능했다.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그의 저서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장창밀집대형이 전면에서 아무리 위력을 자랑한다 해도 운용상 로마군에게 대적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장창밀집대형은 유용성과 문제점을 공유하는 전술적 수단이었다. 실제로, 장창밀집대형은 일반적으로 개인무예와 전투력수준이 밀접하게 연관되는 여타 병종에 비하여 그 운용상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이는 전적으로 대규모 회전의 상황에서만 유용하며, 때문에 실제 전쟁에서 오히려 더 많은 사상자와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는 경우가 많은 유격전, 공성전과 같은 상황에서는 취약함을 나타내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창밀집대형에 관심을 지녀야 하는 것은 이것이 개인무예가 거의 배제된 전술운용의 수단이며, 또한 근대의 전술 및 군사체계의 변화에 가시적인 영향을 미친바 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사에서 창은 보병에게도 매우 일반적인 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장창밀집대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5세기 스위스군의 파이크대형이 한세기를 풍미하기 이전에 이미 장창밀집대형은 고대로부터 부활하게 된다. 그 위치는 스코틀랜드였다.

 

스코틀랜드에서 출현하여 중세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저지대 스코틀랜드인들의 장창밀집대형의 전통은 꾸준히 이어진다. schiltron이라 불리는 이 대형은 방진, 횡대, 또는 원형등 다양하게 펼쳐진다고 하는데, 전방향에 대해 장창을 세워 저항하는 스위스 파이크대형의 Hedgehog와도 일맥상통한다. 이 대형을 발명한 이는 13세기 스코틀랜드 저항군 지휘자 William wallace나 또는 스코틀랜드 독립을 이룩해낸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브루스라고 일컬어진다.

 

최초사용 전투도 애매한데, 1294년 Stirling bridge 전투에서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있고, 이에 대해 월레스는 이를 발명하지 않았고 Stirling bridge전투나, 1298년 Falkirk 전투에서도 사용한바 없고 발명자는 로버트 브루스이며, 1314년 Bannockburn전투가 최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당시 이미 저지대 스코틀랜드인의 장창밀집운용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스킬트론은 영국 중장기병을 격퇴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이 전투를 통해 입증되었고, 에드워드 1세는 Falkirk 전투에서 웨일즈와 아일랜드의 궁병을 운용하여 이를 격퇴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에드워드 2세는 1314년 Bannockburn전투에서 기병을 중심으로 섯부른 공세를 감행하다 패배하게 된다.(Bannockburn전투를 섬세하게 관측하면 결코 중세 전투가 안이한 기병돌격의 반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드워드 2세는 일부 기병분견대로 스코틀랜드 주력부대의 후방(숲으로 보호되는)을 공격하려 했고 로버트 브루스는 스킬트론 일부를 파견해 이에 대응했다. 또한 스코틀랜드군은 공격전면을 축소시키기 위해 장애물도 운용했다. 7))

 

스코틀랜드와 유사한 시기에 플랑드르(벨기에 지방)에서도 장창밀집대형이 중세 중장기병의 우위를 위협하는 시도로서 실현되었다. 1302년 플랑드르 지방의 농민들은 프랑스 귀족인 플랑드르 백작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실지로 반란지도자들은 귀족출신이었다. 플랑드르측 병력 9000명중 대부분은 농민병이나 도시민병이었고 400명의 귀족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거의 전부가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프랑스군은 Coutrai를 구원하기 위해 2500의 기사를 포함한 8000여 병력을 파견했다. 지리상의 이점을 지닌 위치에 포진한 플랑드르군은 장창과 철퇴, 도리깨로 무장하고 밀집대형을 이뤄 프랑스 기사들이 대열을 붕괴시키지 못하도록 방어대형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프랑스군은 연이어 공격을 감행했으나, 보병도 기병도 성공하지 못했고 패배했다.

 

그러나 이미 Coutrai전투에서부터 플랑드르군의 한계가 드러났다. 플랑드르군은 전투도중 병력통제에 실패해 일부 전력이 공세를 감행하다 프랑스군의 반격을 맞이하여 붕괴될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1304년 Mons-en-Pévèle전투에서 이런 문제점이 다시 한번 나타났으나 플랑드르군은 붕괴의 위기를 넘겼다. 플랑드르군은 다시 밀집대형을 구성하고 프랑스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단려왕 필립 4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측면을 마차로 방호하는 플랑드르군의 방어대열에 신중하게 크로스보우로 무장한 유격대를 파견하고 측면으로 우회기동하여 마차로 방호되는 측면을 타격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필립 4세는 신중하게도 무리한 공격으로 Coutrai에서의 황금박차전투를 재현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규모 전투가 없이 서로가 기다리며 지쳐갔다. 플랑드르군측의 문제는 심각했다. 그들은 후퇴할 공간이나 거점이 없었고 기동하는 순간 지리상의 이점은 포기해야했다. 결국 플랑드르군은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고 고대의 팔랑스처럼 거대한 횡대는 최선을 다해 대열을 유지하면서 텐트로 돌아가있던 프랑스군에게 기습을 감행했다. 실지로 훈련이 결여된 중세 보병에게 앞으로 전진하는 이러한 단순한 대열의 유지자체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들은 간신히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필립4세는 승리하지도 못했지만 병력을 유지하면서 후퇴할 수 있었고 이 전투를 통해서 플랑드르군의 한계는 명백하게 드러났다. 3) 공세를 취하지 않으면 밀집창병대형은 적어도 그시점까지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328년 Cassel전투에서 이러한 플랑드르군의 한계로 인해 프랑스군은 승리를 쟁취하게 된다. 필립 6세는 프랑스군을 이끌고 플랑드르 농민병과 교전하게 되었다. 플랑드르군은 언덕위에 방어대형을 구축했고 프랑스군의 공격을 기다렸다. 프랑스군은 방어대형에 공세를 취하지 않고 주변의 농장과 마을을 불태우는 것으로 일관했다. 3일간의 파괴행위에도 플랑드르군은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플랑드르군의 방어진지에 대한 보급로를 차단했고 간단한 유격전을 전개했다. 프랑스 지휘관들이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텐트로 돌아간 동안 플랑드르군은 방어대형을 포기하고 Mons-en-Pévèle전투에서 그랬듯이 공세행동에 돌입했다. 그들은 이번에도 기습의 이점으로 어느정도 돌파에 성공한 듯이 보였으나 프랑스군도 신속히 대응을 시작했고 보병으로서 기사들이 랜스와 방패를 들고 전투에 임했다. 프랑스군은 플랑드르군이 원래 위치했던 언덕위로의 퇴로를 열어놓았고 플랑드르군의 일부가 안전한 그곳으로 돌아가 방어대열을 구축할 수 있으리란 믿음에 대열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결국,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프랑스군은 손쉽게 대열사이로 파고들어 밀집대형을 붕괴시켰다. 플랑드르군의 40%가 괴멸되었고 프랑스군의 손실은 매우 적었다. 3)

 

창병밀집대형은 Dupplin moor전투나 Hallidon Hill전투의 스코틀랜드군이나, Cassel전투의 플랑드르군에서 보여지듯이, 공세행동을 감행할 경우 밀집대형의 대열을 유지하고 그 기동성과 충격력을 유지하는 면에 있어서 보다 적은 병력으로 보다 훈련을 상대적으로 많이 받은 중세 기사집단에 비해 불리했다. 개개인의 잘못된 행동이 전체 대열의 전투력을 무너뜨리게 했고 결과적으로 집단전술의 효율성을 무너뜨렸다. 이러한 문제점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어적 형태의 창병운용은 훨씬 효과적이었으나, 보급을 차단당하는 경우 어쩔 수 없이 공세를 채택해야만 했다. 공세를 취하는 경우 창병대형은 취약함을 나타냈다. 기율이나 훈련이 결여된 대열은 기동력이 취약했고 기동과정에서 대열이 흐트러지기 쉬웠다. 스코틀랜드군의 경우, 당시 나타난 영국의 장궁-보병전술로 인하여 플랑드르군보다는 훨씬 유효한 창병의 공세적 밀집운용이 가능했음에도 패배했다.

 

이러한 한계는 스위스군의 등장으로 드디어 일대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참고문헌

1. William Hazlitt "The Military Capabilities of Ancient Armies"
2. Phlippe Contamine, Translated by Michael Jones, "War in the Middle Ages"
3. Bert S Hall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4. Kelly DeVrie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5. 서영교, "신라 장창당에 대한 신고찰" 경주사학 17, 경주사학회
6. Polybius, "The Histories of Polybius" translated by Evelyn S. Shuckburgh
7. Kelly DeVries, Boydell Pres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전장에서의 개인무예의 소멸: 유럽 군사사를 중점으로 - 3


3) 스위스 파이크 전술


스위스군은 도시 길드나 지방 자치공동체의 연방을 그 근간으로 하는 보병위주의 군사력을 통해서 합스부르크의 지배에 저항하여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위스군은 장창밀집대형의 선구자라고 하기 어렵다. 장창 중심의 병력을 구축한 것은 저지대 스코틀랜드인들이 선구자라고 할 수 있으며, 플랑드르인들의 경우는 장창외에도 고덴닥과 같은 둔기류를 비롯한 무기로 무장했다. 스위스군은 1422년 밀라노군과의 교전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주력병기로서 파이크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1422년의 이 Arbedo전투는 스위스군이 본격적으로 파이크로 기병을 저지해낸 전투가 아니라, 오히려 밀라노군의 용병대장 Carmagnola가 중장기병을 하마시키고 그들의 랜스를 마치 파이크와 같이 활용하여 핼버드 위주로 무장한 스위스군에게 큰 타격을 가한 전투였다.

 

그러나, 그 이전의 1315년 모어가르텐과 1339년 뤼펜에서의 스위스군은 12에서 18피트의 자루, 12인치의 창날을 가진 파이크를 사용하였다. 8) 이것은 4미터에서 5.8미터에 달하는 길이로서 6, 7미터 수준의 파이크보다 짧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파이크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항이다. 정확히 말해서, 1422년의 Arbedo전투는 스위스군이 하마한 중장기병의 장창운용에 패배한 후, 핼버드 위주로 무장한 병력이 파이크위주로 전환되게 하는 전환기적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Arbedo 전투 이후의 스위스군의 병력구성비에서 여전히 스위스군은 파이크병보다 핼버디어의 비중이 높았다. 1443년의 취리히 canton군의 병종구성을 확인해 보면, 전체의 23%만이 파이크병이었던 반면 58%정도는 핼버드로 무장하고 있었다. 9)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장의 주력은 파이크병으로 전환되었다. 핼버드나 도검등으로 무장한 병력은 대열 외각에 배열된 파이크병대열 안쪽에 배치되거나, 전위, 주력부대, 후위로 구성된 병력에서 후위를 구성했다. 이들이 전투를 벌이는 경우는 대부분 파이크병으로 구성된 대열이 적을 붕괴시켜 대열이 무너진 이후, 즉 확인사살을 하는 경우나, 또는 파이크병의 공세가 저지된 경우에 이를 지원하는 경우에 제한되었다.(이런 형태로 야전에서 신속하게 개인무기로서의 핼버드나 도검의 역할이 제한되면서 16세기 중반이후부터는 전체 병력비중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주 목적은 유격전, 공성전, 공병, 상징적 무기, 군기호위의 목적으로 전환되어간다.)

 

이러한 스위스군의 개혁은 1444년 St. Jakob an der Birs전투에서 프랑스 왕 루이11세가 되는 Dauphin이 이끄는 아르마냑군 3만과의 교전에서 그 성과를 드러냈다. 스위스 연방군의 1600여 병력은 18피트의 파이크로 무장하고 프랑스군의 중장기병에게 돌격하여 5시간동안 격전을 벌였으나 결국 후퇴해야했다. 스위스군은 포위망을 돌파하고 후퇴한 후 고립되어 괴멸되었으나, 아르마냑군의 피해는 4천에서 8천에 달했다고 알려진다.

 

스위스군은 플랑드르인들과는 달리, 방어적인 창병운용을 채택하지 않고 공세적으로 운용했다. 그들은 이후 1522년 Bicocca 전투까지, 방어가 아닌 공세적으로 적에게 전진하는 형태의 파이크운용을 지속하였다. 파이크밀집대형은 필요에 따라 hedgehog와 같이 방어에 이용될수도 있었으며, 석궁이나 장궁, 개인화기나 야포의 사격을 무시하고 적의 대열을 향해 높은 속도를 유지하면서 대열을 유지하여야만 했다. 이는 중세의 일반적인 보병의 수준으로 달성되기 어려운 것이었고, 이로 인해 스위스군은 높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스위스군의 명성을 드높이게 된 것은 부르고뉴공 샤를과의 전쟁을 거치면서였다. 부르고뉴공 샤를의 군대는 15세기 중반,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군대중 하나였다. 최초로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는 야포를 전장에 도입하였으며, 다수의 영국장궁병을 포함한 군대를 보유하였고 군사체계를 혁신한 부르고뉴군을 연이어 격파함으로서 스위스군은 본격적으로 유럽을 떨어울리는 명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1476년 Grandson전투에서 부르고뉴군을 패배시킨 스위스군은 같은 해, Morat에서 다시 부르고뉴군과 전투를 벌였다.

 

스위스군은 5000명의 파이크병과 석궁병, 핸드건으로 무장한 전위, 전방 4열을 파이크병으로 구성하고 중앙에 핼버디어가 위치한 10000명의 주력부대, 그리고 보다 소수의 핼버디어 위주로 구성된 후위부대로 나뉘어 전투에 임했다. 반면 부르고뉴군은 스위스군의 공세를 전면에서 버텨내야하는 중앙에 3천의 보병을, 그 양익에 영국 장궁병을 포함한 대규모 궁병을 배치했으며 그 좌측에는 포병진지를, 우익 끝에는 1200의 기병을 배치하였다. 2)

이미 이 전투에서 부르고뉴군은 야포와 석궁, 활을 집중운용함으로서 스위스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배치는 영국 장궁-보병전술과 유사한 면이 있다.(실제 이시점은 영국의 장궁-보병전술이 프랑스군의 야포운용을 통한 방어진지 포기유도로 인해 1450년 Formingly전투에서 분쇄된 이후였다.) 부르고뉴군은 야전축성을 통해 방어진지를 구축하였고 투사무기와 화기를 집중운용하였으나, 스위스군은 이를 극복하고 부르고뉴군을 붕괴시켰다.

 

유사한 상황, 아니, 오히려 부르고뉴군이 더 강력한 살상을 유도할 수 있고 공포를 전파할 수 있는 야포나, 개인화기, 석궁과 장궁을 집중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Hallidon Hill이나 Dupplin moor의 스코틀랜드군이나 푸와티에의 프랑스군과 달리 스위스군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창병대열을 기동간에 유지하고, 공세적으로 운용하면서, 마치 충격집단으로서의 중장기병과 같이 적의 대열을 돌파, 붕괴시키는데 사용할 수 있으며, 또한 기동하면서 측후방 노출로 인한 위협에 대응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의 팔랑스와 비교해 보면, 스위스군의 창병대형은 정방형에 가깝다. 1만명의 병력이 가로 60미터, 세로 60미터의 좁은 구획에 밀집되며, 종심의 깊이가 정면의 넓이와 일치한다. 이렇게 종심의 깊이를 깊게 하는 대형을 통해 파이크병은 17세기 총검으로 교체되기까지 측후방에 대한 기병의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파이크병 위주에서 화승총과 머스켓과 같은 병종이 중심이 되면서 이러한 대형은 측후방에 대한 위협에는 효과적이지만 화력면에서 비효율적이라는 단점이 드러났다. 10) ), 이러한 형태는 18세기 근대유럽군의 대기병 보병대형인 스퀘어대형으로 계승되게 된다.

 

스위스군의 우수성에 대하여 George Gush교수는 용기, 훈련, 잔인성을 들고 있다. 그는 스위스군이 대체로 마지막 한사람까지 싸우고, 또한 대열을 유지하면서 후퇴하거나 돌파를 감행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최초로 패닉상태에 빠진 이를 교수형에 처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훈련측면에서 간단한 방식의 훈련형태를 개별 병사들에게 병사위원회를 통해 완고한 고참병사들에 의해 전수되는 로마군과 유사한 개념이 적용되었고 또한 포로에 대해 극히 가혹한 학살을 감행함으로서 이를 극대화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Bert S Hall은 그의 저서에서, 스위스군의 사회적 특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스위스군은 지방공동체나 길드공동체에서 차출되고 많은 경우에 같은 가족이기도 했다. 파이크 훈련은 소년부터 성년에 이르기까지 실시된다. 이들은 형제 또는 이웃, 또는 단일사회계급으로 구성되고 병사들에게서 선임된 위원회가 이끌게 된다. 전장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동료인 것이다. 파이크 대형은 기동간에 발생하는 투사무기, 측면에서의 공격등 모든 피해를 대열내의 개별 병사들이 무시해야 하고 대열을 흐트리거나 도주하게 되는 패닉현상을 저지해야 한다. 스위스군은 대열내에서 서로가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관계를 지니는 대상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이들은 단체를 개인보다 우선해야 하며 자신의 생명보다도 대열을 유지하고 기율을 유지하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 3)

 

Jeremy Black은 그의 저서에서, 파이크란 무기 자체는 근본적으로 방어적으로 운용되는 특성을 지니며, 스위스군의 파이크 운용은 이러한 본질적인 운용형태와는 정반대의 특성을 지닌다고 언급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스위스군의 우수성은 파이크 운용자체보다는 무수한 피해를 감수하고 대열을 굳건히 유지하고 전진하는 용기와 기율의 측면이라는 것이다. 11)

 

이러한 측면에서 스위스군과 고대 그리스, 그리고 유사한 시기의 스코틀랜드와 플랑드르를 비교해 보면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스위스군은 정방형의 파이크대형을 기동력있게 전진시켜 적에게 공세를 가할 능력을 보유함으로서 전술적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으며, 또한 이러한 충격집단과 같은 전술로서 적의 대열을 분쇄하고, 또한 측후방에 대한 취약성을 제거함으로서 중장기병에게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고, 투사무기의 위력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장창밀집운용은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파이크라는 무기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스위스군이 그 이전부터 가졌던 동일사회계급, 동일 지역이라는 전장외적인 사회적, 인간적 관계가 16세기부터 태동하는 엄격한 군율을 통해 달성하는 군기라는 개념을 스위스군의 등뼈로서 제공이 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스와비안지역을 중심으로 징병되었던 란츠크네흐트를 비롯해, 이시대 다수의 용병들은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이후 등장하는 엄격한 군율의 시초를 이루었으며, 동시에 전장외에서의 인적, 사회적 관계를 통한 형제애를 통하여 이후 군법과 지휘체계가 제공하던 통제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후의 달성수단의 방향과는 다르지만, 스위스군은 효과적으로 전술단위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기율의 유지가 필요하다는 것, 즉 개인이 전장에서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느껴 집단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하거나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휘관들에게 알려주었다. 프랑스군이 스위스 용병들의 군사체계를 도입하고도 "동일한 원칙과 방법을 사용하지만 같은 용기는 지니지 못한" 이들로 혹평을 당한 것은 파이크의 밀집운용이라는 것 자체에 이러한 심리적 통제수단으로서의 무언가가 필요했고, 스위스 용병들은 형제애와 사회구조가 개인에게 강제하는 심리적 기제를 통하여 목적을 달성했고, 이것이 결코 쉬운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보다 개인무예로서 숙련된 핼버드나 도검류와 같은 무기에서, 개인의 무예나 육체적 능력보다는 집단으로서의 원칙과 기율에 부합되도록 하는 집단전술로서 파이크밀집대형으로 전환해가는 스위스군의 등장과 영향은, 개인무예가 전장에서 그 유효성을 상실하게 하는데 개인화기에 앞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스위스군이 높게 평가되었던 것은 그들이 무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나 육체적인 강함이 아니라, 그들의 효과적인 집단전술을 위한 심리적 수단을 통한 "용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1. William Hazlitt "The Military Capabilities of Ancient Armies"
2. Phlippe Contamine, Translated by Michael Jones, "War in the Middle Ages"
3. Bert S Hall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4. Kelly DeVrie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5. 서영교, "신라 장창당에 대한 신고찰" 경주사학 17, 경주사학회
6. Polybius, "The Histories of Polybius" translated by Evelyn S. Shuckburgh
7. Kelly DeVries, Boydell Pres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8. Dr. E.L. Skip Knox, "Europe in the Late Middle Ages"
9. Douglas Miller, G. A. Embleton, Osprey, "The Swiss At War 1300-1500"
10. Ian Heath, "The Armies of the 16th century"
11. Jeremy black, Routledge, "European warfare, 1494-1660 "


전장에서의 개인무예의 소멸: 유럽 군사사를 중점으로 - 4

 

4) 16세기 영국과 아일랜드


영국과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는, 서유럽의 군사적 변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상대적으로 16세기초부터 급속하게 일어난 서유럽 군사체계의 변화를 신속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영국은 16세기 중반까지, 아일랜드는 16세기 말에야 본격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이전까지는 개인무예라는 차원에서는 동시기 서유럽, 특히 이탈리아 전쟁을 통해서 군사체계를 혁신하고 본격적인 중앙집권화와 상비군의 구축, 그리고 화승총과 파이크중심의 보병운용이라는 과정을 거치게된 스페인과, 그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으며 교전을 벌인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에 비하여 서유럽이 집단전술위주로 전술이 전환되어진 것과는 달리, 개인무예의 필요성, 그리고 활용성을 여전히 유지하는 형태와, 기존의 전통적인 전술이 장기간 고수되었다.

 

이러한 정체는 British isles, 즉 영국제도가 유럽대륙과 바다로 인해 이격되어 있다는 점도 큰 역할을 했다고 하겠지만, 그 외에도 각 국가가 독특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술적 효용성은 군사체계를 혁신시키는 중요한 요인이지만 그 전체를 설명해줄수는 없다. 미래학자 토인비는 그의 저서 "War and civilization"에서 역사상 팽창국가를 가능케한 군사체계가 승리 이후 패배를 경험하지 않은 경우 기존 군사조직에 대한 추종을 불러와 화석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바다로 인해 외부의 위협이 제한되었던 것도 이와 관련되어있을 수 있다.

 

영국의 경우, 16세기는 튜더왕조의 시기였다. 헨리8세는 부친 헨리7세가 기초한 영국 절대왕정을 확고히 한 인물이면서, 동시에, 영국 역사상 마지막으로 정복욕을 불태운 사람이라 일컬을 만 한 인물로서, 프랑스에 대한 원정을 감행했던 그의 이후부터, 영국은 백년전쟁과 헨리8세의 치세동안 보여준 영토확장적 태도를 전환, 종교적, 전략적 사유에서 대륙에 강력한 헤게모니를 구축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을 추구하게 된다. 본격적인 이러한 태도는 엘리자베스의 시대에 확고히 형성되게 되며, 합스부르크의 헤게모니 제어를 위한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 위그노에 대한 지원으로 시현되게 된다.

 

영국은 육군체계는 굉장히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마키아벨리가 그의 이상적 군대로서 추천한 바 있고(실제 그가 모델로 삼은 로마군이 전술적으로 완성된 것은 민병으로서의 성격을 상실한 때라고 봐야하겠지만), 실제 피렌체에서 그의 조언에 따라 피렌체공화국이 구축한 5천규모의 민병대와 유사하게, 영국은 자영농과 도시민등 자유민계층을 중심으로한 민병체계를 군사체제의 핵심으로 두고 있었다.

 

영국은 1285년 제정된 윈체스터 성문법에서부터 오랜 민병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코틀랜드에서의 에드워드 3세의 승리와 백년전쟁에서의 승리를 달성해낸 기간 역시 장궁으로 무장한 민병에 있었다. 1285년 에드워드 1세는 윈체스터성문법을 통해서 활과 화살을 보유할 여유가 있는 모든 이는 활과 화살을 보유, 유지해야 한다고 공포했다. 에드워드 3세나 그의 후계자인 리처드2세 역시도 활과 화살로 무장하고 평시에 훈련하는 것을 장려했다.

이러한 오랜 민병의 전통으로 인해 헨리8세 치하의 영국은 민병중심의 육군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1511년 헨리8세는 윈체스터 성문법령을 강화할 것을 선포했으며, 그는 그의 군벌귀족들에 대한 긍정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군사력은 전적으로 지방커뮤니티에 의존되어 있었다. 16세에서 60세 이내의 모든 자유민 남성은 민병으로 복무할 의무가 있었고 통계에 의하면 30여개의 카운티에서 128250명의 병력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12) 영국은 이러한 병력을 방어에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백년전쟁에서와 같이 헨리8세의 프랑스원정에도 동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민병의 무장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 부담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당연하게도, 민병소집은 무장의 형태, 훈련수준과는 별개로 이루어졌다.

16세기초에서 중반까지 영국민병은 장궁과 빌(bill)로 무장했다. 이전에 하마한 중장기병이 담당했던 보병의 역할은 이제 빌로 무장한 민병으로 대체되었고 영국 보병대의 중핵을 이루었다. 엘리자베스의 시대가 오기 이전까지 영국군의 이러한 무장형태는 근본적인 변화를 나타내지 못하는데, 이는 프랑스나 스페인이 용병을 보병의 중핵으로 삼은 것과는 달리 자유민 민병을 군사력의 중핵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1513년 헨리8세시대의 Flodden전투와, 에드워드 6세 당시 서머셋공이 이끈 영국군이 치른 1547년의 Pinkie전투에서 잘 드러난다. 양전투 모두 이미 이 시대의 서유럽군이 파이크와 화승총이라는 무기로 신속히 전환되게된 이탈리아전쟁의 영향 이후의 시점인데도 불구하고, 영국군 보병은 거의 전적으로 장궁과 빌로 무장한 병력이 중핵을 이루었다. 헨리8세 치하에서 파이크나 화승총으로 무장한 병력은 1544년 프랑스원정당시의 1400명의 란츠크네흐트 파이크병이 포함된 8000명의 외국인 용병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10) 에드워드 6세시대의 스코틀랜드 원정기간에서도 화승총으로 무장한 병력은 스페인, 이탈리아 용병으로, 대부분이 기병이었다.

 

이러한 제한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적어도 스코틀랜드에 대해서는 성공적인 전투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1513년 Flodden에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가 이끄는 30000정도로 추정되는 스코틀랜드군은 Surrey 백작 토마스 하워드가 이끄는 15000정도의 병력과 전투를 벌였다. 12) 스코틀랜드군은 다수의 야포를 배치하고 전통적인 장창위주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고지대 스코틀랜드인(하이랜더)들이 우익에 배치되었으며 스코틀랜드군은 먼저 전투위치를 확보하여 고지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Borderer로 구성된 기병과 빌과 장궁으로 무장한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스코틀랜드군은 실제로 포병전력에서 우위에 있었고, 적어도 이시점에서 헨리8세의 주조소보다 제임스 4세의 주조소가 더 크고, 긴 포를 제작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10) 스코틀랜드 군은 당시 제임스 4세가 그의 동맹인 루이12세가 보내준 40명의 프랑스 장교들에 의해 스위스/독일식의 파이크훈련을 받았다. 실지로 스코틀랜드군은 고지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점을 포기하고 공세적인 작전행동을 감행했다.(그러나, 이 견해에 대하여 스코틀랜드군이 야포수에선 우수했으나 포병의 숙련도가 낮아 오히려 영국측 포병사격에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제임스 4세가 대응한 결과였다고 보기도 한다.)

 

영국군은 병력을 2개단위로 나누고 좌익주력부대는 Surrey 백작이, 우익은 그의 아들인 함대사령장관인 토마스가 지휘했다. 스코틀랜드군은 5개 종대로 구성되어 언덕아래쪽으로 공세를 감행했다. 기병교전으로 전투가 시작되어 좌익부터 보병의 공세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영국군 주력인 좌익이 대열을 갖추기 전에 우익을 격파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사다리꼴에 가까운 전방횡대가 좁고, 측면이 긴형태의 대열로 전진했다. 전투는 4단계 행동으로 이어졌는데, 첫째는 스코틀랜드군이, 나머지 셋은 영국군이 주도하였다. 10)

 

영국군 우익에 대한 최초 격돌은 스코틀랜드군이 승기를 잡았으나, 전면적인 붕괴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 시간적 여유동안 Surrey 백작은 신속하게 Dacre경이 지휘하는 주력부대 우익의 Borderer(국경방어를 담당하는 경기병집단)에서 분견대를 차출해 아들이 지휘하는 우익군의 노출된 측방을 엄호하도록 했다. 스코틀랜드는 추가병력을 투입해 우익군에게 공세를 감행했다. 스코틀랜드군 중앙의 제임스 4세가 이끄는 주력부대는 영국군 포병의 공격으로 인해 Surrey백작의 주력부대를 향해 공세를 시작했다. 영국 장궁병이 사격을 실시하였으나 스코틀랜드군은 갑주로 잘 무장하여(대체로 파이크병운용시 전방대열에 갑주착용을 실시했다.)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군은 의외의 산등성이와 늪지대를 거치면서 충격력을 상실하였다. 영국 좌익군의 우측 병력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스코틀랜드의 우익 고지인(하이랜더)병력을 향해 언덕을 올라가 격퇴시켰고 고지인들은 도주했다. 치열한 전투끝에, 스코틀랜드군은 최초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Surrey백작의 장남이 이끄는 영국군 우익이 후방과 측방에 공격을 가해 결국 무너져내렸다.

 

Flodden 전투는 Bill과 장궁으로 무장한 영국군이 오히려 더 선구적인 무장과 집단전술을 갖춘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한 사례이다. 영국군은 이전의 장궁집단전술의 이점을 향유하지는 못했으나, 스코틀랜드군의 야포운용의 미숙, 그리고 유리한 고지의 포기, 그리고 기동로상의 장애물이라는 적의 오류를 통해서 초기 집단전술상의 이점을 향유한 스코틀랜드군을 기병분견대운용과 측후방에 대한 타격을 통해 패배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군이 스위스군의 파이크전술을 도입했으나, 과연 스위스군에 비견할 만한 용기나 기율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영국군의 교전환경에 있어서 서유럽에 비하여 파이크전술을 수행하는데 비하여 기존의 전통적 전술이 유효한 이점이 있다는 것 역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1547년 Pinkie 전투에서도 영국군 보병은 대다수가 Bill과 장궁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서머셋 공작이 이끄는 18000에서 16000명의 영국군은 24000에서 31000으로 추정되는 스코틀랜드군과 Musselburgh에서 마주쳤다. 영국군 우측에는 늪지대가, 좌측에는 바다가 위치해 있었다. 영국군은 4000명의 맨엣암즈와 데미랜스(보다 경장이지만 갑주로 무장한 창기병), 그리고 2000명의 경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중에는 스페인 출신 지휘관 Pedro de Gamboa가 지휘하는 200여명의 이탈리아인 마상 화승총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 스코틀랜드군의 기병은 800에서 1500정도로 영국군에 비해 취약했고 저지대 파이크병외에 Flodden전투와 같이 고지대인들과 섬에서온 경장보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기병들은 전투전날 영국기병대와 교전을 벌이다 참패함으로서 심각한 타격을 입어 전투에서 별다른 활약을 할수 없었다.

 

서머셋공작은 자신이 포병전력이 충분하고 바다에는 영국함대가 포격지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군이 방어적인 전투를 감행하지 못하리라고 예상했다. 스코틀랜드군은 3개 파이크대형(전위, 주력, 후위=실지로는 전위는 우익, 주력은 중앙, 후위는 좌익을 구성했다.)로 나누어 전진을 시작했다. 전체대열의 우익에는 서부 하이랜더들을, 좌익에는 섬에서 온 병력으로 측방을 방호했다. 신속한 기습으로 인하여 스코틀랜드군은 영국군이 완전히 준비를 갖추기전에 전진을 시작했고 유리한 언덕지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이전에 고지로 진격해나가는 시간싸움이 되었다. 전진하면서 해안지대에서 영국함대의 포격을 받자 하이랜더들은 즉시 대열을 무너뜨리고 도주해버렸고 우익의 스코틀랜드 파이크대형이 중앙으로 쏠리면서 주력부대와 전위부대는 단일한 파이크대형으로 통합되었다. 혼란이 발생했지만 전진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서머셋공작은 이 돌진을 저지하고 보병과 포병이 대열을 갖추고 진지를 구축할 시간을 벌고자 했다. 그는 1600기의 맨엣암즈(당시 마갑을 캠프에 두고왔기 때문에 말에는 마갑이 장착되지 않은)와, 1800기의 데미랜스를 투입하여 이를 저지하고자 했다. 이들의 공세는 스코틀랜드 파이크대형을 무너뜨리지 못했고 수차례의 돌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기병대는 Gamboa의 마상화승총병의 엄호하에 후퇴했고 영국군 보병과 포병은 이러한 기병의 저지로 인해 진지에 배치될 여유를 얻었다.

 

접근해온 스코틀랜드 파이크밀집대형을 향해 마상화승총병들의 사격과 영국군 측방에 위치한 장궁병들의 사격이 쏟아졌다. 최악의 사태는 영국군 포병들이 근접거리에서 밀집대형을 향해 일제히 산탄사격을 감행하면서 벌어졌다. 이러한 타격으로 인해 파이크대형은 붕괴되기 시작했고, 후퇴했던 영국군 기병들이 재집결을 완료한후 돌격을 시작하자, 완전히 붕괴되었다.

 

Pinkie전투는 Flodden전투에 비하여 Bill로 무장한 전력이 파이크로 무장한 전력에게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Flodden전투 역시 그러한 도식을 제시해주는 충분한 근거일수는 없다. 단지 이 양 전투는 영국군이 시대적으로 뒤떨어진 병종구성에도 불구하고 전술적 운용에 따라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나갈 수 있었던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1549년의 Robert Kett의 반란과정에서 Pinkie전투에서 활약한 Pedro de Gaboa의 용병들이나 Conrad Pennick휘하의 란츠크네흐트들은 전통적인 민병대로 구성된 반란군을 괴멸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유럽대륙의 병종들은 John Smith경의 저서에 따르면 반란과정에서 반란군의 궁병들이 화승총병에 대해 영국지형에서 매우 유리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8세는 신성로마황제에게 2만크라운으로 스코틀랜드공격을 위한 1천명의 스페인 화승총병을 요청하거나 12), 그가 사망하기 직전에 그의 왕립군수공장에서 장궁의 두배나 되는 화승총이 생산되고 있는등, 영국의 지배자들이 서유럽의 군사적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지속적 노력이 감행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에의 요구는 16세기 중반을 넘어서야 영국의 전통적인 민병시스템은 새로운 변화에 발맞추어 1573년 Trained band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이러한 민병시스템은 부유한 런던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미 1559년 런던에서는 800명의 파이크병과 200명의 핼버디어, 그리고 400명의 개인화기로 무장한 병력을 공급할 수 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0)

 

이전의 민병시스템에서 영국군은 상비군의 성격이 없는 자유민들로 구성된 민병대에게 대열과 제식훈련, 기율이 필요한 파이크대형, 그리고 여기에 접목된 화승총병의 운용을 접목시키기 어려웠으며, 또한 이들은 용병이 아니었기에, 개인이 평시에 무기를 구매, 유지, 관리해야하는 민병대에게 있어서 평상시 사용이 가능한 Bill과 같은 폴암류나 장궁에 비해, 평시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파이크와 같은 무기는 적합하지 않았다. 때문에 영국군은 집단전술보다는 백병전에 있어 주로 Bill로 무장한 개별전사들의 전투력에 의존하는 구조를 지녀야 했다.

 

이러한 경우, 평상시 조선과 유사하게, 평상시 전쟁과 무관한 지역과, 유사시 징집가능성이 높은 지역의 군사적 역량의 차이는 높아지게 된다. 영국의 경우 Flodden전투에서 우익군을 구성한 것은 Lancashire와 Cheshire지방의 민병이었는데, 이와같이 스코틀랜드 지방에 대한 작전에 징병되는 병력이 특정지방일 경우 Kent나 Cornwall지방과 같이 남부에 위치한 경우 전력이 약체화될 수 있다. 즉 군사적 긴장상황에 있는 지역의 민병은 타국가의 용병이나 상비군과 같은 수준의 전투력을, 반면에 그렇지 않은 지역의 민병은 유명무실해지는 것이다. 송대의 민병이 오히려 중앙군인 금군보다 막강했다는 아이러니함은 이러한 영향을 대변하는 요소일 것이다.

 

서유럽의 무기체계, 전술상의 변화를 도입하고, 민병에게 개인단위의 자발적인 훈련에서 집단전술로의 이전을 꾀하기 위해서는 일정수준의 정기적 훈련과, 장비의 구입, 관리, 유지의 강제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민병시스템으로는 이러한 형태로 민병대를 유지관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Trained Band의 민병시스템은 기존의 민병체제의 전통을 살리면서, 동시에 민병을 서유럽 군사체제에 접목시키기 위한 변화를 필요로 하였다.


참고문헌

1. William Hazlitt "The Military Capabilities of Ancient Armies"
2. Phlippe Contamine, Translated by Michael Jones, "War in the Middle Ages"
3. Bert S Hall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4. Kelly DeVrie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5. 서영교, "신라 장창당에 대한 신고찰" 경주사학 17, 경주사학회
6. Polybius, "The Histories of Polybius" translated by Evelyn S. Shuckburgh
7. Kelly DeVries, Boydell Pres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8. Dr. E.L. Skip Knox, "Europe in the Late Middle Ages"
9. Douglas Miller, G. A. Embleton, Osprey, "The Swiss At War 1300-1500"
10. Ian Heath, "The Armies of the 16th century"
11. Jeremy black, Routledge, "European warfare, 1494-1660 "
12. Mark Charles Fissel, routledge "English Warfare 1511-1624"


전장에서의 개인무예의 소멸: 유럽 군사사를 중점으로 - 5


Mark Fissel은 기존의 민병체제가 Trained Band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요인으로 3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요인은 민병체제를 위한 기반이 농민병으로서의 시골지역보다는 경제적으로 성장한 도시와 마을들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12) 헨리8세의 치세에는 시골의 주택이나 농장들마다 Bill이나 장궁을 보유하고 있었다. 13) 이는 무기를 보유유지하는 개인으로서의 다수의 자영농에 영국군이 병력자원을 의존하고 있던 현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Trained Band는 근대화된 개인화기와 파이크로 무장한 병력을 필요로 했고, 이러한 무장은 기존의 개인이 구매하고 유지하고 훈련하는데 장애가 있었다. 이러한 무기를 구매하고 훈련을 위한 병력자원을 차출하고 훈련비용과 일부 급여를 제공하는 의무가 경제적으로 성장한 도시와 마을에 부여되었던 것이다. 또한 Bert S Hall에 의하면 이 시기에 신대륙에서의 은의 유입으로 인해 인플레현상이 일어나고, 또한 흑사병으로 인해 감소되었던 인구가 급성장한 결과, 노동력의 임금수준이 낮아졌다고 한다. 3) 이러한 과정에서 도시와 마을은 사회하류층들에게 Trained Band를 위한 병역의무를 강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해당하는 도시와 마을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보유무장의 수준이나 병력규모는 천차만별이었다.

 

둘째요인은 일반적인 병기가 아닌 특별한 병기(개인적 해석이라면 핼버드나 빌과 같은 폴암류나 장궁은 평상시 호신 및 사냥의 도구로서 사용될 수 있는 무기인 반면 파이크나 화승총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다. 다만 화승총의 경우 중세유럽의 단궁이 사냥도구로서 많이 퍼져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용되어지는 전통이 있었다.)를 사용하는 엘리트 병사의 육성이다. 12) 기존의 민병이 평상시 보유하고 연습하던 무기로서 장궁이나 폴암을 사용했던 것과는 달리, 영국 지배층이 필요로했던 근대적인 대륙 군사체계를 위해서는 평상시는 거의 아무런 쓸모도 없는 파이크나 화승총을 일정대열을 갖추고 훈련받아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전의 민병시스템이 무기에 따른 고려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과 차별된다.

 

셋째 요인은 과거 징병대상이 16세에서 60세라는 광범위한 대상이었던 반면, 징병대상연령이 18세에서 25세로 좁혀졌다. 이는 새로운 근대적 군사체계를 위한 훈련이 용이하게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다. 12)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영국의 Trained Band의 근대적 무장, 즉 파이크와 화승총과 같은 개인보유무장이 아닌 병기들은 지방의 길드공동체 또는 도시공동체가 구매하여 지급하고 관리해야 했다. 이러한 무장들은 자택에 보관하는 장궁이나 Bill과는 달리 교회나 별도의 건물에 통합보관되었으며 훈련기간에 개인에게 지급되었다. 다수의 비무장인들이 민병조직에 포함되었는데 장궁이나 Bill이 Trained Band의 중대 정규무장에 비포함된 16세기 말에도 여전히 이런 무장이 "Unarmed man"에 의해 들려졌으리란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지방공동체는 무기구입 및 소정의 임금을 지급하는 의무를, 국가는 전투를 위한 화약 및 병참물자를 제공하고 면세혜택을 부여하였다. 병사들에게는 채권자에 대한 보호도 약속되곤 했다. 12)

이로서, 백병전을 Bill위주로 무장하던 영국군은 본격적으로 파이크와 개인화기 위주의 전술단위로 변화하면서 집단전술 위주의 전투형태로 전환되어지게 된다. 규정대로라면 영국군 1개 중대는 150명으로 이루어지는데 45명의 파이크병, 30명의 머스켓병, 75명의 Caliver(아큐버스)병으로 구성되었다. 12)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1573년이라는 시점의 혁신이라기보다는 점진적 전개의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존의 민병구조가 혁신되기까지는 오랜시간이 걸렸다. 또한 실제로 규정된 완편편제를 구축, 유지하는 보병중대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더 적은 병력을 보유했고 더 많다고 속여서 더 많은 돈을 지휘관이 갈취했다.(이것은 당시 서유럽 대부분의 군대에서 비전투손실과 탈영, 지휘관의 부패로 인해 일어난 현상이었다.)

 

영국군에도 여전히 핼버드나 Bill로 무장한 병력이 포함되었고, 또한 투핸디드소드로 무장한 병력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전술이라기보다 개인무예적 성격을 지니는 무기들이 전술적 효용성이 있었기 때문에 유지된 것은 아니었다. 1598년 "The Theorike and Practike of Moderne Warres"를 쓴 Robert Barret은 파이크방진내에 폴암류를 배치할 필요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폴암류로 무장한 병력은 파이크방진이 붕괴된 이후에나 쓸모가 있기 때문에 쓸모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전히 다수의 저자들이 남긴 책에서는 핼버드나 빌과 같은 폴암류무기가 군기수나 군악대를 보호하는데 쓸모가 있다고 평가했다. 10)

 

영국군 중대에는 오랜 기간 Whiffler라는 투핸디드 소드로 무장한 하급장교가 배치되었다. 런던 민병대에 배치된 이들의 직무는 군율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하사관들이 이들의 직무를 대체하기 전까지 유지되었으며 사령관의 종자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1590년에 마지막으로 이들에 대한 언급이 존재하는데 극히 소수의 투핸디드소드가 기수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10)

 

16세기 후반이 되면서 핼버드는 실제 전투에 사용되기보다는 부사관의 상징적무기로 전환되었고, Bill의 비중은 신속하게 줄어들었으나 장기간 유지되었다. Bill이 장기간 유지된 이유는 어디까지나 경제적인 이유로서 런던과 같이 부유한 도시는 Bill의 비중이 적었던 반면 가난하거나 도시가 적은 Shire의 경우 Bill로 무장한 병력의 비중이 높은 편이었다. Bill은 기존의 민병들이 가택에 유지했던 병기이면서 동시에 강철제가 아니거나 극히 적은 강철이 섞인 열악한 품질이었고 George Carew경은 Bill따위는 농부들에게 팔아버리는게 최선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영국군의 전투형태는 개인무예의 영향이 큰 무기에서 집단전술과 대형위주의 훈련이 강조되는 대륙형 군사체제로 개편되어갔다. 소수의 도검류나 폴암류는 상징적인 의미를 제외하고는 야전 전투력에서 배제되었고, 이로 인하여 기존의 전통에서 영국은 본격적으로 대륙의 전술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영국은 독특한 병과를 부분적으로 유지하게 되는데, 1600년의 영국 중대의 편성사례를 보면 20명의 파이크병과 10명의 핼버디어, 6명의 Sword and Buckler병, 24명의 머스켓병과 40명의 Caliver병이다.

 

Sword and Buckler는 나무, 또는 금속제의 방패와 검으로 무장한 병력으로, 영국군은 아일랜드 반란군과의 교전과정에서 그들의 게릴라전에 대응하기 위하여 화승총으로 무장한 병력과 검과 방패로 무장한 Targetier를 혼성편재하였다. 1593년 Erne Ford전투에서 영국군은 화승총으로 무장한 병력과 Targetier를 활용하였다. 12) 아일랜드의 다수의 소택지와 작은 하천과 삼림지대에 매복병을 배치하거나 야전축성으로 저항하는 반란군에 대응하기 위해서 파이크대형보다 지형에 대한 유연성이 우수한 도검병을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이전투에서도 병력구성은 파이크병과 화승총병이 주종을 이룬다.)

그러나, 실제 Sword and buckler로 무장한 병력의 야전에서의 운용은 유격전, 정찰에서나 유용할수 있었다. 그들의 진정한 활용의 여지는 무엇보다도 공성전에서의 돌격이나 유격전이었지 야전에서는 아니었다. 마키아벨리를 포함한 다수의 인문주의자들이 로마군의 재현을 위해 갑주와 검과 방패로 무장한 병력의 유용성을 주장했지만 실제 검과 방패는 "병사"들의 무기로서는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16세기 중후반동안 네덜란드전쟁에 참여했으며 " A brief discourse of war "의 저자인 Roger Willams는 방탄성능을 달성할 정도로 방패를 제작하는 경우에 무거워서 1시간 이상 들고 있을 수 없었다고 언급한바 있다. 10) 또한 도검으로 무장한 병력은 파이크대형에 비해 기병에 취약했고 이시대에는 여전히 기병을 배제할 수 없었다.

 

때문에, 영국군 중대병력중 검과 방패로 무장한 것은 "병사"가 아닌 장교였다. 영국군의 중대지휘관인 Captain(대위라고 번역하나 중대지휘관이 적합)이나 부지휘관인 Lieutenant(중위라고 할 수 있으나 부중대장이 적합)들은 각각 상징적인 무기로 폴암류인 파르티잔이나 하프파이크등으로 무장했으나, 그들의 target(방패)를(때때로 그의 파르티잔이나 투구까지) 종자와 같은 소년들에게 들고 다니게했고 전투중에는 방패와 검으로 무장하는 것을 선호했다. 검과 방패는 중세시대부터 대체로 귀족의 무기였고(예외도 존재한다. 중세 스페인 민병이나 이탈리아 보병중에는 검과 방패로 무장한 병력이 존재했다.) 이시대에서는 발달한 스포츠로서 펜싱스쿨이 다수 만들어지고 귀족소양의 일환으로서 성장했으나, 적어도 병사들의 무기로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지는 못했다.

 

아일랜드는 16세기 말까지 서유럽의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영국도 다른 서유럽 국가에 비해 늦게 육군의 변화가 시작되었지만, 아일랜드 반란군이 기승을 올렸던 16세기 중후반에는 파이크와 화승총 위주의 병력구조가 정착되어갔다. 아일랜드군의 주력을 구성했던 것은 아일랜드 귀족들과 초기 영국인 개척자들인 앵글로-아일랜드 귀족들에게 고용된 스코틀랜드 서부해안 출신의 Galloglass들이었다. 10) 이들은 투구와 체인메일로 중무장했으며(이점이 스코틀랜드 고지대인이나 저지대인들이 보이는 특성과 구별되나 고지인들중 높은 계급의 경우 이와 유사한 무장을 했다.) 스코틀랜드 특유의 로커버액스와는 다르지만 Galloglass Axe라는 대형도끼와 투핸디드소드등으로 중무장한 이들은 서유럽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활약한 개인무예적 병종이라 할 만 하다. 이들은 초기 아일랜드 반란군 백병전력의 핵심이었으며 13세기부터 거대한 체구와 힘, 그리고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이들의 취약성은 당장 드러났다. 16세기 아일랜드 의회의장이자 아일랜드 역사가였던 Richard Stanihurst은 이들이 기병에게도, 그리고 파이크로 무장한 병력에게도 상대가 될 수 없다고 평가했다. 10) 아일랜드 반란군은 평지에서 영국군에게 대적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신속하게 인식했고 15세기 말에 최초로 등장하고 16세기 중반에는 일반화된 화승총으로 경무장 보병인 Kern들을 무장시켜 게릴라전으로 대응했다. 야전축성이나 매복의 도움을 받은 아일랜드 반란군들은 게릴라전으로 끊임없이 영국군을 괴롭혔으나, 영국군이 신중하게 정찰을 감행하고 취약한 병참능력을 가진 아일랜드군을 겨울에 작전함으로서 압박해나감으로서 이러한 게릴라전의 역량은 취약해졌다.

 

그러나, 아일랜드 귀족이며, 한때 영국군과 함께 아일랜드 반란군과 싸웠던 티론백작 Hugh O Neill이 반란에 참여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티론백작은 기존의 Galloglass들과 스코틀랜드 용병들을 파이크병으로 훈련시켰고 영국과 전쟁중이던 스페인의 장교들에게 훈련받게했다. 티론백작은 1598년 Yellow Ford전투에서 그의 파이크병을 공세적으로 운용해 영국군을 야전에서 패배시킴으로서 아일랜드군이 집단전술을 도입해서 영국군과 야전에서 상대할 수 있음을 입증시켰다. 그는 1601년 Kinsale에서 패배함으로서 반란은 종결되지만, 서유럽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개인무예위주의 백병전력을 유지하던 아일랜드에서 집단전술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승리를 거둔 것을 통해서, 어떻게, 그리고 왜 유럽 군사사에서 개인무예가 전장에서 소멸되어갔는지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례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1. William Hazlitt "The Military Capabilities of Ancient Armies"
2. Phlippe Contamine, Translated by Michael Jones, "War in the Middle Ages"
3. Bert S Hall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4. Kelly DeVrie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5. 서영교, "신라 장창당에 대한 신고찰" 경주사학 17, 경주사학회
6. Polybius, "The Histories of Polybius" translated by Evelyn S. Shuckburgh
7. Kelly DeVries, Boydell Pres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8. Dr. E.L. Skip Knox, "Europe in the Late Middle Ages"
9. Douglas Miller, G. A. Embleton, Osprey, "The Swiss At War 1300-1500"
10. Ian Heath, "The Armies of the 16th century"
11. Jeremy black, Routledge, "European warfare, 1494-1660 "
12. Mark Charles Fissel, routledge "English Warfare 1511-1624"
13. Sir Charles Oman, "A HISTORY OF THE ART OF WAR IN THE SIXTEENTH CENTURY" 288 page(William S. Fields와 David T. Hardy의 글에서 재인용)


전장에서의 개인무예의 소멸: 유럽 군사사를 중점으로 - 6

 

5) 16세기 스페인 플랑드르 주둔군 / 네덜란드군


16세기 초 이탈리아전쟁은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 도시국가와 교황, 신성로마제국과 영국, 스코틀랜드를 포함하는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었고 유럽 군사체계의 혁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쟁중 하나다. 1494년부터 1559년간의 이 전쟁과정에서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의 발루아가문간의 분쟁에 개입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하게 됨으로서 초기 아라곤왕국의 시실리를 비롯한 이탈리아지역의 부분적 영유권으로 시작되었던 스페인의 군사적 진출은 합스부르크가문이 스페인의 왕위를 확보하면서 다시 부르고뉴공국의 영토인 플랑드르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함으로서 다시 이탈리아 전쟁과정에서 명성을 떨치게 된 스페인군의 절정기를 달성케 하는 플랑드르 주둔군과, 이에 대적하여 네덜란드 독립을 위해 다시 한번의 군사적 혁신을 가능케한 네덜란드군이 활약하게 되는, 80년 전쟁, 즉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수렁에 빠져들게 된다.

 

실지로, 개인무예가 집단전술로 전환되는 측면에서 가장 가시적인 것은 스페인군의 16세기 초 이탈리아 전쟁에서의 변화이다. 레콩퀴스타를 종결지은 그라나다 전쟁의 명장 Gonsalvo de Cordova는 1495년 스페인 연합왕국의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보장받기 위하여 프랑스군에 대적하여 이탈리아로 진입했다. Oman의 저서에 의하면, 그의 휘하에는 500명의 Ginetes(투창으로 무장한 경무장 기병)과 100명의 중장기병, 그리고 극히 소수의 화승총병과 다수의 석궁병, 그리고 대다수가 아라곤출신의 검과 방패로 무장한 도검병으로 구성된 1500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1496년 Seminara에서 페르디난드 왕과 곤살로 데 코르도바가 이끄는 스페인군과 나폴리 민병들은 프랑스군 지휘관인 스코틀랜드인 D'Aubigny가 이끄는 프랑스 중장기병과 스위스 파이크병과 전투를 벌였다. 곤살로 데 코르도바는 수적우위를 믿고 전투를 원했던 페르디난드에 비해서 자신이 보유한 병력이 프랑스군에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했다. Ginetes는 무어인들과의 전투에는 적합할지 몰라도 프랑스 중장기병의 돌격에 대응할 능력이 없었고, 그의 직속 보병대는 검과 방패만으로 무장했고 수도 다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스위스 파이크병에 대적할 수 없다고 보았다. 더욱이 그는 그의 휘하에 포함된 6000명의 이탈리아 민병대에 어떤 신뢰도 주지 않았다. 결과는 그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프랑스 중장기병을 저지하지 못한 스페인 경기병대는 스페인에서 했듯이 일시적으로 물러서 교전을 회피하고자했고 이 행동에 공포에 질린 이탈리아 민병대는 무너져버렸다. 그의 보병들은 스위스군의 파이크대형을 저지할 수 없었다. 14)

 

이탈리아 전쟁을 치르기 이전의 스페인 보병대는 민병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은 그라나다 전쟁을 거치면서 귀족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왕권이 강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레콩퀴스타를 위한 대규모 병력의 필요성과 대포주조등 중앙권력의 필요성으로 인하여 왕권이 강화되었고 레콩퀴스타를 위한 거점과 병력자원을 조달하기 위해서 세금 및 자유를 보장하고 남부지역으로 이주하는 과정과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도시나 마을공동체, 의회를 활용하였다. 그라나다 전쟁기간에 1487년에는 45000명의 보병과 11000명의 경기병이 동원될 수 있었다. 3) 그러나, 그라나다 전쟁은 대규모 야전보다는 무어인 기병의 기습을 야전축성진지를 통해 방어하고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는 형태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병, 보병전력은 경무장했고 개별적으로는 강건하고 우수한 체력과 전투경험을 지녔지만, 야전전투에서 필요한 엄격한 규율과 대열유지능력과는 거리가 있었다.

 

곤잘로 데 코르도바는 Seminara에서의 패배이후 그가 익숙한 게릴라전으로 적을 끌어들였고 이탈리아 남부 Calabria지역의 산악지대에서 스위스 파이크병과의 정면교전을 철저히 회피하면서 그의 경장기병과 경보병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이후 그는 그의 병력을 재편하게 된다. 이후 이탈리아 전쟁과정과 전투사례들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본인이 쓴 "유럽 군사사의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야전에서의 삼수병 운용"의 3번챕터 첫번째 내용을 참조하기 바란다.(http://blog.naver.com/laguel/60018649281)

 

초기 곤잘로 데 코르도바의 병력편제 형태는 기존의 경무장 보병을 개혁하는데 주력하게 된다. 개인의 체력의 강건성이나 개인무예수준에 크게 영향을 받는 기존의 검과 방패로 무장한 Rondeleros가 대다수였던 보병의 병종구성은 파이크와 화승총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1505년 1000명에서 1500명으로 구성된 Colunelas편제에서 20%까지 감소하게 된다. 이탈리아 전쟁동안 Rondeleros는 단 두번의 전투로 16세기 동안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찬양받게 되는데, 특히 마키아벨리의 영향이 컸다. 1503년 Seminara근교에서 다시 일어난 곤잘로를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에서 보낸 일부 전력과 곤잘로를 패배시킨 D'Aubigny 휘하 전력과의 교전에서의 승리와 1512년 Ravenna전투에서 스페인 도검병의 분전을 근거로 마키아벨리는 고대 로마군을 재현한 병종이 가장 이상적인 군대라고 판단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전술론"에서 이상적인 군대의 구성을 10개 코호트로 구성되는 1개 로마군단을 모델로 하여 6천명의 보병으로 구성되는 "Battalion"을 10개 중대로 나누고, 10개 중대는 450명으로 구성되며 중대병력 450명중 50명이 경장병으로 화승총이나 석궁, 핼버드, 방패등으로 무장하고, 300명은 검과 방패와 갑주로 무장하며, 100명은 파이크병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15)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견해는 개인무예위주의 전투형태가 집단전술로 이전되는 과정과 얼마나 괴리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견해를 떠나서, 그는 중대병력의 9분의 1, 그것도 그중 일부만을 화승총으로 무장한 병력으로 구성함으로서 당시의 전투형태의 변화와 완전히 괴리된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당시 군사체계에 대하여 복고주의적 사고방식으로 고대의 재현만이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보는 인문주의자들이 현실속에서 발전해나가고 있는 군사체계의 현상을 자신의 견해에 맞추어 재단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는 1422년 Arbedo전투에서 용병대장 Carmagnola가 밀라노 기병대를 하마시켜 랜스를 파이크처럼 사용하여 핼버드로 무장한 스위스군을 격파한 것에 대하여 승리의 원인을 갑옷을 입었기 때문에 스위스군이 대적할 수 없었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그의 견해와는 달리, 스위스군은 이 전투에서 파이크를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전면적으로 전술형태를 바꾸게 된다.

 

그는 1503년 케리그놀라에서 유럽 군사사상 최초로 개인화기의 야전에서의 밀집운용이라는 기념비적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투 이후 Seminara에서 일어난 전투(이 전투에서 패배한 D'Aubigny군은 1496년 Seminara에서 그 스페인 도검병을, 그리고 패전하기 전 Teranova에서 스페인 본토 지원군을 재차 격파한 병력이었다.) 에 주목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1512년 Ravenna전투는 기병이 여전히 중요한 병종이며, 야전축성을 포병화력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서 현대 군사사가들이 평가하는 전투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실제 중요한 부분이 아닌 도검병이 파이크병에게 우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실제 단 두차례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러한 기록으로 인하여 다수의 저작들에서는 이를 근거로해서 검과 방패로 무장한 병력이 파이크대형에 "치명적"이었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이 두전투를 제외하고(이 두 전투도 과연 그렇게 인식되어질 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그러한 견해를 입증할만한 사례는 도검병비중의 신속한 감소로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기병이 보병에 취약하다는 일방적 결론을 그의 저서에서 내리고 있는데, 그의 견해에 의하면 과거 로마중장보병은 기병을 압도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아드리아노플 전투가 로마군이 기병에 취약하다는 평가를 내리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칸네전투나 자마전투와 같이 기병의 중요성을 확연하게 보여주는(실제 당시 기병은 16세기초의 기병에 비해 등자도, 무장수준, 마필의 수준도 떨어짐에도 불구하고)전례들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에 대한 지나친 편향적 태도로 인하여 그는 16세기에도 여전히 결정적 수단으로서 전투에 영향을 미친 기병전력에 대해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인문주의자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실제 군사편제에서 개인무예적 성격을 지니는 병종은 순식간에 화석화되었다. 1534년 본격적으로 스페인군은 16세기 초기에 구축된 기존의 Colonellas 편제를 Tercio라는 여단편제로 전환하게 된다. Tercio란 Third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3개의 Colonellas로 구성되었다는 주장, 또는 파이크와 화승총, 검이라는 3개 무기를 의미한다는 주장, 전통적인 전위, 주력, 후위와 같은 편제를 의미한다는 주장들이 다양하게 언급되어지고 있다. 1567년 플랑드르군이 탄생하게 되는 시점에 Alva대공이 네덜란드에 부임할 때 이끌고 간 전력은 4개 Tercio로서 각각 나폴리, 롬바르드, 시실리, 사르디니아 Tercio였다.(초기에는 어디서 징병, 구성되었는지에 따라 이름붙여졌다.) 10)

 

초기 Alva대공이 이끈 Tercio는 2가지 형태의 중대로 구성되었는데, 2개중대의 화승총병만으로 구성된 중대와, 10개중대의 파이크와 화승총으로 구성된 중대였다. Roger Williams는 파이크병력의 4분의 3은 파이크로 무장했으며, 4분의 1은 핼버드와 방패로 무장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10) 여기서 방패로 무장한 병력이 Rondeleos로 추정된다. 초기의 Tercio에는 소수의 Rondeleros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편제대로라면 Alva대공 휘하의 Tercio의 파이크-화승총비율은 3분의 2가 파이크병(핼버디어나 Rondeleos)이어야 하나, 실제로는 1:1정도의 비율이었다. 10) 때문에 1505년 20%정도의 비중이었던 Rondeleos는 10%이하로, 핼버드로 무장한 병력(공병들은 핼버드로 무장했기 때문에 적어도 Rondeleos보다는 수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을 제외하면 거의 미미한 수준이다.

 

플랑드르군의 스페인군 구성비율은 상당히 낮은 편으로, 6만에서 8만에 달했던 플랑드르군 중 4000명에서 1만명정도에 불과했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네덜란드인과 독일인으로 각각 1만에서 3만이상까지 달하기도 했다. 16) 그러나 플랑드르군의 스페인 지휘관들은 대체로 네덜란드의 Wallon인들을 비롯해서, 이탈리아인, 독일인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Wallon인들에 대해서는 네덜란드에서 징병되었기에 네덜란드인과의 싸움에서 별로 신뢰성이 없다고 평가되었고, 독일인들에 대해 1567년 알바대공은 스페인주재 프랑스대사에게 자신은 독일인들이 네덜란드 반군과의 친밀한 관계때문에 단지 수적인 요인외에 전투에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언급했으며, 1567년 이탈리아인들에 대한 보고서에는 스페인이 그들의 고향을 지배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기율이 결여되어 있기에 지휘관들은 단지 2선급부대로만 이탈리아인을 활용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10)

 

스페인군은 정규 장교 및 부사관외에도 비공식적인 "등뼈"가 존재했다. 영국의 Gentleman Volunteer와 같은 Gentleman계급, 또는 귀족으로서 상속받을 땅이나 재산이 없는 스페인인들이 군대에 자원하였다. 이들은 Particulares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일반 병사에 비하여 Ventaja라는 추가임금을 받았고 공식적인 직위는 없이 일반적인 병사들과 동일한 위치에서 중대전력에 배치되었다. 알바대공은 이들이야말로 전쟁에서 행동을 통해 승리를 쟁취하는 이들이며 부대에 기율을 확보하게 할 수 있는 근간으로서 이들을 보병대열에 투입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1640년 네덜란드 민정장관은 이들에 대하여 전투와 공성전에서 선두에 서는 이들이며 다른 병사들에게 빠르게 대열을 갖추고 용기를 가지고 싸우게하는 이들이라고 평가하였다. 16)

 

이들은 중세시대의 하마기사들처럼, 병사들에게 용기와 기율을 부여하는 자들이었으나, 병사들과 별개의 무장으로 분리된 존재는 아니었다. Roger Willams는 그들이 대부분 파이크로 무장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10) 이들은 공식적 장교 및 부사관이 별도의 무장을 하고 지휘통제를 하는 것과는 달리 집단의 전술단위내에서 병사의 하나로서 복무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중대지휘관이나 부지휘관이 될 수 있기를 꿈꿨는데, 대체로 플랑드르군에서는 기존의 지휘관이었던 자가 완편병력을 갖추지 못한 Tercio나 연대단위의 중대들을 통합시키는 Reformation(항명, 군율위반등에 대한 처벌목적으로 실시되기도 했다.)과정에서 타중대의 Particulares가 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았다. 이들은 자신이 포함된 대열내의 병사들의 리더로서 복무하거나 때로는 극히 소수이긴 하지만 알레한드로 파르네세 공작의 42명의 종자들처럼 복무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원자들은 영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에서도 관측되어질 수 있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이들이 개인무예를 전장에서 발휘하는 전사들이 아니라, 비공식적인 장교집단의 일원이자, 병사로서 전투에 임했다는 점이다. 집단전술이 개인무예를 전장에서 거의 배제시킴으로서 실제 이들의 무예수준은 전투에서 거의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병력을 통제하고 기율을 유지함으로서 집단전술로서의 백병전능력을 강화시키는 심리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였다는 점에서 과거 하마한 기사들과 유사하나, 기사들이 자신의 갑주와 개인무예라는 물리적 수단으로서 어깨를 마주하고 싸운 보병들과 차별화된 존재였다는 점과는 다르다. Particulares들은 단지 장교로서 복무할 경우에만 검과 방패로 무장했다. 1578년 파르네세공작과 같은 지휘관들을 비롯해서 이시대 대부분의 장교들은 검과 방패로 무장하는 것을 선호했으나, 플랑드르군내에서 방패로 무장한 병력 자체가 소수에 불과했다.

 

네덜란드군의 경우, 그것이 마키아벨리의 견해에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유일하게 검과 방패로 무장한 병력을 전장의 주요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시도가 네덜란드 군개혁의 선구자인 모리츠 왕자를 통하여 시도되었다. Nassau의 모리츠라고 불리는 이 왕자는 그의 일반적인 병력개선의 방향이 병력통제 및 운용에 효과적이며 보다 유연성이 있도록 중대규모를 감소시키는 것을 추구하였다. 1598년 네덜란드군의 150명의 중대단위는 120명으로 편제가 변화되었고, 보다 대형의 중대인 200명단위 중대는 160명으로 규모를 줄이게 되었다. 네덜란드 군 1개중대의 장교 및 하사관은 3명의 장교, 5명의 하사관과 2명의 군악대, 1명의 사무원등으로 구성되어 변하지 않았으나, 병력수가 감소함으로서 간부대 병사의 비율이 신장되었다. 1600년에 편제상 네덜란드군은 같은 병력의 스페인군에 비해 2배의 간부비율을 보였다. 10), 1941년의 대패전 이후 소련군이 자군의 병력 통제, 운용능력에 대한 불신으로 소총여단을 통해 병력단위규모를 줄임으로서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과 비견되어질 만 하다. 또한 네덜란드군은 화승총과 파이크의 중대내 비율에 있어 화승총의 비율을 높이고자 했는데, 1580년대 네덜란드군의 화승총:파이크비율은 7:4, 1590년대에는 5:3, 17세기 초에는 2:1까지 상승하였다.

 

이러한 집단전술적 혁신에도 불구하고, 모리츠는 그의 개인적 견해에 의거하여 매우 독특한 시도를 하고자 했다. 1594년 Griningen공성전에서 모리츠는 영국군 지휘관 Francis Vere와 함께 총격에 직면했으나, 방패가 두명을 덮어주었기에 부상만을 입고 생명은 건질 수 있었다. 그는 검과 방패로 무장한 병력이 파이크병보다 효과적이라는 Matthew Sutcliffe와 같은 당시의 저자들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었다. 1595년 그는 이를 실험했고, 적어도 그의 개인적인 만족을 이끌어내는 결과를 도출했다. 그는 파이크병 200명당 100명의 Targetier를 편제하여 최초 3열의 파이크대열의 절반을 이들로 편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시각은 실질적으로 네덜란드를 통치하는 네덜란드 의회에 의해 공유되어지지 못했고 기각되었다. 그는 끈질기게도, 그의 직할 호위대의 일부를 Targetier로 편성했다. 10) 그러나 이 전력이 특별한 활약을 했던 전례를 찾기는 어렵다. John Lothrop Motley는 그의 저서에서 네덜란드의 보병중대에 3인이 방패로 무장하고 있으며, 이는 지휘관이 탄환에 노출되는 것을 방호하기 위해서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17) 네덜란드 1개 중대의 장교인원은 중대지휘관, 부지휘관, 기수로 정확히 3인이므로, 장교계층의 실전무기가 대체로 검과 방패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이 방패로 무장한 3인의 병력일 것으로 보인다.

 

Targetier은 실제로, 다수의 인문주의자를 포함한 군사관련 저작에서 "Mortal to Pikeman", 즉 파이크병이란 백병전 집단전술에 대해 효과적인 병기로 기록되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주된 활약은 파이크병이 활약하기 어려운 공성전에서의 돌격, 참호나 삼림지대등에 대한 유격전수행으로서 파이크병에게 효과적이라는 야전에서의 운용을 찾아보기 어렵다. 즉 개인무예로서 고전적인 전통을 가지며, 귀족적인 스포츠로서 16세기 장교집단의 주무기로 활약한 이 무장형태는 야전에서 파이크병을 위협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러한 개인무예에 대한 집단전술의 우위는, 파이크병에 화승총병이 결합되면서 보다 신속하게 진행되었다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역할마저도, 16세기 중후반에는 공성전 외에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이는 유격전을 수행하는 주체로서 Targetier의 효용성이 극히 제한되기 때문이다. 1600년 이전까지 네덜란드 전쟁은 야전보다는 유격전 및 공성전위주로 진행되었으며, 중앙집중화된 군사체제보다는 개별 도시 및 촌락에 배치된 소수병력의 지휘관이 자체적으로 병력을 운용하고 자금을 확보하며 습격전을 벌이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때문에 실제로 Tercio와 같은 대규모 병력단위는 전투에 참여할 일이 거의 없었다. 대체로 대대적 군사행동은 파이크병에 비해 압도적으로 화승총병이 많은 비율을 가지는 1000명에서 3000명단위의 Escuadron으로 실시되었다. 15) 아일랜드에서 증명된 바와 같이, 유격전에서는 경무장 기병이나 화승총으로 무장한 경보병이 파이크병보다 효과적이었으며, 때문에 소단위 유격전에는 화승총위주의 병력이 Targetier보다 더 일반적일수밖에 없었다. 단지, 이 시점에서는 개인무예라는 측면은 아니지만 현대의 특수부대에 요구되는 경험많고 노련한 개별 병사들의 숙련도가 유격전이라는 특성상 강조되는 편이었으나, 이것은 개인무예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결론적으로 16세기 후반 유럽군사사의 핵심코드로서의 네덜란드전쟁과, 플랑드르군, 네덜란드군에게서 개인무예는 전장에서 그 가치가 거의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1. William Hazlitt "The Military Capabilities of Ancient Armies"
2. Phlippe Contamine, Translated by Michael Jones, "War in the Middle Ages"
3. Bert S Hall "Weapons and Warfare in Renaissance Europe"
4. Kelly DeVrie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5. 서영교, "신라 장창당에 대한 신고찰" 경주사학 17, 경주사학회
6. Polybius, "The Histories of Polybius" translated by Evelyn S. Shuckburgh
7. Kelly DeVries, Boydell Press, "Infantry warfar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 discipline, tactics, and technology"
8. Dr. E.L. Skip Knox, "Europe in the Late Middle Ages"
9. Douglas Miller, G. A. Embleton, Osprey, "The Swiss At War 1300-1500"
10. Ian Heath, "The Armies of the 16th century"
11. Jeremy black, Routledge, "European warfare, 1494-1660 "
12. Mark Charles Fissel, routledge "English Warfare 1511-1624"
13. Sir Charles Oman, "A HISTORY OF THE ART OF WAR IN THE SIXTEENTH CENTURY" 288 page(William S. Fields와 David T. Hardy의 글에서 재인용)
14. William H. Prescott "The History of the Reign of Ferdinand and Isabella The Catholic"
15. NICCOLO MACHIAVELLI, "THE SEVEN BOOKS ON THE ART OF WAR"
16. Geoffrey Parker, Cambridge Univercity Press "The Army of Flanders and the Spanish Road 1567-1659", Cambridge Studies in Early Modern History
17. John Lothrop Motley "History of United Netherlands, 159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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