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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의 정립 - 백병전이란 대체 무엇일까?

익명_45390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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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historywar/Nws/2629?listURI=%2Fhistorywar%2FNws

 

본인이 제시한 스레 때문에 역겔에서 며칠동안 대토론이 벌어졌군요. 그러나 이것이 백병전이라는 개념에 대한 서로간의 이해 차이 때문에 진흙탕 토론으로 번질 뻔한 일이 조금 있었던 것으로 본인의 책임을 통감합니다.

그렇다면 송태조조광윤이 조선군의 무능을 통감했던 백병전 능력, 백병전의 개념은 대체 무었일까요?

- 세계 여러 나라에 걸쳐 백병전이라는 것은 군대와 군대의 최종적인 승부 결정을 위해 거의 반드시라고도 말할 수 있을 만큼 행해져 왔습니다. 여기서 백병전이라는 것은 <냉병기를 사용한 Close-Combat> 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백병전이라는 것의 의미는 말 그대로 칼이나 창을 이용한 영거리 전투 그 이상은 아닙니다.
이것에는 기병전이나 보병전 모든 것이 다 포함되며 누가 싸우던 냉병기를 이용한 영거리 전투로 정의할수 있습니다.

제가 백병전 능력의 보완을 위해 야전축성이나 성곽을 필요로 할 것을 주장했던 만큼 지형이나 야전축성을
이용한 변수는 제외하도록 하지요.

이러한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군대는 많은 고심을 하였으며 그 발전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서양입니다. 서양은 과거 그리스-로마의 선진적인 군사제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문명이 단절되고 북방의 바이킹들에 의해 주도권을 빼앗기면서 전투양상이 원초적인 수준으로 돌아갑니다. 그 이후 백병전이라는 전투 상황에서의 승리를 위해 점진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고 결국은 세계 제일의 백병전 능력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그들을 통해 백병전 능력이란 무엇인지 보는 것이 이상적이다 하겠습니다.

가령 백병전 능력이란 또한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 그대로 <칼이나 창 등 냉병기를 사용한 영거리 전투에서 승리하는 능력>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형태가 가장 백병전 승리에 이상적이었는지 보기만 하면 됩니다.


역겔에서 백병전 능력의 유무를 따지면서 <개인의 영거리전투능력>을 곧 백병전 능력으로 직결시키시는 분들이 많으심에 조금 놀랐습니다. 백병전에서 개인무예가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유럽에서 15세기를 거치며 대부분 소멸되었습니다. 과거 로마의 예를 들자면, 켈트인들이 오랫동안 로마인들과 싸워 왔습니다만, 이들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서도 언급하고 있듯 로마인의 60cm검에 비해 거대한 90cm의 검을 한손으로 사용하고 방패를 들었으며 체격과 힘도 로마인을 압도했습니다. 이 경우 개인적인 무기 사용 능력이나 힘이라는 면에서 켈트인이 우월했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로마군은 무기의 열세와 막강한 켈트인의 파상공세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승리를 지켜냈으며 이것은 전열의 구성, 백병전에 알맞도록 진화된 로마군의 전술, 그것을 위한 무기였던 글라디우스와 필룸. 하나처럼 움직이는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등의 우월함으로 흔히 평가되고는 합니다.

이후 백병전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바로 <전열을 구성, 잘 짜여진 명령체계, 기본을 이루는 전술과 그것을 위한 병기체계>로 굳어지게 되었으며, 흔히 혼자서 뛰쳐나가기를 좋아하고 환상적인 무술실력을 선보이며 일당백으로 적을 쳐부수는 이미지로 굳어진 중세의 기사들도 사실은 전열을 구성하여야만 승리할수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는 1191년 9월 7일 벌어진 아르수프 전투에서 더욱 잘 드러납니다. 이 전투에서 기사들은 우리가 흔히 아는 영웅주의의 화신같은 모습과는 다르게 사자왕 리처드의 명령을 따르며 적의 화살공격을 침착하게 견디며 적의 기병돌격을 격퇴시키고 이후 엄청난 밀집을 통한 일제 기병 돌격을 통해 살라딘군을 참패시킵니다. 이후로도 기사들의 명성은 전장에서 전열을 구성하여 일제 돌격을 통해 적진을 붕괴시키는 능력을 통해 얻은 것이며 결코 나홀로 돌격으로 무언가를 해낸 적은 없었습니다.

이 경우 개인무예의 화신으로 알려진 중세의 기사들조차 <전열의 구성이 백병전 승리의 비결> 임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 중세시대를 지나 르네상스 시대에 달하면 유럽의 백병전 능력은 더더욱 개인무예의 수준을 떠나 <전열을 구성, 잘 짜여진 명령체계, 기본을 이루는 전술과 그것을 위한 병기체계>의 공식을 철저하게 따르게 되는데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스위스 용병단의 파이크 전술입니다. 스위스 용병단의 파이크 전술은 이후 전 유럽 군사체계의 기본이 되고 당시 1476년 Grandson전투에서 여전히 우월하다고 여겼던 기사를 격파하면서 새로운 백병전의 최강자로써 등극했습니다. 이후 파이크 대형이 백병전의 황제라는 사실은 17세기 초까지 변함없이 유지되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일본의 경우를 보지요. 일본의 파이크라 할수 있는 나가에 야리(長炳槍), 비록 유럽의 그것처럼 기병을 의식하여 만들어진 물건은 아니지만 그 형태나 운용법에 있어서 유럽의 파이크 대형과 여러모로 유사한 측면을 가집니다. 오다군의 2간 창(2間:364cm)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무기는 집단을 이루었을때 그 어느 무기보다 우월한 전투능력을 제공하고 민병들도 쉽게 배울 수 있었으며 그 길이에서 나오는 위력으로 오다, 타케다, 미요시, 아사쿠라, 아사이 등 일본의 영주들에게 급속도로 퍼진 무기입니다. 이러한 무기들은 사무라이들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는 아시가루 병력을 통해 운용되며 개인무예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일본의 백병전 풍토를 단숨에 장창 집단전 체제로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무기로써 유럽인들에게도 상당한 놀라움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제시한 조선군의 백병전 능력의 부재에 대해서 두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일본의 백병전 체계를 상회하거나 혹은 대등한 수준의 백병전 전술 체계가 있었음을 증명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저 백병전과는 상관없는 몇몇 전투를 나열하거나 개인 무예 수준의 백병전이 벌어져 소규모의 우세를 증명한 정도로는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를 뒤엎을 수는 없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화기와 투사무기를 중시하여 화기수준은 높았으나 조선군이 백병전 보병방진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검과 창은 비웃음을 당할 정도로 짧았고 대규모의 정규군이 대치한 야전에서 백병전 상황에 돌입하였을 때 우세를 유지하여 적 백병전 병과를 패퇴시킨 사례도 찾아볼수 없었고 오히려 일본군의 백병전 능력에 대하여 전율하는 실록의 기록은 많으며 이후 삼수병체계의 도입을 통해 백병전 전문 병과를 양성하려는 노력만 보아도 조선에 그럴듯한 백병전 전술이나 전문병과가 전무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조선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야전이라야 제가 이전에 조선군의 약점 보완책으로 제시했던 야전축성을 통해 우위를 확보하거나 아니면 성곽을 통해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한 정도인걸요.


결국 저의 말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백병전이란? <냉병기를 사용한 Close-Combat>
백병전 능력이란? <칼이나 창 등 냉병기를 사용한 영거리 전투에서 승리하는 능력>
유럽의 예를 통해 본 백병전에서 승리하는 비결이란? <전열을 구성, 잘 짜여진 명령체계, 기본을 이루는 전술과 그것을 위한 병기체계>

일본보다 조선이 백병전 능력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일본의 백병전 전술체계나 병장기에 대해 그 수준을 상회하거나 최소한 뒤지지 않을 만한 조선의 전술체계와 병장기를 증명하면 O.k.>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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