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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태국 무에타이로 접근하는 구한말 택견의 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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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pitbullman/223286946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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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택견을 묘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룰이다.

사실 내가 다룰 작품 속 택견은 무술이므로 룰이 정립되지 않는 배경을 먼저 깔고 어떤 식으로 룰이 정립되었다는 설정을 넣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시대별로 작중 배경으로 구상하면 되지만 룰이 정립된 상황에서의 택견을 다루는 것이 더 확실한만큼 전개에 있어 룰을 만드는 과정보다는 이런 식으로 룰을 정한다는 묘사가 더 직관적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위대태껸의 룰을 만들기 위해 송덕기의 증언을 참고한다면 모호한 느낌이 강하다.

손이 바닥에 닿으면 진다 라는 말 외에 발바닥과 손바닥으로 차는 것이라는 말이 택견의 과거 경기 관련 증언의 전부 같다.

그렇다면 이 말을 현대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내가 해석한 송덕기의 증언은 이렇다.

손이 바닥에 닿으면 진다 -> 상대가 쓰러지면서 손이 바닥에 닿으면 패배로 간주

여기서 손이 바닥에 닿는다는 것을 처음엔 손으로 바닥을 짚는 것으로 해석했지만, 위대태껸의 기술에 손을 바닥에 짚으며 쓰는 것도 있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손으로 바닥을 짚는다고 패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경기라는 특성상 손이 바닥에 닿으면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이것을 현대 복싱을 예로 들어 해석한다.

먼저 복싱의 룰을 논하지 말고 (어차피 택견이 아니므로) 복싱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본질을 해부한다.

복싱, 권투의 본질은 상대에게 자신이 힘을 강요함으로써 굴복시키는 것이다.

상대가 쓰러져야 이긴다. 혹은 상대가 궁지에 몰려 제대로 공격을 펴지 못한 채 라운드가 끝나야 이긴다.

결과적으로 둘 중 한쪽이 다른 한쪽을 공격해야 이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복싱의 패배를 결정하는 요인은 상대로부터 강요당한 힘에 의한 굴복이다.

복서가 스스로 경기를 포기하거나 세컨이 포기할 때도 있지만, 대개 승패의 결정은 상대로부터 주어진다.

레프리가 지켜보다 위험할 것 같아 경기를 스톱시키며 끝내버리거나 상대 선수에게 공격을 받고 쓰러지는 등

즉, 당사자가 직접 패배를 결정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이 논리를 송덕기 증언에 넣어 해석한다.

손이 바닥에 닿으면 진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대로 손이 바닥에 닿을 때를 뜻하지 않는다.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강요받아 의지와 상관없이 쓰러졌을 때를 뜻한다.

그래야 승패가 깔끔해진다.

위대태껸의 기술 중 손이 바닥을 짚어야 쓸 수 있는 것들을 쓴다고 패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의지대로 손을 바닥에 짚었기 때문이다. 반면 상대의 공격을 받고 쓰러져 손이 바닥에 닿을 때는 얘기가 다르다.

이건 상대의 공격을 당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바닥에 닿은 것이다.

그러니 이 모습이 연출되면 경기의 승패는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하게 된 것은 송덕기의 다른 증언이 있어서다.

송덕기는 택견 경기에서는 발바닥으로 차는 것과 주먹이 아닌 손바닥으로 치는 것을 언급했다.

그러니까 과거 진짜 택견 경기는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과격 잔혹한 것보다는 서로의 안전을 존중하는 스포츠맨쉽이 당시에 어느 정도 있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게 아니었다면 발바닥과 손바닥을 언급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주먹으로 치는 것보다 손바닥으로 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덜 다치는 건 사실이다. 맞는 상대도, 치는 상대도 모두 주먹보다 손바닥이 안전하다. 글러브가 없고 치료 수준이 부실한 과거를 감안하면 이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발바닥도 마찬가지다. 위대태껸의 기술에는 발과 다리의 다양한 부위를 쓴다.

그러나 경기에서는 발바닥으로 찬다는 것은 서로의 부상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상생공영이라기보다는 당시 태껸꾼들끼리 암묵적으로 혹은 상호 합의 하에 경기가 치러지면 불필요한 부상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선택한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발로 차서 상대를 부상 입히거나 죽게 만드는 것보다는 서로 다치지 않고 기술만을 겨뤄 승패를 가르고 거기서 인기를 얻고 다음 경기를 대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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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예로 태국의 무에타이가 있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무에타이는 시대가 흐르면서 기술적 변화가 일었다. 그 변화의 불씨는 도박에서 시작하였으며 무에타이 경기에 걸리는 도박이 커짐에 따라 해당 무에타이 선수들끼리 암묵적인 합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서로 단숨에 쓰러뜨리는 공격 위주로 싸워 부상도 많았지만, 도박이 커지면 이런 그림만 나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도박꾼들의 수익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시작하자마자 1라운드, 길어야 2라운드에 승패가 갈려버리니, 도박꾼들이 중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도박하라고 부추기는 시간이 부족했다고 한다. 1라운드 초반에 끝나거나 2라운드 가기 전에 끝나버리면 누가 이기든 상관없이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저 선수가 지금 유리하니 빨리 돈을 걸어라 식으로 부채질이 불가능해진다.

반면 라운드가 길어질수록 이런 부채질이 가능하고 여기저기 구경꾼들의 돈을 모아서 더 큰 이득을 챙기는 것이 가능해졌다. 무에타이의 도박꾼들은 이걸 노리고 선수들과 수익 일부를 나누는 등 합의하여 링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결과적으로 선수들은 자신들 경기에 걸리는 도박 자금이 많을수록 경기 후 받는 수익이 커졌고, 그걸 위해 경기를 단숨에 끝내는 것은 서로 지양하게 되었다.

그것이 무에타이 선수들끼리 주로 발을 차고 잡고 넘기는 식으로 지루한 경기를 불러왔고 오늘날 과거 무에타이 선수들과 지금의 무에타이 선수들의 기술 차이는 매우 크다며 과거보다 지금의 무에타이 수준은 퇴보했다는 평가를 받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물론 지금의 무에타이 선수들도 얼마든지 서로 단숨에 끝내는 경기를 연출할 수는 있지만, 과거에 비해 기술의 숙련도와 경험치에 변화가 생긴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게다가 무에타이 선수들이 서로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팔꿈치와 무릎, 공격적인 스타일로 초반부터 불이 붙는 전략보다 서로 킥을 주고받으면서 경기를 라운드 끝까지 싸워서 판정에서 결판을 내는 것을 많이 선택한 것은 도박 외에 다른 이유가 있다.

부상과 안전

무에타이 선수들이 서로 단숨에 끝내려고 공격을 퍼붓다 보니 부상이 심해졌다고 한다.

이걸로 먹고 살아야 하는 선수들이 초반부터 심한 부상을 당하다 보니 경기를 계속 뛰는 것이 불가능했고 은퇴가 빨라 결과적으로 손해가 컸다고 한다.

보는 사람들이야 화끈하니 재밌겠지만 싸우는 선수들은 둘 중 누군가는 혹은 둘다 처참한 부상을 당해 회복에 전념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치료비용도 많고, 다음 경기에 또 같은 부상을 당하면 선수로 생활하는 것에 불편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먹고 살려면 무에타이 선수들은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서로 싸우는 사이지만, 가능한 부상을 덜 입히고 안전하게 서로 링에서 내려오자는 합의였다.

이것을 통해 적의가 없음을 드러내고 링에서는 싸우지만 같은 선수라는 공동체 사고가 작동되어 무에타이 선수들끼리 위험한 부상을 유발하는 기술들을 적극적으로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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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런 태국의 무에타이 내부 사정을 알고 나서 한국의 태껸꾼들이 떠올랐다.

송덕기가 말한 발로 찰 때는 발바닥으로, 손으로 칠 때는 손바닥으로, 혹은 욱 해서 차지 말라는 얘기나 손이 바닥에 닿으면 진다는 얘기를 종합해볼 때 구한말 혹은 이전의 태껸꾼들도 부상을 서로 덜 입히고 안전을 위해 노력했던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얘기를 할 리는 없다.

이런 부분을 오늘날 택견의 고정관념이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상생공영이라는 고정관념이 여기서 작동될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틀린 말이다.

태껸꾼들의 저 얘기에서 상생공영을 주장하고 싶다면 현대 복싱과 태국 무에타이에도 똑같이 주장해야 한다.

상생공영의 의미를 풀어보면 상호 존대의 뜻이므로 현대 모든 스포츠에 녹아있는 사상과 같다.

그러나 택견은 이것을 마치 다른 무술에는 없는 택견만의 철학이나 사상으로 착각하고 주장한 것이 패착이다.

택견만의 뭔가를 주장하고 싶다 보니 이런 어설픈 철학이 만들어진 것이다.

알고 보면 상생공영은 철학이 아닌 그냥 보편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서로 싸우는 경기를 한다면 가급적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끝내는 것이 좋은 것이다.

직업으로 하는 선수라면 더하다.

이것을 어기는 선수가 나오는 일은 요즘 스포츠에도 많으니 과거 태껸꾼 경기에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 송덕기가 욱 해서 차지 말라고 한 것 아닐까?

경기하다 열 받는다고 세게 차거나 위험한 곳을 차서 부상자가 나오면 상대 패거리가 열 받아서 난입할 것이고 그러다 보니 서로 패싸움이 벌어지고 여기서 진정되지 않는다면 석전이 벌어지는 전개로 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태껸꾼들이 송덕기의 증언대로 서로 안전한 싸움을 원했다면 그것은 당대의 도박이 태껸 경기를 통해 횡행했을 증거라고 생각한다.

태국의 무에타이가 그러했듯 태껸도 비슷한 일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안전한 싸움을 추구하는 것이 태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태껸이라는 물건을 놓고 사용 목적에 따라 방향이 달랐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돈이 걸린 경기의 흥행을 돋구기 위해 시간을 끌수록 좋다면 상호 합의 하에 태껸꾼들은 안전한 싸움을 추구했을 것이다.

시간을 끌면서 태껸꾼들의 기술이 서로 화려해질수록 도박을 부추기는 움직임도 많았을 것이다.

반대로 돈이 걸린 경기가 아닌 어떤 이유로 서로 목숨 건 승부를 보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긴다면 태껸꾼들은 낮에 열리는 경기의 안전함보다는 둘 중 하나 죽어도 좋다는 결의에 의한 승부로 전개해야 하는 만큼 위험한 싸움을 추구했을 것이다.

그럴 때 쓴 택견이 경기에 쓴 택견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둘 다 같은 택견이었고 같은 태껸꾼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대태껸의 룰은 과거에는 이것이 룰이다 라고 정해졌다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룰이 달랐던 것이 아닌가 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는 어디까지나 사료가 부족한 택견의 과거 모습을 한국이 아닌 태국의 무에타이로 접근해본 가설일 뿐이지만 작품 속 택견의 모습을 담아내기에 논리적인 면을 갖추고 있어 이걸 선택하고 있다.

[출처] 태국 무에타이로 접근하는 구한말 택견의 룰|작성자 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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