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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명의 왜구가 단 74명의 조선군에게 패배한 을묘왜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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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60CdPfJDnN4

을묘왜변(1555년, 명종10년)의 현장은 다리 위가 아니고 남수곽 동쪽 구릉(丘陵)지대와 신산모루 일대였다. 왜구는 전남 해역에서 분탕질하다가 소득 없이 귀국하던 왜구 군단 70여척 1천여명이 을묘년 6월 화북포로 쳐들어 왔다. 이어 왜구들은 남수곽 동쪽 구릉에 망루를, 신산모루 일대에 3일간 진을 치고 성안 동태를 살피면서 결판을 내려던 참이었다. 우리로서는 제주성의 함락 직전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였지만 4인의 치마돌격대와 효용군(驍勇軍) 70인의 분전으로 왜구를 분쇄하고 승리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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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ASTqqhDkis

제주 을묘왜변에서 승전을 이끌었던 전략은 목숨 바칠 각오로 자원한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의 등장이었다. 아군은 왜구 1천여명이 진을 친 남수곽 동쪽 구릉을 중심으로 성서동격(聲西東擊)의 작전을 폈다. 6월 27일 새벽 남수과 동벽을 기어오른 엄호 부대 70명 용호군의 벼락같은 함성과 함께 동쪽에서 바람같이 나타난 4인의 치마대(馳馬隊)의 칼날아래 혼비백산한 왜구의 진지는 여지없이 파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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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돌격대는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 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등으로 4인이었다. 고작 4명이 말을 타고 적진을 누비며 개인 전술로 싸워 공을 세운 것이다.

 

정로위는 조선 중종 7년(1512)부터 광해군 무렵까지 존속한 정예 군인으로 중종 5년 (1510)에 삼포 왜란을 겪으면서 만들어졌다. 김직손(金直孫)은 김수문 목사와 고령김씨 재종간(再從間; 6촌형제)으로 목사로 부임할 때 함께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갑사(甲士)는 조선 의흥부(義興府)에 딸린 군인으로 1401년(태종 1)부터 왕권 호위를 담당하는 중앙군의 기간병인 특수 병종으로 제도화하여 엄격하게 시취되었다. 김성조는 갑사로 시취된 바 없어 단순히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甲軍, 甲兵, 甲首, 甲卒)의 뜻으로 쓰인 것 같다.

 

이영권의 『새로 쓰는 제주사』(2012)에는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가운데 보인(保人)만을 지적하여 현역군인이 아니라 현역을 돕는 예비 병력에 불과했다고 하나 갑사로 지칭한 김성조와 이희준, 보인 문시봉(文時鳳)도 무관이 아닌 한량 출신으로 돌격대를 자원하여 ‘갑사’라는 임시직을 받은 것이다. 이는 일반인들도 이 전투에 적극 참여했음을 말해준다.

출처 : 뉴스N제주(http://www.newsnjeju.com)

https://youtu.be/qxuu98qo3N4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 고려나 척계광의 원앙진 전법을 도입한 명나라군조차 14:1이라는 숫적 열세인 상황에서 이긴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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