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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서촌, 중인, 그리고 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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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대태껸 하는 갤럼인데 태껸이 흥했던 곳이라 하는 사직골, 그 일대를 포함하여 부르는 서촌에 대해 알아보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가져와 봄.

 

임란 이후 한양 도성 내 각 지역은 권력가의 대저택이나 동일직종을 가진 관직자 계층의 집단 거주지가 되면서 서로 구별되는 지역적 특색이나 생활양식을 보여주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양반 사대부계층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고 상공업의 발달, 신분제의 동요 등으로 사회분화가 진행되는 18세기 무렵에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음.

 

따라서 어디에 사는 사람이라고 하면 따로 물어볼 것도 없이 그 사람의 신분과 가문, 직업을 바로 알 수 있을 정도였는데 서촌 또한 이는 마찬가지였음.

서촌은 중인들로 대표되는 조선시대의 전문직 종사자들의 집단 거주지였고, 태껸을 하는 우리들에게는 임호 선생과 송덕기 옹으로 대표되는 웃대 태껸의 계승지로서의 의미를 가진 공간이었음.

 

하지만 여기에서 의문이 생길 수 있을 거임.

 

전문직이라 한다면 지금으로 치면 의사, 변호사, 소위 사짜가 붙는 직업들이 상당수고, 이런 직업들은 말 그대로 인생을 갈아야 그런 직종에 종사하기 위한 전문성을 얻을 수 있음. 

 

당연히 일반 양민층보다야 금전적 여유는 넘치겠지만 과연 그런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년단위의 시간을 매일같이 투자해야 하는 태껸을 익히고 그걸 명절날의 대회에까지 나가서 즐겼을 수 있었을까?

 

정답은 YES임.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태껸을 전문적으로 할 만한 중인계층이 실제로 존재했음.

 

그 중인계층이란 바로 별감(別監)이었음.

유곽쟁웅.png.jpg

신윤복의 그림 유곽쟁웅에 나오는 왼쪽의 화려한 빨간 옷과 노란 갓을 입고 싸움을 말리고 있는 인물이 바로 별감인데, 처음 듣는 사람은 좀 생소할 수 있는 호칭이니 과연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에 대한 설명들을 가져왔음.

 

별감(別監)은 궁중에서 잡직(雜職)을 맡아 하는 기관인 액정서(掖庭署) 소속으로 왕의 경호를 담당하였다. 직책과 소속에 따라 대전별감, 중궁전별감, 세자궁별감, 세손궁별감, 처소별감 등이 있다.

 

별감은 특히 왕이나 세자가 행차할 때에 왕의 가마 옆을 시위하였다. 시위 업무를 수행할 때의 예복은 참여하는 행사에 따라 단령·직령·철릭(帖裏) 등을 입었고, 궐내에서 일상적으로 생활할 때는 직령을 입고 머리에는 초립(草笠)이나 건(巾)을 썼다. 왕과 왕세자를 시위하는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할 때는 보편적으로 건을 쓰고 단령을 입었으며, 왕의 교외 행차 시 옆에서 시위할 때는 초립을 쓰고 철릭을 입었다. 평상시에는 일반적인 포 종류인 직령을 착용하였다. 별감은 품계가 주어지는 관직이 아닌 잡직이었으나 궁중의 크고 작은 행사에 관여하여 실질적인 권세를 누렸기에 복식도 화려하였고, 왕과도 가까워 모습과 기개가 당당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행사 시 기생을 수습하고 안배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기방(妓房)의 실질 운영권을 장악했을 정도로 기세가 등등하였고, 당대 유행을 주도한 사교계의 대표 주자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09_0050_0010_0040&whereStr=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09_0070_0040

https://news.mt.co.kr/mtview.php?no=2017110110330892927

https://shindonga.donga.com/Library/3/02/13/102191/4

 

정리하자면 별감이란 조선 색주가의 큰 손이자 조선의 패션을 선도하는 멋쟁이들이었고, 왕의 경호를 담당할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에 다다르면 궁녀들을 별감 가문에서 주로 배출할 정도로 왕가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으면서도 동시에 왕실의 종친마저 몰매를 놓을 정도로 막 나가는 사람들이었던 것임.

 

특히 태껸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한량과 기생의 이야기들. 태껸꾼들이 한양의 색주가들을 관리했다는 이야기들은 당대의 유력 태껸꾼들이 별감직을 가졌다고 가정하면 전부 말이 됨.

 

사처소 기부 중에서도 가장 끗발이 있는 것이 바로 별감이며, 별감 중에서도 대전별감이 으뜸이었다. 기생은 ‘조(操)’라는 것이 있어 양반이나 부호의 명을 거스를 수는 있어도 대전별감의 명령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승지나 참판 등 고위관료 외에는 기생에게 ‘해라’를 못하고 모두 ‘하게’를 하였는데, 유일하게 액정서의 사알이나 사약은 ‘해라’를 할 수 있었다. 별감과 기생은 이처럼 특수한 관계에 있었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기생과 별감의 특수관계에 대해 언급된 부분을 살펴보면 더욱 태껸꾼들과 한양 색주가들 사이의 관련성을 쉽게 떠올릴 수 있으며 중인들이 태껸을 하였다는 증언과 기록은 이와 같이 의외로운 곳들에서 교차검증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임.

 

개인적으로 굉장히 의아한 건 문화재 태껸단체를 비롯해서 태껸을 연구할만한 단체들이 별감이라는 직책에 대해선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연구와 조명을 하지 않았다는 점 같음.

 

조선이라는 신분제 사회에서 양반이 되지 못하였음에도 권력의 중심에 드나들 수 있었던, 또한 돈과 여자, 그리고 패션을 아우르는 풍류의 상징이었던 이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창작 컨텐츠 소재로는 이만큼 흥미로운 집단도 찾기 어려울 것 같은데 안타깝다고 해야 하려나. 대략 그런 느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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