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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겨울』 - 4장 : 숨겨진 전장

익명_7047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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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장의 잔해 속으로 발을 들인 순간,

공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차가운 쇳내, 오래된 피냄새, 그리고 땅 밑 어딘가에서 꿈틀거리는 음산한 기운。

 

세라는 미세한 긴장을 느끼며 주위를 살폈다。

도윤도 본능적으로 발끝에 힘을 주며 경계태세에 들어섰다。

 

그때였다。

 

철골 구조물의 그늘 아래서,

수십 개의 그림자가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망토를 두른 무리들。

낡은 총과 도검, 쇠사슬을 든 채, 그들은 조용히 두 사람을 포위했다。

 

선두에 선 사내가 입을 열었다。

 

"여긴 돌아갈 수 없는 땅이다."

 

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낮았다。

오랜 세월 생존을 위해 싸워온 자만이 지닐 수 있는 깊은 음색이었다。

 

도윤이 발끝을 살짝 돌리며 묻었다。

 

"우린 싸우러 온 게 아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리더격인 사내가 걸음을 옮겼다。

세라는 품속의 책을 꺼내 손에 쥐었다。

세라의 맑은 눈동자가 빛나며  무장한 사람들의 보폭, 자세, 숨결의 리듬을 빠르게 읽어냈다。

 

난잡하지 않다。

 

그들의 움직임은 단순한 약탈자의 것이 아니었다。

서로의 위치를 지키며, 공격과 방어를 자연스럽게 교환하는 고도의 전술적 움직임。

 

그리고 그들의 눈빛

패배자가 아니라, 잊혀진 전사의 눈이었다。

 

세라는 짧게, 조용히 말했다。

 

"너희들은……유진과 함께 싸웠던 자들이구나."

 

순간, 무리 전체가 숨을 삼켰다。

 

리더가 세라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 깊은 곳에서 오래된 기억이 번뜩였다。

 

"……유진을 알고 있나?"

 

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도 입을 열었다。

 

"우린 그를 찾고 있어.

그가 남긴 길을……따르고 싶어."

 

짧은 침묵 끝에, 리더는 총구를 내렸다。

 

그의 동료들도 긴장을 풀며, 경계태세를 해제했다。

 

그리고――

 

리더는, 오래도록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곳……유진이 휩쓸었던 전장은 인간끼리의 싸움이 아니었다."

 

쇳소리 같은 바람이 투기장을 스쳤다。

 

"우린, 문명의 잔재와 싸웠다."

 

세라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기계……인가?"

 

리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가 무너지기 직전, 인간은 전쟁을 끝장내기 위해, 스스로를 대체할 무기를 만들었어. 자율병기, 전투AI, 강화인간 프로젝트……그 괴물들이 이 땅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타들어가는 모닥불처럼 탄식했다。

 

"인간들은 그들을 통제할 수 없었고, 결국 서로를 파괴하기 시작했지. 우리는 그 잔재와 싸웠어.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이 아닌 것들과."

 

도윤이 숨을 삼켰다。

 

세라는 가만히,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

 

리더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권력자들은 이 사실을 숨겼다. 그들은 옛 기술의 일부를 손에 넣었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것을 이용해 이 땅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그리고 유진은, 그걸 부수려 했다."

 

세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파편처럼 흩어졌던 정보들이, 이제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를 없앤 건가."

 

리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모든 답이었다。

 

세라는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너희가 지켜온 이야기……잊지 않을게."

 

리더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세라와 도윤은 다시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확실한 목표를 품고。

 

권력자들을 만나 숨겨진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리고 문명의 잔재를 끝내기 위해。

 

밤바람이 투기장의 폐허를 휘감았다。

 

두 개의 그림자가

어둠을 가르며 묵묵히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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