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법도 있는 석전', 편싸움 이야기
안녕하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여러분의 택견(태껸, Taekkyeon) 빌런. 커피크림우유입니닷!

오늘은 제가 택견과 관련된 여러 역사적 자료들을 탐구하다가 수집하게 된 내용 가운데 굉장히 흥미로운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며
구한말 시기 작성된 외국인 선교사들의 후기나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잡지, 신문기사와 같은 여러 문헌 자료들을 통해 교차검증이 가능한 한양 지역 특유의 법도 있는 석전 문화. 『편싸움』에 대해 여러분과 공유해 보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이렇게 헐레벌떡 찾아왔습니다.
글의 순서는 대략, 석전이 무엇인가? 사서에 남은 석전 이야기, 그리고 구한말 시기 외국인들이 남긴 편싸움에 대한 기록 등으로 이어질 예정이니
즐겁게 읽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1. 석전은 무엇인가?

석전(石戰)은 의미 그대로 '돌로 하는 전쟁'을 뜻하는 한반도 각 지역에서 행해진 민속 놀이이자 세시 풍속입니다.
단옷날이나 정월 대보름과 같은 전통적인 명절에 주로 행해졌으며, 작게는 동리 대 동리. 한양이나 평양 같은 대도시에선 천명 단위나 많으면 만명 단위까지 모여
10대 초의 어린아이~청장년층 남성들이 사람 주먹만한 짱돌을 서로에게 던져대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무릿매(슬링)에 재어 던지고, 방패와 몽둥이를 들고 육박전을 벌이기까지 하는.
단어 그대로 전쟁(戰)이란 표현이 조금도 과하지 않던, 조상님들의 1년치 도파민을 한 방에 충족시키는 놀이(?)였습니닷.
당연히 짱돌을 슬링에 재어 던지고, 몽둥이로 마빡을 깨 버리는 특성상 석전이 끝났다 하면 어디가 깨지고 부러지는 건 예사요, 영 좋지 않은 곳을 맞아 고자가 되거나 사람이 죽는 경우도 왕왕 있었지만.

(??? : 으아니 의사양반..!)
테토력 넘치는 우리의 조상님들께선 "...뭐, 안타깝게 된 거지." 하고 쿨하게 넘겼을 뿐더러,
관에서 또한 석전 과정에서 사람이 죽거나 가옥이 상하는 것은 으레 있는 일로 치부하여 죄를 주지 않았다 합니다.
다만 높으신 분들의 입장에선 열심히 농사짓고 세금 납부해야 할 SCV가 지들끼리 돌 던지고 몽둥이질 하다 몇 기씩 펑 하고 터져 버리는 찐빠가 해마다 벌어지는 꼴(...)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석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이따금 인명피해를 구실 삼아 석전을 금한다는 명령을 내리곤 했지만 정작 민간에선 이를 씹고(...) 열심히 석전을 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구한말 시기까지 조상님들의 도파민을 책임지던 석전은 다수의 인원이 군집할 수밖에 없다는 특성상 만세 운동과 같은 대규모 반일운동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인해
일제 강점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소멸 단계로 진입.
해방 이후 6.25로 이어지는 혼란기가 거기에 마침표를 찍어, 이제는 기록으로밖에 남지 않은 비운의 민속 놀이가 된 것이 바로 석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 사서를 통해 확인하는 석전의 기록들
한국사에 있어 최초로 석전이 묘사된 시기는 삼국시대로, 《수서》 [고구려전]에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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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매년 왕이 친람하는 가운데 군중들이 두 패로 나뉘어 석전을 진행하였다는 것인데, 놀이가 끝나면 왕이 옷을 물에 던진다는 묘사를 보면 일종의 제물이 연상되는 느낌도 있는 바.
단순한 세시 풍속이었다기보단 어떤 제례적인 의미가 있는 행사였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 않나 합니다.
그리고 이후 석전이 문헌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고려 후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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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1354년 충목왕이 단옷날에 척석희(擲石戱: 돌을 던지는 놀이)를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기록이나 1374년 공민왕이 격구와 석전을 금지시켰다는 기록.
반대로 우왕 같은 경우 누가 폭군 아니랄까봐 석전을 매우 좋아해, 하루는 석전에서 돌을 잘 던지는 사람 몇을 친히 불러 술과 몽둥이를 하사하고 기예를 마음껏 발휘하게 하였다는 기록 등이 《고려사》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이미 고려 후기를 기준으로 Part 1에서 서술한 것과 같은, 돌과 몽둥이 전부를 사용하는 방식의 석전이 최소한 개성 인근 지역에서는 보편화 되었음을 짐작 가능케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러한 방식의 석전은 군사적으로도 이용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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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창자 태조 이성계는 1394년 대규모 척석희를 열고 석전에 능한 이들을 모집하여 이들로 척석군(擲石軍)을 조직.
당시 한반도의 해안 지역에서 기승을 부리던 왜구들을 아래의 기록들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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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석군과 갑사 등을 동원하여 소탕하였으며,
이렇듯 전문 석전꾼들로 조직된 척석군은 조선 초기 왕실의 직속 부대로서 왜구 소탕에 참여하는 한편으로 왕실이 주최하는 프로 석전 경기의 주역으로서 왕실의 인사들을 즐겁게 만드는 일종의 엔터테인먼트적인 성격을 가진 부대이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이들의 정예함 만큼은 정말로 진또배기였던 모양인데, 이들의 전투력을 보여주는 한 가지 아주 재미있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습니다.
바야흐로 때는 1421년 5월 4일.
감기 몸살에 걸려 휴양차 이천 온천에서 휴식을 취하고 돌아온 태종이 문득 석전이 보고 싶어 아들인 세종에게 석전을 열고 함께 구경을 갔으면 좋겠다고 하였던 바.
그러나 아버지완 달리 딱히 석전에 관심이 없던 세종이 태종의 권유를 거절하자, 이에 살짝 뿔이 난 태종은 병조판서 조말생을 불러 넌지시 이렇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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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쉽게 말해
"야, 말생아. 너 국방부 장관이니까 석전이 저얼~대로 놀이가 아니라 군사 훈련인 것 정도는 알지? 그래서 내가 꼭 석전 좀 봐야 쓰겠는데 아들내미가 말을 안 듣는다. 그렇다고 혼자 보러 가면 말동무도 없어서 영 재미도 없을 것 같고, 넌 어떻게 생각하냐?"
라고 현직 국방부장관을 불러다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1401년 과거 급제 이후 태종 아래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해, 어언 20년간 궁에서 출세 가도를 달리던 조말생은 찰떡같이 전직 상사의 의중을 파악하고 이렇게 답변합니다.
“신 등의 의사도 또한 그러합니다. 전하께서 혼자 가시고 주상께서 따라 가시지 아니하시면, 실로 편하지 못합니다.“

사실 이는 세종 입장에선 상당히 도발적인 한마디였는데, 다시 말해 전직 상사의 비위를 맞추겠답시고 현직 상사인 본인한테
"너님 아빠가 원하는 대로 석전 열어주고 같이 가서 구경 안 하면 아버지 심사가 편하지 못하실 것 같대요. 불효 자식 되기 싫으시면... 알죠?"
라는 유교 국가 최대의 가불기를 걸어버린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 허허 이새끼가...?)
이에 세종이 마지못하여 태종을 받들고 종루(鍾樓)에 행차하여 종친과 병조의 당상관들과 함께 석전을 열었는데, 이때 동원된 병력이 바로 방패(防牌) 300여명과 척석군 150여명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방패란 태종 시기 새롭게 조직된 중앙군으로, 평시에는 왕을 시위(侍衛)하고 전장에선 진의 바깥 부분에 늘어서는 부대였으며

왕을 시위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상당한 정예병으로써 신분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단정한 외모(왕을 시위해야 하므로)와 무예 실력만을 보고 채용이 되었던 이들이었습니다.
실제 이들 가운데 결원이 생기자 수박희를 열어 연달아 3인과 겨루어 승리한 이들을 특채하였다는 실록의 기록이 있기도 했지요.
어쨌든 이들이 아무리 정예하다 한들 종목 자체가 석전이다 보니 아무래도 프로 석전꾼들로 구성된 척석군보다야 잘 못할 것이라 판단을 했는지 방패 300인 VS 척석군 150인으로 인원 배분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돈의문 방향에 포진한 척석군과 흥인문 쪽에 진을 친 방패군이 개전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함성을 내지르며 서로에게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어 육박전을 벌이기 시작하자 삽시간에 종루 앞은 양측 도합 450인의 군병들이 뒤엉키는 전장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개꿀잼 이벤트가 벌어지는데 구경이 빠질쏘냐?
종로 사람들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구경을 하는 가운데 마침내 맞붙은 근위대 vs 근위대의 불꽃 튀는 빅 매치!
하지만 이게 웬걸, 숫자로는 2배나 되는 방패가 고작 150인의 척석군에게 밀려 번번히 패퇴를 하는 일방적인 결과가 나오고 말자 태종의 미간이 삽시간에 구겨지고 맙니다.

(....시방 지금 뭐하냐 너희들?)
자신의 제위기에 만든 근위대가, 아무리 상대가 석전의 프로라지만 절반 밖에 안 되는 숫자한테 번번이 박살이 나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석전에 참여해 방패를 지휘하던 무장들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 : 상왕 전하의 앞에서 번번히 패배한 굴욕. 우리 무장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이래 뵈도 가별초 시절부터의 짬밥을 자랑하던 방패군 측의 무장들의 입장에선 절반 밖에 안 되는 숫자의 인원한테. 그것도 자신들의 옛 상관인 태종 뿐만이 아니라 종로의 뭇 백성들 앞에서 자신들이 지휘하는 부대가 번번이 깨지는 모습을 보인 꼴인지라 자존심에 거하게 스크래치가 가고도 남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한바탕 깨지고 만 방패군이 재집결해, 다시 석전을 시작하자....

"저 종간나 아새끼들 기병으로 싹 다 밀어버리라!!!!"
연속된 패배에 마침내 눈이 돌아가 버린 방패의 지휘관들이 아주 작당을 하여 기마대를 이끌고 척석군을 향해 기병 돌격을 벌이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맙니다.
당연히 척석군을 지휘하는 지휘관들의 입장에선 "마 니 똘개이가????" 가 입에서 절로 튀어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니, 석전에서 몇 번 졌다고 기병 돌격을 벌이는 미친놈들이 진짜 있다고???

그런데 더욱 골 때리는 것은 저 기병 돌격이 프랑스의 산악사단... 아니,
척석군의 벌떼같이 쏟아지는 투석에 막히다 못해 아주 개같이 깨졌다는 사실입니다.

(진짜 이렇게 추할 수가 있나 싶은 수준의 참패...)
더욱 어처구니 없는 건 이걸로도 모자라 이징옥의 형 이징석은 아예 말까지 빼았겨 척석군들이 빼앗은 말을 태종에게 끌고 와 바쳤으니,
그 꼴을 바라보던 태종의 입장에선 기가 막히다 못해 절로 탄식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아니, 반칙을 저질렀으면 이기기라도 하던가!
기병 돌격까지 박은 주제에 이기기는 커녕 오히려 말까지 빼앗기다니, 이런 망신이 대체 어디 있답니까?
그래도 내 제위기에 만든 근위대고, 가별초 시절부터 함께 한 모지리들이라고. 태종은 얼굴에 돌을 맞아 피투성이가 된 총제 하경복을 누(樓)로 불러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는가를 살피는 한편 만신창이가 된 방패군들을 불러 대체 왜 쪽도 못 쓰고 진 건지를 묻자 그 대답이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그래, 공격 다운 공격 한 번을 못해보고 어찌하여 패했느냐?”
“저녁노을이 눈부시게 비쳐오고 바람과 티끌이 얼굴에 가득히 날아와서 돌을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실록에 이렇게 적혀 있음(...)
“....그렇다면 진영을 바꾸어 겨뤄보도록 하라.”

그야말로 실소가 절로 나오는 수준의 변명이었지만 최소한의 면이라도 세워 주려는 심산이었는지, 태종은 방패들의 아우성을 가납하여 부대의 위치를 교환함은 물론 투석을 금지하여 두 부대가 오직 몽둥이만 가지고 맞붙게 만들었습니다.
숫자도 2배고, 거기다 척석군의 장기인 투석까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말 그대로 할 수 있는 편애란 편애는 전부 보여준 셈입니다.

(솔직히 이쯤 되면 이기겠지?)
그런데 웃긴 건 태종이 이렇게까지 해줬는데도 또 다시 방패가 척석군에게 깨강정이 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또 졌어!!)
상술하였듯 수적으로 우위임은 물론이요,
심지어 몽둥이만 들고 싸우게 만들었는데도 척석군의 기세에 눌려 또 다시 방패가 패퇴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젠 황망함을 넘어서 아예 빡이 쳐 버린 태종은

라고 일갈하였는데,
숫자로 따지면 340 vs 150이 된 판이었는데도 이쯤 되면 다들 예상하시겠지만 앞장서서 싸우는 자는 새롭게 추가된 척석군 40인 뿐이었으며
방패 300인은 석전이 다시 시작되자마자 냅다 도망가 숨거나(...) 그나마 자리를 지키는 이들조차도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뒤에서 함성을 지르며 응원(...)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 한심함을 넘어 참담하기까지 한 모습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태종은
“...맞아서 넘어진 사람은 다시 치지 말라. 죽거나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라는 말과 함께 의원(醫員)에게 명하여 다친 자를 돌보아 치료하게 하였으며, 땅거미가 짙어지는 저녁 무렵 마침내 강무(석전)은 끝을 맞이하게 되었죠.

(실록에 남지는 않았지만 아마 저 석전에 참여한 방패 300인의 운명은....)
이 일화에서 조선의 근위대였던 방패가 보인 추태에 가까운 모습은 어찌 보면 사기가 꺾인 군대가 얼마나 무능력해지는가의 교과서적인 예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당시 척석군의 군율과 전투력이 얼마나 엄정한 것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임과 동시에 석전이 배양할 수 있는 전투력이 결코 낮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서양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서도 투석병은 군의 정식 편제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아예 전문 용병으로 고용될 만큼 전장에서의 수요가 적지 않은 병종이었으며,
조선 또한 삼포왜란에서 안동의 석전꾼들이 돌팔매를 이용해 왜구를 격퇴한 사례나,
임진왜란 때엔 죽령 방면의 방어를 명받은 경상좌방어사 성응길이 긴급 소집한 안동 석전꾼들로 안동에 접근하던 일본군 2군 선견대를 격퇴해 사흘 이상의 시간을 벌자 초조해진 가토 기요마사가 길을 바꿔 1군이 통과한 조령으로 향하게 만드는 등.
역사서에 남은 이러한 사례들을 제외하고서도 고대 시절부터 한반도 각지에서 성행하였던 석전은 외세의 침입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써 군/민 양쪽에서 꾸준하게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측이 가능하며,

비록 조선 중기 이후 화약무기가 대중화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투석의 군사적인 입지가 줄어들게 되었지만 민간 차원에서는 여전히 석전은 인기가 많은 놀이(?) 였기에
구한말 시기에 다다라선 조선의 두 대도시 한양과 평양, 이 두 지역이 석전으로 유명한 지역이 되어 후술할 외국인 선교사나 여행객 등의 다양한 기록 자료로 남게 되었죠.
3. 구한말 한양 지역 특유의 석전, 편싸움의 이모저모
상술한 바와 같이 구한말 시기의 조선에서 석전으로 유명한 지역은 조선의 수도 한양과 조선 제 2의 도시였던 평양이었습니다.

(한양 vs 평양. 오랜 경쟁의식을 가진 한반도의 두 도시)
당시의 기록을 살펴 보면 지역 감정으로 상호 라이벌리티가 찍혀 있던 두 도시 답게 석전을 치루는 방식이 조금씩 상이하거나 각 도시의 석전꾼들끼리 서로를 비하하는 뉘앙스의 서술도 나오는 등. 여러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이 있기도 합니다만,
해당 내용들을 하나하나 서술하기 시작하면 안 그래도 긴 글이 두 배는 더 길어질 듯하니(...) 평양의 석전은 비교를 위한 대조군 정도로만 사용하기로 하고 오늘은 한양의 석전 방식인 『편싸움』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긴 글은 읽기 힘들테니, 이 나의 배려요~)
일단 한양의 석전 문화와 관련된 기록을 확인하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돌을 던지는 행위】 만큼이나 【근접전을 중시】했다는 점이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일례로 아예 '석전향'이라는 별명마저 가져,
몸에 석전을 하다 난 상처가 없으면 사내 취급조차 받을 수 없었다는 평양 지역의 석전과 관련된 기록을 확인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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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들과 같이 '돌을 던지고 맞추는' 투석전에 좀 더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양에서의 석전(편싸움)과 관련된 기록들 같은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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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한 내용과 같이 투석 뿐만이 아니라 『몽둥이를 들고 백병전을 벌이는 행위』 그 자체에 상당한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을 확인 가능합니다.
실제로 한양의 편싸움에 대해 서술한 구한말 당시의 기록들을 살펴 보면 투석은 당연히 편싸움 내내 계속되는 행위이지만 편싸움을 끝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백병전을 통해 상대 진영을 패주시켜 전장에서 이탈시키는 것'이라는 묘사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며,
한양의 군민들 또한 아래의 서술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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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지역의 석전 방식을 편싸움, 편전(便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일반적인 석전과 엄하게 구별했다는 점은 실제 당시 한양에서 치루어졌던 석전이 타 지역과는 남다른 부분이 있었다는 점을 반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백병전 중시 성향』 때문인지, 한양과 그 인근 지역에선
'싸움 실력이 좋거나 편싸움을 잘 하는 전문 싸움꾼들'을 마을 단위로 고용해 먹여 살리다 매해 정월에 열리는 편싸움, 또는 마을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격투 시합에서 동원하는.
일종의 마을/지역 단위의 대전사(代戰士/Champion) 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당대의 기록에 언급된 마을 단위로 고용된 전문 싸움꾼들은 중세 서양의 편력기사나 일본의 낭인들과 같이 스스로의 싸움기술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던 이들로, 개중 편전 실력(투석, 몽둥이질 등)이 특히 좋은 이들은 『매질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습니다.
편전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한양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한 매질꾼들의 인기는 엄청나, 『헌코』, 『방갓』, 『붕어』, 『보라족기』 와 같이 아예 별명으로 통하던 매질꾼들 마저 있었을 뿐더러, 어떤 이들은 명성을 얻기 위해 일부러 편전판에 나막신을 신고 나와 어그로를 끄는 경우마저 있었다고 하니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아이돌(?) 내지는 UFC 선수들과 같은 인기를 누리던 인물들이었던 셈이죠.

그리고 이러한 전문 편전꾼들이 활약하고 명성을 얻을 수 있던 것은
한양의 편싸움이 단순한 단체전이 아닌 의례적 결투와 집단전이 동시에 존재하며,
양쪽 본부(本部)에는 이른바 모사(謀士)가 있었고, 구호소(救護所)도 있어 전체적인 작전을 진두지휘하고, 부상자를 수용해 응급처치를 해 주는 시설까지 마련되어 있던.
매우 전문적이고 '법도 있는' 행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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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UFC 경기에서와 같은 선수 사이의 트래시 토크까지 있었다 하니, ㄹㅇ 개꿀잼 이벤트였던 게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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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편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1대1 매치나,
편싸움 도중 기타 여러 이유로 전투가 소강 상태에 들어서면 각 진영의 전문 편전꾼(매질꾼)들이 앞에 나와 일기토를 벌여 다시금 분위기를 끌어 올리고.
심지어 부상 시 응급처치를 진행하는 구호소가 존재하기까지 하였으니, 1년치 도파민을 정월의 편전판에서 충족시키던 당시 한양 사람들의 입장에선 편전이란 도저히 인기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는 대규모 축제이자 원한다면 직접 참여까지 가능한 참여형 엔터테인먼트였던 것이죠.

(비유하면 1년에 한번씩 치뤄지는 WWE? UFC? 행사인데, 내가 직접 링 위로 뛰어들어서 한 판을 벌일 수도 있는 구조라는 거임!)
거기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 한양 지역에서도
『사대문 안(성내)』과 『한강 포구(강대)』 사이에 지역감정에 기반한 라이벌리티가 찍혀 있었고,
편싸움에서 장기로 삼는 부분과 사용하는 무기, 심지어 사용하는 전술까지 서로 상당한 차이가 났다는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시기 출간된 잡지인 《별건곤 제26호》 윤백일, 편싸홈, 朝鮮의 正月노리, 그리고 1941년 간행된 조광(朝光) 잡지 7권 4호 '조선무예와 경기를 말하는 좌담회'에 서술된
성내(城內) 매질꾼과 강대(江帶) 매질꾼의 특징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컨대 성내 매질꾼들은 상대적으로 강대 매질꾼들보다 정면 싸움은 약하지만
『지형지물을 이용한 끊임없는 소부대 전술 기동』과 발차기(택견?!)로 대표 되는 적극적 육탄전을 감행하여 정면 싸움에 강한 강대 편쌈패를 사방에서 흔들어 무너뜨리는.
상당히 『근대 군사적인』 전술을 구사했고,

(이것은 한양 도성 내에 다수의 군영들이 몰려 있었던 영향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강대 매질꾼들은 『야구빠따와 거의 같거나 더 긴 길이의 몽둥이와 강한 완력을 이용.』
조폭 영화 등에서 흔히 나오는 것과 같이 "자 드가자-!!!" 하는 함성과 함께 집단 돌격을 벌여 성내 편쌈패를 충격력으로 무너뜨리는
『보다 중세적인』 전술을 장기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한양이라는 대범주에 속해 있으면서도 성내와 강대. 두 지역의 무기, 특징, 전술의 차이가 발생한 이유로 가장 유력하게 추정되는 것은
바로 성내와 강대 지역의 직업군과 기저 문화가 달랐기 때문으로,
특히 강대 같은 경우 한양의 외항 역할을 하였던 지역으로써 조선 팔도에서 밀려드는 세곡과 온갖 귀중품을 한양으로 운송하기 위한 중간 기착지였기에

하역 등 육체 노동을 주업으로 삼는 날품팔이들과 홍등가, 도박장 등을 관리하는 왈자.
굿을 해주거나 비방을 해 주며 먹고 사는 무당, 박수들.
한탕을 노리는 도박꾼.
법에 저촉되는 장물을 거래하는 장물아비 등.
소위 아래의 5주 문화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번영하는 항만과 거기에 딸린 특유의 어둠이 공존하는 일종의 항만 느와르의 스테레오 타입과도 같은 지역이었습니다.

이렇듯 사대부와 중인, 상공업자, 그리고 다수의 군영들이 한 데 밀집하여 전형적인 수도 도시 문화를 바탕에 깔면서도 각 계층의 거주 지역에 따라 풍습이 확확 갈리던 성내 지역과는 또 다른.
강대 지역 특유의 항만+하류층 문화를 가졌던 것이 편싸움 방식에 있어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흥미롭게도 조선 후기의 강대 지역에선 동시대 조선의 타 지역에선 쉬이 찾아보기 어려운 의형제 문화(유협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다 합니다.)
여담이지만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구한말 당시의 편전과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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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있는데,
성 밖 사람 특유의 성 안 사람(브루주아지)에 대한 적대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실제로 조선 후기쯤 가면 시전 상인이나 훈련도감 등에 속한 군교가 대놓고 나루터를 통해 들어오는 물건을 빼앗거나, 상품의 가격을 헐값에 후려치는 경우가 워낙 잦아 강대 지역에선 상당한 앙심을 품고 있었다 합니다.)
어쨌든 글이 너무 길어진다 싶기에 이만 슬슬 요약을 하자면,
1. 한양의 편싸움은 소위 투석 위주의 일반적인 석전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결투/투석/백병전을 망라한 혼합 전투이자, 전문 진행 요원과 스타 플레이어까지 존재하던 대규모 엔터테인먼트였다.
2. 한양 인근 지역의 각 동리들은 동리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마을을 대표하여 싸워줄 전문 싸움꾼을 고용했으며, 그들은 각 동리의 대전사이자 편싸움에서의 '스타 플레이어'로서 한양 군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3. 한양 안에서도 사대문 안(성내)과 한강변의 포구 지역(강대) 사이에 지역색과 신분/이권 문제로 인해 발생한 라이벌리티가 존재했으며, 이 두 지역의 사용 무기, 전술, 장기가 각기 달랐다.
4. “엎어진 사람은 더 때리지 않는다”는 불문율과 본부, 모사, 구호소가 있는. 나름의 법도가 존재하는 '통제된 폭력의 장'이었다.
정도가 될 수 있을 듯합니닷!!!
마지막으로 이 글을 적기 위해 석전/편싸움과 관련된 구한말 시기의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들었던 생각에 대해 짧게 이야기 하면,
상당히 많은 분들이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중 하나인 "평화의 민족."이란 프레임이 실은 얼마나 허구적이고 왜곡된 관념에 불과한가, 라는 점이었습니다.
본문에 하나하나 전부 서술하기엔 사족에 가깝거나 글이 너무 길어지는 감이 있어 넣지 못했으나,
제가 조사 가운데 확인할 수 있던 자료 중엔 구한말 당시 한양의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약 15일 동안은 사실상 퍼지 데이에 가까운 수준의 사적 폭력이 관습적으로 용인되는 기간이었다는 충격적인 기록은 물론이요,
심지어 고작 8~9살 짜리 아이들마저 부모의 부추김을 받고 편전 판에 나와, 같은 또래 아이들에게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이 권장되는.
"ㅅㅂ 이게 무슨 세기말 아포칼립스여?" 싶은 수준의 자료들마저 존재했거든요.
당장 본문 내내 서술한 편싸움만 하더라도 매 해 상당한 수의 사상자를 발생 시키는 더 없이 폭력적인 이벤트였음에도 불구하고 온 한양 사람들이 이것에 열광하고,
구경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용맹과 남성성을 드러내는 무대로 편싸움을 적극 활용하였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결국 우리가 가진 여러 통념들이란 사실 '현대인의 관점'이라는 렌즈에 의해 한 차례 걸러진 것일 수밖에 없으며,
과거를 바라볼 땐 일단 그 렌즈를 벗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노력하는 것이 의도치 않게 발생할 수 있는 왜곡을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아직 적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지만, 이미 길어도 너무 긴 글이 되어버린 감이 있으므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고.
지금까지 이 긴 글을 따라와 주신 독자님들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커피크림우유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닷!
끄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