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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LH (2) - 봉오동부터 용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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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LH 링크 모음
PJLH (1) - 여섯 명의 임호


(본 글은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현욱과 태경이 LA를 방문한 까닭은

그들의 스승이자 송덕기의 가장 오랜 제자

고용우가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경은 비행기에서 구성한 가설을 바탕으로

고용우에게 임호, 송덕기, 만주 등에 대해 질문했고,

뜻밖의 답을 받는다.

 

"어~ 할아버지도 만주에 다녀오셨지."

 

서울 토박이로 알려진 송덕기가

만주를 방문했다는 증언은 새로운 정보다.

그는 무슨 연유로, 얼마동안 만주에 다녀왔을까?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어도

둘의 의문을 자극하기엔 충분했기에,

 

태경은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역사 관련 데이터베이스를 탐색했다.

 

큰 소득없이 한 달이 지날 즈음,

현욱은 외사촌들과 모임을 가졌고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는 봉오동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홍범도, 김좌진 장군이 벌인 게릴라 전투.

 

너도 나도 역사교과서에서 본

딱 그 정도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봉오동의 실상은

우리의 상상을 가뿐히 뛰어넘고,

그 내막에는 최우삼 일가의 희생이 자리한다.

 

최우삼은 간도 연변의 도태(道台)였다.

도태는 중국 지방 관리직의 명칭이다.

 

청나라 말, 그는 혼란한 정세를 틈타

간도가 조선 영토임을 선포한다.

 

당연히 청나라와의 무력충돌이 발생했고,

최우삼은 패배하여 국내로 도주한다.

 

이때 그는 어떤 무술 고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고,

그 고수는 최우삼의 집에 함께 거주하며

최우삼의 자식들에게 무술을 전수한다.

 

최우삼은 슬하에 사형제를 두었고,

그 중 셋은 장성하여 중국 군관으로 입대한다.

첫째부터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둘째 최운산은 뛰어난 무술실력으로

중국 군벌 장작림의 목숨을 수 차례 구해

그의 큰 신임을 얻어 군사훈련을 담당한다.

 

최운산은 본인만의 사병 부대를 운영했고,

장작림의 허가 하에 중국군을 떠나

이들을 이끌고 봉오동으로 향한다.

 

최씨 일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부였고,

관련 일화는 다음과 같다:

 

- 첫째 최진동은 양부로부터 9천만 평의 땅을 물려받았고,

- 이를 팔아 봉오동 일대를 사들였다.

 

- 둘째 최운산은 간도지방의 토지정리 담당관이었다.

- 이를 이용해 간도 땅을 싼 값에 사들였는데, 해당 면적이 부산시의 6배였다.

 

최씨 일가는 자신의 사재를 모두 털어

봉오동 일대 땅을 매입했고,

콩기름, 국수, 비누, 성냥 등 생필품 공장을 건설하여

봉오동 군사기지의 주요 수입원으로 활용했다.

 

그들은 소련군에 소를 수백마리씩 납품하여

맥심 기관총과 러시아제 소총을 구입하는 한편,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위해

연병장 3000평과 막사 2000평을 건설했다.

 

어느덧 봉오동은 최씨 집안의 집성촌이자,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인 군사기지로 변모했다.

 

 

봉오동은 조선 땅에서 두만강만 건너면

바로 당도할 수 있는 위치다.

 

소문을 들은 조선의 지사들은

속속들이 봉오동으로 집결하였고,

여인들은 밤낮없이 재봉틀을 돌려

군복을 제작했다.

 

즉, 봉오동은 북간도 지방의

무장독립전쟁의 본거지이며,

 

봉오동 전투 역시

소수의 의병대가 펼친 게릴라 작전이 아닌

장기간 계획된 독립전쟁의 일환이다.

 

본 내용은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의 활동으로

 2018년경이 되어서야 수면 위로 떠올랐으며,

 현재도 활발히 후속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왜 이야기가 갑자기

임호에서 봉오동으로 넘어갔나 의아할텐데,

 

현욱의 외가 장손이 족보를 통해 확인한 바,

봉오동 전투의 첫 총성을 울린 인물이

 

공현욱의 외증조

최호림의 아버지

 

최명극이기 때문이다.

 

<23년 11월 14일>

 

봉오동과 최운산의 일대기는

프로젝트 임호에 더욱 명료하고 확장된 관점을 제공했고,

추후 서술할 내용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자. 다시 임호로 돌아가자.

 

 

무장독립운동가 2번 임호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 연길 국자가(연변 중심 도시)에서 순경이자 기자로 활동

- 한인사회당 창립에 참여

- 니항부대 중대장으로 일본군과 전투

- 러시아와 만주에서 고려혁명군 모집

- 연길에서 김사국과 교육운동 참여 

- 간도교육협회 조직을 주도

- 국민대표회의에서 이승만, 안창호, 이시영 등의 비밀 명령을 받고 고려공산당 간부들과 비밀회의 개최

- 적기단 집행위원 활동

- 김원봉, 이동휘 등 무장독립운동가와 함께 대한독립맹진결사대 조직 후 조선 내 활동 협의

 

한편, 용정의 교육자 3번 임호는:

- 용정의 동흥중학교, 영신중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 교육

-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에 의해 국민대표로 선임되었으나 거절  

 

2번 임호와 3번 임호는

- 활동 지역 및 내용이 중첩되고

- 특히 1923년 상하이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한다는

- 매우 희소한 행적이 공통된다는 점에서

-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증가한다.

 

2번 임호는 ‘한인사회당’의 창립멤버인데,

이는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자

무장독립운동의 한 획을 긋는 집단이다.

 

3번 임호가 근무한 동흥, 영신중학교 역시

강한 민족운동 기풍과 더불어 

사회주의적 기조가 강했던

북간도 지역 항일투쟁의 초석이다.

 

또한 2번 임호가 주도해서 설립한 간도교육협회는

3번 임호가 활동한 동흥중, 영신중을 포괄한다.

 

결정적으로 2번 임호는 

연길(연변)에서 김사국과 교육운동을 진행하는데,

이는 종교재단이 설립한 학교의 종교교육을 

마르크스주의로 비판하는 내용이며, 

그 내용이 3번 임호의 교육내용과 동일하다.

 

즉, 2번 임호와 3번 임호는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흥미로운 점은 두 임호의 행적이

봉오동 관련 인물들과 교차한다는 점이다.

 

2번 임호는 통신원 시절 연길의 순경으로 위장취업하는데,

봉오동 총사령관 최진동이 당시 주변 지역인 왕청현의 순경국장이다.

 

3번 임호가 동흥중학교 교사일때,

최명극은 동흥중학교의 자금모집책이다.

 

 

현재 우리는 6명의 임호 중에서

2번 임호와 3번 임호가

동일인물이라는 추론에 다다랐다.

 

사회주의 계열 임호는 

무장독립투사이자 교육자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과연 이 임호는

송덕기의 스승이자 태껸의 명인, 

1번 임호와 같은 인물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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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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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1,2부 나눠질 것 같은데 1부만 6개월 이상 걸립니다. 길게 보시죠!
20:30
1시간 전
에디터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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