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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 권법이 생각보다 더더더 인기 없었던 거 같다.

익명_323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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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ugakkwon.com/taekkyeon/254573

 

지난번에 쓴 글이랑 결론은 같은데 추가적인 근거를 발견해서 보강함.

 

軍兵柳葉箭鳥銃两技中 從自願 本國釰用釰提督釰雙釰偃月刀藤牌六▣中一技 從自願 竹長槍木長槍旗槍挾刀狼筅鐺鈀六技中一技 從自願

步鞭棍拳法捧三技中一技 從自願 ○牟釰手則倭釰交戰銑刀三技加試

유엽전과 조총의 2기 중 원하는 것 1기, 본국검, 용검, 제독검, 쌍검, 언월도, 등패의 6기 중 원하는 1기, 죽장창, 목장창, 기창, 협도, 낭선, 당파의 6기 중 원하는 1기, 보편곤, 권법, 봉의 3기 중 원하는 1기를 시험볼 수 있고, 모검수(牟劍手)는 곧 왜검, 교전, 예도의 3기를 시험볼 수 있다.

 

정조 시절 금위영에서 정기적으로 무예 수준 체크하려고 치르는 시험인 중순(中旬)의 군영등록을 살펴보면 권법은 제식무술이지만 필수는 아니었던 걸로 보임.

 

그리고 정해은이라는 국방부 연구원이 쓴 「18세기 무예 보급에 대한 새로운 검토  :  『御營廳中旬謄錄』을 중심으로」 논문에서 군영등록 응시과목이랑 합격자들 통계 낸 거 있음.

 

https://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1a0202e37d52c72d&control_no=690aaea0139398be47de9c1710b0298d&keyword=%EF%BD%A218%EC%84%B8%EA%B8%B0%20%EB%AC%B4%EC%98%88%EB%B3%B4%EA%B8%89%EC%97%90%20%EB%8C%80%ED%95%9C%20%EC%83%88%EB%A1%9C%EC%9A%B4%20%EA%B2%80%ED%86%A0%20-%E5%BE%A1%E7%87%9F%E5%BB%B3%E4%B8%AD%E6%97%AC%E8%AC%84%E9%8C%84%EC%9D%84%20%EC%A4%91%EC%8B%AC%EC%9C%BC%EB%A1%9C%EF%BD%A3

 

수량적 지표는 원문에서 알아서들 보시고 중요한 사실만 뽑아보자면

 

1) 통지권법은 오군영 내에서도 널리 수행된 게 아니고 장용영과 훈련도감에서만 거의 수행됐다. 나머지 군영은 전수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2) 모든 군영 통틀어서 합격자 비율이 권법이 30%대, 검술류가 60%대로 대부분을 차지함. (다만 수어청처럼 월도 합격자 100%의 예외가 있으나 전체 비중 8% 따리)

3) 고위 장교들은 활쏘기 비중이 높고 권법, 검술 같은 백병전용 무예 비중은 극히 적음. 하위 군졸일수록 무예로 많이 합격하고 상을 받음. 고위 장교들은 백병전 과목을 아예 응시조차 않은 것으로 보임.

 

먼저 1)의 의의를 보자면 지난 글에도 말했듯이 무예도보통지 권법편 서문 보면 '이 새끼들 기술 10개나 빼먹고 2인이서 합도 안 맞춰서 애들 놀이처럼 변했다'고 까고 있거든?

 

근데 무예도보통지 편찬에 참여한 백동수가 장용영 출신임.

 

그렇다는 건 장용영과 훈련도감에서조차 권법을 그냥 점수따기용으로만 대충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

 

이전까지는 통지권법이 제식무술이라 전국의 군영에서 (제대로는 안 했어도) 널리 수행됐을 거라 봤는데, 실제로는 한양 내 군영 중에서도 2군영, 심지어 그중 장용영은 정조 죽고 해체되니 훈련도감에서만 대충대충 하고 있었단 거지.

 

정조가 팍팍 밀어줘서 엘리트 of 엘리트만 모이던 장용영도 이 지경이었으니 한 끗발 밀렸던 훈련도감은 뻔할 뻔자고.

 

택견은 그래도 한양도성 전반에 걸치고 사대문 바깥에서도 그럭저럭 하는 정황이 보이는데 통지권법은 그보다 훨씬 더 좁은 범위와 적은 인원들에 의해서만 수행되었다는 거.

 

이러니 통지권법의 흔적을 택견에서 하나도 찾을 수 없던 게 당연함.

 

현대로 치면 수방사 일부 부대만 가라로 대충하던 무술이 타 부대 무술에 영향을 끼칠 수 있나. 지난글에 통지권법을 군대태권도에 비유했는데 그보다도 더 못한 급이었던 것.

 

이 경향은 정조 시대만 국한된 게 아니고 19세기까지 쭉 이어진 걸로 보인다.

 

통지 편찬으로 군용무술도 재정비하고 군영도 전면개편하면서 빠릿하게 군제개혁하던 정조 시대에도 이미 창, 봉, 낭선 같은 장병기술은 아무도 안 하고, 쉽고 간단하고 돈 안 드는 권법, 쌍수도, 제독검만 했는데 세도정치와 삼정문란으로 군기가 무너질 대로 무너지는 19세기는 하물며...

 

 

그리고 2)를 보면 하급무관들은 군영을 안 가리고 검술을 중시했는데(수어청 월도 100%인데 월도도 검으로 분류됨) 택견의 고대세나 수벽치기의 손기술이 검술에서 왔다는 기록에 그런 경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3)을 보면 고위 무관들은 권법이든 검술이든 무예 단련 자체를 기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건 조선시대 내내 유지된 일관된 경향이라 뭐 이상할 것도 없다.

 

대체로 조선의 상무적인 기풍은 중인~하급무관 계층에 한정해서 유지됐던 것으로 보임.

 

택견을 흔히 선비무예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중인무예(...)에 가까웠단 거지. 택견판을 이끌던 주축이 한성 내의 무예별감들이었는데 중인 계급이 진출할 수 있는 가장 최고위 자리가 별감이었으니. 

 

이러니 공식 기록이나 고위 관료들 문집에서 택견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도 설명됨. 양반들이 양인보다 더 멸시한 게 중인들이거든. 

 

검술을 소재로 한 조선 후기 도검문학들이 고위 사대부들이 즐기던 한시보다는 중인 이하 계층이 즐기던 소설 같은 패관문학 형식으로 유행한 것도 마찬가지.

 

정리하자면

a) 통지권법은 말로만 제식이지 조선군의 일부 of 일부만 수행했다. 택견 수박 씨름이 진짜 군용무술.

b) 고위 무관들은 생각보다 더 병신이었음. 무술은 철저하게 중인급 계층의 문화.

c) 후기 조선군은 의외로 검술 많이 좋아함. 맨손무술에도 그게 반영.

d) 택견은 외래 영향 덜 받은 찐전통.

 

놀이론 주장하던 사람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무술론 주장하던 사람들도 대개 조선시대부터 상무적 기풍이 이어져 온 걸 강조하던 편인데

 

그게 오히려 택견의 정체성 찾기에 더 방해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정조 시절에는 좀 멀쩡했을 거라 생각하잖아 보통. 근데 그때부터 답도 없이 무너져 있던 거...

뭐 택견을 군용무술이라 하자니 통지권법이랑 엮여서 중국 묻을까봐 꺼림칙해하던 사람들은 좋을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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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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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익명_005333
윤곽이 슬슬 나오는구만.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무예도보통지가 검술 빼면 사실상 말만 제식에 가까웠단 얘기가 되는 거네... 군제 개혁 돌렸다는 정조 시절 오군영도 저 모양인데 지방군은...ㅋㅋㅋㅋㅋㅋ
18:00
11시간 전
2등 익명_323211 작성자
아 그러고보니 중순시험 저거 절대평가던데 통지권법은 선택과목이란 말이지? 그리고 여러 해 동안 응시율 추이가 유지되는 걸 보면 과목 편중현상에 대해 딱히 제동 거는 무빙도 없음. 그렇다면 통지권법이 진짜 기초제식으로 퍼져 있었다면 꿀빨려는 날먹충들이 군영별로 고르게 나타나야 할 텐데 권법 응시자가 장용영과 훈련도감에 지나치게 쏠려 있음. 그 말은 뭐다? 나머지 군영은 통지권법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을 거다...
19:03
10시간 전
양반들이 중인들을 멸시한 이유가 뭐임?
22:30
6시간 전
양반 계층은 너무 흔해지고 몰락해가는데 경제력 갖춘 중인들이 양반 지위를 위협해서. 근세기에 기존 귀족 계급이 상공업으로 부를 쌓은 신흥 상공업자 전문직 계급 경계하고 멸시하는 흐름은 전세계 공통이었지.
01:07
4시간 전
익명_709871
애초에 상업을 천시했으니까ㅋㅋ
조선시대 중인들은 지금으로 치면 전문직들에 ceo들 삐까리임
역관들도 사무역이나 밀수로 돈 많이만졌고
05:02
16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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