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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전투능력과 무술의 관계, 근접전투능력을 가진 병사란

익명_2900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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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전투능력과 무술의 관계와 대중들의 오해, 근접전투능력을 가진 병사란 무엇인지에 관해 짧은 글을 써 보았습니다.

우선 근대 이전시대 전투에 있어서 근접전투능력과 근접전투능력을 가진 병사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근접전투능력을 각 개인의 악과 깡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거나 타고난 신력과 용기만 있으면 된다고 보는 경향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근대 이전 전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집단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집단전투체제입니다. 기마전술을 사용하는 몽골이나 유목민족이든 정주국가의 보병군대이든 전투에 있어서 각 개인은 자신이 속한 분대, 소대, 대대의 전체적인 움직임 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근접전투에 있어서 개인의 능력은 타고난 신력과 용기만 있으면 되는 것인가? 그건 아닙니다. 전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해 내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기술’이 필요하고 그 기술을 연습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기술과 훈련을 통해 개인이 체득한 근접전투능력을 이 글에서는 편의상 ‘전투기술’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 시민군이라고 평소에 그냥 놀고 먹다가 전쟁 때에만 모여서 전투를 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평소 철처한 군사훈련(단검을 이용한 근접전투 훈련, 필룸을 이용한 투창 연습 등)을 받았고 그러한 군사훈련을 통해 천하무적 로마군단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밀집대형에서 자신의 위치를 끝까지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군기와 군법등의 요소와는 또 별개의 문제입니다.
전투기술이라는 토대 위에 군기와 군법이 더해져야 비로소 진정한 전투력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조선시대에 있어서 전투기술이란 어떤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전투기술과 ‘무술’을 동일시하는 분위기가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투기술로서의 ‘무술’과 개인의 호신과 수양을 위한 ‘무술’은 구별되어 져야 합니다.
한국 전통 무술계를 지배하는 한 권의 책은 정조시대에 편찬된 ‘무예도보통지’라는 무술서적입니다.
무예도보통지는 정조 당시 병사의 훈련에 필요한 무술 기법 24가지를 정리한 종합 무술 서적으로 현대로 치면 ‘전투 교본’과 같은 책입니다. 이 책에 수록된 무술들 중에는 개인의 호신을 위한 ‘무술’도 포함되어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과 목적은 군인을 훈련시키기 위한 ‘전투기술을 위한 무술’입니다.
그런데 이런 무술이 현대 한국 무술계에서는 개인의 호신을 위한 ‘무술’로 둔갑(?)하면서 무예도보통지 역시 군대의 ‘전투교본’이 아닌 ‘무예비급’인양 호도되고 있습니다.
이런 인식은 근접전투능력에 필요한 ‘군대 무술’과 개인 무술을 혼동하게 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TV나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두 군대의 군인이 마구 얽혀 이단엽차기와 화려한 검술로 적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는 장군들의 모습을 통해 더욱 왜곡된 모습을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예도보통지나 그 이전 무예서적인 ‘무예제보’ ‘무예신보’등은 모두 각 개인 병사들의 근접전투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전투 기술’을 담은 ‘전투 교본’입니다.

조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교본화 된 근접전투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런 가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들로는 일전에 제가 쓴 글에도 나와 있듯이 최초로 중국의 근접전투기술을 정리한 한교의 ‘무예제보’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재인용을 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우리나라는 해방(海方)에 치우쳐 있어 예로부터 전해오는 것이 다만 궁시 한 기예만 있고 칼과 창은 단지 그 기기(器機)만 있고 도리어 그 익혀 쓰는 방법이 없다. 말 위에서 창을 쓰는 것은 비록 무과 시험장에서 쓰이지만 그 방도도 상세히 갖추어져 있지 않으므로 칼과 창이 버려진 무기가 된 지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왜군과 대진할 때 왜군이 갑자기 죽기를 각오하고 돌진하면 우리 군사는 비록 창을 잡고 칼을 차고 있더라도 칼은 칼집에서 뽑을 겨를이 없고 창은 겨루어 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인 채로 적의 칼날에 꺾여버리니, 이는 모두 칼과 창을 익히는 방법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정황증거로는 임진왜란 이전까지 실시된 무과시험의 과목에 ‘근접전투능력’을 측정하는 과목은 기창을 하나 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실시된 무과시험 종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사(步射), 기사(騎射), 기창(騎槍), 격구(擊毬) 등입니다. 보사와 기사는 거리별로 세부 규정이 있으나 본 글과는 관련이 없으니 세부 사항은 제외합니다.
기병의 경우 기사, 기창을 근접전투능력이라고 쳐줘도 보병의 경우는 아예 해당항목 자체가 없습니다.
무과시험은 장교용이라고 치고 넘어가서 일반 보병에 해당하는 정병(正兵)이나 대졸(隊卒), 팽배(彭排)수의 경우에도 보사와 달리기, 체력 측정만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달리기와 체력이 있으면 근접전투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싸움’ 실력도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본 글에서는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배양된 ‘기술’을 ‘근접전투능력’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해당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중국과 일본의 근접전투기술에 눈을 뜨게 되었고 두 나라의 근접전투의 ‘기술’을 전수받기 위한 노력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이전의 제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kr.dcinside7.imagesearch.yahoo.com/zb40/zboard.php?id=history&page=1&sn1=&divpage=4&banner=&sn=on&ss=off&sc=off&keyword=我行&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9755

이렇게 전수받은 기예들이 ‘쌍수도’ ‘예도(조선세법)’ ‘제독검’ ‘낭선’ ‘당파’, ‘장창’, ‘등패’ 등의 근접전투기술들입니다.
이 기예들을 현대적으로 보면 개인의 호신을 위한 ‘무술’이지만 당시 조선에서의 시각은 ‘근접전투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필요한 전투기술’이었고 이 기술을 배운 병사들을 ‘살수(殺手)’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전투기술을 가진 살수는 당시 조선의 새로운 전술체계인 삼수병제도의 구성에 있어서빠져서는 안 되는 필수요소들이었습니다.
살수들이 빠졌을 때 발생하는 문제가 바로 심하전투나 쌍령전투와 같은 패배입니다.
삼수병제도를 이용한 절강병법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장창’ ‘등패’ ‘당파’와 같은 근접전투기술을 가진 병사가 있어야 하며 단순히 힘과 용기만 가지고 있는 병사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근접전투능력을 가진 병사란 단순한 무용(武勇)을 가진 병사가 아닌 전투를 하기 위한 전술에 필요한 ‘전투기술을 가진 병사’를 뜻하는 것입니다.

 

참고...이 글은 디시역겔에 올린 글을 퍼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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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시인사이드 역사겔러리에서 "조선군이 10만양병설을 받아들였다면" 이라는 논지로 글이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조선군의 제승방략체계가 가동되고, 10만양병이 현실화되었더라도 조선군이 끝끝내 떨쳐낼수 없는, 결정적 승리를 거머쥐기 어려운 문제를 설명했고, 그것에 대한 리플을 정리하여 올린 글이지요.


하지만 역시 조선군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던지 많은 다양한 토론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그 논쟁의 촉발점이 된 본인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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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중국 다음으로 다양한 화기를 운용하여 임진왜란에서 그 역량을 보여준 군대입니다. 그에 비하면 일본군은 대형화기의 운용 경험이 전무하다시피하고 일반적으로 화승총과 대구경 총인 대통(大筒:오오즈쯔)정도를 운용하여, 화기의 위력 자체는 조선보다 낮은 것이 많았습니다. 이것만 본다면 조선군의 방어체계가 제대로 가동되기만 하였더라면, 임진왜란때 압도적인 위력으로 일본군을 제압하였을 거라는 것에 많은 분들이 동의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군은 16세기 말의 전쟁터에서 결정적인 요소를 하나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시대는 활은 물론이고 조총을 비롯해 대포와 같은 중화기조차도 전투에서 백병전에 의한 종결이라는 공식을 바꿔놓지는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조선군의 동원문제나, 제승방략 체계의 붕괴는 차지하고서라도 단순히 군대의 질만 놓고 본다면 조선군이 화약무기와 장사정병기의 비중은 압도적으로 높으나 역시 최종적으로는 백병전으로 전투를 종료했고 아시아보다 훨씬 진보된 당시 유럽도 백병전에 의한 전투 종결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역시 백병전 역량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 점에서 볼때 백병전 역량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의 우세입니다. 일본은 나가에야리와 같은 초장축 장창을 집단운용하였고 개개인의 검술이나 군대로써의 규율도 매우 잘 잡혀있는 등 유럽인들조차 놀랄 정도의 백병전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모든 전투가 백병전으로 종결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는 상상 이상의 메리트이죠. 그에 비해 조선군은 장사정무기에 지나치리만큼 의존하는 성향을 보였으며 백병전에 있어서 취약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습니다. 당연히 장창방진 집단기동이나 규율문제에 대해서도 미비했구요. 결국은 압도적인 화기운용의 묘를 살리는 길인데...

"조선군은 성에 들어가면 호랑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점은 바로 조선군의 취약한 백병전 능력이 그들의 가장 큰 약점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말이라고 봅니다. 성곽, 혹은 야전축성의 준비를 통한 적과의 백병전에서의 우위를 확보해놓는 것은 조선군의 백병전 능력 부재를 보완하는 최적의 길이며 현재 디펜스코리아에서 르메일님이 작성하신 논문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사실이지만 일본군이나 청나라 정예군에게 맞서 화기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 또한 성곽 혹은 야전축성을 통해 백병전 상황으로의 전환을 막은 데에서 그 성공원인을 찾아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술은 역시 방어전술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우며 한정된 전장에서 준비된 조선군과 이동중인 일본군의 상호 충돌이 이루어지더라도, 전투 하나에서는 승리하더라도 결국 일본군을 몰아내지 않는 이상 조선의 최종승리라고는 말할 수 없으며 제승방략이 가동되어 소규모 읍성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형성하여 일본군을 경상남도에서 저지한다 하더라도 결국 방자인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승리를 위해 공세를 취할수 밖에 없는데 이 점에서 엄청난 참패가 우려됩니다.

방어전을 떠나 공세에 나서는 경우 필연적으로 야전축성이나 성채를 통한 부족한 백병전 능력의 보완을 받을 수 없으며 당시 화기의 위력이 적병의 접근을 저지하기에는 아직 부족하였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역시 야전에서의 백병전은 반드시 맞이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며 이 경우 조선군의 참패는 명약 관화합니다. 물론 다른 변수도 있습니다. 높은 능력의 조선기병을 통한 유격전이나 화포를 통한 적 대열에 대한 피로의 강요와 그로 인해 허술해진 대열에 조선기병을 집중시켜 대열의 붕괴를 유도하는 방법 등도 있겠지만 역시 최종적인 결전병력은 백병전을 주로 하는, 엄격한 규율과 편제로 통제되는 보병집단이라는 점에서 제아무리 10만 양병을 하더라도 백병전 능력의 보완 없이는 승리를 거머쥘수 없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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