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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위대태껸이 나아갈 방향성 - 실전의 의미

익명_84919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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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pitbullman/223302099121

 

무술 소재 관련 조사를 하면서 참 많이도 호신이나 실전 타령을 하는구나 싶다.

정작 그 호신과 실전의 정체를 파헤쳐보면 일상 생활에 벌어지기 힘든 극히 드문 상황에 집착하고 있다.

내가 무술을 조사하면서 이건 쓸모없는 것이며 인생에 도움되지 않고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느낀 것이 바로 호신과 실전 판타지에 집착하는 부류만 무술에 집착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서다. 이런 것은 사회 생활은 물론 어떤 인간관계 형성에도 도움이 될 수 없다.

호신이니 실전이니 이런 유치한 말장난을 핑계로 만화 속 설정놀음을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무술과 스포츠의 차이를 말하라면 나는 목적성이라고 말하겠다. 스포츠는 모두 목적성이 있는 반면, 무술에는 목적성이 없다. 이것이 스포츠와 무술의 인프라, 대중성을 갈라놓고 있다. 모든 스포츠는 저마다의 목적이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으며 그에 따른 인프라, 시스템, 보상이 구체적으로 정립되어 작동한다.

아마추어 스포츠 선수는 전국체전, 아시안 게임, 올림픽 등 여러 대회에 나가 메달을 따고 연금과 지도자 과정을 밟아 대학 교수나 감독 및 코치로 일하는 등 관련 업계가 서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프로 스포츠 선수도 마찬가지다. 국내 구단, 해외 구단에 스카우트 되고 연봉을 계약하고 이적하고 등등 전형적인 기업 활동과 다를 바 없는 사회 생활로 작동된다. 이런 경제 활동이 스포츠의 생기를 불어넣는 원인을 낳는다.

그렇다면 무술의 실체를 알아보면 어떤가? 이건 뭐 말이 안 나오는 수준이다. 인터넷 검색해서 무술 관련 키워드를 보면 하나같이 처참하다 못해 비참하다. 이런 게 인기 없는 이유는 세상이 안 알아봐줘서가 아니라 애초에 이런 것들은 현대 사회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위대태껸이 무술이나 호신, 격투기에 집착하지 말고 스포츠, 체육, 운동, 문화 생활로 발전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 것도 이런 현실 때문이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였다. 태국의 무에타이는 엄연히 프로 스포츠로서 활동되고 있으며 태국인 모두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을 만약 태국의 전통무술이라는 키워드로 고정시켜뒀다면 오늘날 세계에 무에타이 라는 단어의 인지도는 없었을 것이다. 일본의 유도가 고류 유술이라는 키워드로 고정시켜뒀다면 세계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건 불가능했으며 태권도, 복싱, 레슬링, 펜싱도 모두 마찬가지다.

주짓수를 볼까? 한때 실전 타령을 부르짖던 주짓수는 오늘날 스포츠로 발전하려고 노력한다. 위험하다면 서브미션, 초크를 금지시켜서 포지션에서 점수 따는 걸로 승패를 가르는 것도 고민하고 있자, 주짓수 네임드 힉슨이 그랬다던가?

서브미션과 초크를 빼면 주짓수가 아니다! 이런 사상은 전형적인 무술의 고리타분한 관념에서 나온다.

힉슨은 그러니까 구시대 인물에 불과하며 시대적 흐름을 제대로 타지 못하고 있다. 반면 현대 주짓수를 이끄는 사람들은 무술 따위 필요없고 그냥 대중성을 향해 노 젓고 나아가자는 쪽에 가깝게 행동한다. 욕을 먹어도 차라리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욕을 먹는 게 낫지, 대중성을 놓치고 극소수 한줌 모래먼지만도 못한 찐따 부류의 칭찬만 받는다고 주짓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아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위대태껸에서도 참고해야 할 부분이다.

내가 지금껏 조사하며 위대태껸을 바라보는 인터넷 시선을 정리하면 솔직히 쓸데없는 원리와 이론에 집착하는 무술맨들과 다를 바 없는 시선이 많았다. 이들은 위대태껸이 앞으로 이렇게 움직이기를 바라는 것 같다.

지금 상태 그대로 1도 바꾸지 말고 보존하면서 발전해라

이건 마치 얼음을 구워먹으라는 뜻으로 들리는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다.

위대태껸, 그러니까 한국의 진짜 태껸의 원본을 발굴했다면 그걸 그대로 보존시키는 것이 태껸을 위한 건지 극소수 비주류들을 위한 건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원본을 그대로 보존하며 발전하는 건 불가능하다. 시대는 예나 지금이나 계속 바뀐다. 그 흐름에 맞춰 움직이려면 변화하는 대중성에 적합한 행동을 보여야 한다. 원본 그대로 보존하겠다는 집착은 말 그대로 태껸을 박제시키고 싶다는 집착으로 이어진다.

이런 생각들이 어디서 왔냐면 서양에서 왔다.

서양 건축과 동양 건축의 철학을 비교해보면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 차이점이 건축을 바라보는 관념에서 나온다. 서양은 전통 건축의 존재 가치를 옛 것 그대로 1도 바뀌지 않고 보존하는 것에 두지만 동양은 전통 건축의 가치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에 둔다.

이런 사상적 차이는 동양과 서양의 건축 철학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

그러니까 서양은 천년 전 건축이 천년 간 1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야 진짜라고 주장하지만 동양은 그런 건축은 죽은 것이지 살아있는 게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왜 이런 차이를 갖는가? 동양에서는 건축 또한 생명과 같이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구분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것처럼 건축도 태어나고 죽는 것이 당연하며, 그 과정에 다양한 변화는 매우 정상적인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철학은 중국과 일본의 전통 건축을 살펴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두 나라 모두 천년 전부터 이어오는 고대 건축물들을 원본 그대로를 보존하거나 복원한 것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 그 시대 상황에 맞게 새롭게 지어낸 창작품들이 많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것이 전통 건축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서양이 뭐라 하건 관심 갖지 않고 자기만의 철학을 추구해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한국은 고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 건축물을 원본 그대로 보존해야 진짜이며 복원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로 달라지거나 변화가 생기는 건 가짜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반응은 전형적인 서양 건축 철학에서 온 것이다. 한국의 건축은 동양의 것임에도 그 철학과 사상은 서양의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서양의 건축이 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1도 바뀌지 않고 원본 그대로 이어져야 진짜이며 중간에 훼손되거나 무너진 건축물을 복원하려면 원본 그대로 1도 바뀌지 않고 만들어야만 진짜로 인정하는 습성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건 서양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한다.

쉽게 직관적으로 풀이하면 서양 건축의 이러한 복원과 전통 사상은 기독교의 부활이라는 관념에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부활이라는 설정을 자기들 나라의 건축물에 투사하고 있기에 이러한 태도가 나오는 것이다.

반면 동양의 건축 사상과 철학은 기독교가 아닌 불교의 환생으로 해석한다.

천년 전부터 지금껏 이어오는 고대 건축들은 시간이 흐르면 끊임없이 변화해야 정상이며 훼손되고 무너져 사라져도 시간이 흐른 뒤에 새로운 형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진짜이며 살아있는 전통이라고 받아들인다.

불교의 환생처럼 천년 전 사라진 고대 건축물을 새로운 형태의 건축으로 탄생시키는 것이 현대 중국과 일본이 추구하는 전통 건축 철학이다. 그것을 서양에서는 죽은 것이라고 하지만 동양은 이것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한다.

서양은 천년만년 1도 바뀌지 않고 보존되어야 살아있는 것이며 바뀌는 순간 죽은 것이라 부르지만 동양은 반대로 천년만년 계속 바뀌어야 살아있는 것이며 바뀌지 않는다면 죽은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의 건축 철학의 차이처럼 위대태껸을 해석하자면 어느 쪽이어야 하는가?

천년만년 1도 바뀌지 말고 원본 그대로를 보존하며 발전해야 하는가?

계속 바뀌면서 원본에 집착하지 않고 정체성을 지키며 발전해야 하는가?

중국과 일본이 고대 건축을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시켜도 이들은 여전히 그것을 고대 건축의 명칭을 붙여 즐기고 있다. 원본이 달라져도 그것을 주도하는 행위의 주체자가 중국 일본이라면 자연스럽게 동양의 미학이 물든다.

껍데기에 집착하지 않고 내용을 추구하는 것이 동양의 특성이다.

태권도가 이런 식으로 변화하고 인프라를 넓혀나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술, 실전 따위에 집착했다면 태권도는 이렇게 발전하지 못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껍데기가 아닌 내용을 추구하며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것. 태권도는 현대 한국이 유일하게 중국과 일본의 건축 철학처럼 서양에 얽매이지 않는 동양 사상의 흐름을 따라가는 운동이다.

태권도가 현대 한국이 만들어낸 운동인 것처럼 위대태껸도 현대 한국이 발굴해낸 운동인 것이다.

무술, 실전이라는 키워드는 솔직히 말하자면 위대태껸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체 무술을 해서 어디다 쓰냐고 질문하면 대답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태권도를 해서 어디다 쓰냐고 한다면 대학 갈 때 쓴다거나 엘리트 체육으로 갈 때 쓴다는 답안지가 있지만 태껸은 그런게 없다.

축구를 잘해서 어디다 쓰냐고 하면 어린애가 축구 잘 하면 선수 시켜보면 된다고 하면 간단하다.

다른 모든 스포츠가 마찬가지다. 위대태껸이 앞으로 나아가려면 무술, 실전이라는 키워드를 버리고 스포츠 라는 정체성을 새롭게 다져야 한다.

현대인들에게 심리적 거리가 가까운 건 스포츠지 무술이 아니다.

솔직히 나이 먹고 무술한다고 실전이 어쩌고 설쳐대는 건 없어보인다. 애도 아니고 무슨 싸움을 해서 뭐 어쩌겠다는 건가? 실전이란 단어 자체가 유치한 관념인 것이다. 반면 스포츠를 한다면 건강해 보인다. 이미지는 이렇게 사소한 단어로도 큰 심리적 차이를 만든다.

위대태껸에서 말하는 실전이란 향후 만들어갈 스포츠, 대회에서 원하는 결과를 내고 대학이나 선수 생활로 잘나갈 수 있는 토대로서의 의미로 쓰여져야지, 그것이 무슨 싸움이나 호신, 격투기 따위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 호신 같은 건 생활 체육 시스템을 잘 만들어 어릴 때부터 교육시켜야 하는 것이며, 사설 체육관을 통해 익힐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오늘날 사설 체육관에서 주장하는 호신이란 개념은 기껏해야 밖에서 싸움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호신은 그보다 더 넓고 복잡한 개념이다. 어릴 때부터 교육시켜야 성인이 되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유치한 싸움 논쟁이나 다름없는 실전, 호신 타령은 그만하고 위대태껸은 이것과 다른 스포츠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러면 이상한 무술 원리나 이론 따위 찾아 헤매는 부류들이 기웃거릴 일도 없어진다.

이런 부류는 늘 무술이나 무슨 원리 따윌 추구하는 이상한 것들에 집착하지, 정작 가장 강한 복싱이나 레슬링 같은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꼭 복싱이나 레슬링은 이렇지만 지들이 하는 건 이래서 더 뛰어나다는 이상한 정신 승리에 빠져 산다.

위대태껸도 이런 부류들이 들러붙어 인기를 막고 있다는 푸념을 들었는데 그걸 벗어나는 방법은 정체성을 무술이나 실전에서 스포츠, 운동, 체육으로 선회하는 것이다. 위대태껸이 스포츠화 한다고 무술이었던 본질이 사라지진 않는다.

유도는 스포츠이지만 여전히 내용은 무술의 것을 갖고 있다. 태권도, 복싱, 레슬링, 펜싱 모두 스포츠이지만 이것을 비웃는 놈은 이상한 무술 원리나 찾는 찐따들이지 정상인들 중에는 없다. 특히 건강한 사람일수록 스포츠를 좋아하지 무술은 이상하다고 여긴다. 실제 단어를 듣는 순간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그렇게 느끼게 한다.

복싱이 과거 로마 시절 군대 격투기로 개량하여 사용된 적이 있다고 갑자기 지금의 복싱을 로마 군대의 무술이라거나 검투사들의 무술이라고 홍보하면 인기 다 떨어진다. 복싱이 인기를 모았던 것은 스포츠로서의 드라마와 선수들의 서사였지, 고대 인류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가장 오래 된 무술 나부랭이여서가 아니다.

위대태껸은 실전, 무술이란 키워드를 사용하는 건 좋으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되려 발전을 망치고 퇴보를 부르는 길을 열어버릴 수 있다. 대중성을 원한다면 그에 적합한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위대태껸의 원본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발전하겠다는 건 무술, 실전이란 고정관념을 투사한 집착일 뿐이다.

태껸은 놀이어야 해 라는 것과 태껸은 무술이어야 해 라는 것은 서로 같은 뜻, 같은 말이다.

어딘가에 고정되지 않고 새로운 관념을 만들면 태껸은 스포츠다 로 정리할 수 있다. 태껸은 스포츠로 접근해야 놀이든 무술이든 지겨운 고정관념 말장난에서 벗어날 것이다. 태껸을 좀먹는 기존의 관념들도 자유로운 스포츠, 운동으로서 보급이 되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소멸될 것이다.

보여지는 이미지가 다르면 기존의 이미지도 달라진다.

이것은 현실의 위대태껸이 나아갈 길이 아닌 작품의 위대태껸이 묘사될 방법을 정리한 것이다. 확실히 무술이나 실전 따위보다는 스포츠, 체육, 운동으로서의 발전한 모습이 더 현대적이고 전통미를 살릴 수 있다.

[출처] 위대태껸이 나아갈 방향성 - 실전의 의미|작성자 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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