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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견의 아름다움이 곡선에 있는가?

익명_79337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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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선의 미(美), 택견

https://youtu.be/0cZo4jbELNQ

 

글쎄올씨다...

 

흔히 한국의 미 혹은 예술을 곡선미, 곡선의 예술이라 칭하는데 사실 이런 식의 정체성 규정은 우리 스스로 부여한게 아니라 일제강점기 일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 ~ 1961년)가 개.인.적으로 정의하면서 부터이다. '한(恨)'이 한국인의 성정을 가리키는 단어가 된  것도 이 사람에게서 유래됐다.

 

그는 조선의 처마와 도자기 등에서 보이는 굽은 곡선은 직선에 비해서 여성적이고 유약해 보인다며, 이런 한국의 유약한 마음가짐은 그 당시 일제에 식민지배 당하는 조선의 현실과 결부시켜 '그들 조선인의 마음이 본래부터 약하고 슬프기 때문'이라는 데까지 미쳤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 곡선의 예술을 중국, 일본과 비교하면서 중국의 예술은 '의지(뜻)의 예술'로, 일본의 예술은 '정취의 예술'로, 한국의 예술을 '비애의 예술'로 표현하면서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문화적으로 이러한 '한(恨)의 정서'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고 보았다.

 

야나기 무네요시 개인으로서는 한국의 예술품을 사랑하고 조선문화재 보호를 주장했던 사람이었지만, 곡선이 많은 조선의 도자기를 슬픔(恨)이라는 감정에서부터 등장한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후 일본의 예술비평가들이 한국의 작품을 평가할 때에 '원한과 슬픔(恨)'의 감정을 기본으로 깔고 해석하게 되었으며, 일본매체로부터 동아시아의 뉴스를 전해받는 유럽과 미국의 예술비평가들 또한 이에 영향을 받아 한국의 예술을 설명할 때에 꼭 'Han'의 감정을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한(恨) 정서론'은 해방 이후에도 살아남아서, 여전히 살기 힘들었던 한국전쟁 후 경제개발 시기동안 한국인의 고통스러운 삶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많이 쓰였다. 특히 1970년대 말부터 경제 성장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 문화소비 욕구가 생기면서 대중적으로 소비된 '한국인론', 즉 한국인의 원형에 대한 문화적 탐구에서 그 중심으로 자주 등장했으며, 1980~1990년 대에 중산층의 저변이 넓어지고 민족주의, 문화, 역사에 대한 대중적인 저술이 대거 등장하였을 때에도 서편제 영화, 각종 드라마에 남아있는 신파극적 요소, 한국형 발라드 음악 등의 문화작품을 통하여 다시 인지도를 높이게 된다.

 

K-pop 등으로 한국의 인지도가 높아진 2010~2020년 대 이후로, 유럽과 미국 등 해외 언론에서는 '한(恨)' 정서를 '슬픔을 승화시켜 예술로 표현'하는 고차원적인 감정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긍정적으로 평가를 해준다고해서 마냥 좋아할 것은 아니다.

 

이러한 해석은 일본인 야나기의 일방적이고 잘못된 해석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임을 유념하자. 일본에서 '한(恨)'을 '원망'으로 해석하고 있고, 일제강점기에서부터 해방 후 식민사관을 가진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한국인 대표 정서를 '한(恨)'으로 규정지어 이를 작품을 통해 다시 '체념'으로 재해석했다는 사실 등을 인지한다면, 한국인의 대표정서가 '한(恨) 정서'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인은 쿨(cool)하지 못하다'는 일본의 전형적인 레파토리에 당하거나, 또는 '한국인은 잘 포기한다'는 자포자기의 체념 의식을 부추기는 꼴이 되므로, 이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요구된다.

 

근래에 들어선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문화 사랑이 진정성이 있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30111022006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 예술론’을 비판한다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9746

 

일본에서는 야나기식 방법론이 비판 대상으로 오르내린 지 오래되었다. 1997년 가을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세계적인 문학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미와 지배’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야나기의 시각은, 식민 지배자가 자신들이 멸망시키려는 민족을 향한 동정의 시각에서 비롯된 독단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民藝論'엔 인간이 없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4318374#home

 

한국적인 것이나 한국의 미는 고정된 개념이 아니다. 한국의 5000년 역사에서 아름다움의 정의는 계속 바뀌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것이며, 이는 한국만의 이야기도 아니고 어느 민족이든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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