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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를 향한 일본미술 선전 - 독자성과 오리엔탈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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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space.snu.ac.kr/bitstream/10371/146862/1/%eb%b0%94%ec%9d%b8%eb%8d%944.pdf

 

..중략..

 

 그는 더 나아가 왜 일본인들은 유럽인들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인들과 비교해서도 특히 성을 묘사하는 데 더 개방적이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 이유를 일본의 종교 신도에서 찾아, 비옥함과 다산을 기원하며 여자뿐 아니라 남자의 성기를 숭배하는 성향이 있었음에 주목했다. 이러한 남근 숭배 사상은 다른 가부장적 문화권—기독교, 유교, 불교를 불문하고—에서는 사라진 것이지만, 일본에서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민간에도 남근석을 만지며 아들 낳기를 기도하는 등의 남근 숭배사상이 최근까지 여전히 남아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의 일본이해는 객관적인 비교 자료에 의한 이해라기보다는, 일본적 독특함을 강조하고 싶은 취향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이 대외선전에서 일본이 국력과 자본을 바탕으로 동아시아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개념과 용어를 선점하여 주변 국가의 소외를 초래하는 현상은, 비단 하루이틀 사이에 시작된 일이 아니다. 구키 류이치(九鬼隆一)는 『일본미술의 역사』의 서문에서 일본이 ‘동양미술의 보고(寶庫)’라고 하면서 “중국과 인도에서 우리나라가 보존하고 있는 걸작에 필적하는 것을 찾으려 해도 무익하며, 일본에서만 잃어버린 과거의 예술을 연구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렇게 일본이 중국과는 독립적으로 동양의 유서 깊은 전통을 가진 나라이면서 동시에 진보적인 문화국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일본 중심의 미술사 서술방식은 주변국과의 관계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이후 동아시아 미술의 서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해 후지와라 사다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서구에서는 19세기 후반 미술사학이 학문으로 자립하지만, 그 기반을 이룬 것 은 그리스·로마 미술을 다룬 고고학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미술사’와 ‘영국미 술사’라는 것은 성립하지 못했다. 그러한 환경에 1900년의 일본미술사를 둔다면, 얼마나 과대망상적인 일국미술사관으로 괴이하게 여겨졌을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이 책에 대해 황국의 역사와 일체화한 역사적 산물로서 미술을 다룬 점을 독창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는데, 이 평가는 회화와 건축 등 각 장르의 양식사적 전개를 서술의 중심으로 하는 서양미술사와의 차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후지와라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점으로 성립한 일본미술사가 구미의 미술사가와 동양학자, 또는 중국인과 한국인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논의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일본미술사의 성립을 일본이라는 한 나라의 역사적 문제로서 파악하는 한 이러한 특이성이 보이지 않으며, 국제적 경합 속에서 구상된 동양미술사의 편찬 속에서 일본 미술사가 성립되는 현상을 고찰함으로써 비로소 특이한 일본미술사가 초래 한 공과 과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미술사에 대한 이야기지만,

단지 미술사에만 국한된게 아니라 무술사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인 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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