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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 2 - 일본은 왜 석전을 무서워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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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석전을 무서워했을까?

 

우리나라 석전의 기원은 고구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중국 문헌 『수서』의 ‘동이전’, 「고구려조」에 의하면 석전은 고구려의 정초 풍습이었다고 한다. 해마다 고구려왕은 패수에 가서 석전을 구경했다. 옷을 입은 채로 강물에들어가 신하들을 두 패로 나눈 뒤, 그들이 벌이는 돌싸움을 지켜보았다. 당시 고구려에서 석전이 얼마나 성행했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이 살수(청천강)에서 수나라 대군을 무찔렀을 때, 돌팔매질이 화살만큼 큰 위력을 발휘했다.

 

고려시대에 와서도 석전은 군사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고려 군대에는 돌을 주무기로 삼아 적군을공격하는 ‘석투군’또는 ‘척석군’이 있었다. 이 부대의 병사들은 돌팔매질로 왜구들을 소탕했다.

 

조선시대 와서도 석전은 전투수단으로 널리 쓰였다. 태조 이성계는 척석전(돌싸움) 부대를 만들었고, 태종 이방원 역시 석전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질을 심하게 앓았을 때도 아픈 몸을 이끌고 병사들의 돌싸움 훈련을 지켜봤을 정도였다.

 

석전은 전쟁에서 쓸모가 많았다. 1510년(중종 5년) 삼포왜란 때 석전군으로 난동을 부리는 왜인들을 제압했으며, 1593년(선조 26년) 임진왜란 때는 석전군을 동원해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무찔렀다.

 

석전은 우리 민족의 오래된 전통놀이였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이 보기에 이는 매우 위험하고 위협적이었다. 집단 놀이로서 참여 규모가 큰데다 전투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9년 평안도 순천에서 일본 경찰과 주민들의 충돌로 7명의 일본인이 조선인이 던진 돌에 맞아죽은 사건이 있었다. 이런 사건까지 겪고 나니 일제는 더이상 석전을 전통 놀이로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12년 3월, 일제는 ‘경찰범 처벌 규칙’을 제정해 석전을 금지했다. 항일 투쟁을 조직화하려는 이들에 대한 처벌 규정을 만들면서 ‘돌싸움, 기타 위험한 놀이를 하거나하게 한 자, 또는 가로에서 공기총·새총 따위를 가지고놀거나 놀게 한 자’를 처벌 대상에 넣었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인이 언제고 돌로 자신들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단순한 놀이가 항일로 이어질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전통 놀이 석전은 자취를 감추었다.


* 요약

  1. 석전은 고구려 때 부터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전투수단으로 쓰임
  2. 돌팔매질로 왜구 많이 소탕함
  3.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이 맞아죽을까봐 쫄려서 금지시킴
  4. 석전 하위 분류에 택견이 함께 들어갔을 가능성도 꽤 될것으로 봄

 



이게 팩트ㅇㅇ

 

다른 곳도 아니고 독립 기념관 사이트 기사에 쓰인 글인데 한국인이고 역사를 제대로 알면 미개하다는 뉘앙스로 절대 함부로 글 쓸 수 없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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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24/post-24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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