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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 싸움인가 놀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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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말 언더우드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그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집을나섰는데 공터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지?’언더우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람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커다란 함성과 함께 갑자기 반대편에서 돌이 비 오듯 날아들었다. 언더우드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리고는 돌을 피해 부리나케 달아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돌이 머리 위에 떨어질 것 같아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언더우드가 그날 목격한 것은 석전(石戰), 즉 돌싸움 현장이었다. 당시 돌싸움에는 수백 명의 장정이 참여했는데, 서로 돌을 던져 싸우는 투석전과 몽둥이를 들고 싸우는 육박전으로 나뉘었다. 맨 앞줄에 투석꾼이 서고,그 뒤에 육박전을 하는 이들이 섰다. 싸움이 시작되면함성과 함께 상대편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전진했다. 양쪽 진영을 향해 돌이 쏟아지고, 날아오는 돌에 맞은 사람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터지곤 했다. 싸움은 꽤 치열했다. 돌에 맞아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부상자가속출했다. 심지어 머리를 정통으로 맞아 죽는 경우도적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죽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았다. 수백 명, 수천 명이 한꺼번에 던지는 돌에 맞아 죽은 것이니 어느 돌에 맞아 죽었는지 알 수 없었기때문이다.

석전에는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참여했다. 아이들의 돌싸움이 시작되면 “개똥아!”, “덕재야!”하며 제 자식을 찾는 어머니들의 애타는 절규가 들려왔다.

석전은 쉽게 끝나는 법이 없었다. 돌과 몽둥이 들고 맞붙어 다들 악착같이 싸웠다. 몇 시간이나 계속되는 긴싸움 끝에 한쪽이 달아나면 그것으로 승부가 끝났다. 싸움이 길어질 양이면 씨름이나 택견으로 승부를 가렸다.예부터 석전은 서울 만리재 고개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것이 가장 유명했다. 참여하는 인원만 9천여 명에 달했고 구경꾼은 수만 명이었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이 석전은 서울의 흥인문(동대문)·돈의문(서대문)·숭례문(남대문) 등 삼문(三門) 밖에거주하는 사람들과 애오개(아현) 일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두 패로 나누어 행해졌다고 한다. 싸움은 좀처럼끝나지 않았는데, 양편에서 사생결단으로 싸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삼문 밖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이기면 그해 경기도에 풍년이 들고, 애오개 일대에 거주하는사람들이 이기면 다른 지방에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었던 것. 그래서 애오개 사람들을 이기게 하려고 용산·마포 등 이웃 동네 사람들이 합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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