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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소설] Chaper11 – 발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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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행군이 시작되었다. 계곡을 지나치며 젖었던 바짓단에서 진흙이 굳어 떨어져 나갔다. 찰나의 안식이 가져온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급속 충전한 전지처럼 금새 소모되었다. 유진은 자신이 유독 생생한 것에 의아했다. 훈련 간 열외 없이 최선을 다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것 또한 충일의 교육 덕분일까. 마치 익숙한 길을 걷는 것처럼 발걸음이 가벼웠다. 몇 걸음 내딛지 못하고 툭툭 발이 걸리는 32번과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만약 유진이 32번과 같았다면 그는 분대원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안 그래도 몸이 피로한데 정신마저 피폐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32번에게 실망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남에게는 상대적으로 관대하다. 그래서 뒤처지는 32번을 다그치는 대신 주변의 전우들에게 남은 물을 나누고 쓰러질 것 같은 32번의 군장을 받쳐주며 나아갔다.

 

임무지원지점에 도착했다.”

 

1분대장이 담담하게 말했다. 드디어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저기 보이는 게 우리 타깃이냐며 물어왔다. 유진은 그렇다고 했다. 그것이 완벽한 정답은 아니었지만. 자세히 설명하는 일이 번거로웠다. 그 시간에 분대장들은 인원을 선정하여 목표를 정찰할 조를 꾸려야 했다. 해가 지기 전에 임무지원지점에서의 생활을 보장할 최소한의 여건이 마련되어야 했기에 각자에게 역할을 나누어주고 임무 수행에 서둘렀다.

 

통신인원들은 현시간 부 도착내용 보고하고, 나머지는 각자의 위치에서 경계해. 분대장들 모여봐.”

 

1분대장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이곳을 분기점으로 삼아서 목표를 공략할 거야

 

좀 더 가까이 가지 않고?”

 

이미 충분히 가까워, 더 가까이 가면 우리 쪽이 먼저 적에게 관측될 위험이 있어

 

유진은 처음으로 1분대장과의 대화에서 의문을 느꼈다. 유진에게는 현 위치에서 목표가 도저히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사계가 좋다고?”

 

2분대장도 유진의 말에 동조했다. 1분대장의 능력을 의심한 적이 없지만, 이번만큼은 교리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충분한 근거가 없다면 그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1분대장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무언가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듯 굴었다.

 

알고 있는 게 있다면 말해줘. 그걸 들어야 우리도 판단할 수 있어.”

 

못해... 말 할 수 없어

 

그렇다면 우리도 따를 수 없어

 

분대장들 사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골이 메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분대장은 이 상황에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차선책을 택했다. 자신의 의견을 무르고 교리대로 계획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래 그럼 가보자. 대신,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바로 돌아와야 해.”

 

당연하지. 축차적으로 빠져서 재집결, 교리대로.”

 

상황에 따라 아예 정찰을 멈추고 돌아오는 것도 고려하자

 

그건 말그대로 상황에 따라 결정하는 거로 하자.”

 

나도 그건 현장에서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1분대장의 탐탁치 않은 숨소리가 만연했지만 대화는 계속되었다. 유진과 2분대장은 솔직한 말로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배움이 적은 만큼 자의적인 판단을 경계했다. 배운대로. 그것이 제일 안전해 보였다. 그들이 배운 교리에서 목표를 정찰하는 활동은 중요했다. 그것은 작전의 성공률과 분대원들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한 필수 코스였다. 그사이에 분대원들이 경계, 은닉, 취사, 취침 등을 위한 기반을 닦아 놓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분대원들에게 쉴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될 터였다. 더구나 잠시나마 분대원들과 떨어져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 자신에게도 숨을 돌릴 시간을 주었다. 그들에게는 정찰을 고수할만한 이유가 많았다.

 

 

아냐 아무래도 ... 너희에서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

 

정찰 계획이 얼추 정리될 즈음에 1분대장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이곳은 내 고향이야

 

뭐라고?”

 

1분대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2분대장이 반응했다. 유진은 놀라지 않았다. 그것이 2분대장을 더욱 미치게 했다.

 

“34번 너는 알고 있었어? 이걸 보고도 안 하고 있었단 말이야?”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나도 아주 오랜만에 온 거라 미리 말했어도 큰 도움은 되지 못했을 거야

 

그럼 지금 와서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뭔데?”

 

3분대장의 질문에 1분대장이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어

 

그는 침착하게 아주 중요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는 일반적인 군인이 아닐지도 몰라

 

잠시 정적이 흐르는 사이 유진이 일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34번에겐 내 고향엔 이미 사람이 없을 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지?”

 

맞아, 그랬었지

 

1분대장은 아주 성실하게 답변했다.

 

군인이 아니면 도대체 뭔데? 우리가 마을주민이랑 싸우기라도 해야 한다는 거야?”

 

2분대장이 답답해하며 물었다.

 

어쩌면... 그마저도 아닐 수도 있고.”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이야기 해봐

 

그날 1분대장은 자신의 과거부터 목표에 존재하는 문명의 잔재의 정체에 대해서까지 시간을 들여 상세히 설명해야만 했다. 국제기구의 협력 아래 개발된 특별한 장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현존하는 모든 무기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기술이었고, 그곳에 접근한 이들은 알 수 없는 함정에 빠져, 무덤에서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숨겨왔던 비밀을 듣고 나서 2분대장은 식상하게 느껴질 만큼 전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게 말이 돼? 그건 그냥 사지로 보내는 거잖아

 

2분대장의 부정에 1분대장은 단호하게 맞섰다.

 

말도 안 되지만 사실이야, 우리는 작전에 성공해도 살아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커.”

 

아니 그보다 도대체 왜 그런 무시무시한 게 이 땅에 있는 거야? 그 의도를 알아야 우리도 대응을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유진은 침착하게 핵심을 찔렀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큰 위험 요소는 사람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현지의 인물과 접촉 또는 적과 조우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들의 의도에 대해 기민하게 반응해야 한다고 배웠다. 이해관계를 알 수 있다면 타개책도 낼 수 있다고 그렇게 교육받았다. 근거 있는 추궁에 1분대장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머뭇거리더니 어렵게 목소리를 내었다. 미안하지만 그것까지는 여기서 말해줄 수 없다고. 그래도 납득이 안된다면 정찰을 가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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