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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소설] Chaper11 – 발진(2)

익명_58442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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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그 시작에 불안을 동반한다. 유진은 그런 감정에 의연한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유달리 불안했다. 자신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진흙탕에서 1분대장과의 격차를 느꼈기 때문일까. 자신이 실패한 도자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모래 알갱이가 묻어나오고 쉽게 균열이 가는. 금방이라도 부서져 존재의 가치가 없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경사면을 타고 여념없이 걸었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혹시 미끄러지진 않을까. 행여 낙엽 따위를 밟아 적의 주의를 끌지는 않을까. 온몸에 힘을 주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죽음이 목전 앞에 두었다고 생각하니 힘들다고 긴장을 푸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느새 새벽 해가 떠올랐다. 긴장된 와중이라 모두 정신이 맑았지만, 피로가 한가득이었다.

 

파사삭

 

어디선가 소음이 들려왔다. 적이 나타난 것일까. 모두 기민하게 자세를 낮췄다. 멀리서부터 수신호가 전해져왔다. 유진도 그 신호를 받아 다음 사람에게 전했다. 어둠 속에서 일제히 왼손 주먹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파도가 치는 것처럼 보였다.

 

환자 발생

 

구름이 움직이며 잠시 비춘 월광에 2분대장의 수신호가 보였다. 강행군을 멈춘 것은 적이 아닌 2분대였다. 모두가 진지하게 임했지만, 불가항력이라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2분대장의 오른편에 있던 유격대원이 그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반면교사의 실천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구는 형태로 행해졌다. 바닥에 이끼가 낀 돌멩이를 밟고 죽 미끄러진 것이다.

 

1분대장이 전 분대를 멈추고 환자에 대한 신속한 조치를 요구하는 것이 보였다. 다시 구름이 드리웠다. 유진은 삽시간에 맹인이 되었다. 스스슥. 유격대원들의 소매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시각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낙상 1명 발생. 상태 양호. 전원 경계 유지 하 대기

 

유격대원들은 그 상투적인 명령에서 많은 것을 읽었다. 교관은 반복되는 훈련 속에 명령과 보고가 간결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했다. 그러나 그 의도는 지치고 피로한 수행자들에게 모종의 요행을 학습시켰다. 부족한 정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습관을 들이게 된 것이다. 이는 장단점이 분명했다. 전원 경계라는 말에 그들은 대열을 정비하고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자신의 안전을 확보했다. 이것은 장점이었다. 그러나 대기하라는 말에 그들은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엄폐물인 바위와 나무에 몸을 기대어 쉬었다. 이는 명백한 단점이었다.

 

분대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주저앉자 장비가 덜그럭거리고 나뭇잎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주변을 뒤덮었다. 유진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두려움과 염려가 섞여 동공에 탁한 기색이 내비쳐졌다. 그것은 꽤 볼썽사납게 불거져 화를 내는 것 같이 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분대원들의 시야에는 그 표정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소강상태로 돌아오자 유진은 평온을 되찾았다. 사실 전문적인 군인이라면 질타받아 마땅한 행동이었지만, 그들은 단기간 훈련을 받은 부랑자들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해준 것만 해도 충분히 잘 하고 있다

 

1분대장이 속으로 생각했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전장에서의 필수 생존요건이었다. 일일이 지적하고 화를 낸다면, 속이 터져 죽거나, 뒤통수에 구멍이 뚫려 죽을 것이다. 전장의 총알은 맞은 편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기에. 아군에게 미움을 사서 좋을 것이 없다. 1분대장은 그것을 직접 경험으로 배웠다.

 

1분대원들은 분대장의 눈치를 스스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가 평소처럼 엄격하게 굴지 않는 것을 보며 의외라고 생각했다. 몇몇은 거기서 그의 배려를 느끼고 따뜻한 위로를 얻었다. 잠시 후 환자 처치가 끝났다는 신호를 전달받을 때까지 쥐 죽은 듯한 고요함이 자리했다. 가는 동안 두어 명만 더 쓰러져 주기를 바랄 정도로 편안했다.

 

인원장비 이상유무를 파악하여 보고 할 것

찰나의 안식은 규정된 절차에 의해 뭉개졌다.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대열에 섰다. 출발 준비를 마치고 각자의 옆 사람의 어깨를 두 번 두드리며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렸다. 모두의 안전을 확인한 1분대장은 전 인원의 주목 아래 전진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선두에서 능숙하게 유격대원을 통솔하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선봉이라고 할만했다.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다

 

1분대장이 뇌까렸다. 아주 미세하게 옆 사람만이 겨우 듣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정도로. 최소한의 소음으로 모두가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식은 땀이 맺혔다. 모두 자신이 전장에 있다는 것을 체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분대장들은 단 한 번의 교전 없이 목적지에 가까워지는 상황이 오히려 불안했다. 유진은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것이 없는지 염려했다. 그는 고난 없이 잘 풀리는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들의 부주의 때문에 벌써 적의 아가리로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수월할 수가 있나. 적과 마주치지 못한 건 맞는 걸까. 적이 있었는데 우리가 못 보고 지나친 거라면 어떡하지. 그는 적진에 들어오고 나서 누구보다 큰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분대원들은 그런 마음을 모르고 경계에 소홀한 모습마저 보였다.

 

와 장관이네

 

누군가 하늘을 보다 감상을 입 밖으로 흘렸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으나 유진의 귓가에 닿았다. 유진은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망각한 분대원들이 못마땅했다. 몇 되지 않는 이들을 통솔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는 1분대장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변수에 의연하지 못했다. 그는 열이 뻗쳐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 그 짜증스런 눈물이 흐르지 않게 고개를 쳐들었다.

 

한순간, 그의 입에서도 감탄이 빠져나올 뻔했다. 그곳은 그들 같은 황무지 부랑자의 인생에서는 평생 와보지 못할 곳이었다. 유진이 애써 외면하고 있던 그 풍경에는 눈 앞을 가리는 회색 건물이 없는 수풀이 펼쳐져 있었다. 그들이 몸을 숨겨 이동하고 있는 산새 너머 저편에는 초원도 보였다. 여러 언덕이 함께 있어 유려한 그 자태는 이제껏 상상해 본 적 없는 절경이었다. 그 풍경 속에서 푸른 풀과 샛노란 꽃, 벌새의 분주한 날개짓이 아름다움을 더했다.

 

왜인지 익숙해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한 번 더 이를 꽉 물었다. 의식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수다를 떨 것만 같았다. 그는 그 생각을 일축하기 위해 속으로 자신을 다그쳤다. 자신이 그것을 봤을 리가 없다고. 그저 어디서 주워들은 것일 거라고. 마침 1분대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반딧불이, 벌새, 쏟아질 것 같은 별들

 

그래 분명 거기서 들었던 것이겠다. 유진은 그렇게 타협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그 사람의 연고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광경을 보여 준 분대원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은 맑은 하늘 위로, 해와 달이 모두 보이는 정경을 바라보며 총구를 잠시 내려놓았다. 그는 아직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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