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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김명근 선생님의 까기와, 그 까기가 성행했다는 왕십리 지역의 역사만 좀 뒤져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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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견이 일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한양의 소수 계층들만이 향유하던 무술이 아니라, 당시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하급 무관과 병사, 중인들 사이에서 널리 행해진 무술이었을 수밖에 없다는 추론이 저절로 나오긴 함.

 

일단 김명근 선생님이 어린 시절 배우고 친구들이랑 즐겼던 까기(각희)가 어린아이들끼리 즐겼던 서기택견의 다른 이름이거나, 어른들이 향유하던 택견의 일부 기술들이 어린아이도 익히기 쉽도록 개량, 파편화 된 것일 거라는 사실은 저장소 짬빱 좀 있는 친구들은 다들 알 법한 얘기니까 넘어가고. 본문이 메인으로 다루고자 하는 왕십리의 중요한 지역적 특색에 대해 말해보겠음.

 

일단 왕십리가 어떤 곳이냐.

 

왕십리.jpg

 

여기, 중앙의 서울 도성 동남쪽에 위치한 빨간 동그라미가 표시된 곳이 바로 왕십리임.

 

당시 한양 중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을 기준으로 하여 이북을 웃대, 이남을 아랫대라고 불렀는데 당시 아랫대 지역에는 훈련원(조선시대에 무관 선발과 무예 및 병법 훈련을 관장하는 관청)과 5군영에 속한 훈련도감의 분영이 있어 부사관/장교 역할을 담당하는 각 병영의 하급 군관들과 중인들이 모여 살았다고 함.

 

image.png

출처 : https://blog.naver.com/danggan0912/223173496545

 

그리고 이 훈련원과 하도감에 속한 하급 군인들의 상당수가 왕십리에 거주하였으며, 인근에 넓은 평야가 펼쳐진 왕십리는 조선에서 주는 녹봉만으로 생활이 어려운 하급 병사들이 채소를 키워 도성에 내다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던 공간이기도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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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통은 충실히 이어져서 1930년대엔 왕십리 미나리가 서울을 넘어 만주에까지 수출이 되었다고...)

출처 :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4/09/07/4PWVMSUTTRGNVMOSANRURHZ7PA/

 

다른 예시로 나무위키에서는 왕십리 지역에 대해 이렇게 설명함.

 

왕십리는 조선 시대부터 한성부 성저십리에 속하였던 곳으로, 광희문을 통해 도성에서 빠져나오면 곧장 나오는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중랑천을 건너면 서울의 농경지대였던 뚝섬이 나오고, 뚝섬을 지나면 광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너 충주·원주·영남 방면으로 지어지는 교통로가 이어졌다. 이렇듯 조선시대에는 경충대로의 시작점이자 종점이었기 때문에 왕십리 일대에 성외(城外) 시전이 발달하였고, 상인을 비롯한 중인(中人) 계층이 많이 살았다. 서울 사투리 중에 '~걸랑' 하는 것이 왕십리 일대에서 생겨난 특유의 방언인데, 이 당시 이 일대에 거주하던 중인 계층에서 쓰던 말이라고 한다.

 

또한 지금의 을지로5가에 군사들을 훈련하던 훈련원이 있었고, 마장동 일대에서 군마(軍馬)를 키웠고, 뚝섬에는 군사들을 사열하던 연무장(演武場)이 있었으므로 그 중간 지점인 왕십리 일대에 군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임오군란 당시에 구식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킨 중심지 역시 왕십리였고, 때문에 청군이 구식 군인들을 소탕할 적에 군인들이 많이 살던 왕십리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고 한다.

출처 : https://namu.wiki/w/%EC%99%95%EC%8B%AD%EB%A6%AC#s-4

 

즉 구한말 당시에도 왕십리 지역은 훈련도감과 훈련원에 소속된 군관 및 병사들의 집단 거주지이자 배후지적 특색을 가진 지역이었다는 것인데, 재밌는 건 김명근 선생님이 어린 시절 배우신 까기가 성행했다고 하는 곳이 하필 저 왕십리라는 사실임.

 

학술적으로 볼 때, 현대와 같이 유흥 문화가 발전하지 못했던 전근대 시대의 어린아이들이 즐긴 놀이가 당시 성인이 즐기던 것과 거의 동일하거나, 전문성의 부재로 인한 마이너 카피에 가까운 형태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저건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임.

 

왜냐하면 저 말대로라면 훈련원과 훈련도감이 위치한 남촌-왕십리의 병사/하급 무관들이 수련한 맨손 무술이 택견이라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송덕기 옹과 임호 선생을 비롯한 웃대태껸의 기록이 다수 남아있는 청계천 이북의 서촌 지역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한양 전체의 군인/중인 계층이 택견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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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전도. 경복궁을 제외하면 사실상 한양 전역이 택견의 영향 안에 들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난 저장소에서 요새 스멀스멀 나오고 있는 택견 군용무술 설이 세세한 사실관계에 있어선 어느 정도 비판의 여지는 있을지언정 큰 틀에 있어서는 틀린 이야기 같지는 않다고 생각함.

 

택견의 기술들 가운데 씨름과 겹치는 부분도 굉장히 많기 때문에 택견을 하던 사람들이 군영에서 씨름 룰로 겨루었다면 그걸 씨름이라고 불렀을 가능성도 충분한 데다, 병사로서 익혀야 할 것들이 산더미인데(사격술, 무기술, 제식 등등) 씨름 따로, 택견 따로 배웠을 거라는 게 오히려 더 말이 안 됨.

 

어렸을 때부터 저런 지역들에서 또래들과 함께 서기택견을 배우던 애들이 커서 군인이 된 다음, 평소에 하던 가닥을 살려서 군영 등에서 씨름 룰로 겨루거나 무기술에 있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근접박투를 수행했다는 게 정배에 가깝고, 이런 추리를 바탕으로 하면 택견이 군용무술이었을 수 있다는 주장은 어느정도 비약은 있을지언정 크게 잘못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겠음.

 

최소한 조선의 중앙군(5군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군영인 훈련도감의 병사들이 택견을 수련했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고 봐야 할테니 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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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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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기연 어원설을 취한다면 정확히는 군용무술을 베이스로 어느 정도 경기화된 게 택견일 것임. 택견이란 이름은 무술이자 경기 그 자체를 뜻하는 거란 거지. 그렇다면 무예도보통지 같은 공식 기록에 잘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설명됨. 군인들이 군용무술로 사적으로 벌이는 경기판을 뜻하는 것이니. 송덕기옹이 무술이자 놀이였다고 발언한 것도 설명되고.
14:44
2시간 전

군용무술→민간무술의 테크를 밟고 그게 역으로 다시 군대에 유입되는 식의 순환을 이루어 갔을 가능성이 높다 보이고, 개중 발차기 테크닉이 발전한 건 민간무술화 되는 과정이 꽤 길었던 증거가 아닐까 싶음.

14:50
2시간 전
익명_130675
발차기 테크닉 발전이 민간무술화 때문이라는건 좀 억지같은데?
발차기의 발달이 곧 민간무술화는 아니잖아. 물론 민간무술화가 된다면 택견을 하는 인원이 늘어나기 때문에 발차기 발전의 가능성이나 속도가 빨라지긴 하겠지. 근데 그건 결과론적인거고. 발차기의 발달의 핵심은 경기화임. 그 경기화는 사람이 많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한거고.
그렇기 때문에 민간무술화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판단하는게 맞고, 발차기의 발전은 긴 시간동안 경기가 치뤄진 결과물이라고 보는게 맞음.
16:17
1시간 전
익명_559295
경기화의 결과물인 건 당연한 얘기고, 동시에 민간무술화 된 결과물이기도 하다고 할 수 있음.

전근대 병사들이 다루는 단병접전용 무기가 칼과 창인데 이 무기들을 드는 걸 가정하면 무릎 위로 올라가는 발차기는 리스크만 가득하고 얻을 이득이 없어짐.

그도 그럴 게 발차기 사정거리보다 무기 사정거리가 압도적으로 긴 데 발차기를 하겠답시고 발을 들어올리는 행위 자체가 내 몸의 균형을 깨는 것과 다름 없기 때문임. 실제로 아이키도에선 그런 이유로 중단 이상으로 올라가는 발차기를 안 한다고 하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무기술을 의식하지 않고 순수하게 택견을 맨손무술로 봐야만 발전할 수 있는 게 중단 이상으로 올라가는 발차기이기 때문에, 만약 택견의 시작이 군용무술이었다고 한다면 발차기의 발전은 택견이 민간무술화 된 증거라고도 볼 수 있음.
16:45
52분 전
2등 익명_130675
자세한건 어찌됐든 중요한건 누가 말하는것 처럼 택견이 전국적으로 모든 계층에서 즐겼던 놀이가 아닌, 한양 일부지역에서 특정 군인계층 위주로 수련했었던 무술이라는거 아님?
15:19
2시간 전

한양의 일부 지역이라기엔 경복궁을 제외하면 사실상 한양 전 지역에 가까워서...

아무튼 중요한 건 택견의 향유한 사람들의 목록에 사대문 안, 서촌을 중심으로 한 중인 계층이나 한량 뿐만이 아니라 아랫대에 위치한 훈련원, 훈련도감에 연관되어 있던 하급 군관들과 병사들까지 더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음.

 

그리고 물론 전국택견론은 개소리인 게 맞음 ㅋㅋㅋㅋㅋㅋ

15:32
2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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