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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견은 생각보다 더 군용무술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익명_928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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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aekyun.org/posts/column/28

 

옛날에 도기현 회장이 무카스에 기고했다는 글에서 본인의 고교 은사 아버지가 택견꾼이었다는데 증언에 따르면,

 

택견은 사대문 안팎에서 민중들에 의해 널리 행해진 놀이가 아니라 경복궁 서쪽의 훈련도감터~태평로(광화문에서 남대문까지)~남산 일대~훈련원 일대의 무반 한량 등 중인 이상 계급이 즐기던 고급문화였다함.

 

https://taekkyeon.net/column/11525?page=2

 

그리고 윗대태껸 공현욱 관장이 쓴 칼럼의 옛 한양도성 거주지 분석에 따르면 태껸의 윗대와 아랫대는 딱 5군영+훈련원과 하급 무관들 거주지와 겹치는 것으로 나오는데 위의 도회장 고교 은사 증언과 교차검증된다.

 

그러니까 그 윗대 아랫대란 용어가 단순한 윗마을 아랫마을이 아니라 '군인 마을'에 한정되었다는 거...

 

이런 걸 보면 택견 경기가 마을과 마을 간의 놀이축제라면서 왜 서울 청계천 부근에서만 보이고 전국적으로 안 보였는지도 이해가 되고...

 

무엇보다 이게 함축하는 바는 택견이 생각보다 더 민간무술보다는 군용무술에 가까웠을 거란 거지.

 

지금까지 생각되어온 택견 향유층은 군인 30%, 민간 70% 정도였는데 실제로는 군인 비율이 80, 90%까지 올라간달까.

 

민간무술에서는 상당히 흔하고 군용무술(ex:쌍수도, 예도총보)에서조차 간간히 보이는 퍼포먼스성 아크로바틱한 동작들이 택견에 거의 없는 것도 실전 군용무술의 풍격을 뒷받침한다고 봄.

 

그럼 명백히 제식이었던 무예도보통지 권법은 대체 뭐냐? 싶을 텐데 통지 권법은 무기술을 위한 체조일 뿐이라 실전 격투용으로는 좆무쓸모이고 무예도보통지 시점에서도 많은 기술들이 빠지거나 변형해서 수행되고 있다고(=나이롱으로 하고 있다고) 적혀 있음.

 

애초에 무예도보통지가 조선군 무술의 100%가 아님. 기록은 됐는데 군영에서는 안 하는 무술도 많고, 거꾸로 군영에서는 하는데 기록이 안 된 것도 있고. 무예도보통지 자체가 구한말 시점에선 150년이나 된 오래된 교범이라 실무 현장과의 괴리도 상당했을 게 뻔하고.

 

통지권법과 택견의 관계는 현재 국군에서 품새만 대충 하는 군대태권도랑 특수부대용 크라브마가 or 무사트 같은 CQC의 관계와 비슷했을 것으로 보임.

 

'군영 기록에서 택견이나 탁견이 언급되는 경우가 적지 않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권법이나 수박, 각저 했다는 기록들이 택견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음.

 

왜냐하면 조선군이 이름을 존나 대충 불렀거든. 군영등록 보면 명백히 무기술인 편곤이랑 곤방도 맨손권법이랑 싸잡아서 '권법'으로 부르고 있질 않나... 쌍수도도 용검(用劍, 칼 쓰는 방법)이라고 대충 부르거나.

 

물론 택견이 제식으로 채택되었다기보단 실질적으로 제식이나 다름없이 훈련도감과 군영에 들어온 자는 누구나 익히는 준제식 같은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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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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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익명_715355Best

확실히, 송덕기 옹께서 입대하시고 병사들에게 택견을 가르쳤다는 말씀을 하신 걸 보면 최소한 당시 병사들한테 택견은 충분히 배울 만한 격투기로 취급이 되었거나, 혹은 본문의 내용처럼 서울 지역의 병사들에게는 일종의 제식 맨몸격투기였을 가능성이 있어보임.

특히 후자에 좀 더 무게가 실리는 이유가 있는 게, 군대에 입대해서 택견을 가르치셨다는 말이 문맥적으로 보면 취미로 가르쳤다기보단 훈련교관으로서 택견을 병사들에게 익히게 했다에 더 가까워서 ㅋㅋ

거기다 위대측에서 공개한 사료들을 확인해 보면 택견과 석전의 연결지점이 두드러지는데, 석전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병사들도 상당수였으며(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조선은 병사들이 투잡을 뛰는 게 당연했음 ㅋㅋㅋ 급료가 워낙 짜서.) 사대문 안 석전패들의 장기가 포졸들이 들고 다니는 육모방망이와 발차기였다는 기록등을 떠올려 보면 이야기가 아주 재밌어지지.

결론을 말하자면 나도 본문의 내용에 동의함.

물론 사대문 밖에서도 택견꾼들이 오곤 했다는 증언이 있으니 민간에서도 택견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지겠지만, 사료를 살펴보면 통설과는 다르게 택견과 관련된 기록들을 남긴 건 군인(한량)/별감 계층이 7이라면 민간이 3에 가까운게 사실이니 말이지.

(심지어 그 민간조차 퇴역한 군인이나 경기권으로 내려간 병사/하급 무관들이 퍼뜨린 거라면?! ㅎㅎㅎ)

09:17
24.08.30.
2등 익명_427514
사실 연구자료나 인터뷰 자료들이 이렇게 다 있는데도 불구하고 택견이 무술이라고 하면 입에 거품 물고 택견은 무술이 아니라 경기에 불과하다고 하는 사람들 투성이라서....
07:55
24.08.30.
3등 익명_715355

확실히, 송덕기 옹께서 입대하시고 병사들에게 택견을 가르쳤다는 말씀을 하신 걸 보면 최소한 당시 병사들한테 택견은 충분히 배울 만한 격투기로 취급이 되었거나, 혹은 본문의 내용처럼 서울 지역의 병사들에게는 일종의 제식 맨몸격투기였을 가능성이 있어보임.

특히 후자에 좀 더 무게가 실리는 이유가 있는 게, 군대에 입대해서 택견을 가르치셨다는 말이 문맥적으로 보면 취미로 가르쳤다기보단 훈련교관으로서 택견을 병사들에게 익히게 했다에 더 가까워서 ㅋㅋ

거기다 위대측에서 공개한 사료들을 확인해 보면 택견과 석전의 연결지점이 두드러지는데, 석전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병사들도 상당수였으며(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조선은 병사들이 투잡을 뛰는 게 당연했음 ㅋㅋㅋ 급료가 워낙 짜서.) 사대문 안 석전패들의 장기가 포졸들이 들고 다니는 육모방망이와 발차기였다는 기록등을 떠올려 보면 이야기가 아주 재밌어지지.

결론을 말하자면 나도 본문의 내용에 동의함.

물론 사대문 밖에서도 택견꾼들이 오곤 했다는 증언이 있으니 민간에서도 택견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지겠지만, 사료를 살펴보면 통설과는 다르게 택견과 관련된 기록들을 남긴 건 군인(한량)/별감 계층이 7이라면 민간이 3에 가까운게 사실이니 말이지.

(심지어 그 민간조차 퇴역한 군인이나 경기권으로 내려간 병사/하급 무관들이 퍼뜨린 거라면?! ㅎㅎㅎ)

09:17
24.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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